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로크-근대혁명기 AU

* 추천브금 : https://youtu.be/UGObrzEh9LM?t=305




2.



"헉, 허억...." 


 숨을 고르기 힘들었다. 작은 체구에 마른 몸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기절해 늘어져 있는 피터의 몸은 물에 젖은 옷감처럼 무거웠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무거워졌다. 집으로 오는 동안 힘이 빠진 탓일 거라 생각해 보아도 이 정도의 무게감은 경우에 맞지 않는다. '풀썩'하는 소리와 함께 피터의 몸을 침대 위로 거의 던지듯 내려놓고 무릎을 짚은 채로 거친 호흡을 내쉬었다. 대체 왜 거기에 있었던 걸까, 그리고 나의 비밀 정체를 두고 한 말은 무슨 말일까. 복면을 쓴 악마? 


"하아... 하아..." 


 묻고 싶은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정작 대답을 해줘야 할 피터는 기절을 한 채로 늘어져 열병에 시달리고 있다.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거친 호흡을 감추지 못한 채 손의 촉감을 둔하게 만드는 밧줄과 장갑을 급하게 풀어냈다. 


"피터?" 


 손을 가볍게 만드는 동안 이름을 불러봤지만 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질 않는다. 대답할 기운이 없다고 해도 만약 자신의 이름을 들었으면 청각이나 다른 신체 기관이 반응을 할법한데 그에게 그럴 정신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진흙이 묻은 신발을 벗기는 동안에도 나의 움직임을 돕긴커녕 다시 침대 위로 털썩이며 힘없이 떨어지는 발소리에 불안감이 엄습한다. 아주 건강하진 않더라도 멀쩡한 상태에서 한순간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허약하지도 않았는데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연금술사의 집에서 뭔가를 잘못 만진 걸까. 이 상태의 피터를 내가 혼자 돌볼 수 있을까.

 결국 누군가 도와줄 만한 사람을 부를 각오로 자리에서 일어나 피터를 등지자마자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으로 움직임이 멈췄다. 누군가를 불러오더라도 피터가 열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해야 하나. 이 수상한 옷차림과 이곳저곳에 널려진 밧줄과 반장갑은 또 어쩔 것이고. 늦은 밤 잠행을 나갔다는 이야기는 물론이고, 이 시간에 무언가 시킬 일이 있어 시종을 찾아왔다는 것 역시 뱉을 수 없는 말이다. 가뜩이나 사교회에 두문불출한다고 말이 많은데 야심한 시각에 이제 갓 성인이 된 남자시종을 찾는 귀족 집안의 유력한 상속자라니. 상상만으로도 헛웃음이 터질 정도로 입방아에 오르기 좋은 소재가 아닌가. 나를 이 자리에서 치워버리고자 하는 누군가 일부러 더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허억. 허억." 


 잠시 고민하는 사이 피터의 숨소리가 더욱 가빠졌다. 의사의 도움이나 하다 못해 내가 아닌 다른 '멀쩡한'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이 상황에서 너를 두고 갈등에 빠진 나 자신에 자괴감이 들었다. 피터는 착하고 이해심이 많으니까 그래도 이번 한 번쯤은 나를 이해해 주지 않을까. 내가 지금 이런 순간에 너의 이해를 바라도 되는 걸까. 

 그의 몸을 억지로 돌려 눕히며 재킷을 벗겨냈다. 한 꺼풀 벗어낸 너의 신체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선명하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잠시 손을 떨었다. 사람의 체온이 이렇게까지 올라도 되는 걸까. 셔츠 위로 느껴지는 체온을 더듬다 급하게 얼굴로 손을 옮겼다. 몸에서 올라오는 열기보다 더 선명한 뜨거운 열기. 이 정도의 열기라면 근육이나 장기, 나아가서는 심장이나 뇌까지 손상될 것이다. 사람을 부를 땐 부르더라도 일단은 이 열기를 식혀야 했다.


