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지검 4층 비상계단.


휴대폰을 든 은수의 손이 힘을 받아 하얗게 질렸다. 소곤대며 통화하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아빠가요? 갑자기 왜. 지난주에 나 내려갔을 때만 해도 괜찮으셨는데.”

- 현철이가.... 청첩장을 보냈어 은수야. 그거 보고 충격을 받으셨나봐. 계속 몸살처럼 아프다면서 드러누우시네.

“뭐?”

- 느이 아빠는 얘기하지 말라고 했는데, 네 일인데 어떻게 얘기 안 해. 너도 알아야지...

“하…”


질끈 감아든 눈. 끝을 본 지가 언제인데, 굳이 나한테 청첩장은 왜 보내는데? 저딴 인성파탄 개새끼랑 결혼까지 생각했던 자신이 제일 한심하다. 은수는 뻐근한 눈가를 열심히 문질렀다. 조금도 나아지는 건 없었지만.


“그걸 열어보게 두면 어떡해요, 엄마!”

- 우린 그냥 네 앞으로 온 편지인 줄 알았지.... 중요한거면 전해주려고.

“아빠도 진짜… 내 결혼 엎어진 게 아빠 탓이야?! 이제 그만좀 하시라구 해요!”


그리고 청첩장 그건 그냥 버리고! 결국 터져버렸다. 비상계단이 쩌렁할 정도로 짜증을 질러버렸다. 뱉어놓고 이내 후회했지만 주워 담을 수도 없다. 맞는 말이잖아. 아빠도 엄마도 언제까지 과거에 매여서 그렇게 위축된 채 지낼건데? ...물론 나도 우리 가족이 당했던 그때의 수모와 억울함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쌍욕이 터져 나오지만. 적어도 나는 잊으려고, 앞으로 나가려고 노력은 하고 있잖아.


이후로도 엄마와의 통화는 짜증의 연속이었다. 다 큰 딸래미 혼자 사는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다 먹지도 못할 반찬 기어이 자꾸 보내고, 일찍 자라, 영양제 챙겨 먹어라, 걱정과 잔소리의 반복. 안 들어도 뻔한 레퍼토리, 피곤해. 마지막엔 엄마에게 적당히 수그리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후우…”


계단 난간을 붙잡고 끝없이 터지는 한숨을 팍팍 비워냈다. 생각 할수록 분하네. 지가 결혼하는 게 뭐 어쩌라고. 진짜 찾아가서 축하라도 해줘? 나쁜 새끼.

어쨌든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시간 낭비는 그만하자. 목 스트레칭이나 좀 해주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려다가,


“헉!”


아 깜짝이야! 3층 계단에서 이쪽으로 올라오려다 멈춰선 황시목과 눈이 맞아버렸다.


“거, 거기서 뭐 하는데!”

“...사무실 올라가는 중입니다.”


민망해서 괜히 새된 소리로 질렀다. 물론 황시목은 전혀 타격감 없는 무감한 표정으로 일관했지만.


“...들었어?”

“전화 통화 말씀이시라면, 네. 조금 들렸습니다.”

“어디서부터 들었는데.”

“결혼 엎어진 건 아버지 탓이 아니고, 청첩장은 버리라고, 까지요.”


아오, 환장하네! 또박또박 읊는 저음의 목소리가 콕콕 귀에 박힐 때마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통제 불가 수준의 쪽팔림 때문에 까득까득 어금니나 씹어댔다. 하… 그래. 뭐. 검사들 중에 영은수 검사 부친 영장관네 불행의 히스토리 모르는 사람 있겠냐고. 은수가 사시 공부할 적에 뇌물 수수 누명 쓰고 억울하게 낙마하셔서, 아직도 건강도 자존심도 회복 못 하신 우리 아빠. 그 딸도 검사가 되었다지. 리벤지물이냐 뭐냐. 워낙 다들 아는 이야기라 아무리 친한 사람이 없는 저 ‘또라이’ 황시목이라도 분명 들어는 봤을 거다. 

