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리거 요소 있습니다.

* 성 학대 요소 있습니다. 불편하신 분들은 스킵해주세요.







미완의 교정

W. 에뚜왈






/ 56. 

순간은 지나가도록 약속되어 있고, 지나간 모든 것들은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전정국은 지나가 버린 그 시절의 모든 것들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싶었다. 그가 시간의 흐름 속으로 떠내려가지 않도록, 그가 남기고 간 모든 순간의 장면들 속을 언제까지나 영원히 머무르고 싶었다.


"정국아."


너무나도 고귀하여 어렵고도 또한 드물었던 내 세계의 김석진. 


"좋아했어, 너를."


그 모든 것이 고귀한 당신. 


"그리고 지금도 나는,"


나를 다시 시작되게 하는 김석진. 


"너를 좋아해, 정국아."


내가 찬란히 사랑해 온 김석진.


"좋아해요, 선생님."


그 모든 것이 고귀한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좋아했어요, 선생님."


고요히 울리는 당신의 목소리 한 음 한 음. 당신에게서 닿는 손길 하나하나. 당신의 온도가 남기는 파편의 조각조각들까지. 언제까지나 영원히 머물고 싶었던 그 모든 것들이 다시는 찰나의 순간이 되어 휩쓸려가지 않기를 처절하도록 갈망했다. 


이 흑백의 세계가 내재하는 그 모든 불우와 결핍들이 이 어두컴컴한 미로 속을 깊이 없이 메운다 할지라도. 이 칠흑같이 어두운 세계가 쏟아내는 절망과 뒤틀림이 끝없이 저를 추격한다 할지라도. 오직 당신만이 뿌려내는 그 온기의 조각들 틈으로 도달할 수만 있다면. 당신만이 내어준 그 찬란한 색채 속으로 그저, 온몸을 내던져 물들여지고 싶었다.

 

"김석진."


여전히 컴컴한 미로 속을 헤매는 열네 살의 소년을 덜컥, 눈부신 빛줄기 아래로 이끌어내는 존재. 언제까지나 영원히 머물고 싶었던 김석진을 마침내 되찾은 열아홉 살의 전정국은, 


"이제 다시는 못 도망쳐요."


그를 처절하도록 꽉 끌어안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내가 안 놔줄 거니까."


그의 내면으로 부서져왔다. 









/ 57. 

너를 부를 수 있는 말이 내게는 없었다. 그것은 우리 사이를 명확히 정의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서다. 그래서 나는 너를 그저 '그 애'라 칭했다.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은, 그러한 불분명의 거리감으로. 딱 그 정도의 미완성으로. 그러나 지나치게 풋내가 났던 스무 살의 김석진은 돌연 눈앞에 나타난 폭우에 흠뻑 빠져들듯, 그 애의 세계를 기꺼이 머금고 만다. 미성숙한 어른의 평범했던 일상을 돌연 이탈시키며, 동시에 영혼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그 애. 열네 살의 전정국. 그 애는 갑작스럽게 쏟아져 내리는 봄비처럼 그 아득한 샴푸향과 함께 김석진 안으로 스러져 왔다.


열아홉 살의 전정국. 스물다섯 살의 김석진. 사회가 규정해 버린 어른의 나이. 그러나 여전히 그 애의 세계 속을 더듬거리고 방황하는 스물다섯 살의 김석진. 미완의 어른. 


그러나 그 애를 사랑해 왔던 김석진. 내가 사랑해 온 전정국. 내가 더 사랑하여도 되는 그 애.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이 곧,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 58. 

시간이란 건 지나가도록 약속되어 있고, 그리하여 미래는 현재를 향해 달려온다. 늘 그렇듯 오늘도 어김없이 맞이하는 월요일 아침이었지만, 뱃속에 깃털 하나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괜스레 간지러운 감상이 일었다. 왠지 모르게 특별하게 느껴지는 그러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야, 김석진. 내가 그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긴 하냐? 어엉?"

"미안하다고오. 주말 내내 사과했잖아."