 두건을 벗어던지며 욕실로 달려가 찬장을 열고 커다란 타월을 꺼내 급하게 찬물을 적신 뒤 있는 힘껏 물기를 짜냈다. 일단 체온만 조금 떨어뜨리고, 그 방에 남은 나의 옷가지나 알리바이들을 모두 치운 다음, 그 다음 사람을 부르면 된다.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했다. 물에 젖은 수건을 터는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이 짧은 시간 동안 만약 네가 잘못된다면 내 책임일지도 모른다. 

 급하게 피터에게 다가가 침대 위에 무릎을 올리고 열기에 헐떡이는 얼굴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냈다. 손끝으로 만져지는 피부가 작게 경련하기 시작한다. 열이 많이 오르는 눈언저리를 수건으로 눌러 닦는 동안 그의 눈이 뒤집히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사람을 불러야 해. 이건 내가 어쩐다고 될 일이 아니야. 


 그의 몸에 젖은 수건을 덮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피터의 몸에서 수상한 흐름이 느껴졌다. 큰 호흡으로 들이마시는 숨이 그의 기도를 지나 등 뒤로 자리 잡은 폐를 필요 이상으로 부풀린다. 갈비뼈 아래 자리 잡은 심장엔 말도 안 될 정도의 많은 양의 피가 들고 나기 시작한다. 마치 누군가 공기라도 불어넣듯 부풀어 오르는 그의 근육 조직 사이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혈류들이 쏟아졌다.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그의 셔츠를 거의 찢듯이 벌리고 양손으로 심장의 고동이 느껴지는 왼쪽 가슴을 잡아 눌렀다. 정신을 잃은 동안 이렇게 뛰는 심장은 없어. 진정해, 제발 진정해! 


"죄 지은 자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


 간절한 내 기도가 하늘에 닿기라도 했던 걸까. 열기에 벌벌 떨고 이따금씩 펄떡대며 경련하던 몸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섯 호흡을 뱉기도 전 갑자기 경련이 멈췄다. 그의 갑작스러운 신체 변화에 무서운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점점 움직임이 느려지는 너의 심장 소리에 공포를 느끼며 가슴을 잡은 손을 떼지도 못하고 온몸을 살폈다. 안정을 찾아가긴 했지만 그의 심장은 그 누구의 것과도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압력으로 두근거렸고, 온몸의 혈류량도 아직 상당했다. 피터가 정신을 잃기 전 나에게 내밀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독? 아니면 아편? 대체 뭐가 널 이렇게 만들었을까. 

 제발 정신 차려. 너까지 이런 일을 당하면 안 돼.



… ❋ …



 눈가를 간질이는 어스름한 햇살에 천천히 눈을 떴다. 천장을 바라본 채 눈을 두어 번 끔뻑거리며 장소를 확인하고, 고개를 돌려 창문가를 바라보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환한 햇살에 '헉'소리를 내며 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딛자마자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알 수 없는 진동과 낯선 촉감으로 비틀거렸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아무렇게나 뻗어진 손으로 협탁의 손잡이를 급하게 잡아당기며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바로 '우당탕'소리와 함께 박살 난 협탁의 서랍을 내려다보며 놀란 눈을 끔뻑거렸다. 

 이거 왜 이래? 어라? 나 왜 셔츠가 없어? 잠깐만, 나 어제 어떻게 돌아왔지? 

 고개를 돌려 닫힌 커튼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집안에서 새벽이면 잠에서 깨야하는 신분인 나는 커튼을 닫고 잠든 적이 없었다.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선 단 한 번도. 


