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소설은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사건, 조직 및 배경은 실제와 어떠한 관련도 없음을 밝힙니다.



2장




“때가 때인지라, 고해소 형제님들께서 무척 바쁘시겠습니다.”

“보속과야말로 연일 몰려드는 신자들 때문에 수고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주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이들이라면 응당 그래야지요.”

서로 마주 보고 앉은 주임 신부들이 차를 마시며 덕담을 나누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의 말이 길어질수록 어지러워졌다. 당장 내 뒤에 굳게 닫힌 문으로 누군가 뛰어 들어와, 나를 급히 데려가야 한다고 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벌써 10번쯤 했다. 하다못해 재판소에 증언이라도 하러 가야 한다든지.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나는 무거운 공기 속에 질식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동방 정교회와 개신교가 신성 가톨릭교회로 통합될 때, 기존의 교계를 정리하면서 대부분의 교회 조직은 삼위일체의 형태로 정비되었다. 도시 교구 하나를 관장하는 추기경 아래에 3명의 대주교를 세운 것도 그에 따른 교계였다. 성 베드로로부터 계승되어온 주교의 권한은 크게 사제직, 사목직, 교도직으로 나누는데 세 명의 대주교는 각각 이 권리를 상징했다. 교도직을 맡은 제1 대주교는 재치권을 가지는 주교단 회의와 성서율법회, 이단 심판소를 맡고 있으며 사목직을 담당하는 제2 대주교는 고해소와 보속과, 종교 재판소를 맡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제직을 담당하는 제3 대주교는 도시의 모든 성당과 신학교, 지상 선교원을 관할했다.

제2 대주교가 관할하는 각 층의 모든 대사처에는 4명의 관리자가 있다. 각각 고해소, 보속과, 재판소의 주임 신부가 1명씩 있고 그 위로 대사처장까지 총 4명. 그중 두 명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고해소 주임 김감호 비질리오 신부와 보속과 주임 수까르노 아넥토 신부는 서로 마주 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차기 대사처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가 퍽 다정할 리 없다. 원래 보속과 주임 신부인 수까르노 신부가 사무실로 부른 것은 나였으나, 사무실 앞에 가보니 나보다 먼저 김감호 주임 신부가 와 있었다. 혹시라도 고해소 소속 사제가 결례라도 겸했을까 봐 걱정되어 달려왔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자기가 맡은 고해소에 흠집이라도 잡아 깎아내리려는 시도가 아닌지 걱정되어서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수까르노 신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운을 뗐다.

“제가 마태오 신부님을 이곳에 모신 것은 어제 접수된 대사부 때문입니다.”

수까르노 신부는 흰색의 대사부 한 장을 꺼내 놓았다.


<Z-1 대사부>

고해자: 사토 치즈루 유스티나

고해 내용: 3019년 12월 8일 직장 상사의 다리를

칼로 벤 상해사건

고해성사일: 3019년 12월 10일

성사담당사제: 최윤 마태오


“마태오 형제님이 발부한 대사부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여쭤봐도 되겠군요. 왜 이 고해자에게 Z-1 대사부를 주셨습니까?”

수까르노 신부가 호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 일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김감호 신부는 가만히 나와 수까르노 신부를 번갈아 보며 침묵을 지켰다. Z-1 서식은 해당 행위가 정당방위일 때에만 발부한다. 대죄를 고해하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드문 일이었지만, 자연재해 같은 불가항력에 의해 고의성 없이 행해진 일에 대해서는 정당방위로 인정하여 보속 없는 사면이 가능했다. 올해로 5년째 고해소에서 대사부를 발부해온 나로서도 처음 발부해본 서식이었다. 특이한 대사부이긴 하지만 없는 서식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니 보속과에서 주목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수까르노 신부의 다갈색 눈이 차갑게 나를 쳐다보았다. 입을 열려는 순간.

“괜찮다면, 녹음기록을 듣고 마저 이야기할까요?”

김감호 신부가 슬쩍 끼어들었다. 수까르노 신부는 마지못해 동의했고 우리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에 올려진 스피커에서 어제 고해소에 방문했던 사토 치즈루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여자는 몹시 지쳐 보였다. 그 여자, 사토 치즈루는 33살이라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만성적인 피로감을 스카프처럼 두르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주소가 55층이 아닌 20층이었다. B20-122-34. 지하 주거지의 최상단이자 마지노선으로 늘 시끄러운 펌프 소리가 울리는 소음공해가 심각하고 지하층에서는 대기 오염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지상을 떠나 도시에 입성한 것에는 성공했지만 도시의 물가를 맞출 수 없는 사람들이 지상과 도시를 오가며 살아가는 주거지였다. 형을 찾아 돌아다니며 방문한 적이 있는데, 상자처럼 빼곡히 들어찬 작은 집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지러웠다. 사람들은 보통 주거지 관할 대사처를 찾아갔지만, 교회법에 지정된 사항도 아니고 일터에서 가까운 쪽을 찾아가는 사람도 제법 많았으므로 그녀가 55층 대사처로 찾아온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어제의 마지막 고해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온종일 너무 많은 죄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저 쉬고 싶단 생각만 하던 중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형을 찾는 일도 쉬어야 할 정도였다.