"전화도 안 받고 말이야. 어? 그날 도대체 집에는 어떻게 간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따로 출근할 걸 그랬다. 만나자마자 민윤기가 이렇게 잔소리를 늘여놓을 줄 알았다면 말이다. 주말 내내 연락을 하는 둥 마는 둥 답답하게 굴었던 탓에 월요일 아침 출근길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욕 처먹는 중이었다. 


"너한테 모르는 번호로도 전화 몇 통 가지 않았냐?"

"응, 맞아. 환상의 듀엣 마냥 너랑 번갈아가면서 울리던데."

"그거 김남준 선생님 번호임."


뭐? 깜짝 놀라 우뚝 걸음을 멈추자, 왜? 알려주면 안 되는 거? 하며 민윤기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귀를 후비적댔다. 그제서야 그날 저녁 고깃집에서 김남준 선생님과의 일이 퍼뜩 떠오르는 거다. 모든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아니었지만, 꽤나 민폐를 끼친 것만은 분명했다. 차라리 아예 깔끔하게 기억이 짤렸으면 좋았을 텐데. 어설프게 기억나는 게 더 쪽팔려서 오늘 하루 종일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하나, 둘! 하나, 둘!"


운동장에서는 오늘도 어김없이 김태형 구령 소리에 맞춰 야구부 학생들이 아침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들 틈에서도 단연코 눈에 띄는 그 애를 이제는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응당 그래왔듯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좇게 만드는 전정국을 말이다. 애써 외면해 왔던 그 감정의 형체를 깨달음과 동시에 결국 팽창하여 터져버린 마음을 이제 더는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애써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는 계속해서 그 애를 향해 눈동자를 갖다 붙인다. 


사실 김석진은 주말 내내 전정국에게 과부하가 걸려 있었다. 안팎에서 난리였다. 김석진의 내면 속을 덜컥 침범해온 그 애는, 이미 김석진의 영혼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걸로도 모자라, 그 주변의 일상마저도 거침없이 침략해왔다. 머릿속에서 그 애를 환기시키고자 괜히 핸드폰 앱을 켜서 포털 사이트에라도 들어가면, 전정국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내건 뉴스 기사가 메인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 경기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세일고는 주말 내내 매스컴 보도를 탔고,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은 역전의 주인공은 역시나 전정국이었다. 


결국 또 전정국의 물결 속이었다. 그 애를 좋아하게 되어버린 건, 이토록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 심연 속으로 온몸을 풍덩 빠뜨려야만 하는 두려움을 수반하는 걸까. 혹시 그 애가 이 보통의 일상 속을 평생에 걸쳐 침범해 오리라 생각하면, 미성숙한 어른은 또다시 지레 겁을 먹고 돌연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잘못된 어른은 또다시 그러한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 것일지도. 미래의 두려움과, 불명확한 미지수에 금세 가슴 한켠이 찌르르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막 첫사랑을 시작해버린 서툰 어른은 또다시 명확히 답을 내리지 못한 채 괜스레 바쁜 척 걸음을 옮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 애의 시선이 오롯이 저만을 바라봐 주길 바라며.









/ 59.

야, 전정국.      오전 02:13


왜 답장 안 해. 내 연락 씹냐??      오전 06:50


너 정말 나랑 끝낼 거야?       오전 07:35


한 글자 한 글자를 마치 쓰레기를 씹어먹는 심정으로 읽어내린 뒤 가차 없이 지워 버린다. 주말 내내 난리였던 세일고 우승 관련 기사에 배알이 꼴렸는지 김현수는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미친듯이 연락을 해댔다. 아침 훈련을 마치고 부실에서 막 샤워를 끝낸 전정국 머리카락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핸드폰보다 더 정성스럽게 바라보다 아예 전원 버튼을 눌러 꺼버린다. 


"미친 새끼야... 너, 너, 정상 아니야." 