 커튼을 열지 않아도 방 안으로 파고드는 햇살을 보아하니 이미 정오가 가까운 시간일 듯 해 짧은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살폈다. 궁금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일단 오늘을 시작해야 했으니 옷부터 입어야지. 침대 옆에 떨어진 셔츠를 발견하고 그 앞으로 한걸음 옮겨 급하게 집어 올리자마자 이번엔 '지이익'하는 옷감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끄트머리를 밟고 있는 줄도 몰랐는데, 내가 설령 밟았다 한들 손으로 잡아 들면 그냥 빠져나오기 마련인데 대체 내 손에 들린 이 반쪽짜리 셔츠는 뭘까. 별로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너무 급해서 힘이 들어갔나? 넝마가 된 셔츠를 침대 맡에 대충 집어던지고 옷장으로 걸어가 문을 열자 이번엔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한쪽 문짝이 떨어졌다. .... 이게 말이 돼? 


 고난의 연속이었다. 손에 닿는 것마다 부서지고 깨지고 망가진다. 셔츠를 조심히 입은 뒤엔 조끼를 입다가 찢어먹었고, 실내용 재킷을 다시 조심히 입어 놓고 이내 단추를 채우다 터뜨려버렸다. 평소같이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모든 몸짓이 낯설었다. 내 몸이 내 몸처럼 느껴지질 않는다.


 최대한 가벼운 손짓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거의 달리듯이 그의 방문 앞에 당도했다. 그렇게 달렸음에도 조금도 숨이 차지 않는 것이 신기했지만 일단은 할 일을 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직후 그의 방문에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올렸다가 혹시나, 정말 만약에 나의 노크로 이 문 마저 부숴버리진 않을까 싶은 두려움에 '크흠' 하는 가벼운 헛기침 소리를 냈다. 


"들어와." 


 내가 망설이는 걸 눈치라도 챈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이젠 이 문을 밀어야 하는데 또 망가지는 건 아니겠지. 살살 밀 테니 제발 부서지지 않았으면. 이것 만큼은 절대 부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문 손잡이에 조심히 손을 올리고 천천히 미는데 별안간 문이 안쪽으로 확 밀리며 눈앞에 밝은 햇살과 큰 그림자가 쏟아졌다. 


"늦잠 잤어?" 

"네?... 아, 네네." 


 양손으로 문을 열고 나를 향해 선 그를 살짝 올려다보며 나도 모르게 긴장이 역력한 듯 침을 삼켰다. 나와 마주할 때 만큼은 시선의 방향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그의 눈이 두어 번 끔뻑이다 부드럽게 휘어진다. 아, 혹시 안 씻은걸 눈치챈 건가. 앞이 보이지 않는 만큼 후각이 워낙 예민한 사람이니까. 차라리 씻고 오겠다고 할까. 아니 지금 내가 씻을 수는 있을까. 이번엔 욕실의 무엇인가를 망가뜨리진 않을까. 


"뭐 해. 가만히 서서." 

"아... 아직 잠결인가 봐요."


 피식 하는 웃음소리를 낸 그가 방 안으로 깊이 들어가 창문 곁의 소파를 손끝으로 훑으며 천천히 앉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뱃속에서 허기를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 정도 소리는 들을 텐데. 그의 앞에선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는 것에 못내 기분이 상했다. 정작 나는 그가 지난 밤 어딜 갔는지 작은 단서 하나 얻지 못했으니.


"아침 먹을 때 안 보이길래 늦잠 자나보다 했어." 

"네. 죄송해요." 

"나한테 죄송할 건 아니고. 주방에 가서 뭐라도 좀 먹고 와." 

"아니에요. 금방 점심시간일 텐데요." 

"하긴. 그렇지." 


 어젯밤 자리를 비운 사람치고는 보기 드문 단정한 모습이었다. 밤마다 사라지는 일이 잦아지면서부턴 오전 내내 늘어져 있는 일이 많았는데 꼭 약속이 있는 사람처럼 말끔한 차림으로 앉아 따듯한 차를 홀짝이며 정말 뭔가를 보기라도 하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버릇일 뿐이라는 걸 알지만 오늘은 그의 행동이 묘하게 거슬렸다. 찻잔을 들고 있는 가벼운 동작도, 까딱거리는 발목과, 부드럽게 빗어 넘겨 바람에 하늘거리는 머리칼도. 그의 존재가 너무 섬세하고 뚜렷하게 다가오는 것이 불편했다. 일면 어지럽기도 했고. 