“찬미 예수님. 어떤 죄를 고하러 오셨습니까.”

“제 이름은 사토 치즈루 유스티나입니다. 55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틀 전, 주방에 남아 채소를 다듬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들어왔습니다. 전 벌써 두 달째 월급을 받지 못해 사장님께 이미 여러 차례 월급을 달라고 말씀드린 상태였습니다.”

사토 치즈루는 건조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부유층이 사는 55층의 레스토랑은 매일 만석이 될 만큼 장사가 잘되어서 주방은 늘 아비규환처럼 바빴는데, 정작 요리사들의 월급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메인 셰프와 수 셰프에게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직원마다 월급일을 달리한다든지, 전체 금액의 일부만 지급하는 일이 빈번했다. 특히 사토처럼 지상에서 내려온 사람들에게는 그런 일이 더욱 잦았다. 직원들끼리 이야기하다가 특히 지상 출신 여직원에게는 이런 불이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치즈루는 그날 주방에서 만난 사장에게 정식으로 항의하겠다고 말했다. 노동청에 신고하겠다는 치즈루의 말에 사장은 그 자리에서 그녀를 해고했다. 항의하는 그녀에게 사장이 설명한 해고 사유는 그녀가 레스토랑의 재료를 훔치고 함부로 썼다는 것이었다.

“전 맹세코 단 한 번도 제 물건이 아닌 것을 사사로이 건드린 적이 없어요. 하느님은 다 아실 거예요.”

치즈루가 어이없는 얼굴로 사장을 쳐다보자 사장은 선반 위의 루가닉 오일 병을 쓰러뜨려 치즈루가 다듬고 있든 채소 위로 뿌렸다. 고기가 귀해지면서 풍미가 진한 음식에 고기 대신 들어가는 오일로, 특수 재배해야 하는 버섯으로 만들어져 몹시 고가의 제품이었다. 치즈루가 뒤늦게 병을 주워 세웠지만 이미 푸성귀에서는 강한 루가닉 향이 났다. 별것 아닌 쓴 풀에 루가닉을 넣다니. 미친 여자로군. 사장은 그녀를 밀치며 오히려 역정을 냈다. 너 같은 도둑에게 줄 월급 따윈 없어. 그동안 내 가게에서 얼마나 많은 걸 훔쳐 갔을까. 지상층 비렁뱅이는 이래서 안 된다니까. 치즈루는 자신을 밀치는 사장의 손을 쳐냈다. 당신 말은 다 거짓말이야! 그러나 이건 내 가게야. 누가 네 말을 믿어줄 것 같아. 억센 손을 밀치며 몸싸움을 벌이다 사장에게 뺨을 얻어맞은 치즈루가 바닥을 짚고 쓰러졌다. 오일이 흐른 바닥이 미끄러웠다. 넘어진 치즈루를 보고 비웃는 사장의 웃음소리에, 그녀는 사장을 노려보았다. 이게 뭘 쳐다봐. 사장은 치즈루를 힘껏 걷어차기 위해 다리를 들어 올렸고 그녀의 눈에 채소 상자 옆에 있는 작은 칼이 보였다. 치즈루가 작은 칼을 들고 위로 휘저은 것과 사장이 다리를 뻗은 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허벅지가 깊게 베인 사장이 쓰러지고 나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시야에 들어왔다.

“사장님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저는 전 재산을 털어 그 병원비를 내고 왔고요. 칼로 사람을 베었다고 하니 대죄과로 가라고 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신부님, 저는 더는 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월급도 받지 못했고 사장의 병원비를 내느라 집도 뺐거든요. 여기서 나간다고 해도, 저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칼로 사람을 상하게 한 죄는 대죄지요. 그 보속을 내지 못할 테니 저는 재판을 받고 강제노역을 하게 될 것을 알고 왔습니다. 이상이 제게 일어난 일입니다.”

사토 치즈루는 엎드려 울지도, 떨리는 목소리로 빌지도 않았다. 가만히 모은 두 손을 다리 위에 올려둔 채 차분히 허리를 펴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죄지은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이들의 고해를 들으며 자신이 지은 죄에 사실은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고 조그만 죄에도 벌벌 떨며 용서를 구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당당한 사람이 또 있었던가. 행위 자체에 떳떳하여 어떠한 결과에도 굴하지 않을 사람의 자세였다. 여자는 의연하게 삶을 포기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몹시 피곤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물었다.