여기까진 그래도 흔히 알려진 이야기니까 상관 없다 쳐도, 근데, 내가 아버지 불명예 퇴진 때문에 애인에게 지저분하게 까이고 결국 이렇게 청첩장까지 받은 건… 지극히 사적인 일이잖아! 그런데 이젠 어쩌다가 황시목과 단 둘만 공유하게 된, 영은수 인생 길이 남을 흑역사. 


“너는…! 너는 왜 그런걸 다 듣고 있어?!”

“선배님께서 큰 소리로 통화하셔서 본의 아니게 들었습니다.”


하.. 그래. 말자, 말아. 저 나무토막 같은 또라이를 내가 어떻게 상대하겠어. 그냥 생각만 했는데 벌써 피로가 몰려온다. 오늘은 너 상대할 기력도 없다.

그래도 입은 무거울 것 같으니 소문 내지만 말아줘. 믿어 본다? 은수는 시목을 잔뜩 쏘아보다 먼저 문을 열고 비상계단을 벗어났다.








자리에 앉으니 눈앞에 보이는 건너편 책상의 말 없는 동그란 머리통이 몹시도 거슬린다. 황시목 쟤는 뒷모습마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가 없다.

검사 생활 7년 차에 이리저리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접해본 은수였지만 황시목 같은 캐릭터는 또 새로웠다. 처음 받은 시보니까 잘 해주려고 했는데, 이 놈은 이래도 뚱, 저래도 뚱, 늘 한결 같이 딱딱했다. 그래도 ‘속은 착한데 내성적인’ 수준인가 싶었지. 평소엔 조용하니 있는 듯 없는 듯 굴다가도 식당에 가면 선배인 은수의 자리부터 챙기고, 물이랑 수저 눈치껏 착착 세팅하고. 업무도 가르쳐주면 군말 없이 끄덕끄덕 하면서 꽤 잘 소화 해냈으니까.

다만 어딘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사람과의 접촉에 민감하다는 거. 황시목은 은수가 그야말로 옷깃만 스쳐도 화들짝 정색하면서 멀리 떨어지길래 그저 쑥맥인 줄 알았다. 이성을 대하기 어려워하는 그런 종류 있잖아.


...하지만 얘가 서부지검에 시보로 온 지 딱 일주일 만에 회식자리에서 그 실체가 밝혀졌다. 

그 모든 건 은수의 착각이었다. 이 새끼는 쑥맥도, 착하고 조용한 애도 아니었다. 그저 싸가지 밥말아먹은 또라이였다.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새로 부임한 차장검사를 환영하는 회식자리. 처음부터 꼿꼿이 앉아 술은 입에도 대지 않던 황시목은, 기어코 차장이 따르는 술을 거부하며 제 앞에 놓인 술잔을 탁 소리 나게 뒤집어엎었다.


“허허. 이 친구 재미나는 친구네!”


소주병을 높이 치켜든 차장 손이 민망했다. 보고 있던 차장 아래-황시목 위 모든 기수들이 뜨악 할 말을 잃고 눈알이나 데록데록 굴렸다. 야 임마, 빨리 잔 받아! 옆자리에 앉은 선배가 팔꿈치로 쿡 찔러도 그는 여전히 대쪽같은 절개를 지키고 있었다. 누가 보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 임금은 섬길 수 없는 선비인 줄. 오히려 쿡 찔린 제 옆구리를 슥슥 문지르더니 꿈틀대는 눈썹으로 불쾌감을 드러낸다! ...쑥맥이 아니라 결벽증 그런 거였냐.


“제가 술을 못 마십니다. 죄송합니다.”

“야! 황시목이! 그냥 받기만 하래도!”


보다 못한 강원철 부장이 나섰지만 이미 분위기는 안드로메다로 날아갔지요. 차장 빡쳤지요. 그럼 이 꼰대집단에서 그다음 순서는 뭐다? “저 새끼 담당 사수가 누구야?!” ...네, 네. 접니다. 쌍팔년도식 연좌제로 싸잡아 사수인 나까지 정신교육 당하게 된다.