"뭐 해? 이쪽에 와서 앉아." 

"어젯밤엔 어디 가셨어요?" 


 당신을 따라가겠다고 밤길을 나섰다가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한 것에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답지 않게 말이 차갑게 나간 걸 보면.


"나? 방에 있었어." 

"방에 없는 거 봤어요." 

"잘못 봤겠지. 중간에 화장실을 잠시 다녀왔거든." 


 아무렇지도 않은 평온한 얼굴로 대답하는 것에 나도 모르게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감각들에 자꾸만 정신이 아득해져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저었다. 눈을 감아도 앞을 보는 것 같고, 귀는 계속 웅웅 거린다. 테이블 위의 찻잔에 피어오르는 열기, 정원사가 나뭇가지를 다듬는 소리, 나를 보며 갸웃하는 고갯짓과 사르륵 거리며 옆으로 살짝 흘러내리는 그의 머릿결까지. 눈을 감고 양손으로 눈주위를 살짝 눌렀다가 귓가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너무 많이 쏟아지는 정보에 집중이 흐트러진다. 그 순간 지척으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나도 모르게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잡아챘다. 눈을 뜨기도 전에. 그러니까 나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괜찮아?" 

"네. 잠을 잘 못 잤나 봐요." 


 손에 잡힌 건 나에게 내밀어진 그의 손이었다. 나를 걱정하는 듯한 그의 표정과 손길에 억지로 입꼬리를 당기며 아무 대답이나 뱉으며 손을 놓았다. 간밤에 당신을 쫓다가 독거미에 물렸다는 말은 할 수 없으니까. 그나저나 밤마다 어딜 그렇게 나가는 건지 대답을 들어야 하는데.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쉬자." 

"네? 오늘이 무슨...." 

"사교회 가지 말자고." 


 아, 오늘이 그날이었구나. 이번에도 안 가면 난리 날 텐데. 그나저나 밤마다 밖을 나돌아다니면서 용케도 사교회는 신경 쓰고 있었네. 정말 여자 문제인가.


"지난번에도 아프다는 핑계로 안 가셨잖아요. 오늘은 가야 돼요." 

"이번엔 네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 어때?" 

"저... 요? 저 멀쩡한데."

"하하. 정말로 아프다는 게 아니라. 그냥 핑계를 그렇게 대자고." 


 그런 핑계를 댔다간 내가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고 한마디를 더하려는 순간 그의 고개가 방문 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벼운 손짓의 노크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맷은 누군가 자신의 방으로 다가오면 노크를 하기 전부터 누구인지를 알아냈고, 문을 열기 전 나에게 적당한 사인을 보내줬다. 문을 열어도 되는지, 아니면 없는 척이나 자는 척을 해야 하는지. 그 어떤 사인도 없이 가만히 문쪽을 향한 그의 굳은 표정을 보건대 문밖에 있는 그분의 정체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뻔했다. 머독 백작 부인.


"주무신다고 전할까요?" 

".... 아니야. 열어줘. 내가 일어나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천천히 자리에 앉는 그의 앞에 적당한 책을 펼쳐주고 방문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칼 위로 늘어지는 화려한 장신구들, 레이스로 수놓은 푸른색의 드레스, 새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 그리고 차가운 눈빛의 그녀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얼음장 같은 표정의 그녀가 옅은 주름이 겨우 비칠 정도의 가벼운 손짓으로 나에게 비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군말 없이 옆으로 비켜서고 나면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밝고 환한 표정으로 맷을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가 시선을 올려 그녀의 눈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지만.


"그깟 책 따위를 읽는다고 인사도 안 하는구나." 

