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BS 뉴스 속보를 알려드립니다. 아... 속보는... 어젯밤 최초 보도했던 대로... 그런데 좀비떼들이 이곳 방송국까지 근접해 TV 뉴스 방송은 오늘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향후 상황은 국가 긴급 라디오 방송를 통해...







오드아이: 세계 최후의 인류






1.

지직거리며 TV 화면이 점멸하더니 뚝, 새까맣게 변했다. 사실 민현은 별 생각이 없었다. 민현만 그랬겠나, 적어도 지금 이 N국가에 있는 인간 대부분은 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민현은 어제 N 최대 아레나에서 월드투어 팬미팅을 가졌고, 오늘은 간만에 휴식을 갖겠다며 룸에서 말벡을 마시고 있었다. 외국어에 능통해서 망정이지 까막눈이었담 TV를 보면서도 통신장애인가 생각하고 말 뻔했다. 민현은 테이블에 와인잔을 내려놓고 커튼을 걷었다. 어렴풋 호텔 밖 도시의 야경은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뭐야... 이게 뭐냐고. 민현은 리모콘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N국가와 아주 먼, 다른 대륙에서 송출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자료화면에 유혈이 낭자했다. 화면이 바뀌고 데스크에 앉은 앵커는 심지어 이 취재가 해당 기자의 마지막이었다며 눈물을 닦았다. 영어에 능통하진 않아도 해외 비행기 타고 다닌 구력이 얼만데 그 정도 문맥이야 감으로도 때려잡았다. 민현은 자신의 인지력을 의심했다. 안온한 이 호텔룸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쾅쾅. 잔뜩 긴장해 있던 민현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까무러칠 뻔했다. 얼음처럼 굳었다. 민현아, 민현아. 들려오는 목소리는 매니저 P였다. 뛰어왔는지 P가 숨을 헐떡였다. 가야 돼, 민현아. 지금 당장. 민현은 불안한 촉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판단이 어느 정도 맞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형, 밖이 이렇게 멀쩡한... 민현은 P가 보는 앞에서 다시 룸에서 보이는 야경을 가리켰다.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불과 그 짧은 사이에, 불기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2.

방밖을 나서니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복도를 울리는, 아랫층 사람들의 아비규환 같은 비명이 시작이었다. 민현은 비상계단을 통해 정신없이 옥상으로 올라가면서 '여기 방음 정말 잘된다' 얘기했다. P가 구슬프게 돌아봤다.

좀비가 떼로 나타나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다는데도 돈은 위력이 있었다. 물론 천문학적인 액수만이 힘을 발휘한다. 분초를 다투는 급한 스케줄일 때 몇 번 이용해본 적 있는 헬기가 호텔 옥상에 있었다. 이런 건 꿈에도 모르고 호텔 로비를 통해 어디론가 뛰쳐나가는 사람들의 무리가 민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확실한 방법이 없다면 그냥 쳐박혀 있는 것도 일종의 방법 아닐까? 모르겠다. 민현이 어정쩡한 삶을 살고 있었다면 탈출했을까, 이 호텔 안에서 문을 걸어잠그고 있었을까. 하긴, 버텼으면 오래 못 갔겠지. 옆방에 좀비가 들어와 사는 건 아닌지 궁금할 거야.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민현의 현실 감각이 온전치 못했다고 봐야 한다. 헬기가 거센바람을 일으키며 상공을 날았다. 아까만 해도 손으로 셀 수 있던 수의 불기둥이 거리 전체를 뒤덮었다. 민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의 초점을 맞췄다. 사람 같지만 영 사람같이 돌아다니지 않는, 저런 것들이...?

그래. 인간 같았으나 혈색이 없었고 서슬퍼런 표정으로 입아귀를 벌리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덮치고, 뒤덮었다. 어기적대는 경향도 없었다. 비틀비틀거리면서 어디 고장난 로봇처럼 걷는 게 아니었다. 움직임은 날랜 재규어에 가까웠다. 개중에 상당 개체는 네 발로 뛰었다.  