“너 도대체 어제는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그 자리에서 말씀 드렸는데요. 제가 술을 못 마시는 사정이 있습니다.”

“누가 마시래? 그냥 잔이나 받으라는 거잖아.”

“......”


출근길 내내 어느 정도 수준의 지랄을 해야 황시목이 말귀를 알아 들을지 시뮬레이션까지 돌렸다. 다 큰 성인을 붙잡고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잔소리 하려니 열도 차오르고. 게다가 분명 반응도 반성도 없을 이런 놈한테, 무슨 말을 해도 그저 모조리 다 튕겨 나올게 뻔했거든.

그런데 오늘은 황시목이 평소와 달랐다. 늘 동그랗거나 세모나게 뜨던 눈을 조용히 내리깔고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있으니, 하얀 얼굴이랑 어울려 처연하기까지 했다. 은수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씩씩대다 막상 어딘지 축 처진 황시목을 보고 혼자 마음을 추스려봤다. 그래, 너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못했을 수도 있지. 기회를 주자. 선배 노릇 하는 거야, 영은수! 마음 넓게 먹고, 따뜻하게, 후배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그런 선배.


“황시목 시보님. 다음부터는 적당히 분위기만 좀 맞춰줘. 사회생활이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이것도 일종의 업무상 위력 행사 아닙니까?”

“...뭐?!”


커흡! 큭! 옆에서 일하던 계장이 미친 발언을 듣고 요란하게 사레들린 기침을 뱉었다. 실무관은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미동도 없다. 이 새끼, 아니, 얘가 지금 뭐래냐. 내가 널 추행하니? 나한테 수치심을 느껴? 뒷목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운. 은수의 직감이 댕댕댕 경종을 울려댄다. 또라이다! 알아볼 수 있어. 나도 어디가서 지지 않는 또라이인데, 얘는 진짜야.


“직장 내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신체적, 정신적으로 고통-”

“야! 적당히 해!”


마음 넓은 따뜻한 선배? 개나 줘버려. 하던 대로 할란다 그냥.


“보자 보자 하니까. 너 선배가 우스워? 피드백을 주면 받아들이고 개선할 생각이 없어? 태도가 왜 그 따위야!”

“...죄송합니다.”


너무 당황해서 황시목을 따끔하게 혼낼 비장의 논리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기수로, 짬으로 몰아붙였다. 죄송하다는 사과를 받아내긴 했는데 저 특유의 입꾹꾹 닫은 무표정은 여전하다. 진심으로 죄송한지 알 수가 있어야지. 

아 모르겠고, 오늘은 서부지검 본관 412호 영은수 검사실의 무너진 기강을 바로 잡는 날이다. 너의 잘못은 일로 조져주마. 선.배.답게.


“그런 황당한 잡생각 할 여유도 있고, 널널한가봐? 그럼 오늘부터 바로 실전에 들어가.”

“...예.”

“어제 편의점 절도사건 피의자 심문 기억 나지? 조서 써.”

“언제까지 드리면 됩니까?”

“검사 일에 기한이 어디있어?! 무조건 지금 당장 바로 해야지.”


그래서 그렇게, 그대로 쭈욱, 황시목이 조서를 완성 할 때까지 둘은 떨떠름한 야근을 했다. 

그냥 내일까지 하라고 할걸, 스스로 불러온 대참사를 후회하면서 밀려오는 하품을 가까스로 참으며 몸을 베베 꼬는데 그때가 저녁 9시 쯤이었나. 드디어 황시목이 프린트에서 한 무더기의 종이를 꺼내 결재판에 넣어 내민다.


“......”


근데 너무 잘 써. 군더더기 없이 깔끔 완벽한 문장력. 핵심을 정확히 파악한 범죄 사실 정리와 입증. 법리적 판단에 따른 근거까지. 난도질 하려고 대차게 꺼내든 빨간펜이 무색하게 은수의 손안에서 헛돌았다. 