"특별한 볼일이 없으시면 마저 읽겠습니다." 

"특별하다 마다. 오늘 사교회엔 카펠로 가문의 아가씨도 온다고 하니 준비를 미리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가만 보자... 파커." 

"네?" 

"가서 맷이 읽고 있는 책을 거두고, 말끔하게 씻겨서 적합한 옷으로 챙겨 입히렴." 

"저...." 

"가세요. 제가 알아서 합니다. 피터, 넌 서재에 가서 이거 다음으로 읽을 책 가지고 와." 


 시선을 주지 않는 그와, 노려보듯 하는 그녀의 사이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건 언제나 내 몫이다. 아무리 계모라고 해도 같이 산지 15년이 넘었다는데 이렇게까지 사이가 안 좋을게 뭐람. 덕분에 항상 나만 곤란하잖아.


"내가 윗사람이니 내 말을 들어야지?" 

"피터는 제 시종이니 제 말을 들어야지요." 


 나를 두고 벌이는 말 같지도 않은 기싸움에 나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뱉으니 자리에 앉아있던 맷이 책을 덮고 내가 있는 곳까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목을 덥석 잡는다. 조금 전처럼 반사적으로 저항할 뻔했으나 이전과는 전혀 다른 힘으로 잡아 쥐는 것에 달리 대응하지 않고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저... 저는 그럼 이만..."


 맷을 노려보는 백작 부인은 내 인사를 받아줄 생각이 없고, 내 손목을 잡고 방문 밖으로 나서는 그에게도 엉성한 걸음걸이로 쫓아가는 나를 배려해 줄 마음이 없다. 너무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그를 어설프게 쫓아가다 갑자기 치미는 어지럼증에 되려 그의 손을 살짝 당기며 자리에 멈췄다. 분명 살짝이었는데. 무게 중심을 잃을 정도로 흔들린 그가 놀란 얼굴로 멈춰 서고 난 또 그가 넘어질까 팔을 잡아 바로 설 수 있게 도왔다. 


"너...." 

"죄송해요. 제가 지금 좀 어지러워서 저도 모르게 세게 잡았나 봐요." 

"...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근데 급하게 오느라 씻질 못해서 머리가 아픈가 봐요. 좀 씻고 올게요." 

".... 그래. 그렇게 해."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온몸이 끈적한 기분을 씻어내고 싶다는 생각에 몰두한 탓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어던졌다. 그러던 와중에 셔츠 소매가 손바닥에 달라붙어 그것을 떼어낸다고 잡아당기다 또 한 벌을 제대로 해 먹어 버린다. 


"하... 대체 왜..." 


 그 순간 욕실의 거울을 통해 보이는 모습에 눈이 크게 뜨였다. 팔이, 가슴이... 꼭 힘쓰는 일을 하는 노역꾼처럼 발달된 근육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대체 내 몸이 어떻게 된 거지?



… ❋ …



 오고 가는 사람이 없는 늦은 저녁시간. 사목실의 가장 안쪽,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서적 앞엔 먼지 한 톨 찾아볼 수 없고, 해가 모두 저물어 여러 개의 조명이 필요함에도 두어 개의 촛불로 밝히는 것이 전부인 어둠 속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울린다. 


"아이가 없어졌다고요." 

"없어졌다기보단 아예 보지도 못했습니다." 

"같은 말이지요. 저는 분명 보내라고 했으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낮았지만 동시에 섬뜩했다. 아이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던 그 목소리와는 판이하게 다를 정도로.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성직자용 수단이 답답했던 건지 남자는 목의 흰색 칼라 부분을 손으로 살짝 당겼다가도 이내 고쳐 입으며 자세를 단정히 했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도 되는 듯이. 


"추기경께 알리실 생각입니까?" 

"고작 이런 일에 소란을 만들고 싶진 않군요. 심부름꾼들은 어찌 됐습니까." 

"마구간에서 일을 당한 모양입니다." 

"일이라니?" 