헬기에서 밑을 내다보던 민현은 어렴풋 한 개체가 차창을 부수고 운전자를 무는 모습을 목도했다. 목을 물어뜯고 마구잡이로 파헤친다. 비명이 끊이지 않고 도시를 감쌌다. 인간이 또 하나의 개체로 변하는 데까지 겨우 수초가 걸렸다. 이성을 잃은 그가 그대로 핸들을 쥐고 질주한다. 엉망진창이 된 도로에서 차들이 몇 겹으로 들이받으며 불기둥이 피어올랐다. 그 사이에 끼어 최후를 맞이한 건 인간인지 좀비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지옥. 아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화려한 아경.






3.

민현의 모국, 그러니까 국가 K의 영공에 진입하기 무섭게 조종사가 라디오 주파수를 맞췄다.


-'좀비'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이 생명체... 아니 개체의 출현에 대해 명확한 원인은 규명하지 못하고 있으나 최초의 개체는 며칠 전 국가 B의 국립과학연구원에서 비밀리 행해진 무기 개발 실험실에 있던 연구원으로 확인됐으며... 현재 N국가에 번졌고 개체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확산돼 하루면 우리나라 국경을 넘어올 수도... 우리 정부는 이 좀비들이 국경을 넘을 수 없게 방어태세를 강화하고...



"아니, 어제는 분명 초기 진압에 성공했고 해프닝이었다며?!"


B국가에서 어쩔 줄 몰라 쉬쉬한 상황이 비극을 낳은 모양이었다. 속수무책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는 것을 모두 직감했다. P가 라디오에 대고 버럭 화를 냈다. 그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똑바로 얘기만 해줬으면 민현과 P가 팔자 좋게 B와 인접한 국가 N에서 팬미팅이나 하고 히히덕거리는 일도 없었을 거다. 아무것도 모른 채 월드투어를 했던 어제를 떠올리면 등골이 싸했다. 당시엔 몰랐으나 악몽이 됐다. 혹시라도 놈들이 덮쳤으면 어쩔 뻔했어. 민현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떨었다.


"심지어 좀비라고도 안 그랬어, 돌연변이... 돌연변이라고 했잖아. 그래서 일정 강행한 거고!"


P는 말없는 민현을 부여잡고 동의를 구했다. 뭐... 냉정하게 따지자면 민현이 P의 고용주이고, 목숨을 담보로 하는 해외일정 강행의 책임 상당부분은 분명 P에게 있었다. P는 퉁퉁한 몸집에 키가 작았고, 안경을 썼다. 올드패션한 뿔테 안경을 끌어올린 그가 애달프게 민현과 눈을 맞췄다.

인간이란 이상해. 죽을지도 모르는데, 종잇장으로 흩어질지 모르는 지폐 때문에 아비규환 속으로 헬기를 몰고 오질 않나,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 상황이 해피엔딩을 맞을 거라는 긍정의 힘으로 향후 고용안정성을 확인받고 싶어하질 않나.

민현과 P가 나란히 살아남는다면? 당연히 P는 해고할 작정이다. 정이 많이 들었지만 웬만하면 좀비가 나타나는 이 상황에서도 자신의 안위 정도는 지켜주는 매니저를 새로 구해야겠다. P형, 형은 원래 입버릇처럼 늘 '관두고 치킨집이나 열어야지' 했었으니깐. 하지만 민현은 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했으며 겉으로는 떨고 있는 P의 등을 툭툭 두드려줬다. P가 한시름 놨다.






4.

P는 정신사납게 자꾸 다리를 떨었다. 민현은 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조금만 덜 잘생겨서 연예인이 되지 않았다면 머리깨나 쓰는 직업을 가졌을 거라고 확신한다. 민현은 머리가 잘 돌아가는 축이었다. B국가와 국경이 맞닿은 N국가의 수도까지 불과 이틀.. 사흘인가? 헬기가 향하는 모국은 B국가와 불과 좁고 얕은 바다 한 줄기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물을 피해 육지로 우회한대도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았다. 아까 활개치던 놈들의 속도를 봤잖아? 민현은 날짜를 세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어쩌면... 서울이라고 멀쩡한 게 이상할지도.


"이 연료면 얼마나 날 수 있어요?"