“...흠, 흠. 잘...했어. 다음부터는 범죄 행위 요약은 조금만 줄여봐. 지금보다 4, 5줄 정도 줄이면 적당할 거야.”


꾸벅 고개를 숙이는 이 골칫덩이 시보가 달리 보였다. 인정 할 건 인정하자. 일은 잘하는 또라이구나, 너.


"혹시 질문 있어?"

"식사는 안 하십니까."


어이가 없네. 얘 진짜 뭐지?!








그 난리를 친 게 겨우 엊그제였고, 여전히 껄끄러운 감정이 바닥에 남았는데 하필 저 놈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엮이게 되다니. 선배 체면이 말이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이게 다 강현철 그 나쁜 새끼 때문이잖아. 

은수는 자리에서 엄지나 잘근거리다 불현듯 벌떡 튕겨져 일어났다. 가방에서 강현철에게 서부지검 발령 기념으로 선물 받았던 카드지갑을 꺼내 내용물을 샅샅이 털어냈다. 카페 쿠폰 한 장까지 야무지게 책상 위로 쏟아내더니, 텅 빈 지갑은 쓰레기통으로 쑤셔 박는다.


“선배님, 지난달 수사비 영수증에 서명-” 


의자를 돌려 일어나 은수에게 가려던 시목은 멈칫했다. 난데없이 멀쩡한 카드지갑을 버린 은수가 이제는 손에 쥔 만년필도 찬찬히 살펴보다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종이를 긁을 때 서걱대는 소리가 좋다고, 서명할 일이 있을 때 특히 꼭 챙겨와 사용하던 만년필. 나름 아끼는 물건 아니었나. 손이 자주 터서 자주 발라야 한다던 은은한 오렌지 향의 핸드크림도, 단정히 묶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에 쥔 머리끈도 죄다 쓰레기통 행. 그러다가 텀블러에 든 물을 원샷으로 비워내고 쓰레기통에 처박을 땐, 저 선배를 말려야 하나 고민도 나름 했다.


“재수 없는 새끼.”


아예 비워버리려는지, 쓰레기통을 손에 쥐고 척척 밖으로 나가는 은수의 중얼거림. 아… 그 일 때문인가. 시목은 마음을 고쳐먹고 도로 모니터를 향해 돌아 앉았다. 지금은 은수를 건드려선 안될 것 같다. 원래 전 연인과의 깨어진 관계는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휘몰아치는 분노를 가져오는 걸까. 일상에서 잘 쓰던 물건들도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무작정 처분 할 정도로. 

직접 겪은 적은 없었지만 여지껏 학습한 감정으로 은수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정도는 희미하게나마 공감할 수 있다. 시목은 눈치껏 결재판을 책상 한 귀퉁이에 밀어 넣고 뒤에서 들리는 은수의 한숨 소리가 잦아들길 기다렸다.



눈에 띄는 대로 개새끼에게 받은 선물들을 처분하고 나니까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구내식당 메뉴도 은수가 좋아하는 황태 강정이었고. 원두가 끝내주는 카페에서 커피를 사 들고 산책까지, 직장인 점심시간 힐링 풀코스를 거쳤더니 오후엔 속 시원히 털어내고 다음 공판 준비에 몰입 할 수 있을 것 같아. 은수는 오전의 빡침을 만회할 생각에 식사 후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무섭게 집중했다.





오후의 가을 햇살이 노랗게 내려앉은 사무실. 조용히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와 사락사락 은수가 넘기는 서류 소리만 간간이 들리고. “다녀왔습니다.” 법원에 재판기록 사본 받으러 다녀온 황시목 시보가 외투 벗는 소리마저 배경음으로 낮게 깔리던, 완벽히 평화로운 오후.


“이게 뭔데?”

“선배님께서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시목이 은수에게 내미는 종이가방이 잔잔한 수면에 약간의 파장을 일으킨다. 나갔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목의 몸에는 여전히 서늘한 가을공기가 묻어 있었다. 그게 황시목 특유의 무표정과 더해져 한층 무심함을 돋보이게 했다.


“......”