"검은 복면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맞은편에 앉아 재미난 일이라도 있다는 듯 들뜬 자세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려던 남자는 검은 수단위로 빛나는 차가운 눈빛의 그를 보며 다시 목소리를 낮춘다. 그들의 입은 옷엔 큰 차이가 없었고 실상 말을 이어가려는 남자의 얼굴에 주름이 더 많았지만 둘의 관계는 별로 동등해 보이지 않았다. 그 나이 많은 남자의 행동에 맞은 편의 그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다시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그것에 용기를 얻은 건지 남자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요즘 시내에 말이 많습니다. 부녀자를 겁탈하려는 놈들을 혼내주거나 유흥가의 포주 놈들을 경찰청으로 보내 넣고 하더군요." 

"자경단이 생겼습니까?" 


 나이 많은 이가 고개를 끄덕이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놈이 왜요." 

"어제 심부름꾼 두 명이 놈과 상대한 모양입니다." 

"연금술사도 말입니까?" 

"현장에 없었답니다. 마차가 집 앞에 있는 것을 보고 샅샅이 뒤졌지만 집엔 아무도 없었다고 하고요." 


 차가웠던 남자의 눈빛 사이로 옅은 주름이 잡힌다. 자신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만의 버릇이었지만 최근 몇 년간은 이런 표정을 지을 날이 많지 않았다. 


"놈을 찾으세요." 

"그놈은 왜요?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어리석은 놈입니다." 

"내가 그 복면을 쓴 남자라면 아마 그런 놈부터 상대할 겁니다. 몇 대 두드리면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지 않겠습니까." 


 둘 사이에 잠시간의 적막이 흘렀다. 몇 년간 이어져온 부귀영화가 덜떨어진 연금술사와 어설픈 자경단의 손에 삐걱거릴 생각에 입술을 깨물다 작게 혀를 차는 소리까지 들렸다. 


"찾으면 데리고 올까요." 

"아니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야기를 늘어놓은 상대를 등지고 책장 쪽을 바라보며 섰다. 가지런히 꽂힌 책등을 손으로 가볍게 쓸고는 책장 앞의 먼지를 검사하듯 손끝으로 가볍게 쓸어낸다. 눈에 띄는 먼지 같은 것은 없었지만 남자는 허공에 손끝을 비비며 먼지를 털어내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죽이세요."



… ❋ …



 정말이지 기가 막힌 하루였다. 옷을 몇 개를 해 먹고, 식사 중에 손바닥에 달라붙는 식기에 고생을 하는가 하면, 누군가 떨어뜨리는 물컵을 공중에서 잡아채서 탁자 위로 올리기까지 했다. 나의 이런 상황을 대부분은 눈치를 채지 못했고, 눈치 챈 사람도 '우연의 일치'로 치부하며 나에게 재밌다는 듯 어깨를 살짝 두드리는 것으로 모든 상황이 무마됐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나에게 이상한, 혹은 비상한 능력이 생긴 것이다. 


 해가 모두 저물고 막 외출 준비를 마친 맷은 '오늘은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라며 혼자 사교회장으로 나섰다. 내가 없으면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결점이 드러나지 않겠냐며 걱정했지만 그는 그냥 얼굴만 비추고 올 거라며 혼자 마차에 올라 금세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속으로 내심 잘 되었다며 쾌재를 불렀다. 그가 일단 사교회에 가면 일찍 오든 그렇지 않든 오늘 저녁 그에 대한 나의 책임이 덜어지는 것이었으니. 오늘 밤은 다른 볼일을 봐야지. 어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야겠어. 


 한밤중이 되어 일전의 오크나무 옆 담벼락 앞에 서서 낮동안 고생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손을 주억거렸다. 의도치 않게 이상한 것들이 달라붙는 손. 그 점착력이 어느 정도 일지 궁금했다. 담벼락에 한 손을 짚고 다른 손으로 조금 더 높은 곳을 짚었다. 