“보속과에서 참고할만한 CCTV가 있습니까?”

“경찰이 조사해갔지만, 주방엔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 없을 거예요.”

“그럼 자매님께서 자매님의 사장님에게 위해를 가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까?”

“없습니다. 주방엔 저 혼자였고, 사장이 쓰러져 비명을 지르자 홀에 나가 있던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함께 구급차를 불렀고, 저는 엉망이 된 주방을 정리했습니다.”

나는 거기까지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장님께서는 평소에 술을 많이 드시나요?”

“…….”

사토 치즈루는 의외의 질문에 입을 닫았다.

“이곳은 고해소입니다. 하느님께 죄를 고하러 오신 분들은 낱알만큼의 거짓도 없어야 합니다.”

“사장님은… 사제님들께 팔아야 할 포도주를 한 병씩 더 주문해서 자기가 마시곤 했습니다. 장부는 가짜로 표기하고요.”

“그날도 사장님께서는 포도주를 마셨나요?”

“아마, 마셨던 것 같아요. 아니스 향이 났습니다.”

“술에 취한 사장님이 루가닉 오일 병을 엎질렀습니까?”

사토 치즈루는 대답을 멈춘 채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부드럽게 다시 한번 물었다. 술에 취한 사장님이 비틀거리는 바람에, 루가닉 오일 병을 엎질렀습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사토 치즈루는 한참 나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네, 주방에 들어올 때 살짝 비틀거려서 선반에 기대었는데 그때 사장님이 병을 넘어뜨렸습니다.”

“오일이 쏟아졌다면 바닥이 몹시 미끄러웠겠군요.”

“네.”

“그래서 자매님도 미끄러지신 거고요.”

똑똑한 여자였다. 사토 치즈루는 대화를 이해했다. 나는 그녀를 유도신문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결론을 위해, 사실의 일부만 나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모든 고해성사는 교회법에 의거, 전체 내용이 녹음되며 녹음 파일은 보속과에서 오류를 심사하는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거기에 녹음되어야만 하는 말들을 그녀에게 들어야 했다.

“바닥에서 채소를 다듬었으니 칼도 옆에 있었겠군요. 넘어지면서 위험하니 얼른 칼을 치우려 잡았습니까?”

“네. 그대로라면 위험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사장님께서.”

“처음엔 저를 차는 줄 알았지만, 다시 보니 미끄러지고 있었습니다. 사장님을 도우려고 손을 뻗었는데, 하필….”

“손에 칼이 쥐어져 있고 그 칼 때문에 사장님이 다리를 다쳤다는 이야기군요.”

“네, 맞습니다.”

“고해 내용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어야 합니다. 모두 사실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나는 가장 끝에 있는 하얀 대사부를 집어 들었다. 정당방위를 뜻하는 Z-1 서식이었다.

“Z-1 대사부를 드릴 겁니다. 자매님의 고해 내용을 들어본 결과, 술에 취한 사장님께서 오일을 엎지 않았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이기 때문에 자매님의 우발적 사고는 정당방위로 처리, 보속이 없어도 죄가 면제될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금지한 술을 드신 사장님께서는 별도의 고해성사를 받으셔야 할 겁니다.”

사토 치즈루는 대사부를 받아들고 놀란 얼굴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재판소로 넘겨질 거라 짐작했던 미래가 바뀐 것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기도하겠습니다.”

내 말에 사토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자 그녀가 이를 악문 채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감사합니다. 하느님. 나는 사죄경을 읊어 성사를 마치고 그날의 마지막 고해자를 내보내는 것으로 하루의 일을 마무리 지었다. 어쩌면 그녀가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토 치즈루는 울지 않았고 몸에 힘을 잔뜩 준 채 고해소를 나갔다. 그녀가 나가는 순간까지도, 나는 내가 왜 그녀에게 Z-1 대사부를 주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 ◆ ◇



녹음기록이 끝나자마자, 수까르노 신부는 다시 한번 물었다.

“이 고해자와 마태오 형제와의 대화 내용은 아주 묘합니다. 처음 내용은 앙심을 품은 몸싸움이 거론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둘 사이에 있던 갈등은 빠지고 갑작스럽게 사장이라는 사람의 규정 위반 행위와 우연과 실수가 부각되지 않습니까.”

Z-1 대사부는 그가 일으킨 피해가 얼마이든지, 보속을 내지 않는다. 발급해봤자 대사처에서는 손해일 뿐인 대사부였다. 그러니 윗선으로 보고됐을 것이고, 내가 이 자리까지 불려왔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하루 사이에 누군가 캐물을 것을 대비하여 대답을 준비해 두었다.