종이가방 안은 가관이었다. 새 제품이라는걸 팍팍 과시하는 비닐로 랩핑된 핸드크림, 역시 비닐에 포장된 머리끈 따위가 들어있고. 다른 길쭉한 상자는 뭔데, 설마 텀블러냐?


“...이걸 왜 줘?”

“없으면 불편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네가 뭔데. 불편해도 내가 불편하고, 필요하면 내가 사는 거지!


“황시목 검사. 내가 너한테 이런 거 사 오라고 시켰어?”

“아뇨, 제 자발적 선의에 따른 선물입니다. 다른 물건들은 고가여서, 김영란법 위반이 될까 봐-”

“하, 하하! 하하… 아… 진짜.”


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거지? 기가 존나 턱턱 막혀. 은수의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렸다. 고맙게 받아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저 또라이 앞에서만 유독 말문이 실종되는 이유는 뭘까. 어떤 반응을 할 지 고민하는 사이, 이미 원인 제공자는 제 할 말을 끝내고 꾸벅 숙인 뒤 은수의 앞에서 사라졌다.

뭐에 홀린 듯 하나씩 내용물을 꺼냈다. 더더욱 기가 막힌다. 원래 가지고 있던 핸드크림과 최대한 향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패키지와 브랜드. 텀블러도 분명 수도 없이 많은 종류 중에서 ‘우연히’ 늘 쓰던 것과 비슷한 스테인리스 재질의 손잡이 달린 것으로. 머리끈은 아무 장식 없이 그저 심플한 검은색. 오전에 버린 머리끈에는 동그란 진주 장식이 붙어 있었지.

얼굴로 열감이 확 몰려왔다. 

취향을 꼼꼼하게 파악당해서? 그동안 얼마나 세세한 부분까지 관찰 당했을지 부끄러워서? 그저 딱딱하기만 할 줄 알았던 후배가 뜬금없이 날 챙겨줘서? 전남친한테 미련 남은 사람처럼 보였을까봐?

...잘 모르겠어. 지금은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 앉아있는 동그란 뒤통수를 잔뜩 눌러볼 뿐. 

근데 쟤가 저 뚱한 얼굴로 뻣뻣하게 드럭스토어에 가서 이리저리 둘러대며 생소한 조합의 물건들을 골라왔을 생각을 하니 좀 우습기도 하다. 평생 그런데 들어갈 일 없게 생겨가지고, 밝은 조명 아래에서 쫄래쫄래 바구니 들고 여기저기 기웃거렸을 거 아냐. 핸드크림 향도 맡아보고, 머리끈도 꼼꼼히 살펴보고. 옆에서는 직원이 따라붙어서 자꾸 손등에 핸드크림 짜줬으려나? 의외로 그런 거 거절 못 하는 스타일이라 혼자 보겠다고 말도 못하고 막 곤란했으면 웃기겠다. 푸하, 상상하니까 진짜 안 어울리네.


어쨌든. 물건은 죄가 없으니까 쓰긴 쓸게.

황시목 이 섬세한 또라이야.








“선배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안쪽 사무실에서 한창 업무 중이던 은수가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타이핑을 멈추고 황시목과 손에 들린 결재판을 번갈아 본다.


“무슨 일이야?”

“어제 선배님께서 작성하신 홍제동 사건 공소장 관련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려나. 서 있는 황시목이 답지않게 뜸을 들인다. 은수는 자세를 고쳐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대며 팔짱을 꼈다. 왜. 또 뭔데.


“그래. 공소장. 무슨 문제라도 있니.”

“죄송하지만 내용이… 공소장이 아니라 변론요지서 같습니다. 수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뭐?”

“범죄 진술 정리 이후 부분이, 피의자의 개인적인 심리 상태와 어려운 경제 사정에 대해 지나치게 자세합니다. 마치 정상참작을 바라고 쓴 변호인의 주장처럼요.”

“아아. 우리 훌륭하신 황시목 검사님께서 이젠 사수를 가르치시려구요.”

