옆집에 전남친이 이사 왔다는 것도 환장할 노릇이지만 술에 잔뜩 취해서 그 집에서 하룻밤 잤다는 건 선을 넘은 거 아닌가. 물론 말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서 얌전히 잔 거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받아 들이자니 혀를 깨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살짝이 깨물어 보았다. 당연히 바뀌는 건 없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자는 척 하는 건 오바겠지?

    그동안 세상에 없는 판타지를 쓰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판타지 로맨스만큼은 통달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만큼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또 있으려나- 싶었다. 만들어 준 볶음밥을 오물오물 거리면서, 마주하고 있는 얼굴을 빤히 쳐다 보는데, 밥을 먹다말고 김도영이 꽤나 어른스러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 얘기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마. 부모님으로서는 당연한 얘기잖아.”

    “…그래도.”

    “너를 응원하는 마음에 그러시는 걸 수도 있어. 많이 걱정하시니까.”

 

    음..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김도영이 가진 말의 힘은 가히 대단하다 싶었다. 도영 스스로도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성격 때문인지, 자기 주관에 묻혀서 허덕이고 있을 때마다 위로 끌어 올려줄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지금도. 좀 멋지네. 재수없는 놈. 김도영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인정하기 싫은 게 많지?

 

    “열심히 글 써. 지금 쓰는 거 잘 되면 작품도 새로 낼 수 있고.. 계속 그렇게 하다보면 너가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인정하실 거야. ”

    “……”

    “말씀만 그렇게 하시지 부모님이 너 엄청 아끼시잖아. 옛날에 그 더운 날에 너랑 나 먹을 거 잔뜩 들고 먼 길 올라 오셨던 거 생각해 봐.”

 

    도영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위로하듯 말했다. 저저- 오빠인 척 하는 눈빛. 아, 오빠는 맞지. 한 살 많은 오빠. 맞는데 괜히 존심이 상했다.

    그 말을 꺼내자마자 두 사람 모두에게 특정한 기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1학년이었을 때였나, 종강하고 여름방학이 되자 여주를 보러 서울에 올라오신 부모님이, 남자친구였던 도영의 손을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우리 딸 좀 잘 부탁한다고, 밥도 잘 챙겨주고 외로운 서울살이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던 게 스치듯 지나갔다. 남자친구라고 여주 것뿐만 아니라 도영의 것까지 반찬을 챙겨온 엄마에게 괜히 타박을 놓으면서 이제 좀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교제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게 괜히 민망하기도 했고 혹시나 도영이 부담스러워 하지는 않을까 싶었기에. 하지만 김도영은 전혀 그런 기색없이 활짝 웃으면서 어머니 진짜 잘 먹겠다고, 챙겨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를 하고는 했지. 그 티없는 웃음에 진심이 느껴져 문득 결혼하고 싶다고 철없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랬지 그랬어. 우리 엄마 아빠가 그 누구보다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이라는 건 맞기는 했다. 얘가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옛날 일을 다시 꺼낸 덕분에 오히려 열심히 글 쓸 동기를 아주 강하게 얻은 기분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다시 떠올리는 건 그저 시간낭비에 불과한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걸 보면 마냥 그런 건 아닌 것 같기도. 

    그렇다면 김도영과 나의 옛날들도 지금의 나에게 이런 영향을 줄 수 있는 걸까. 금세 샛길로 빠져 다른 주제를 생각하고 있는 여주였다. 다시는 읽기 싫은 한 페이지 때문에, 몇 번을 읽어도 좋을 부분들까지 먼지 속에 외로이 두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갈대 같은 마음이 김도영 때문에 살살 흔들렸다. 하여튼 말은 잘해요.