중년의 조종사는 머뭇거렸다. 오래는 안 되지만 서울 민현의 집까지는 될 거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민현의 의도는 그게 아니지. 제길... 좀 더 갈 수만 있으면 아예 저 멀리 섬으로 가버리면 될 텐데. 민현이 손톱을 물어뜯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별장 있어요. 거기로 가주세요."


민현이 한 지명을 댔다. P가 민현을 뜯어 말리기 시작했다. 민현아 거기 완전 산골짜기잖아, 근처에 대형병원도 경찰서도 없어.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정신 차려, 형. 서울 복판으로 가는 건 자살 행위야. 닭장처럼 사람 바글바글한 곳이 얼마나 버틸 것 같아?"


민현의 예상은 정확했다. 죽어도 안 된다는 P의 만류로 헬기는 동이 틀 무렵 꾸역꾸역 서울 상공에 도착했으나 도로엔 지난 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망이 없어. 얼마 남지 않은 연료로 헬기가 방향을 틀었다.






5.

헬기는 불시착했다. 연료 부족이 원인이었다. 산자락에 그대로 고꾸라진 헬기 안에서 민현이 정신을 차렸을 땐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오후였다. 그날 오전과 낮이 통째로 기절한 상태에서 흘러버린 것이다.

매니저와 조종사가 그 자리에 얌전히 의식을 잃은 채였다. 아니... 의식이 없는 게 아니라... 몇 번이나 P와 조종사를 흔들어 깨우던 민현은 둘의 맥박을 확인했다. 의학드라마를 찍으면서 응급실에서 맥박 짚는 시늉한 걸 이런 식으로 써먹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둘 다 죽었어. 죽었어. ...죽었어. 좀비떼를 봤던 막연한 두려움, 공포와 결이 또 다른 구체적인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들었다. 눈앞에서 죽은 사람은 당연히 처음 봤다. 놀란 민현은 헬기에서 뱉어지듯 나와 넘어졌다. 놀라서 나온 건 둘째치고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피가 한참 흐르다 굳은 자국이 검은 팬츠를 물들였다. 아끼는 슈츠라 빼입고 있었던 옷차림이 엉망이었다.

울었다. 잠시나마 꺽꺽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었다. 그때 산등성이 저너머에서 괴상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늑대의 하울링 같았는데 두 번째 들었을 때 그 종류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민현은 넘어가는 해를 확인했다. 슬픔에 젖어 허비할 시간조차 없었다. 해가 지면 놈들이 움직인다. 간밤에 그렇게 난리를 치던 개체들이 해가 뜨자 쥐죽은 듯 어두운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민현은 봤다.

불시착한 지점이 도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민현의 머릿속엔 오로지 하나밖에 없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왼 다리는 통증이 극심해 제 신체의 일부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집념이 민현을 움직이게 했다. 땅에 왼발이 닿을 때마다 뼈가 새로 부서지는 고통이 잇달았다. 민현은 기었고, 절었고, 나무기둥을 잡아 의지하며 짐승처럼 산세를 탔다.

별장은 민현이 기분에 휩쓸려 지어놓은 곳이었다. 외국을 가도 사람들이 알아보니 호텔에서도 맘 편하게 머물수가 있나, 그런 스트레스에 감행한 돈지랄이었다. 이젠 돈지랄이라고 부르지 말자. 하늘이 서슬퍼렇게 변한 첩첩산중. 배경과 맞지 않는 멀끔한 신식의 건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민현은 안도했다. 민현의 뒤로, 저 멀리 시내에서 또 한 번의 굉음이 났다. 총성도 울렸다. 민현은 힘을 쥐어짜 다시 걷기 시작했다.






6.

설마 이곳까지 오진 않았겠지. 민현은 별장으로 다가갔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이상한 기운이 맴돌았다. 창문이 군데군데 깨져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오래 비워놨던 산장인데 이상하게도, 자신이 해놓은 것과 뭔가 다른... 하지만 이 안에 좀비가 있다 해도 어쩌겠어. 민현은 성치 않은 몸으로 더이상 움직일 기력이 남지 않았다. 어차피 죽는다 해도 운명일 것이다. 큰 결심을 하고 도어락 버튼을 눌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고장? 민현은 문손잡이를 돌렸다. 열려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높고 넓은 문을 밀었다. 민다고 열리는 걸 보면 정말...


