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정적이었다. 라피오스는 침묵이 가져오는 싸한 냉기에 몸을 쓸었다. 어쩌면 정말 추운 걸지도 몰랐다. 그는 조금 전까지 전장을 뒹굴었고 에페가 쏴대는 얼음 마법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마인은 마법에 의한 피해를 느끼지 못한다. 라피오스는 제 드레스를 꽉 움켜쥐었다. 양치기 소녀들이 흔히 입을 법한 칙칙한 치마는 마법의 힘으로 지나치게 흰색이 되어버렸다. 라피오스는 치마를 더럽히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악마의 대행자, 재앙의 불씨라고 불리는 마인이지만 그들의 힘과 그들을 명령하는 목소리가 그토록 숭배하는 신임을 인간들은 알고 있을까. 아마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눈은 신의 문양을 받아 기이한 문양을 갖고 있었다. 그 눈이 마력의 흐름을 보고 읽는다. 재앙이 쓸고 간 황야의 대륙 시쉴은 강한 생명력을 가진 시리아울프만이 배회하고 있었다. 심장이 부서진 인간, 마력이 생명인 인간. 신의 대행자. 자연은 그들을 두려워하며 스스로 물러났다. 그들의 등장은 신이 무언가를 소멸시키겠다는 개입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라피오스는 가이아의 문양이 새겨진 눈을 손으로 가렸다. 마인은 선천적인 마인과 후천적인 마인으로 이루어진다. 라피오스는 생명이 터져 죽은 숲의 정령이었다. 작은 신의 하수인은 이전의 생을 잃고 마력이 빈자리를 채워 새로 태어났다. 정령왕만이 듣는다는 신의 목소리가 라피오스의 귀를 울렸다. 그는 가이어스라는 새 이름을 받았지만 그 이름을 애정하지 않았다. 그를 반기던 숲은 그의 발길마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벌벌 떨었다. 라피오스, 이름조차 없는 흔한 하급 정령의 명칭을 그는 과거의 추억인 것처럼 갖고 다녔다.

제 파트너이자 선배인 에페는 선천적인 마인이었다. 그는 최초의 마인이 수백 년간 마력을 응집한 마지막 덩어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마인은 에페가 마인으로서의 직무를 다할 수 있게 되자 에페를 두고 떠났다고 했다. 에페. 에펠레아의 가호를 받은 마인. 그는 무뚝뚝한 마녀였지만 인정은 넘쳐 보였다. 마남은 희귀하다며 몸을 사리는 멍청한 게링과는 달리 솔선수범하는 에페가 라피오스는 더 좋았다.

에페는 최초의 마인이 만든 마지막 마녀답게 머리카락 끝까지 마법으로 차올라 있었다. 엘노아라드 인처럼 선명한 태양색의 머리는 그가 마법을 쓸 때마다 노랗게 타올라 별의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라피오스는 그런 에페가 한없이 멋져 보였다. 그에 비해 자신은 위장할 때나 도움이 되는 짧고 칙칙한 녹색 머리에 나무껍질같이 까칠한 피부를 하고 있었다. 선배인 데릴은 그를 볼 때마다 수분 없이는 광합성도 불가능하다며 비웃었다. 자기는 엘프였던 주제에!

"너무 고요한데?"

에페도 정적을 눈치챈 모양인지 중얼거렸다. 원래 모든 세상은 마력으로 가득 차 있다. 살아있는 것은 소량의 마력을 가지고 있다. 마인의 눈에는 마력이 보이기에 세상을 보는 시야도 조금 뒤틀려있다. 라피오스는 처음 마인이 됐을 때 여러 벽에 얼굴을 부딪치고 격렬한 키스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너무나 평범하게 보였다. 마력이 멈추다 못해 소멸해버린 것이다.

가끔 신이 내리는 또 다른 힘을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신을 믿는 신앙심을 통해 힘을 얻는데, 그들의 힘은 같은 신이 내려도 마력과는 반대되어 간혹 마력을 지워버리고는 한다. 하지만 공간 그 자체에 존재하는 일상적이고 생명에 필요한 마력까지 없애지 못한다. 대체 시쉴 대륙에서 무슨 일을 벌인 것이란 말인가.

시쉴은 언제나 말썽이었다. 너무 빠른 문명의 발전을 이룬 포레스트인이 살았던 곳도, 드래곤을 붙잡아 브레스를 인간들의 편의에 써먹은 것도, 사악한 집단이 지하에서 거대한 결계마법을 시행한 것도 모두 시쉴의 황야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그곳이 황야의 땅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연했다. 그곳이 풍요로웠던 시절 한 마인이 그곳을 날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간즈라는 방랑자 신이 탄생한 것이지만.