    수긍했지만 안 그런 척,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배를 채웠다. 비록 티는 안 냈지만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는 걸 도영도 눈치 챈 건지 이후 별 다른 말이 없었다. 눈을 내리깔고 침묵 속에서 밥을 먹다가, 그릇이 바닥을 보여 숟가락과 부딪히는 소리가 날 때쯤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사람은 여주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어딜 가서든 먼저 말을 꺼내는 스타일은 못 되어서- 라고 변명한다면 이해해줄까? 김도영이 아니라 내 자신이. 

 

    “아침밥 고마워. 덕분에 잘 먹었어.”

    “앞으로도 좀 챙겨먹어. 바쁘다고 굶지 말어 나중에 나이 더 들면 후회한다-.”

    “..갈게.”

 

    대놓고 하는 걱정에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서 등을 보였다. 아무에게나 저런 모습, 저런 말 해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젠 뭣도 아닌 관계인 걸 나도 김도영도 알지만 결국은 그의 바운더리 안에 또 들어와버린 기분이여서 그 공간에 더 있다가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차라리 헤어진 후부터 쭉 해왔던 것처럼 아예 모른 척하고 신경쓰지 말아줬으면 했다. 몸의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마음의 거리까지 좁히지는 말아줬으면 했다. 어제 기분에 휩쓸려 잠잠히 있던 김도영을 먼저 불러낸 건 본인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 그렇게 남 탓이나 하며 떡진 머리를 벅벅 문지르고 집으로 들어갔다.

 

    ‘좀.. 떨어질 필요가 있겠다.’

 

    창작에 도움이 되는 것과는 별개로, 김도영이 내 남자친구였던 시절에 느꼈던 두근거림까지 소환이 되니 이건 위험했다. 

    반복되는 최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억들에는 불가피하게도 항상 김도영이 있었고 당시에 그를 바라보면서 느꼈던 동경, 사랑, 설레임, 열정, 오만가지 좋은 이름의 감정들이 매번 반복되니까 이게 반복에 의한 학습인 건지 아니면 내가 미쳐가지고 좋아하는 감정이 진짜 다시 생긴 건지, 이딴 고민을 시작하게 될까봐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이미 시작된 거 아니냐고 반문 말아주기를. 지금은 반복된 회상으로 인한 증후군이 확실하니까.. 여주가 걱정하는 건 이게 계속 리플레이 되어서 나중에는 이걸 좋아하는 감정으로 헷갈려 할까봐.. 단지 그게 걱정이었다. 

 

    ‘..이번 주에는 핑계나 대야지.’

 

    매주 토요일에 만나서 두 사람의 추억이 있는 곳들을 가기로 했던 약속이 떠올라서 순간 흠칫했다. 그 잘난 얼굴을 보는 순간 또 반복이겠지. 잘 빚은 조각처럼 생긴 얄쌍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면, 좋았던 그 시절이 떠오를 것이고, 고장난 것처럼 눈치없이 뛰는 울림이 시작되겠지. 어떻게든 피하고만 싶었다. 다시 만난 김도영을 보며 ‘내가 얘를 다시 좋아하게 되었나?’ 같은 한심한 질문을 던지는 일은 아무래도 싫었다.

    그래서 금요일 저녁에 노크를 하고 찾아온 도영에게 적절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핑계를 둘러댔다. 저번에 너네 집에서 잔 날 있잖ㅇ, 아니 그니까, 술마신 날. 그 날 너 덕분에 소재가 생각났지 뭐야. 이번 주는 그걸로도 충분할 것 같아. 아니 아니, 나 한꺼번에 여러 가지 못 하는 거 알잖아. 그걸로도 충분해. 다음 주에 보자. 응, 들어가-.

    후-. 문을 닫고 마음이 놓이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소재는 다다익선 아니냐며 그래도 만나자는 도영을 어렵게 설득시켰다.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도 그의 표정은 의문이 안 풀린 듯 애매하기는 했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 짧은 대화 때문에 머리가 어질했다. 매트리스에 누워 깊은 한숨을 쉬고는 ‘내일은 나 혼자 다녀와야지.’ 다짐하는 여주였다. 