딸깍.


별장 안으로 몸을 집어넣기 무섭게 민현의 머리로 총구가 들이밀어졌다. 정확히 민현의 관자놀이였다. 총구는 차가웠다. 등골부터 소름이 돋았다. 놀란 민현은 그대로 굳었다. 그럼에도 깨달은 게 있었다. 그 흉폭한 좀비가 아니라 총을 쓰는 생명체라는 것. 불이 꺼져 있는 줄 알았는데 들어와 보니 안에서만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한 등불이 켜져 있었다. 민현은 그 빛에 의지해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 쪽을 쳐다봤다.


"아 헐 대박."


반응이 의외였다. 남자는 들고 있던 총구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세상에 황민현... 황민현?"
"......"
"황민현이다 우와!!!!"


흥분한 남자가 갑자기 벽의 스위치를 환하게 켰다. 별장 응접실이 순식간에 대낮처럼 환해졌고, 구석 곳곳에 있던 인영이 명확히 드러났다. 아 배진영 뭐하는 거야 그렇다고 불을 켜면... 야유 비슷한 불만 소리도 들려왔다. 배진영이라 불린 남자가 기관단총을 다리 사이에 끼워 세우곤 양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시선은 여전히 황민현의 얼굴에 박아놨다.


"대박. 진짜 대박사건. 황민현이야. 아니 사람인 줄은 알았는데 황민현인 줄 몰랐어요. 나 너무 놀라서 쏠 뻔했어 진짜. 와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형 제가 정말 팬이에요. 저 진짜, 농담 아니고, 너무 형 팬이라서... 나 지금 눈물날라 그래. 형 제가 얼마나 팬이냐면 형 작품 당연히 다 봤고요, '메디컬'은 진짜 정주행만 세 번 넘게 했고요 와 이게 실화냐!!! 나 계탔어!!!!

어쨌든 민현은 당장 살았다. 헬기를 타고 도망친 지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 사이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심지어 총구까지 생생하게 머리에 닿았다. 그럼에도 산 것이다.

민현은 그제야 탈진해 쓰러졌다. 형!! 형!!! 스나이퍼에서 남팬으로 표정이 돌변한 순간이 정말 기가 막혔지. 의식이 흐려지는 가운데 민현은 쓰러진 자신을 잡고 흔드는 진영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오른쪽 눈동자는 칠흑 같은 검은색, 왼쪽 눈동자는 푸른 빛이 도는 짙은 회색. 오드아이였다.






7.

그곳엔 총 6명이 있었다.

민현은 한참 뒤에 깨어났다. 날이 밝고 새가 우는 때였다. 보이는 건 새하얀 천장. 폴대에 걸린 링겔, 뚝뚝 일정한 박자로 떨어지는 수액. 또 다른 바늘은 마약 성분의 무통주사 컨트롤러와 연결돼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흐릿하던 시야도 점차 초점이 맞아들어갔다. 침대는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여긴, 민현이 제 침실로 인테리어 해놓았던 그곳... 아마도.

예전 기억과 달리 서재엔 빈칸이 없이 웬 약품과 수술용 도구들이 그득하게 들어차 있었다. 공간이 모자랐는지 꽂혀 있던 책 대부분이 바닥으로 옮겨져 탁자 대용으로 쓰이는 중이었다. 개중 가장 튼튼한 책들 위에 천쪼가리가, 그리고 그 위에 메스 등 각종 수술 도구가 놓여 있었다. 그 세련된 방이 병동처럼 변한 것이었다. 마치 원래 그런 용도였던 것처럼 잘 정돈된 방을 보니 민현은 이들이 언제부터 제 별장에 살고 있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왼쪽 다리는 발끝까지 붕대로 칭칭 감겨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침대 옆 의자에서 꾸벅꾸벅 조는 처음 보는 남자. 신기하게도 민현이 물끄러미 보고 있자 남자가 마침 세게 꾸벅거리다 깼고, 침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라...? 드디어 깨셨구만."


아프슈? 아플거유. 아프댔슈. 출처를 알 수 없는 이도저도 아닌 사투리는 웃음을 노린 게 분명해 보였다. 민현은 살짝 기분이 나빴다. 저는 만신창이로 누워 있는데 장난을 치는 타인이 달가울 리가.