“......그런 건 아닙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흠씬 두들겨 맞은듯 저릿했다. 홍제동 사건. 40년지기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충격으로 쓰러진 아버지가 끝내 돌아가시자, 아들이 앙심을 품고 아버지 친구를 찾아가 칼로 복부를 수차례 찔러 상해치사에 이르게 한 사건. 조사하는 내내 기시감이 드는 건 은수도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이건 기시감이 아니라 피의자에게 감정을 몰입한 거겠지.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다. 기회가 있다면 나도 우리 아버지에게 누명 씌운 놈을 찾아가 반드시 복수 하고 싶으니까.

근데 그게 공소장에까지 녹아들었을 줄이야. 저도 모르게 문장 한 줄, 한 줄마다 사심을 잔뜩 집어 넣었나보다. 그걸 또 하필 황시목이 발견해서 지적을 하네? 어째서 쟤랑은 이렇게 사사건건 부딪쳐야 할까. 이쯤 되면 또라이랑 자꾸 얽히는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건가?


“왜 마음대로 내 공소장을 읽어보고 평가해?!”

“오탈자 있는지 보고 부장실에 결재 올리라고 지시하셨잖습니까.”

“그럼 오탈자나 보지, 왜 나한테 들고 와서 따지는데!”

“평소에 일 하다가 조금이라도 의문이 생기면 바로 물어보라고 하신 것도 선배님이십니다.”

“야! 그래, 너 잘났어. 너 참 대단하다! 매사에 그렇게 따박따박, AI처럼 정확해서. 크고 훌륭한 검사 돼라 꼭!"


그리고 언제나 황시목과 맞붙으면 합리적 근거와 논리 따위는 사라지고, 말도 안 되는 우김과 큰 소리만 남는다. 아. 미치겠네! 날 얼마나 한심하게 볼 거야… 제대로 조목조목 받아치지도 못하고 맨날 버럭버럭 우기기만 하는데.


“이대로 부장님 결재 올리면 어차피 다시 작성하셔야 할 텐데요.”

“그러니까, 내가 혼날까 봐 내 생각 해서 미리 알려준다? ...어쩌다가 이런 또라이가 시보로 들어와가지고!“

“......”


헙. 어떡하지. 마지막 말은 실수였어.

황시목의 미간에 미세하게 홈이 패었다. 살짝 가늘어진 눈꼬리에 힘이 들어간다. 싸늘하게 퍼지는 기세에 눌려 수습도 못하겠고 아랫입술이나 잘근거렸다. 기분이 많이 나빴으려나…?

근데, 그치만 쟤가 먼저 시작한 거잖아. 말하는 싸가지가 진짜! 사람 이성 마비시키는데 뭐 있다니까.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선배한테 너무 입바른 소리로 대들지 마. 이 바닥이 원래 기수 따지고 존중해주고, 그렇게 돌아가. ...나도, 음, 네 생각해서 알려주는 거야.”

“예. 알겠습니다.”


구구절절 혓바닥이 길게도 늘어놨다. 이럴 땐 왜 또 고분고분 한 건데. 더 민망하잖아 쯧. 아. 퇴근하고 싶다. 은수의 피로감을 눈치챈 시목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다시 찾아온 적막. 검사실을 나서는 황시목의 발소리, 문소리 따위에 저도 모르게 청각이 쏠렸다. 아마 그대로 부장실에 결재 올리러 가는 거겠지.


“아오!”


마지막에 쓸데없는 말만 안 쏘아댔어도! 이 정체 모를 찝찝함은 없었을 거다. 은수는 애꿎은 머리나 쥐어 뜯으며 책상에 털썩 널부러졌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지금 이렇게. 서부지검 정문 앞 포장마차 테이블 위에 널부러져 있다.

싸구려 플라스틱 식탁의 차가운 기운이 볼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불쾌할 법도 한데 은수는 잘도 테이블에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이미 소주를 한 병 가까이 비운 상태거든.