안녕하세요
오늘 이사 온 네 전남친이라고 합니다





    나 혼자 가도 충분해. 기억 안 나는 건 대충 그럴 듯 하게 앞뒤만 맞추지 뭐. 토요일 늦은 오후, 외출 준비를 하고 거울 앞에 선 여주가 스스로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의 장소는 한강공원. 한강의 저녁을 유난히 좋아하던 두 사람이었다. 그래서 데이트 날 딱히 계획이 없으면 한강 주변을 곧잘 가고는 했다. 뚝섬도 갔고 반포도 갔지만 제일 많이 갔던 곳은 여의도.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 벤치에 앉아 조잘조잘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도 했고, 다른 곳에서 놀다가 와서 체력이 다한 날에는 도영의 품에서 노을이 사라지기만을 조용히 기다리던 날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체력이 만만치 않게 약하다는 특성상 마지막 케이스가 가장 흔하기는 했지.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향수를 칙 뿌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지금 시각이면 분명 깨있을테니까. 옆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고 바로 나와서 확인을 하지는 않겠지만 괜히 겁 먹은 것이었다. 거짓말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려서.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걸어 나와 문을 닫는다. 삐리릭- 아차차, 문이 잠기는 소리는 예상 못했는데. 그 길로 헐레벌떡 소리없이 뛰어 냅다 계단으로 내려갔다. 아이씨 내가 왜 지금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본인도 알 수 없지만 일단 몸이 하는데로 따랐다. 건물을 나와 슬쩍 뒤를 돌아보지만 김도영이 있을리가. 거짓말을 한 대가로 불안함을 얻어버렸구나. 도영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그제서야 안심을 하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둘이 아닌 혼자. 맞은편 사람이 신고 있는 신발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멍을 때렸다. 멍 때릴 때 정말 아무 생각없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본인은 해당 사항이 없기에 그런 사람들이 급 부러워졌다. 여의도로 가는 동안 또, 또, 떠오르는 옛날 기억들 때문. 

    옆에 김도영이 없는데도 이러는데, 같이 왔으면 어쩔 뻔 했어. 나 혼자 기억의 홍수에서 허덕이며 괴로워했겠지. 걔 앞에서 티도 못 내고.


    "뭐 먹을래?"

    "음.. 아무거나."

    "또또또."

    "진짜 아무거나ㅋㅋ"

    "그러면.. 치킨?"

    "너무 기름지다."

    "아, 그럼 샌드위치 시켜 먹을까?"

    "어제 먹었어."

    "...떡볶이?"

    "둘이서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지 않나."

   

    아오! 외마디와 함께 여주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입도 짧으면서 뭐가 그렇게 까다롭냐며 면박을 주다가도, 결국은 여주가 먹고 싶어하는 메뉴가 나올 때까지 어플에 있는 모든 종류의 음식을 읊은 도영이었다. 생뚱맞게 초밥이 먹고 싶다는 여주의 말을 고분고분 들었다. 

    기껏 생각해서 세트로 시켰는데 몇 개 먹고 배부르다며 젓가락을 내려놓자, 그는 '이거 연어 하나만 더 먹자, 응?' 어르고 달래며 기어이 두 세 개를 더 먹였다. 나머지는 온전히 김도영의 몫. 도영은 이걸 참 마음에 들어했다. 여자친구보다 더 많이 먹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여주가 다 먹고 자기에게 음식을 먹여 주는 것이 좋아서. 언제 한 번 말했던 것 같다. 하긴, 받아 먹는 내내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으니까.

    사귄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한강 노을 아래에서 같이 붙어 있는 것도 어찌나 설레고 떨리던지. 한 번은 돗자리를 펴고 서로를 마주본 채 누워있는데 또렷한 김도영 눈 때문에 괜히 더 부끄러워지고 그랬더랜다. 


    "눈 감아봐."

    "왜?"

    "뭐 줄 거 있어. 눈 감고 20초만 세봐."