“저는 대죄과 고해성사 사제로서 많은 사람의 고해성사를 들었습니다. 이따금 신자들은 자신이 본 것과 생각한 것을 착각하여 말하곤 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실과 환상을 구분하여 정확한 죄의 유무를 가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저희 고해성사 사제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신자들께 나누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 신자가 사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다가, 형제님과의 대화를 통해 사실을 기억해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고해의 내용대로 정당방위로 판단하여 Z-1 대사부를 발부했습니다.”

수까르노 신부가 다시 입을 여는데 김감호 신부가 끼어들었다. 그는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태오 형제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맞습니다. 고해소로 달려오는 신자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때도 참 많지요. 길을 헤매는 양 떼들을 인도하시는 목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자세입니다.”

“하지만 이 여자는 분명히.”

“아넥토 형제님.”

사람 좋게 생긴 얼굴로 김감호 신부는 수까르노 신부를 불렀다. 둘이 신학교 동기이지만, 김감호 신부가 수까르노 신부보다 두 살 더 많고 출신도 이 도시 토박이로 승진에 훨씬 유리했다. 그의 태도에서는 사실에 기반한 여유가 묻어났다.

“증인이나 증거가 없다면, 죄인의 양심에 따라 고해한 내용만이 사실이 된다는 수정 교회법 1043조 3의 2항을, 알고 계시지요.”

수까르노 신부는 입을 닫았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인의 고해 내용을 판단하는 일은 전적으로 고해성사 담당 사제의 권한이라는 수정 교회법 1043조 3의 3항도 잘 알고 계시겠군요.”

수까르노 신부는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안경 너머로 엄중한 비난의 뜻이 느껴졌지만, 그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김감호 신부가 사람 좋게 내 어깨를 두드리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럼 더 물어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젊은 세대가 이토록 열심히 책무를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군요. 종종 아넥토 형제님 사무실에 들려 차를 마셔야겠어요.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수까르노 신부는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불쾌함이 얼굴에 묻어났으나 거기까지였다. 내가 공식적으로 일체의 의혹을 부정했으니, 이제 그는 고해 담당 사제의 권한을 침범할 수 없다. 나를 재판장에 세우지 않는 이상은. 나는 김감호 신부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나는 옆에 선 김감호 신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주임 신부님.”

“뭐가 감사합니까? 저는 들은 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대사처에서 가장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역시 김감호 신부였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은 걸음이 느렸다. 그는 고해소 앞에서 잠시 멈춰 나를 쳐다보았다. 웃지 않는 눈. 자칫하면 보속과에게 책을 잡힐 뻔 하지 않았냐는 질책이 침묵 속에 냉정하게 스쳤다. 그는 사토 치즈루가 어떤 사람인지, 왜 Z-1을 발급했는지는 관심이 없다. 자신이 관리하는 고해소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순간 그는 또 웃었다.

“마태오 형제님. 사람들이 왜 도박을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지요.”

“아닙니다. 도박꾼들에게 중요한 것은 돈보다 스릴입니다. 사람은 생각보다 감정에 쉽게 중독되거든요. 그래서 돈이 있어도, 없어도 자꾸 도박판에 갔던 것이지요. 내가 가진 것을 다 잃을 수도 있지만, 내가 가진 것은 비교도 안 되는 것을 가질 수도 있는 기대와 흥분의 갈림길이 그렇게 사람을 미치게 만든답니다.”

김감호 신부는 나직하게 말을 마쳤다. 도박하지 마십시오, 마태오 형제님. 소소한 일에 목숨을 걸다 보면, 다음번에는 정말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중년임에도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주임 신부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누가 찬 입김이라도 분 것처럼 어깨가 으슬으슬해서 나는 반대편 복도로 재빨리 걸어갔다. 수까르노 신부의 초대가 위협 사격이었다면, 김감호 신부의 말은 정확하게 나를 정조준한 말이었다. 이제까지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물론 표면적이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주임 신부가 나를 도우러 보속과까지 올 리가 없으니까. 나는 부지런히 어깨를 털며 사제관으로 돌아갔다. 몸을 사리는 일과 형을 찾는 일 사이에서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일과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내가 왜 그녀의 손에 정당방위를 쥐여 줬을까. 어차피 매뉴얼을 어기지 않았으니 보속과에서 파고들어도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형을 찾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다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그저 존재해야 했다. 공기처럼 투명하게 존재하는 나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이끄는 것도, 구원받는 것도 큰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그녀가 내게 형에 대한 정보를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그냥 노역에 끌려가기엔 아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상황 앞에서도 비굴해지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 나는 어둠 속에서 한참 생각한 뒤에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 난 형이라면 했을 법한 일을 한 거구나. 내가 아니라, 형이라면. 분명히 그녀를 도왔을 것이다.