"하하." 


 어이없으면서도 기분 좋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제만 해도 나무를 이용해 억지로 넘어선 담벼락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이렇게까지 수월 할 수가 있나. 게다가 이 어둠 속에서, 아무리 보름달이 뜬 밤이라고 해도 사방이 지나치게 훤히 보였다. 담벼락 위에 올라 넓고 밝아진 시야를 즐기며 그 아래를 내려다보다 작게 숨을 골랐다. 뛰어내릴 수 있을까. 온몸의 근육에서 즐거운 비명을 질러댄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허공을 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퍽!」 


 작지 않은 타격음이 검은 숲을 울렸다. 사실 조금 협박만 해도 이름을 뱉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무르고 미약한 심장 소리를 내는 놈이 이 정도로 저항하고 있다니. 


"이름." 

"몰라!!!" 


 선명한 거짓말. 분명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서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그 두려움의 대상이 내가 아닌 것이다. 이름을 뱉으면 반드시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확신. 귀족일까, 아니면 성직자, 관료? 이런 연금술사 하나 죽는다고 눈하나 깜빡하지 않을 정도의 높으신 분은 이 도시에 몇이나 될까. 내 아버지를 제외하고 20명은 될까. 


「쿵!」 


 멱살을 잡아 나무 등걸에 그대로 밀듯이 찍어냈지만 놈은 공포와 통증에 흐느끼면서도 내가 듣고 싶어 하는 이름을 대지 않는다. 벌써 몇 번째 인지도 모를 주먹을 내리꽂는 것에 내가 먼저 지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려던 찰나 꽤 떨어진 거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무와 풀숲에 몸을 숨긴 한 사람. 손에 들린 나무와 금속성의 장치. 라이플. 


"제발, 난 아무것도 몰라.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벨라스코가 거의 울듯이 애원하는 목소리를 듣고 그의 멱살을 잡아 내리며 급하게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순간 라이플의 격발 잠금장치가 찰칵이는 소리와 함께 풀린다.


「탕!!!」


 조용한 숲에 크게 울리는 총소리에 잠들어 있던 새들이 정신없이 날아오르며 숲이 한순간 소란스러워졌다. 멀지 않은 곳의 작은 동물들이 도망가는 소리와 동시에 다시 한번 라이플에 총탄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린다. 나무 뒤에 있는 내가 보이지 않는데도 바로 장전을 한다는 건 다음 격발의 목표가 벨라스코라는 뜻이다. 


"뭐... 뭐야..." 


 당황해서 버둥거리는 그의 앞으로 자세를 숙이며 다가가 나무에 묶인 끈을 풀어내자 놈이 도망가기 위해 자리에서 큰 소리로 움직였고 동시에 한 번 더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다. 


「탕!!!」 

"으악!!" 


 급하게 몸을 잡아당겨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놈의 다리에 탄환이 스치며 피부가 그을리고 터졌다. 놈의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보다 공기 중에 퍼지는 구리 냄새가 훨씬 더 불쾌했다. 대체 총을 쏜 놈은 누구일까. 


"으아아!! 이거 놔!" 

"가만히 있어!!!"


「탕!!!」


 벨라스코와 나의 사이로 총알이 지나가 나무에 박혔다. 분명 그와 나 사이에 수풀과 나무의 잔가지들이 무성할 텐데 이 정도의 명중률을 보인다는 것은 보통 솜씨가 아니라는 얘기다. 민간인은커녕 군인들 사이에서도 저격수로 이름을 날린 놈일 테지. 이 도시에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있단 말인가. 이 정도의 저격수까지 동원하는 것을 보면 이름이 밝혀지는 것만으로도 큰일 나는 놈이 있다는 건데. 그 순간 다시 한번 더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제대로 몸을 피하지 않으면 벨라스코 대신 내가 총을 맞아야 할지도 모른다. 