    "뭔데.."

    "실눈 뜨면 안 된다?"

    "알았어. 나 이제 센다. 하나.."


 여주는 이럴 때 두 눈을 정직하게 꼭 감고 있는 타입이었다. 그의 말대로 별다른 기대나 의심없이 하나.. 둘.. 셋..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10. 11... 12. 이상하게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줄 거 있다면서 뭔가를 꺼내는 바스락거림이나 움직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도둑도 아니고 이렇게 조용히 움직인다고? 같은 생각이나 하면서 17을 말하려는데, 부드럽고 약간은 촉촉한 느낌이 이마에 짧게 느껴졌다. 이게 김도영의 입술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어 눈을 부릅 뜨면, 헤실 헤실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 때는 아직 손잡거나 포옹만 하던 사이였기에, 그의 입술이 처음으로 내 피부에 닿았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간지럽게 다가왔다. 


"ㅁ..뭐야."

"음- 글쎄. 뭘까?"

"..."

"입술에 하려다가 너 놀랄까봐."


그 말을 하면서 도영의 시선은 여주 입술에 머물러 있었다. 그 때까지 본 미소 중에서 가장 환했던 것 같다. 여주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귀엽다- 웃으며 팔로 그녀를 끌어 당겨 품에 가두었다. 달릴 때 만큼이나 빨리 뛰는 심장 소리를 혹여나 들킬까 걱정했지만, 도영의 가슴팍에 닿은 이마로 그녀의 것만큼이나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능구렁이처럼 먼저 뽀뽀해놓고 이렇게까지 떠는 게 귀여워서 푸스스 웃으니까 팔을 더 꽉 조이며 말했다.


"뭐가-. 먼저 하기는 했어도 떨리는 건 똑같은데."

"그래서 17초나 고민했어?ㅋㅋ"

"떨렸던 것도 있는데, 눈 감고 있는 게 너무 예뻐서."

"...."

"평소에는 너 얼굴 오랫동안 못 보게 하잖아. 부끄럽다고."

"그치.."

"이제 소원 이뤘다!"


김도영은 이미지와는 안 맞게 생각보다 능청맞은 구석이 있어서 뜬끔없이 사람을 미치도록 설레게 만드는 때가 있었다. 동기들이랑 있을 때는 나서는 걸 별로 안 좋아하고, 조그만 농담에도 씩씩거리길래 그냥 얌전하고 귀여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뻔뻔한 스타일인가? 그 때 처음 느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더 떨려왔던 거겠지.

멍 때리던 여주의 손이 살포시 이마에 닿는다. 기억을 되짚다보니 그 때의 감촉이 느껴져서 일까. 정처없는 시선을 가진 채 이마를 만지작 거리다, 내려야 하는 역이 방송되자 급하게 정신이 들었다. 여주는 지하철에서 내리고 나서 어딘가 나사 빠진 표정으로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래가지고 오늘 잘 버틸 수 있을까, 싶어서.

    오랜만이었다. 김도영이랑 헤어지고 나서 바깥 세상을 돌아다닌 게 거의 없을 정도니, 이만하면 서울에 있는 모든 장소가 오랜만인 거 아닌지. 하물며 저번에 같이 갔던 학교도 오랜만이었으니까.

    딱 해가 지려고 하는 시간에 맞춰 온지라 일렁이는 물 위가 반짝거렸다. 둘러보니 그 날의 여주처럼 벤치에 앉아 남자친구 어깨에 기대고 있는 여자들이 많이 보였다. 이거 추억 소환 제대로 되겠네. 참 고맙게도 여기를 보나 저기를 보나 커플들 천지였다. 그래- 없어서 영감이 안 떠오르는 것보다는 낫지 나아- 중얼거리면서 빈 벤치에 앉았다. 옆에 한 두 사람은 족히 더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벤치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조금은 고독했지만, 그래도 별 수 없으니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마치 그런 건 전혀 신경 안 쓰는 사람인 척.