그 후 한동안은 형에 대한 꿈을 꿨다. 형과 내가 성경을 읽고 있었다. 형의 얼굴이 어딘지 흐렸다. 다시 잘 보니 사토 치즈루가 성경을 읽고 있었다. 우리 형은 어디 있어요? 내가 묻자 사토 치즈루는 고개를 저었다. 성경을 덮으니, 그녀는 김감호 신부로 변해 있었다. 도박하지 마세요, 마태오 형제님.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답니다. 나는 아침이 되기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여전한, 악몽의 연속이었다.



◇ ◆ ◇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이 편할 때도 많았다. 일과를 마치고 몰래 지상에 다녀오고 나면 한두 시간 뒤에 곧바로 묵상기도와 아침 미사에 참석해야 했으니까. 고해소 업무가 너무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처방받은 각성제 한두 알이면 버틸 만했다.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 옛날 대기 중에 떠 있었다는 별이 궁금했다. 나도 별을 보긴 본다. 지하도시의 천장 패널은 밤 시간대에 별을 띄웠다. 화면에 그려지는 별은 아름답고 호화롭지만 나는 도서관의 옛 문헌에서 소박하게 반짝이는 별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런 아름다움까지 재건하지는 못하더라도, 도시의 설계자들이 조금 더 신경을 썼다면 저 거대한 검은 돔에 싸구려 전구라도 달았을 텐데, 이곳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버려진 땅이니 그런 장식은 사치다. 주위를 둘러보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후드를 도로 뒤집어쓴 채 희미한 가로등이 걸린 시장을 걸어가는데 멀리서부터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단 심판관들이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거리를 배회하던 사람들이 우왕좌왕 길 양옆으로 비켜섰다. 더러운 길바닥에 넘어지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무거운 굽이 질척한 바닥을 세게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사람이 걸어왔지만 마치 한 사람이 걷는 것처럼 소리가 일정했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길 끝이 밝아졌다. 이단 심판관들이 들고 다니는 조명등이 길 위의 사람들을 샅샅이 비추었다. 사람들은 그 빛에 타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고 서로 몸을 겹쳐 피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중심을 잃고 옆 골목으로 흘러갔다. 더 빨리 멀어지고 싶어도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꼼짝할 수 없었다.

이단 심판관 제도는 최후의 심판을 앞두고 급속도로 늘어난 사이비 종교단체를 단속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현재의 신성 가톨릭교회에서는 주교단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이었다. ‘가짜를 잡기 위하여 그 누구보다도 진짜여야 한다.’는 교황의 지침에 따라, 이단 심판관은 가장 신앙심이 깊은 사제들만이 지원할 수 있는 보직이었다. 사목 경력이 5년 이상 되어야 지원 자격이 주어지는데 철저한 배경 검증과 세 차례에 걸친 교리 문답과 대주교와의 일대일 면담을 통과해야 했다. 선발 과정에만 6개월이 소요될 만큼 신중하게 선발하는 자리였다. 생활 규정도 다른 사제들보다 더 엄격했다. 짧게 깎은 머리는 중세의 수도사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상징했다. 검은 옷에 로만 칼라를 착용했지만, 일반적인 사제복과는 달리 채찍을 찬 군인의 제복이 연상되는 복장은 그 자체로 이단 심판관의 힘을 상징했다. 그들에게는 즉결 심판권이 있다. 만약 이단의 증거가 뚜렷한 사람을 이단 심판소로 연행하지 못할 불가항력적 이유가 있다면 이단 심판관은 그 자리에서 그를 ‘심판’, 즉 사형시킬 수 있다. 대사처가 주님의 자비를 상징한다면, 이단 심판관은 주님의 분노를 상징했다. 꼭 이단 행위를 하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이단 심판관을 두려워했다. 두려워하라고 만든 곳이니, 사람들의 반응은 아주 적당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절대 이단 심판관들과 마주쳐서는 안 된다. 운 나쁘게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라도 만난다면, 허가 없이 주거지를 이탈하여 지상에 올라온 일로 잡혀갈 것이다. 이단의 범위는 매우 넓고 이단 심판관들은 성경 교리와 교회법의 해석에 대해 매우 폭넓은 자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근처에서 조명등의 둥근 빛이 사람들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몸을 숙인 채 사람들 등을 떠밀며 안쪽 골목으로 빠져나갔다. 비교적 한적한 길을 달려서 길 끝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꺾었다. 좁은 골목은 사람 둘이 동시에 지나가기엔 비좁았고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나는 코너에서 누군가와 세게 부딪혔다. 뛰어가던 속도 때문에 충격이 커서 멍한 머리를 흔들며 서 있는데, 바닥에 굴러다니는 양초 토막들이 보였다. 넉넉한 옷에 숨겨두었는데, 부딪히는 충격으로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그것을 주우려고 손을 뻗는데 누가 내 손보다 먼저 양초를 주워들었다.