마치 비정상적인 존재를 맞닥뜨린 사람처럼 저를 보던 그 괴이한 눈빛. 저를 향했던 그 모든 환멸과 비난들. 그 모든 부정과 뒤틀림들. 정상의 궤적을 벗어나 뒤틀리고 망가졌던 그 시절의 모든 것들. 불우하고 상실하는 그 모든 장애와 결함들. 남들과는 다른 이 세계의 결핍과 불균등함. 내가 이상해? 내가 이상한 거야?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정, 정국아..흐으, 아앗!" 


정국아. 정국아. 사랑해. 정국아. 정국아. 사랑해. 정국아. 엄마가 사랑해. 정국아. 흐느끼며 맞부딪쳤던 살덩이의 더러운 소리. 맹렬히 고막을 파고드는 그 여자의 울음소리. 뇌 속을 증식하며 좀먹어오는 극심한 고통과 불쾌한 역겨움. 그만해. 제발 그만둬. 나를 내버려 둬. 나를 만지지 마. 그만둬. 제발. 그만해.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 정국아." 


 과거의 모든 것들을 살해하고 새롭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건 거짓과 위선으로 둘러싸인 어른들한테나 가능한 것이었다. 몇 년째 서로 얼굴도 안 보고 살면서 여전히 애정 어린 부부인 척 위선적인 가식을 떨어대는 당신들한테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도대체 당신들은 뭔데. 뭔데 날 낳았어. 왜. 그딴 게 뭐라고. 이 지옥 같은 세계를 줄 거면서 도대체 왜. 어째서. 


"전정국."


깜빡. 깜빡. 정처 없이 뒤흔들리는 속내만큼이나 머릿속에서 그 모든 것들이 서서히 점멸한다. 전정국은 무시한 채 두 눈을 질끈 감는다. 그렇게 침묵하고 방관한다. 아프고 괴로운 상처는 모두 잊어버리고 그 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하도록 발버둥 친다. 고통스러웠던 모든 기억은 그렇게 묵살하고 무시한다. 무시해. 잊어버려. 침묵해. 떠올리지 마. 괴물 같은 어두컴컴한 형상이 머릿속을 좀먹으며 괴롭혀올 때마다 사력을 다해 벗어난다. 


"전정국!"


여전히 채 마르지 않은 젖은 머리를 한 채로 전정국은 제 앞에 있는 정호석 코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다시 한번 묻는 그의 격앙된 목소리에 곧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린다.


"너 정신 빠짝 차려야 된다. 어엉? 아마 이번 주 중에 프로 구단에서 너 훈련하는 거 보러 올 거야. 무슨 뜻인지 알지, 내 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부실 밖 운동장이었다. 


"늘 하던 대로만 하면 돼. 긴장 타지 말고, 짜식아."

"....네, 코치님."

"감독님께서도 1차 지명은 별 무리 없을 거래. 그냥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 정국아. 알긋냐."

"네."


얼굴 줘 터진 것부터 빨리 나아야겠다, 임마. 그가 씨익 웃어 보이며 전정국 어깨를 두어 번 두들기더니 곧 자리를 벗어났다. 전정국은 여전히 넋을 놓은 채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 있다. 말없이 왼쪽 손목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박지민과 김태형이 교실로 올라가자며 곁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야, 전정국. 너 그날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 안 해줬다?"

"무슨 질문?"


교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박지민 한껏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당최 뭔 주제의 대화인지 모르겠는 김태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 너 진짜 대답 안 하지? 어어? 아예 모른 척 침묵을 일관하는 전정국 등에 업히다시피 매달린 박지민 한사코 대답을 들어야겠다며 아예 목을 조르는 시늉까지 선보였다. 대충 뭔 상황인지 파악 완료한 김태형도 박지민 편에 붙어먹더니 전정국 허리에 간지럼을 태워가며 협박하기에 이른다. 


"빨리 말 안 해?"

"빨리 말해라아아, 전정구우우욱."

"아, 쫌."

"이래도?? 이래도???"


다른 교실에서는 아침 조례가 한창인 시각이었던지라 복도 가득 세 사람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제는 아예 전정국 양팔을 뒤에서 포박한 김태형과 그 앞에서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한 박지민은 환상의 복식조가 되어 그를 고문하기 시작했다.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


"내가 중학생 때, 과외 선생님이었어."