    노트북을 꺼내 허벅지 위에 올리고 다시 찬찬히 주변을 둘러본다. 크으, 분위기 죽이네. 건물 사이로 내려 앉은 노을부터 선선한 공기, 아직은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아 약간의 푸른색과 주황색이 섞인 하늘까지. 어딘가 영화에서 본 장면처럼 너무도 완벽했다. 이게 날을 잘 잡은 건지 아니면 못 잡은 건지 살짝 짜증이 난 와중에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눈에 들어올 수 밖에 없는 실루엣이었다. 길쭉한 다리, 큰 몸통, 그 위에 작은 머리.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편한 옷을 입고 있지만 저 사람은 분명 서영호였다. 










    순간 입으로 어?가 튀어 나오고 이유 모를 반가움이 싹텄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못했다. 확실히 아는 사람인 건 맞지만 일과 관련해서 알게 된 사람이라 선뜻 아는 체 하기 뭐하니까. 왜 그런 거 있잖아, 회사 동료를 길가다 우연히 마주치면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게 되는 거. 매일 같이 일하는 회사 동료도 그 정도인데 여주와 영호는 고작 몇 번 만난 사이여서 이건 볼 것도 없이 결론이 났다. 그냥 아는 척 하지 말자. 참 웃긴 건 그렇게 생각을 그렇게 하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영호를 향해 있었다. 

    사진 찍는 게 취미인가.. 영호는 목에 카메라를 걸고 마음에 드는 장면을 잡으려는 듯, 한 쪽 눈을 살짝이 감고 있었다. 조각이다 조각이야. 굳이 따지자면 '친숙'과 '낯선'에서 '낯선'에 포함되는 남자를, 가까운 사람인냥 오래 쳐다보고 있어도 되는 걸까. 그건 모르겠지만, 쨌든 낯선 남자에게서 시선을 못 떼고 있다는 건 너무 잘생겼거나 아니면 괴기한 짓을 하고 있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영호는 앞구르기 뒤구르기 하면서 봐도 전자. 확신의 전자였고.

    노을을 담으려는 건지 줌인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큼지막한 렌즈를 것보다 더 큰 손으로 이리 저리 돌리곤 몇 장을 찍는 듯 했다. 와.. 엄청 집중하고 계시구나. 여주의 손가락들은 키보드 위에 방치되어 있었고 두 눈은 여전히 영호를 향했다. 아아- 잘생긴 사람. 불가항력을 핑계로 계속 영호에게 시선을 두고 있는데, 영호는 카메라 렌즈에 눈을 갖다댄 채로 사진을 찍으면서 점점 방향을 트는 것 같더니, 이내 여주 쪽으로 완전히 돌렸다. 블랙홀같이 까만 렌즈를 마주하자 심장이 멎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몰래 야동을 보다가 들킨 것같은 심정. 이거랑 그거랑 같나 싶지만 결은 꽤 비슷했다. 몰래 훔쳐보다가 들켰으니.

    아, 미친. 설마 알아본 건 아니겠지? 비록 거리가 좀 떨어져 있지만 혹시나 앵글 안에 잡힐까 얼른 고개를 내렸다. 아니야. 모를거야. 어떻게 알아보겠어. 내 얼굴 다 까먹었겠지. 잠시만... 아닌가...? 저렇게 고화질 카메라 렌즈로 보면 시력 마이너스인 사람도 나인 거 알아볼 수 있겠는데??!

    별별 생각들이 또 날뛰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평화로운 척, 노트북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이 그저 까만데 마치 뭔가 하는 척, 키보드를 부지런히 두드리며 제발 날 알아보지 않았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왜 항상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걸까. 잠시 뒤 여주의 불안감을 비웃듯 옆에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는,


    "여주씨?"


    서영호가 서 있었다.




엔시티 나페스 • 모든 글은 허구입니다.

태리몽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