“여기 좋은 게 있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피아를 구별했다. 양초를 집어 든 손은 매우 크고 마디가 굵었다. 그 손보다 인상 깊은 것은 찢어진 오른쪽 뺨을 이어붙인 흉터였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명치에서부터 목까지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남자의 뒤에는 남자와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이 두 명 더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어둠 속에서, 나는 그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네 꺼야?”

난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당에서는 초가 흔하다. 타고 남은 부분은 깎아서 따로 모아두는데 거기서 몇 개 집어 들어도 아무도 몰랐다. 지하에서는 그렇게 흔한데 지상에서는 값이 비쌌기 때문에 나는 사람에 관해 물어볼 때 양초로 값을 지불하곤 했다. 한꺼번에 많이 들고 있는 것을 보이면 강도의 표적이 될까 봐 조금씩 꺼내 쓰곤 했는데, 그 노력이 지금 막 물거품이 된 셈이었다. 남자가 양초들을 주워들자 뒤에 서 있던 다른 남자 둘이 나를 우악스럽게 붙잡아 일으켰다. 흉터, 근육, 덧니. 나는 어둠 속에서 그들에게 이름을 붙였다. 흉터가 갑작스럽게 내 배에 주먹을 꽂았다. 속이 뒤틀리고 위장이 당장 목으로 넘어올 것 같은 충격이 한동안 이어졌다. 더 있어? 험상궂은 인상과 달리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상과 지하는 말투가 달라서 지상 사람들은 한 번에 그 차이를 알아차리곤 했다. 가급적이면 말을 안 하는 것이 나중을 위해 좋은데, 그 점이 흉터를 더 화나게 했다. 다른 말 없이 다시 배에 주먹이 꽂힌 걸 보면, 분명 그랬다.

“이렇게 좋은 양초를 어디서 났을까. 훔쳤지?”

아니. 나는 넘어오는 신물을 바닥에 뱉어낸 뒤 이를 악물고 말했다. 덧니가 내 후드를 벗기자 흉터가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며 살펴보았다. 그 손으로부터 얼굴을 빼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귀하게 생겼네.”

너 두더지구나. 흉터는 속삭이듯 말하곤 히죽 웃었다. 하수구 사람들은 지하도시 사람을 두더지라고 불렀다.

“없던 일로 할 테니, 그냥 가져가.”

이단 심판관들을 피하고 큰 소란이 나지 않는 대가로 가져온 양초를 모두 빼앗긴다고 해도 아깝지 않았다. 근육이 숨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헷갈리는 소리를 냈다. 흉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초를 챙겼다. 주머니에 양초를 넣다가 ‘아’하는 탄성과 함께 무언가를 꺼내더니, 다음 순간 주먹이 다시 내 배에 꽂혔다. 아. 주먹이 아니었다. 무엇인가가 내 살을 갈랐다. 칼날은 들어오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내 몸에서 빠져나갔다. 칼이 살을 가르고 들어와 헤집어 놓은 뱃속이 너무 뜨거워서, 몸속에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흉터는 제 손을 내 뺨에 문질러 닦았다. 피비린내가 났다.

“없던 거로 만들어 줄 테니, 그냥 뒤져.”

세 사람은 떠났다. 사실 눈앞이 어두워서 보진 못했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보니 그런 것 같다고 추측했을 따름이다. 눈앞이 깜깜했다. 나는 그것이 하수구의 어둠 탓인지, 아니면 내가 정신을 잃어가기 때문인지 구분되지 않아서 그저 눈을 깜빡거렸다. 누군가 내 배의 한 토막을 잘라낸 것처럼 감각이 이상했다. 복부가 없어진 것 같다가도 별안간 미칠 것 같은 통증이 온몸을 불태워서 아직 내 몸이 붙어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배를 움켜쥐었다. 옷이 온통 따뜻하게 젖어있었다. 아, 안 되는데. 여기 이렇게 누워 있어선 안 돼. 나는 배를 움켜쥔 채 한쪽 팔로 바닥을 기어갔다. 질척이는 흙에선 악취가 올라왔지만 조금 지나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큰길로. 조금이라도 밝은 길로. 고작 30cm쯤 온 것 같은데 칼에 찔린 상처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너무 아파서 정말 이대로 죽을 것 같았다. 통증이 핏줄을 타고 전신에 돌았다. 혹시 형도 이렇게 죽은 것 아닐까. 멋모르고 하수구를 돌아다니다 누군가의 칼에. 아냐, 형. 거기 있지. 사실은 날 피해 숨어 있는 거지. 하느님 아버지, 세상에, 이게 제 끝입니까. 멀리 사람들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눈앞이 흐려서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물속에서 소리를 듣는 것처럼 모든 것이 뭉그러졌다. 여기 무슨 일이야. 어휴, 심하네. 어떡하지? 곧 죽겠네, 뭐. 까마귀들이 알아서 할 거야.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 하수구는 고기가 부족해서 죽은 사람 고기도 거래한다던데요. 타우의 목소리. 형, 도와줘. 나는 손을 뻗었다. 비켜봐. 세상에, 정신 차려요. 이봐요. 여기, 얼른 들어 옮겨. 어디로 데려가게? 그분께 데려가, 얼른. 그분이 누군데. 난 물어보려고 했지만, 미처 입을 움직이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어떡하지. 내 목소리가 물었다. 무엇을 말이야? 또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듣고 보니 그것도 내 목소리였다. 죽어가고 있잖아. 이대로라면, 그렇겠지. 형을 찾지도 못했는데. 이내 목소리가 비난의 기색을 담아 말했다. 형을 찾는다는 건 핑계일 뿐이야, 미련과 죄책감이 빚어낸 핑계. 하지만 형을 찾는 것 외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나는 내 목소리끼리 다투는 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에 한없이 침잠하고 있었다. 어둠의 표면은 부드러울 것 같았지만 삼베처럼 거칠었다. 몸이 젖은 솜처럼 무척 무거운 데다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아 중심 잡기가 어려웠다. 그만 싸우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쉬어도 돼. 나는 내 이마로 다가오는 하얀 손을 보았다. 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는데, 감은 지 오래됐는지 붕대는 지저분해 보였다. 나는 덜컥 겁이 나 그 손을 움켜잡았다.

