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 아파?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몰라서 루카스는 말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떼어내자 레오가 걱정을 담은 눈으로 루카스를 마주보고 있었다. 눈가에 남은 뜨거운 열기를 없애려 눈을 여러번 빠르게 깜빡이자 레오가 이마를 손을 대어 짚었다. 서늘한 체온에 억눌려 있던 숨이 그제야 트이는 것 같았다. 나지막히 내뱉은 한숨을 들은 레오가 조금 더 가깝게 루카스의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 방으로 갈래? 

- 잠깐 바람 쐬면 괜찮을거야.

= 같이 가자.

- 괜찮아. 혼자...



말릴 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제이슨이 깔고 앉아있던 담요를 낚아채듯 빼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뒤따라 일어난 루카스가 사람들 사이를 조심스레 지나 거실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들어오는 애나와 마주쳤다. 



= 어디 가?

- 아, 잠깐 바람 좀 쐬러

= 어. 레오도 같이?

= 내년이 되기 전에 올거야. 



농담인 듯 가볍게 대답한 레오가 등 뒤에서 감싸듯 루카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내년이 되기 전에. 지금이 아니면 하지 못할 대답에 루카스가 작게 웃음소리를 내자 레오가 손바닥으로 루카스의 뺨을 문질렀다. 어느새 따뜻해진 손바닥의 온도에 기분이 좋아졌다.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는 루카스와 레오를 번갈아 쳐다본 애나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집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타박.타박. 발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슬리퍼를 신고 나오는게 아니었다는 후회가 됐다. 레오가 깨끗하게 씻어준 발에 다시 작은 모래 알갱이가 달라붙어 까칠한 느낌이 들었다. 어깨를 감싸고 있는 레오의 옆모습을 슬쩍 쳐다보자 고개를 살짝 기울여 눈을 맞춘 레오가 이마를 살짝 맞부딪쳐왔다. 



= 기분은 좀 괜찮아?

- 나중에 발 다시 씻어줘.

= 응? 



고개를 숙여 다리를 내려다본 루카스가 발끝을 세워 툭툭. 바닥을 두들겼다. 슬리퍼 사이로 들어와 발바닥에 불편하게 달라붙어 있던 모래가 빠져나가는게 느껴졌다. 발가락을 괜히 여러번 꼼지락거리던 루카스가 고개를 들자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레오의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을 수 없을때의 표정이다. 루카스가 볼에 바람을 넣어 입술을 삐죽 내밀자 레오가 재빨리 그 입술에 뽀뽀를 하고 웃어버렸다.



= 알았어. 내가 또 씻어줄게.

- 레오.

= 어. 춥지는 않아? 담요 줄까?



레오가 팔에 걸고 있던 담요를 들어보이며 묻자 루카스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담요보다 따뜻한 레오의 체온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본 루카스는 어둠의 그림자에 용기를 얻어 레오의 품안으로 파고들어 껴안았다. 천천히, 등 뒤로 둘러진 레오의 팔이 루카스를 감싸자 루카스도 레오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 이러면 따뜻해.

= 아, 우리 왜 더운 나라에 있는거야.

  추운 나라에 가서 하루종일 이러고 있을 수 있는데.

- 나중에 영국 가면....거긴 늘 추우니까..



루카스는 아무렇지 않게 미래의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어서 가슴까지 뻐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느라 떨리는 가슴 위로 레오가 조금 더 몸을 붙이며 루카스를 껴안아주었다. 따뜻해...



= 돌아가면, 하루 종일 붙어있을거야.

  화장실 갈때도 같이 가야해.

- 응.

= 어?

- 같이...



레오의 말이 장난이라는 건 알았다. 그래도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을 꼭 전해주고 싶어서 고개를 들고 대답하자 눈이 마주친 레오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레오와 코끝이 닿는 순간 눈을 감았다. 보지 않아도 보이는 가늘어진 눈꼬리를 늘이며 볼록해진 광대로 얼굴을 붙여온 레오의 입술이 루카스의 아랫입술에 닿았다. 아! 아무리 밤이라도 그래도 숙소가 바로 앞인데...놀란 마음에 눈을 뜬 루카스가 레오를 밀어내려하자 어느새 레오의 두 손이 루카스의 얼굴을 붙잡았다. 볼을 누르는 손바닥의 압력에 얼굴이 구겨지며 입술이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그대로 여러번 입술에 촉촉한 소리를 내며 뽀뽀를 계속하는 레오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 레오, 생일이 언제야?

= 어?



눌려진 얼굴 때문에 발음이 엉망으로 들렸다. 생일. 레오의 손을 떼어내며 다시 말하자 레오가 대답을 생각하듯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루카스를 어깨를 잡았다. 



= 7월. 7월 23일.

  내가 얘기 안해줬었어?