“그 새끼, 진짜 뭐지…”


예언자인가? 미래를 보는 사람? 뭐가됐든 소름 돋는 또라이 새끼. 어떻게 부장님이 나한테 할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복붙해서 미리 하냔 말야. 영검사, 이거 내용이 공소장이 아니라 변론요지서 같아. 이참에 옷 벗고 변호사 개업하게 만들어줘? 다시 써! 라고 부장님이 전화로 소리칠 땐 힐끗 창문으로 바깥쪽을 내다보기까지 했다. 혹시 황시목이 부장님 목소리로 흉내 내서 전화하는 건가 의심스러워서.


아. 쪽팔려. 7년 차 씩이나 되가지고 공소장 하나 제대로 못 써서 빠꾸 먹은것도 타격이 큰데, 심지어 시보한테 지적 받은 그.대.로. 한 소리 들었다는 게 훨씬 알싸하게 은수의 자존심을 가격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았어. 이 부담스러운 후배님아.


근데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선배답지 못하게 감정에 휩싸여서, 이제 지검에 온 지 3개월 된 파릇한 애한테 상처나 주고. 걸핏하면 기수로 눌러대고. 할 말 없으니까 큰 소리 치고. 은수가 제일 싫어하던 꼰대선배의 모습을 어쩐지 그대로 밟아가는 것 같단 말이지.

쪼르륵 잔으로 흘려넣은 소주를 다시 입으로 훅 털어넣고, 휴대폰을 들었다. 무슨 용기인지 모르겠다. 그냥 황시목에게 나름의 사과를 하고 싶었다. 이 새끼 이거, 살짝 특이하지만 그래도 내 검사생활 첫 시보잖아? 까도 내가 까고, 이뻐하는 것도 나라구. 멋지다 영검사!


“야. 시목아.”

- 네, 선배님.

“나 꼰대 아니다?”

- ...술 드셨습니까?

“흐흥, 우웅. 마셨지 쪼금.”

- 예.

“야. 시목아.”

- 네, 선배님.

“나 꼰대 아니다?”

- 아효.

“어라 너 지금 나한테 짜증 낸 거야?! 한숨 푹푹 셨어?”


와, 황시목이 짜증을 낸다! 아하하! 한 번 터진 웃음은 혈관 속 알콜을 타고 계속 솟아올랐다. 여러분! 우리 애가 다 컸어요! 흐흥, 푸하! 뭐 흉내도 못 낼 웃음소리로 깔깔 한참을 웃었다. 혼자. 혼자만 흥이 올라서.


- ......

“야. 시목아. 듣고 있어?”


나와주라. 나 혼자 외로워.






그렇게 해서 기어코 열심히 야근하던 시보를 갑자기 불러내 앉혀놓고 소주 한 병을 더 깠다. 이거야말로 핵꼰대스러운 짓인데. 아마 내일 아침 술이 깨면 이 진상짓의 창피함은 고스란히 은수의 몫일 텐데 지금은 뭐 그럴 정신이 있나.


“아참참. 넌 술 안 마시지.”

“잔은 받을게요.”


은수가 피식 웃으며 황시목 앞에 든 잔을 절반 정도 채웠다. 이리 주시죠. 은수의 잔은 소주병을 가져간 시목이 채워주고. 짠- 시목 앞에 놓인 잔에 저 혼자 제 잔을 부딪히고, 입에 쏙 털어넣고, 크, 리액션까지. 혼자 마시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황시목이라도 있으니 좀 낫다.


“이것도 업무상 위력에 해당되니?”


테이블 위로 한쪽 팔로 턱을 괴고 바짝 다가오는 은수. 느릿한 말투를 따라 은은한 술 냄새가 번졌다. 시목의 눈썹이 슬쩍 들렸다.


“아뇨. 이번엔 자의여서 해당 안 되는데요.”

“꺄하! 그렇구나아.”


은수가 핏 웃으며 시목의 팔뚝을 슬쩍 친다. 닿은 부분을 힐끗 보던 시목의 팔에 힘이 들어가 움찔거리고. 그래도 이제는 유난 떨면서 털어내진 않는다. 새끼, 그래도 결벽증 까진 아닌가 봐? 다시 픽픽 웃던 은수가 오이스틱을 들고 휘휘 젓다가 입에 넣었다. 오도독 깨물다가 저를 무심히 보는 두 눈에 대고 씨익 눈꼬리를 접어 보였다.