“건드리지 마.”

손에 쥔 손이 뜨거웠다. 누구의 손이지. 나는 아직도 어둠 속에 있었다. 손은 천천히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내 손을 가슴에 내려놓고는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쉿. 눈을 감아. 나는 힘이 빠져서 그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까지 온몸을 태우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따뜻한 손이 이마에 닿자 졸음이 쏟아졌다. 내 배 위에 또 다른 손이 얹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목소리가 말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깊은 수마에 빠져들면서 중얼거렸다. 마태오 복음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어쩐지 친숙했다. 윤아, 나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 나는 미처 목소리에게 형이냐고 묻지도 못하고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형이 머리맡에서 마태오 복음서를 읽어주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그것이 내내 꿈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잠자코 듣고 있었다. 형의 얼굴이 흐려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날붙이가 살을 가르고 들어오던 느낌이 생생하게 뇌리를 스쳤다. 나는 파드득 몸을 일으키며 배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벌어져 속이 다 보이는 상처도, 쏟아져 내리는 핏물도 없었다. 악몽이었을까. 그러나 살을 뚫고 들어오던 차가운 칼의 감각은 결코 꿈이 아니었다. 나는 내 손을 살펴보았다. 흙바닥을 기어가던 손은 깨끗했지만, 손가락 사이에는 희미하게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꿈이 아니다. 나는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방이었지만 방의 모습을 구분하기에는 충분했다. 높이가 낮은 접이식 침대, 천장 가까이 놓인 선반 위에 켜진 작은 촛불, 창문이 없는 벽. 나는 칼에 찔린 뒤 낯선 장소에서 낯선 옷을 입고 깨어났다. 촉감이 거친 회색 옷을 매만지다 상의를 걷어 올렸다. 칼에 찔렸던 상처가 거의 아물어 이제 그 자리엔 붉은 흉터만이 남아 있었다. 믿기지 않아 오른손 끝으로 흉터를 더듬어 보는데 누군가 방에 들어왔다.

“일어나셨네요. 안 그래도 인제 그만 깨우려고 했는데.”

나는 들어온 사람을 보고 놀라 침대에서 일어섰다. 사토 치즈루였다. 죄를 고하러 왔으나 죄가 없다는 것에 당당했던 사람. 갑작스럽게 몸을 움직이는데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상처 부위가 뻐근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어제의 통증에 비하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당신이 어떻게….”

“그건 내가 물어볼 말이죠. 55층 대사처 신부님께서 지상엔 왜 올라오셨어요? ‘13번째 제자들’1)이라도 돼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지상층 출신으로 지하도시에서 일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전 재산을 병원비로 날렸기 때문에 지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기억났다.

“묵비권? 마음대로 해요. 난 경찰도 아니고 사제도 아니니까.”

“내 상처, 당신이 한 겁니까?”

나는 칼에 찔렸던 부위를 움켜쥔 채 물었다.

“제가요? 요리사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해요.”

한구석에 놓인 옷가지를 바구니에 넣던 사토는 어이없다는 듯 내게 두 손을 펴 보였다. 그녀가 치우는 옷가지는 어제 내가 입고 있던 옷들이었다. 얼룩덜룩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옷들은 지난밤의 일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핏자국을 닦아내고 옷을 갈아입히는 것 정도는 요리사도 할 수 있지만요. 감사 인사는 미리 받아둘게요.”

“나는 칼에 찔린 채 쓰러졌는데, 어떻게….”

“지상에도 솜씨 좋은 의사는 있어요. 면허가 없어서 그렇지.”