- 응.

= 아직 멀어서 그랬나봐. 미안. 



다시 레오의 가벼운 키스가 이어졌다. 귀를 덮고 있는 두 손 때문에 얼굴 여기저기에 닿았다 떨어지는 레오의 키스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가만히 눈을 뜬 채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레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 그제야 레오가 키스를 멈추었다.



= 왕아-

- 나는? 내 ..생일은 안 물어?

= 당연히 알지. 2월 18일. 

  그래도 여기서 생일 같이 보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



어떻게 알아? 난 얘기해 준 적이 없는데, 너는 어떻게 알고 있어? 놀란 표정의 루카스가 레오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어떻게 알아?



= 전에 국립공원 갔을때, 여권 봤었어.

- 내 여권?

= 체크인할때.



아...그때, 리셉션에서 체크인할때 신분증 확인을 했었다. 레오가 여권을 받아서 리셉션에 전해주고 체크인을 했었는데, 그때 봤었구나. 나도 그때 몰래 알아봐둘 걸.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루카스의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레오의 얼굴이 조금 더 굳어졌다.



= 몰래 봐서 기분 나빠?

- 아니.

= 그런데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아.

  내가 뭐...실수했어?



실수가 아니라..루카스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레오의 손목을 잡았다. 그대로 레오의 손을 잡아 이끌며 성큼성큼 걷기 시작한 루카스는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지금의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서 이야기해야 할까. 그렇게 한참을 걸어 낮에 함께 갔었던 호숫가에 닿았다. 잔잔한 바람을 따라 검푸른 빛의 파도가 구름 사이로 모습을 반쯤 드러낸 달빛을 받아 부서지고 있었다. 천천히 한번, 두번, 세번, 반복해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잡고 있던 레오의 손목을 놓고 호수를 바라보았다. 점점 더 밝아지는 달빛 아래의 호수는 마치 떠오르던 태양을 함께 보았던 그날의 아침을 기억나게 했다. 그때도 지금도, 함께여서 좋았다. 루카스의 옆에서 함께 기다려주는 레오가 좋았다. 고개를 숙이자 나란히 옆으로 서있는 레오의 발이 보였다. 색이 바랜 낡은 가죽스트랩의 슬리퍼 아래로 보이는 갈색 발등 옆에 자잘한 모래가 잔뜩 붙어있었다. 몸을 구부리고 앉아 발등을 손으로 털어주었다. 따뜻한 루카스의 손의 온기를 순식간에 빼앗아가는 차가운 발 위로 조심히 손바닥을 올리자 숙이고 있는 머리 위로 레오의 손길이 느껴졌다. 마치, 루카스의 마음이 들리는 것처럼 레오는 천천히 여러번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한동안 머리 위에 머물던 손길이 멈추자 루카스는 고개를 들어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웃는 얼굴로 한쪽 눈을 찡긋하며 윙크한 레오는 가지고 있던 담요를 바닥에 펼치고는 그대로 누워버렸다. 바닥에 누워서 손을 뻗어 루카스의 손을 잡은 레오가 옆자리를 두드렸다. 이리 와서 누워봐. 별이 보여. 



루카스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반짝. 달빛을 받아 빛나는 것만 같았다. 루카스도 레오의 옆으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담요 위에 나란히 놓인 손끝에 레오의 손끝이 닿았다. 손등 위로 올라온 레오의 손가락이 천천히 루카스의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끼고 들어왔다. 단단히 잡은 손을 들어올린 레오가 루카스의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따뜻한 입술이 부드럽게 손가락 마디마디를 스쳐지나갔다. 



움직이지 않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루카스가 몸을 조금 돌려 레오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레오가 잡고있던 루카스의 손바닥을 장난치듯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깨물린 손바닥 위로 레오의 혀끝이 슬쩍 스치고 지나갔다. 간지러워.



- 새해 소원 빌자.

= 좋아.



고개를 끄덕인 레오가 루카스를 마주보며 몸을 틀어 누웠다. 부드러운 모래 바닥에 어깨가 눌려서 불편했지만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깍지 낀 손가락에 조금 더 힘을 주고 잡자 레오의 손이 조금 더 깊게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 네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어.

= 어...? 고마워. 



엉뚱한 소원이라는 듯 당황한 레오의 표정에 웃음이 나왔다. 정말이야, 내 소원이야. 루카스의 미소가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오는 루카스의 작은 웃음에도 늘 환하게 웃었다. 지금도, 당황스러움이 스쳐지나간 얼굴에 어느새 따뜻한 웃음이 머무르고 있었다.



- 지금이 아니라.. 다음 생일에. 또 그 다음 해에도. 또..그 다음도.

= 딱 100번만 축하해줘, 그럼.



백번.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나 오래? 내년 소원은 무병장수를 빌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100번. 좋아.