에페는 더 말을 꺼내지 않고 땅에 손을 올렸다. 생명이 피어날 수 없는 척박한 땅이라 하더라도 마력을 불어넣으면 출렁거려야 하는 대지가 아무런 반응 없이 잠잠했다. 에페는 땅 깊숙이 마법을 불어넣었다. 흐릿한 마법진이 그의 손을 중심으로 점점 확산하였다. 한쪽으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이 풀리며 바람처럼 흩날렸다. 마치 보리밭 같다고 라피오스는 멍하니 생각했다. 곧 100리아페스(팔폰의 길이 단위. 약 27.5km) 가량 되는 범위의 땅까지 마력이 번지는 게 느껴졌다. 라피오스는 에페의 마력이 따스하다 느끼면서도 그에 반항하듯 밀려오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무언가가 마력을 붙잡고 있다. 라피오스는 발아래로 마력을 흘려 에페의 마법을 뒷받침해주며 숲의 정령들이 부르는 생명의 노래를 속삭였다. 봄기운에 돋은 싹처럼 굳건한 대지를 뚫고 그 여린 기운이 번져갈 수 있도록.

"절묘한 곳을 끊었네. 이곳을 왜 그렇게 사수했는지 알겠어. 가이어스. 잘 기억해둬. 세계를 관통하는 마력의 거대한 흐름이 있어. 해류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어느 지점에서 섞이기도 하지. 이곳은 북과 남의 마력이 교차하는 곳이야. 마녀들을 골탕 먹이려고 작정을 했군. 마력이 교차하는 곳은 여러 가지 증상이 일어나지. 몬스터가 생기거나 그 지역에 특출한 마법사가 있거나 아니면 넘치는 생명에 인간이 타락하거나. 시쉴의 교차점은 최악의 경우 같지만 막아두면 더 최악이 될 뿐이야."

"차라리 메인젤처럼 마법이 넘치면 좋을 텐데."

"이럴 때 그런 쓸데없고 시간 소모적인 말을 늘여놓을 거야? 다행히 인간의 힘으로 길게 확산시키지는 못했어. 100리아페스면 충분해. 내가 붙잡고 있을 테니 네가 생명을 불어넣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전(前) 숲의 정령."

저런 비아냥거림만 없더라면 참 좋을 텐데. 에페를 노려보면서도 라피오스는 에페가 펼친 마법진 안에 제 마법을 맞춰나갔다. 고대 라그란즈 어로 된 주문들이 에페의 마법진 위에 하나둘 새겨졌다. 곧 마법의 힘이 사방으로 퍼지자 라피오스는 갑작스러운 확장에 놀라 제 마력을 잡아챘다. 에페의 마법은 매끄러웠다. 라피오스가 접근하기 쉬울 정도로. 라피오스는 그의 진입장벽이 낮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며 에페의 마법진 속으로 천천히 제 마법을 불어넣어 갇혀있는 마력을 독려했다. 곧 무언가가 손안에서 찌그러지는 느낌이 들자 라피오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가이어스!!"

자신이 그다지 애정하지 않는 또 다른 명칭을 부르는 에페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라피오스가 그를 바라보는 순간 깨진 틈 사이로 자연의 마력이 갑자기 솟구쳐올랐다. 반작용으로 인해 라피오스의 몸이 공중에 튕겨 나가 형편없이 널브러졌다. 에페는 눈살을 찌푸리며 터져 나온 마력들을 진정시켰다.

"가이어스. 기절한 게 아니면 어서 같이 캐스트(주문을 외우는 행위)해. 리파르이"

"라파, 뭐?"

라그란즈 어를 아직 다 외우지 못한 라피오스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금방이라도 분노로 터질 듯한 에페의 얼굴을 마주하자 그는 서둘러 낯선 단어를 입안에서 굴렸다.

"라파루이."

"이런! 넘어지며 귀라도 먹었어? 리파르이!"

"잘못 들을 수도 있지! 깐깐하다니까. 리파르이!!"

신경질에 가까운 라피오스의 마법이 에페의 마법 위에 성을 내며 앉자 울컥울컥 쏟아져나오던 마력의 흐름이 진정되며 흘러갔다. 빠르게 마법을 거둔 에페는 손을 휘둘러 이동 게이트를 열었다.

"가자. 이 먼지 나는 땅엔 이제 볼일 없잖아."

라피오스는 거무스름한 공간 너머에 보이는 에페의 방을 응시하다가 손을 잠시 젓고는 흘러가는 마력에 천천히 손을 넣어보았다. 생명력 넘치는 기운이 고갈된 마력을 채워주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전부 원래대로 돌아간 듯한 뿌듯한 기분에 라피오스는 황야의 땅을 뒤로했다.




창작 여성서사

정류장. 흐름이 멈추는 곳. 멈춘 흐름은 다시 흘러가야만 한다. 그것이 섭리. 신의 뜻.

아리드알의 숲, 히리루스와 같은 세계관

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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