“바늘과 실도 없이 봉합할 정도로 솜씨 좋은 의사가 있습니까?”

이번엔 사토가 입을 닫아버렸다. 대신 그녀는 내게 물을 한잔 따라주었다. 물을 보니 갑자기 타는 듯이 목이 말라서, 나는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마셨다. 물에서는 쇠 맛이 났다. 신부님 입맛엔 안 맞으시겠지만, 이래 봬도 다섯 번 정수한 물이거든요. 사토는 컵을 치우고 팔짱을 꼈다.

“왜 올라오셨는지는 몰라도, 신부님은 운이 좋으셨어요. 하느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나 봐. 내가 거길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신부님은 뼈와 살이 분리되고 계셨을 테니까요. 하수구의 까마귀들, 들어보셨죠?”

“…고맙습니다.”

“난 빚지고는 못 살아요. 병원비에 전 재산을 뜯겼지만, 그래도 광산으로 강제노역 끌려가는 것보다 훨씬 낫거든요. 성당에서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준 사람은 신부님이 처음이기도 했고. 게다가 잘생긴 신부님을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두기엔 아깝잖아요.”

“여기 있던 사람은 누굽니까. 정신이 없긴 했지만, 분명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 상처를 낫게 한 겁니까?”

사토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을 닫아버렸다. 메시아가 나타났다던 타우의 진지한 목소리가 침묵 위로 겹쳐졌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대답을 채근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누군가 방문을 열었다.

“뭐야, 아직 안 내보냈어?”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모든 옷이 군청색이었다. 주머니가 잔뜩 달린 베스트 아래에 온몸을 감은 어두운 상의와 폭이 좁은 조거팬츠를 입고 들어오는 모습은 누가 봐도 용병의 옷차림이었다. 속눈썹도, 눈동자도, 머리카락도 한없이 까만색인 데다 상의와 연결된 마스크를 눈 아래까지 끌어올린 그녀는 어둠에 썩 잘 어울렸다. 마스크를 턱 아래로 끌어내린 여자는 나를 한번 훑어보고는 사토에게로 고갤 돌렸다.

”쓸데없이 두더지랑 말을 섞고 있어. 대충 숨 쉬는 거 확인했으면 내보내면 되지.”

“저 신부님 아니었으면 나 지금 여기 없다니까, 자매님. 안 그래도 이제 가실 거야.”

“어이, 흑단. 어제 당신을 찌른 사람, 어떻게 생겼어.”

흑단이 나를 지칭하는 단어인지 헷갈렸으나 여자는 명확히 나를 쳐다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기억해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아마 최후의 심판이 떨어진다고 해도 잊지 못할 것이다. 내 뺨에 피를 닦아내던 비릿한 웃음.

“오른쪽 뺨에 끔찍한 흉터가 있습니다.”

“장두아로군. 그럴 줄 알았어. 이번에는 틀림없이 죽여 버린다. 개자식. 내 구역에 들어와서 칼질을 해? 광신도들까지 와 있는데 칼질 한 건 날 엿 먹이겠다는 뜻이지?”

“당신이 날 치료한 사람입니까?”

내 말에 이를 갈며 화를 내던 여자는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찌푸렸다. 웩, 두더지들 말투 토 나와. 사토는 얼른 그사이에 끼어들었다.

“신부님, 깨어나셨으면 얼른 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벌써 11시가 다 되어가거든요.”

11시라니. 6시에 묵상 기도를 올리고 8시 아침 미사에 참석한 뒤 10시까지 고해소로 출근해야 한다. 지금쯤이면 내가 미사에도 나오지 않고 출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알려졌을 것이다. 내 표정이 볼만했는지, 군청색 옷을 입은 여자가 큰 소리로 웃었다. 기분 나빠할 시간도 없이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나서야 했다.

방 밖은 또 다른 미로였다. 계단을 오르내리고 문을 두 번이나 열고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왼쪽, 오른쪽, 오른쪽으로 꺾으시면 가까워요. 사토 치즈루의 조언에 따라 나는 복잡한 골목을 빠져나와 내관문을 향해 달렸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한결같이 어두운 하수구의 길 위에서 내게 일어난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잠시 생각했지만, 당장 나를 앉혀놓고 쳐다볼 주임 신부의 얼굴이 떠올라 진득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나중에. 나중에 다시 물어보자. 사토 치즈루와 그 여자는 뭔가 알고 있을 것이다. 내 이마에 손을 얹고 상처를 막았던 누군가에 관해서. 어쩌면 10년을 찾아 헤맨 형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나는 몹시 초조해졌다.




1)13번째 제자들: 신성 가톨릭교회 출범 이후, 폐쇄적인 교회 상층부를 비판하며 이를 감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교회 내부 비밀 결사 단체.

~ 하는 걔 /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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