= 생일 파티는 크게 해줘.

- 어...?

= 축하해 준다며. 엄청나게 큰 파티가 하고 싶어.

- 어...알았어.



성대한 파티라니. 그럼 초대하는 사람만 수십명에 펍 같은 곳을 빌려서 해야 하나? 음식 준비는 어떻게 하는거지? 생일 파티는커녕 그냥 파티에도 별로 가본 적이 없는 루카스가 당황해서 눈만 깜빡이는 사이 입술을 꾹 깨물고 웃음을 참던 레오가 결국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파도 소리를 덮을 만큼 기분 좋은 웃음 소리에 루카스도 영문을 알지 못하고 따라 웃었다. 왜 웃어.



= 둘이서만 하는, 엄청나게 큰 파티야.

- 아...

= 대신, 네 생일은 작게 하자.

- 안해도 돼. 나는. 생일 별로 상관없어.

=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는 작은 파티.

   


그게 뭐야. 레오가 하는 것처럼 미간을 찡그리자 레오는 루카스가 하던 것처럼 손끝으로 주름을 펴듯 꾹꾹 눌러주었다. 장난스레 얼굴을 더 구겨서 눈을 감자 레오의 웃는 얼굴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신 뺨을 문지르는 다정한 손길에 조금씩 얼굴에 따뜻하게 열이 올랐다. 손이 닿는대로 퍼지는 미소를 레오가 못 볼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눈을 뜨자 어느새 눈앞에 와있는 잘생긴 얼굴과 마주쳤다.



- 미안해.

= 뭐가?

- 나는 늘 너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답답할 만큼 아는게 없어서..

  너는 다 아는데, 나는 모르는 게 많아서..

= 왕아, 이리 와 봐.



레오는 두 팔을 벌리고는 루카스를 품에 끌어안았다. 여기가 환한 달빛 아래의 호숫가가 아니라 마치 루카스의 침대 위인 것처럼 익숙하게 몸이 닿았다. 한쪽 팔을 레오의 허리에 두르고, 다리가 자연스럽게 엇갈리고. 가슴에 얼굴을 기대면 들리는 레오의 숨소리가 좋았다. 



= 천천히 하자. 많이 하자.

- 응.

= 목적어가 뭔지 알고 그렇게 빨리 대답해.

- 어? 



목적어라니? 여기서 나올 목적어가 다른게 뭐가 있어. 알 수 없는 말에 루카스가 고개를 들자 기다렸다는 듯 레오의 입술이 이마에 닿고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자 이번에는 코끝을 살짝 깨물렸다. 



- 너가 생각하는 목적어가 뭔데?

= 먼저 말해봐. 뭔지 알고 대답한거야?

-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자는 거. 아니야?

= 음...그렇네. 그것도 맞네.



마치 정답이 아니었다는 듯 웃어버리는 레오의 얼굴이 조금 얄미워보였다. 보조개를 손끝으로 꾹 누르자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풍선도 아니고, 더 볼록해지는 반대편 얼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그래서, 원래 목적어가 뭔데.



= 답은 하나지. 당연히.

- 그러니까, 너가 생각한 답은 뭐..

= 섹스. 



이상하다. 갑자기 귀가 멍했다. 뭐?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놀란 루카스의 눈이 천천히 커지고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조금전까지 들려오던 파도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사라졌다. 레오의 얼굴이 점점 크게 보여서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레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거 같은데..



= 하하. 농담이야. 이것 봐, 얼굴 왜 이렇게 빨개졌어.

- 내가...아니, 우리가...

= 천천히, 많이 알아가자는 애기야. 그러니까.

- 그게 아닌것 같은데...



더 물어보지 말라는 듯 레오가 루카스의 입술을 모조리 입안으로 삼키듯 넣어 빨아당겼다. 장난스럽지만 조금 강하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놓은 레오의 혀가 루카스의 입술을 가르고 뜨거운 열기로 입안으로 들어왔다. 잇몸을 핥고 지나간 레오의 혀가 긴장한채 머뭇거리는 루카스의 혀를 찾아 갑자기 강하게 빨아들였다. 놀라는 루카스의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레오의 손이 부드럽게 뜨거워진 뺨을 감싸안았다. 간지럽히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혀의 움직임에 저절로 목안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와 파도소리를 다시 덮었다. 



언제 11시 59분 59초가 지나 새해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시간의 흐름이라고 생각한 한해의 마지막을 보내는 것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특별해지는 기분이었다. 레오와 함께 누워 별을 보고 있던 순간이었을 수도 있고, 새해 소원을 빌었던 순간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이렇게 몸을 맞대고 키스를 나누고 있었던 때였는지도 모르겠다. 



루카스와 레오의 만남은 과거가 되고, 함께하는 미래를 생각하는 새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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