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벌한 연애사










너만 없었어도. 너를 낳지 말았어야 했어. 너를 낳고 내 인생이 엉망이 됐어. 엄마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술을 마신 날에는 울면서 그러기도 했다. 엄마의 기분이 평소보다 조금 더 안 좋아 보이면 눈치껏 조용히 밖으로 나가 대문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잠잠해질 때까지 몇시간이고 기다렸다. 날이 더워도 코끝이 아릴 만큼 추워도 낮이든 밤이든 다를 건 없었다. 그 말이 어린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혀도 아무 내색도 못했다. 모두가 잠든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홀로 눈물을 삼킬 뿐. 위로 따위는 사치였다. 나는 왜 태어난걸까. 쓸데없이 왜 태어나서 엄마 아빠를 힘들게 만드는 걸까. 태어나지 말았으면 모두 행복했을 텐데. 부모의 불화와 불행을 전부 제 탓으로 여기고 자책했다. 그렇다고 하니까, 그때는 그게 당연히 제 잘못인 줄 알았다. 



엄마랑 아빠도 절절하게 사랑했던 때가 있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고, 가진 것은 없어도 행복했지. 하지만 그 행복은 잠시뿐이었다. 문제가 뭐였을까. 애초에 단단하지 못했던 걸까. 요즘은 삼류영화에서도 쓰이지 않을법한 진부한 레퍼토리였다. 아빠는 점점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가진 거라고는 번지르르한 외모뿐인 아빠가 그다음으로 제일 많이 가진 건 여자였다. 수시로 여자가 바뀌었다. 엄마가 일가고 없을 때는 가끔 집에 데려오기도 했는데 고작 천 원짜리 하나 던져주며 나가 있으랬다. 기약도 없었다. 밑창이 다 닳은 운동화 질질끌고 동네를 수십바퀴 돌다가 이쯤이면 갔겠지 싶을 때 집 앞을 서성거렸다. 운이 나쁜 날에는 그러고도 한참을 더 기다리기도 했다. 근데 그보다 더 운이 나쁜 건 엄마가 그걸 눈치채거나 아빠가 데려온 여자랑 딱 마주치는 거다. 그날은 난장판이 된다. 집안에서 들려오는 욕설이 난무한 고함소리, 무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작은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소리 내 숫자를 셌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 얼마 못 세고 금세 다시 일부터 반복이었지만 친구도 없고 갈 곳도 없는 태형이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엄마는 몸도 마음도 점점 망가져 갔다. 엄마의 마음이 닳아가는 게 어린 태형의 눈에도 보였다. 둘이 정말 사랑하기는 했던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사랑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이렇게 얄팍한 거구나. 금방 바스러지고 마음은 쉽게 변하고 남는 건 상처뿐이구나. 태형이 처음으로 보고 느낀 사랑은 그랬다.






어느 날은 잠에서 깨어보니 엄마가 짐을 싸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엄마가 저를 버리고 집을 나갈 거라는 걸. 눈치만 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 어디가? 태형의 물음에도 대답은 않고 눈길도 안주고 가방에 대충 짐을 쑤셔 넣었다. 커다란 가방이 점점 빵빵해졌다. 그만큼이나 태형의 불안감도 커져갔다. 옆을 어슬렁 거리다 엄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엄마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태형을 봤다. 퀭한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더는 이렇게 못 살겠어."




그러고는 엄마의 멍만큼이나 새파란 지폐 몇장을 손에 쥐여주더라. 이걸로 뭐라도 사 먹고 너희 아빠 올 때까지만 기다려. 가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가득 차올랐지만 꺼내지는 못했다. 여기를 벗어나면 엄마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나 때문에 불행해진 인생을 되돌릴 수 있는 걸까? 답을 내리지 못할 고민을 하는 사이 어느새 엄마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엄마.. 진짜 가?"