「쉬이익!!」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리였다. 총소리도 아니고 바람을 가르는 돌팔매질의 소리도 아닌. 허공으로 무엇인가 길고 가는 것이 높은 압력을 받아 발사되는 듯한 소리. 난생처음 듣는 소리에 고개를 살짝 갸웃하는 사이 다시 한 번 더 들려온 그 희한한 소리가 겨우 멱살을 잡고 있는 벨라스코의 발목에 감기고 믿을 수 없는 힘으로 당겨져 순식간에 놈이 내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대체 어떤 놈이야! 


 코앞에서 벨라스코를 놓치자마자 라이플을 든 놈도 그의 모습을 쫓다가 이내 숲을 빠져나간다. 그 뒤를 밟아봐야 총알받이가 될 것이 뻔해 내버려두었지만 그 망할 연금술사만큼은 놓칠 수 없었다. 저격수의 눈엔 보이지 않았겠지만 벨라스코는 내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것도 아주 높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썩은 음식 냄새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그의 체취는 나에게 있어 안내판이나 다름없었다. 허공에 매달린 그에게서 풍겨오는 악취가 땅에 내려앉고 그의 몸에서 미약한 심장 소리가 울리는 것을 미루어 보건대 조금 전의 충격으로 입이라도 벌린 채로 기절해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 순간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그를 묶고 있는 저 수상한 물질이었다. 밧줄도, 피아노줄도 아닌 탄성 있는 끈 같은 저 무언가. 바람에 날릴 정도로 하늘거리면서 놈을 단단히 묶어놓을 수 있는 저것이 대체 뭐란 말인가.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들린다. 수풀이 하나하나 짓밟히며 으깨지는 향기가 선명했다. 자신에게 어떤 적의도 보이지 않는 움직임. 익숙한 향기와 오늘 아침 들었던 낯설면서도 낯익은 그 심장 소리. 


"연금술사가 아니군요." 


 피터. 보통 사람들에 비해 3배는 많은 듯한 혈류량과 그것을 견뎌내는 강력한 심장이 더 많은 피를 몸의 말단까지 밀어낸다. 일반적인 신체였다면 그 압력을 이겨내지 못해 내출혈을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피터의 상태는 지극히 온전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기존엔 들어보지 못했던 크고 단단한 근육들이 수축운동을 하는 것까지 모두. 


"그렇겠죠. 저런 놈 밑에 수제자가 있을 리도 없거나와, 그 악명 높은 '데어데블'이 누군가와 함께 일할 리도 없지." 

"... 데어데블?" 

"네. 아, 혹시 본인 별명 몰랐어요?" 


 나에게 그런 별명이 있다니. 신체반응이 모두 뒤바꼈음에도 목소리만큼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해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교회의 첨탑에 그 악명 높은 '검은 발톱'을 묶어놓고 사람들을 내려다봤다면서요. 난 현장에 없었는데 그날 얘기는 들었어요. 여러 개의 횃불에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는 게 마치 악마 같았다고." 

"그래서 나에게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하, 아니요. 처벌을 받아야 할 포주 놈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주교는 당신을 위험 인물이라고 규정했죠. 그래서 붙었어요. 감히 교회에 덤벼들 정도로 무모한 사람. 데어데블."


 피터의 목소리가 조금 신난 듯 했다. 나에게 붙은 그 이상한 별명 때문에 신난 건지, 스스로 체감 중인 신체의 이상 반응 때문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무엇 때문일까. 


"그래서, 저 사람은 왜 잡은 거예요?" 

"네가 잡은 거지." 

"그쪽이 잡으려는 거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요. 이름이 어떻게 돼요?" 


 두건을 살짝 고쳐 쓰며 그를 향해 완전히 고개를 돌렸다. 



"네가 그랬잖아. 데어데블이라고." 






각주) daredevil : 저돌적인, 무모한 사람 (악마에게 도발하는 자)



MCU 썰공장 운영중

두번째토끼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