“황시목아. 너는 원래 그래, 사람이? 재미도 없고. 표정 변화도 없고. 질문은 많고.”

“그러는 선배님은 원래 이렇게 웃음이 많으십니까?”


아? 내가? 그치 그치, 나 원래 웃음에 관대한 편인데. 사회생활이 사람을 변하게 만드네? 실없는 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놓다가 또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니 근데 이거 봐. 이 새끼 또 질문하잖아.


“무슨 일 있으십니까? 술을 많이 드시네요. 혹시... 저번에 청첩장 그것 때문입니까.”


저 소리에 하마터면 술이 홀랑 깰 뻔했다. 야 넌 날 뭘로 보니! 내가 그런 거에 미련 가질 사람으로 보여?!


“야! 미쳤냐 진짜. 쓰읍. ...너 때문에! 좀 마셨지. 우리 서부지검 또라이, 황시목!”

“저 때문에 술을 드신다구요.”

“미안. 아깐 미안했다.”


뭔데. 왜 또 이렇게 순순히 한 꺼풀 풀어진 느낌인데? 말이 없어진 황시목이 눈을 살포시 내려깐다. 하 저거 저거, 저 처연한 표정에 내가 마음 약해지고 그랬지. 

그렇게 새초롬한 얼굴로, 시목이 잔을 들더니, 어? 어어? 


“마신다…! 마셨다.”

“저도 죄송했습니다. 선배님께 대들어서요.”

“우와. 황시목이 술 마셨다!”

“......”


근데 시목아. 

예? 

나… 너무 졸려. 


그때 황시목 표정이 어땠더라? 당황스러워 했나. 질겁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약간의 경멸?! 기억이 안 난다. 그대로 화면이 뚝 끊어져서.






에이씨. 미안하다는 거 취소. 

황시목 이 싸가지! 또라이! 이거 인간 아니야 진짜.


술이 깬 은수가 덜덜 떨면서 포장마차 밖을 나섰다. 이제 문 닫을 시간이라고, 독촉하며 흔들어 깨운 포장마차 사장님 아니었으면 야외 취침으로 입 돌아갈 뻔.

이 또라이 시보는 혼자 튀었다. 말이 돼?! 선배가 꽐라가 되셨는데, 어떻게 지 혼자 낼름 나만 두고 가버리냐고!


“미친, 진짜!”


으으 추워, 싸늘한 가을밤 공기에 딱딱 절로 윗니 아랫니가 부딪히고. 덜덜 떠는 중에도 내일 황시목을 어떻게 조질까, 그 생각으로 정신이 없던 찰나.


“아가씨! 옷 가져가요!”


사장님이 뒤에서 은수를 불러 세웠다. 이거, 아가씨 위에 덮여 있었어. 가져가요. 휘휘 흔드는 검은 재킷.


“제 옷이 아닌데요?”

“아까 같이 있던 총각이 벗어주던데. 그 총각 갖다줘요.”


들이미는 재킷을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미친, 그 와중에 옷은 왜 덮어줬데?! 그럴 시간에 깨워보거나 데려다줄 생각은 안 들더냐. 그 놈의 사고의 흐름은 따라잡기가 너무 힘들다.


그런데 가을밤 공기는 싸늘했고, 손에는 주인 없는 재킷이 들려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은수는 재빠르게 어깨 위로 재킷을 둘러 올렸다.

그래도 이거라도 덮으니까 좀 덜 춥네. 아주 고오맙다 또라이야. 

그 놈 등짝이 제법 넓은지, 은수의 어깨를 한참 벗어난 곳에 어깨선이 온다. 의외로 향수도 쓰네. 희미하게 남은 시목의 잔향이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는 은수의 코 끝에서 맴돌았다. 






잡식에 죠필을 곁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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