못 들었을 리가 없다. 현관까지는 다섯 발자국도 안되는 거리였다. 참 냉정하기도 하지. 하지만 엄마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쓸데없이. 엄마를 불행하게 만들었으니까 버려지는 거다. 엄마의 뒷모습이 밖으로 사라지고 현관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결국 참았던 눈물이 누런 장판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일곱살, 엄마와 이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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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이 지났다. 반전은 없었고 진부한 레퍼토리는 여전했다. 다만 열일곱이 된 태형은 더이상 자책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의 불행은 그냥 그들의 인생일 뿐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엄마가 우리를 버리고 도망갔어도 아빠는 달라지는 게 없었다. 오히려 나쁜 년이라며 엄마를 탓했고 여전히 집을 비우는 날이 더 많았다. 혼자 남겨진 태형은 언제 올지 모를 아빠를 매일 기다렸다. 집에 와봤자 아빠로서 하는 일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술에 취해 잠들거나 엄마의 욕을 하며 신세 한탄을 해도, 가끔 손찌검을 해도, 그래도 아빠를 기다렸다. 이대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봐 불안에 떨었다. 집안에 다른 사람의 온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참 바보 같았다. 그 따위 아빠는 차라리 없는 게 인생이 훨씬 도움이 됐을 텐데. 가끔 새엄마라며 데리고 오는 여자들은 죄다 반년을 못 넘겼다. 제대로 된 직장이 없으니 당연히 일정한 수입도 없었다. 가끔 집에 들어오는 아빠가 쥐여주고 가는 쥐꼬리만 한 돈 몇푼을 아끼고 아껴 썼다. 하지만 그마저도 다 써버리면 굶어야했다. 




십년 전 현관문을 나서던 그 뒷모습이 엄마의 마지막이었다. 엉망이 된 인생은 잘 해결 됐으려나. 아직도 내 원망을 하는 건 아니겠지. 솔직히 혼자 살겠다고 떠난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치만 지금은 다 관뒀다. 그거 말고도 어린 태형이 감당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엄마도 숨 쉴 구멍이 필요했을 거다. 엄마 없는 놈이라고 아이들이 놀려대는 건 익숙해져 더이상 울지 않았다. 틀린 말도 아닌데 뭐. 그 정도는 이골이 났다. 그래도 지네 아빠 닮아서 아무 여자나 막 후리고 다닌다는 말 들으면 참지 않았다. 냅다 주먹부터 휘두르고 봤다. 바닥에 쓰러진 놈 얼굴이 터지고 피가 나고 맥을 못 추리면 그때서야 멈췄다. 걔네 부모님이 찾아와서 깡패새끼라는 둥 부모가 그 모양이라 그렇다는 둥 멱살을 쥐고 비난을 쏟아내면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일이 더 커지면 수습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억울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엉망이 된 건 엄마 아빠가 아니라 태형의 인생이었다. 책임도 못 질걸 뭐하러 낳아서는. 




   "태형아, 너 얼굴이 왜 그래."

   "......."

   "또 싸웠어?"

   "..아니야."

   "잘생긴 얼굴 흉지겠다. 약도 안 바르면 어떡해."




앉아봐 약 바르자. 밥은 먹었어? 왜 이렇게 말랐어. 한 동네 살던 그 형은 늘 다정했다. 뒤에서 수군거리지도 않았고 혀를 차며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런 후진 동네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참 이상하게도 어려운 일이 있거나 유난히 쓸쓸한 날에는 늘 형이 나타났다. 키도 덩치도 비슷했지만 태형에게는 한없이 크고 듬직한 존재였다. 부모에게도 버려진 인생에서 유일한 내 편이었다. 처음엔 몰랐다. 날이 갈수록 심장이 요동치는 까닭을 말이다. 어디가 아픈 건가 약간 걱정이 되면서도 병원은 가볼 엄두도 못 냈다. 돈도 없는데 큰 병이라도 걸린 거면 어쩌지 그랬다. 받아본 적도 줘본 적도 없으니 알 턱이 없었다. 그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싶지도 않았던 거였지만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열일곱, 그게 태형의 첫사랑이었다.