아무튼 그것까지 신경쓸 위인이 아닌 우진은 민현의 침대로 다가왔다. 아니, 침대가 아니고. 우진은 침대 옆 창문을 활짝 열고 아래를 향해 고래고래 고함쳤다. 야, 배진영!!! 너거 형 깼으니까 의사쌤 그만 족치고 올라온나!!!!!! 목청이 그야말로 대단해서 민현은 심장이 덜컹했다. 목을 빼서 보니 창문 너머 1층엔 사뭇 심각한 분위기의 배진영과,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꽤나 시달렸는지 피곤한 얼굴로 먼저 등을 보였다.


"에혀. 일찍 좀 깨지 그러셨어."
"...얼마나 잤는데요?"


우진이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40시간 37분."
"......"
"댁 때매 유능한 의사 하나 총살 당할 뻔 했슈."


댁이 얌전하게 실신한 덕분에 무리없이 마취하고 수술을 해버렸는데 그 뭐냐 정확히 23시간 25분 지나고부터 배진영이 옹성우 멱살을 잡고 '돌팔이 새끼야 우리 형 안 깨어나면 넌 그대로 좀비 밥이다' 염불을 외더니 여태까지 의사를 닦아가지구 내 참말로 옹 선생이 잠적이라도 하면 앞으로가 깜깜해가지구...


벌컥. 그새 2층으로 뛰어올라온 배진영이 당장 민현의 옆으로 뛰어왔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던 우진은 깔끔하게 입을 닫았다. 방을 나가면서 하품을 쩌억 하는 우진의 뒤로 진영이 뭔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형. 38사단 부대 서버 뚫고 있던 거 중간에 멈췄더라."
"......"
"렉인가봐."
"씨벌 돌아버려..."


이름 박우진. 나이 미상. 해커...?






8.

형, 형. 저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제가 형보다 다섯 살 어려요. 형도 저 편하게 대하세요. 근데 여기가 형 별장이었구나. 대박. 어쩐지 되게 좋더라고요. 전 사실 직업군인인데요, 좀비 소탕 때문에 부대 전체가 투입됐거든요 서울 경계에. 그런데 뭐... 난리가 나는 바람에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차 연료가 다 돼서 헤매다 보니 뭐 이런 곳이 있어서... 대박이죠. 우리 운명인 거죠. 형 걱정 마요. 수술도 잘 됐대요. 저 말고도 군인이 둘이나 더 있고, 아 하나는 취사병이긴 한데... 아무튼 의사도 있고요. 컴퓨터 쓰는 애도 있어요. 제가 다 데려왔어요 형. 제가 형 살릴 수 있어요. 와, 저는 전생에 뭐였을까요? 전생에 대체 뭐였길래 여기서 이렇게 형을 만났을까요? 최고로 행복하다. 형이 깨어나서 너무 기뻐요.


민현은 '행복하다' '기쁘다' 같은 단어를 듣자 두통이 찾아왔다. 놀리는 게 아니었다. 눈앞의 배진영은 순수하게 말그대로 기뻐하고 있었다. 민현을 향해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굳이 인증하지 않아도 열성팬이라는 것쯤은 알겠는데,


"'널 두고 내가 어딜 가.' 크으... 형 명대사 제가 외우고 다니잖아요. 그거 한번만 해줘요. 네?"
"...갑자기?"
"네!"


갑자기 연기를 주문했다. 형 제발요, 그거 듣는 게 제 소원이었어요. 굉장히 친한 사이인 것처럼 민현의 손을 꼬옥 쥐었다. 민현은 정말로 머리가 아파졌다. 깔끔하게 무시하고 싶은데 생명의 은인이라 내치질 못하겠고. 그리고 잘은 몰라도 이곳 별장 상황이 묘하게 배진영을 중심으로 흘러간다는 느낌을 받았거든. 사회 생활에 녹이 슬어 그런 상하관계 기류를 민현은 잘 읽었다. 그래서 막 대하지도 못하겠고. 떨떠름하게 웃으면서 손을 빼냈다. 솔직히 까고 말해, 지금 그런 멜로드라마 대사를 떠올릴 여유가 있다는 게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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