낯설고 혼란스러웠다. 제가 느끼는 감정을 부정해야 할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남자가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는 건지 몰랐다. 형이 알면 싫어하겠지, 더럽다고 욕하고 피하겠지. 무서웠다. 하지만 의지와는 다르게 마음은 점점 커져서 넘쳐흐르고 주워 담을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생채기 가득한 얼굴에 약을 발라주고 같이 늦은 저녁을 먹던 그 날, 꾹꾹 눌러 담아뒀던 마음을 꺼냈다. 나 형 좋아해. 사실은 형의 다정함에 휩쓸려 내뱉은 약간은 충동적인 고백이어서 말하는 동시에 후회가 밀려왔다. 근데 형의 반응은 예상외로 무덤덤했다. 



   "너는 내가 왜 좋아?"

   "..형은 좋은 사람이잖아."

   "나 좋은 사람 아닌데."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아는 사람중에 형이 제일 좋은 사람인데. 그냥 고백을 거절하기 위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거절이어도 상관없었다. 감히 같은 마음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존재만으로도 의지가 되니까 그걸로 된 거다. 태형의 고백으로 둘 사이에 달라진 것은 없었다. 피하지 않아서, 계속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형은 여전히 다정했고 좋은 사람이었다.






태형아 우리 집에 놀러 올래? 늦은 밤 형의 연락을 받았다. 조금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며칠씩 집을 비워도 걱정하고 신경 쓰는 사람도 없다. 서둘러 형의 집으로 갔다. 머리를 감고 올 걸 그랬나. 누워있느라 눌린 머리가 신경 쓰여 가는 내내 머리를 털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신경 쓰이는 것도 잠시, 목적지가 점점 가까워지니까 그런 생각도 잊고 가슴이 쿵닥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기분은 아직도 꽤 낯설다. 괜히 가슴께를 툭툭 두드렸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랑 아빠도 처음엔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아마 이런 감정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을 거다. 아냐,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집에는 형 뿐이었고 식탁위에는 술병이 놓여있었다. 호기심에 몇 번 먹어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제대로 먹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형이 가득 채워준 술잔을 들었다. 뜨겁고 쓴 맛이 목구멍에서 강렬하게 느껴졌다. 으, 어른들은 대체 이런걸 무슨 맛으로 먹는 걸까.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형은 그런 태형이 귀여운지 피식 웃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홀짝홀짝 술을 마시는 형을 보니 새삼 멋있어 보이더라. 어린 티 내기 싫어서 꾹 참고 주는대로 다 받아 먹었다. 조금 지나니까 술기운이 점점 올라왔다. 얼굴도 몸도 뜨겁고 시야가 버퍼링 걸린 것 처럼 느릿하고 버벅거렸다. 술기운이랑 같이 용기가 생겨났는지 평소에는 힐끔 곁눈질로 보던 형의 얼굴을 턱을 괴고 빤히 쳐다봤다. 얼굴 엄청 뜨겁네. 손등을 볼에 갖다 댈 때는 저절로 숨이 참아졌다. 작게 웃은 형은 마주 앉은 자리에서 옆으로 옮겨 앉았다. 




   "태형아."

   "..응?"

   "키스 해봤어?"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버버하는 사이 형은 입술을 들이밀었다. 멍하게 입술을 내어주고 있다가 불쑥 입안으로 침범하는 뜨거운 혀가 느껴지자 번뜩 정신이 들더라. 놀라서 어깨를 밀쳤다. 순순히 떨어져 나간 형은 싫으냐고 물었다. 놀라긴 했는데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고 그냥 뭐랄까.. 아마 형은 거절 못 할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거다. 태형의 침묵에 다시 입술이 맞닿고 옷속으로 들어온 손이 맨살을 헤집다가 기어코 속옷안까지 들어왔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형, 무서워. 그만해.. 잔뜩 겁에 질려 애원해도 형은 멈추지 않았다. 너 나 좋아한다며. 좋아하는 사람이랑은 이런 거 다 하는 거야. 허리를 꽉 쥔 손을 뿌리칠 힘 한번 쓰지 못했다.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곳으로 핏줄이 불거진 형의 것이 뚫고 들어왔다. 태형은 말로 표현 못 할 두려움과 고통에 벌벌 떨며 눈물을 흘렸다. 배려 따위는 하나도 없는 행위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견디느라 질끈 깨문 입술에서는 빨간 핏방울이 맺혔다. 혼자만의 욕정을 잔뜩 쏟아낸 형은 곧바로 잠들었고 채 다 벗지도 못했던 옷을 추슬러 도망치듯 그 집을 뛰쳐나왔다. 




술에 취해 형이 실수를 한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형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지 욱신거리는 아래의 고통을 참으며 고민했다. 며칠 만에야 마주친 형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태형을 대했다. 그 뒤로 형은 종종 태형의 집을 찾아왔다. 고백을 했고 몸을 섞었지만 그렇다고 무슨 사이가 된 건 아니었다. 마음을 받아준 것도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다. 이러면 안된다고 소심하게 겨우 한마디 꺼내면 형은 무슨 특별한 사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게끔 말했다. 그 말에 넘어가서 멍청하게 거절도 못했고 도망갈 생각도 못 했다. 여전히 죽을 만큼 무서웠고 아팠지만 꾹 참고 견디기만 했다. 




   "나 좋아하잖아. 형은 너랑 하는 거 너무 좋아. 응?"




좋아하는 마음을 무기로 삼아 쥐고 흔들었다. 형은 나 좋아해? 나랑 하는 거 말고, 내 몸 말고 나를 좋아하냐고. 늘 그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도 물은적은 없다. 어느 순간부터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태형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고 그냥 원할 때 언제든 대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다. 그래서 좋아한다는 걸 이용해서 다루기 쉬운 자신을 찾는 거라는 걸 다 아니까 굳이 확인받을 필요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같잖은 희망은 점점 크기가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 덕분에 2년이나 끌려다녔다. 육체의 고통은 점점 익숙해지는데 마음은 그럴 기미가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사랑이 뭐라고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것도 못 하는지. 진짜 벼랑 끝까지 가봐야 정신을 차릴까 싶었다. 






그날은 형이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새벽에 갑자기 태형을 불러냈다. 잠도 덜 깬 상태로 불려 나가 근처 모텔에서 몸을 섞었다. 금세 잠이 든 형을 옆에 두고 멍하게 천장만 올려다보는데 누군가 방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형의 이름을 외쳤다. 영문도 모른 채 눈만 끔벅이다 형을 깨우고 문을 열었다. 신발을 신은 채 방으로 들어온 여자는 소리를 치며 욕을 했다. 형의 여자친구였다.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들은적은 없었지만 딱히 놀라지도 않았다. 머리채가 붙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건지 너무 억울했는데 입이 안 떨어졌다. 그 여자는 형의 여자친구고 나는 그냥 섹스 파트너다. 아니, 서로 간에 합의가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으니 파트너라고 할 수는 있는 건가? 그 여자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고 형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지만 남들 앞에서 형에게 내 존재는 그저 불쌍한 동네 동생에 지나지 않는다. 


여전히 형에게 태형은 안중에도 없었다. 화가 난 여자친구를 달래며 태형의 탓을 했다. 대체 뭘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지금까지 버텨왔던 걸까. 자신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믿었어야 했는데.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지금은 돌이키기에 너무 많이 늦어버렸다. 그럼 그렇지, 엉망진창이 된 인생에 내 편 같은 게 있을리가 없지. 



축축한 뒤를 제대로 정리도 못하고 모텔방을 빠져나왔다. 엄청 가슴 아플 줄 알았는데 눈물은 한 방울도 안 나왔다. 겨우 도착한 집은 늘 그렇듯 텅 비어있었다. 차가운 방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든 것도 없이 폼으로 메고 다니는 백팩에 짐을 챙겨담기 시작했다. 가진 게 없으니 짐이랄 것도 없었다. 그냥 눈에 보이는 옷가지 몇 개랑 틈틈이 모아둔 몇 푼 안되는 돈 봉투를 쑤셔 넣은 백팩을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열아홉, 상처만 남은 첫사랑은 끝이 났고 지긋지긋한 집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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