정확히는 열네 살 때. 그렇게 말하며 전정국은 본인도 모르게 왼쪽 손목에 찬 밴드를 괜히 한 번 고쳐 맨다. 김태형은 그 장면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러고는 더는 묻지 않겠다는 듯 입을 일자로 꾸욱 다물었다. 반면에 박지민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질문 폭격을 이어나간다. 


"어쩐지! 예전부터 널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더라고? 뭐야, 근데 갑자기 다시 만난 거야?"

"어."

"진짜 신기하다, 우와. 엄청난 우연이네. 찐 쌤 그때도 잘생겼었냐?"


그럼 찐 쌤 그때는 몇 살이었는데? 뭐? 스무 살? 이야, 대박이네.  그럼 지금 스물다섯 살인 거? 어른이다, 어른. 우와아. 박지민 입에서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제법 소란스러운 세 사람의 분위기가 꽤나 오래 유지되는가 싶더니,


"아침부터 기운들 좋구나."

"헉, 영어 쌤."


화들짝 놀라 바라본 곳에 김남준 선생님이 있었다. 무심코 그냥 지나쳐 걸어온 2학년 7반 교실 앞이었다. 전정국 눈이 조용히 번뜩이며 그를 향한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을까. 


"지금 다른 반들은 조례 시간이니까, 소란 피우지 말고 얼른 들어들 가라."

"예에엡. 죄송함돠."


박지민 꾸벅 인사하며 예의 그 미워할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후다닥 두 사람을 이끌고 3층 계단으로 몸을 올렸다. 전정국은 흘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다. 그와 눈이 마주친다. 


"........"

"........"


알 수 없는 더러운 기분에 휩싸인다. 









/ 60.

김석진 떨리는 마음으로 4교시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3학년 3반 영어 수업이 있기 때문이다. 조례 시간에는 늦장을 부리고 만 세 사람 탓에 복도에서 스치듯 마주친 게 다였다. 솔직히 말해서, 하루 종일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그 애를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마치 사랑니를 시름시름 앓는 것마냥 첫사랑에 풍덩 빠져버린 여고생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뱃속이 울렁거리면서 그 기분이 막 싫지는 않은데, 왠지 모르게 무섭고 두려운 감정의 다채로움 속이다. 


".....선생님."

"........"

"김석진 선생님."

"네?!"


심하게 정신을 놨나 보다. 제 이름이 두어 번 정도 불리고 나서야 인지했다. 뒤늦게나마 퍼뜩 정신을 차린다. 제 이름이 불린 그 시작점을 바라보니, 교생 연구실 문 앞에 김남준이 서 있었다. 


"잠깐 볼까요?"


문 바깥을 가리키며 그가 웃어 보였다. 아, 네! 서둘러 대답하고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다른 교실은 한창 수업 중인 시각이었다. 교실 창문 너머로 간간이 울리는 말소리가 복도를 먹먹히 채웠다. 어느덧 5월의 중순이었고, 계절은 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뭐 마실래? 라떼랑 아메리카노 있는데."

"으음. 저는 라떼요."


이윽고 그가 건네준 라떼 음료를 손에 고이 쥐고는 운동장 스탠드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때마침 체육 시간이었는지 3학년 3반 학생들이 신나게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김석진 시선은 또다시 그 애를 향한다. 


"걱정돼서 전화 엄청 했었는데, 안 받더라."

"아... 집에 와서 그냥 잠들어 버렸어요. 죄송해요."


거짓말이다. 전정국과의 일로 잠 한숨 이루지 못했다. 


"뭐가 죄송해. 넌 정말 여전하네, 김석진."

"네?"

"내 흑심 가득한 호의를 내내 성실히도 거절하는 거."

"....예?"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말들에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남준은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늘 그랬듯, 손을 뻗어 다감히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나는 너 다시 봐서 반가워 죽겠는데."

".....저도, 저도 엄청 반갑고 기뻤어요..!"

"그럼 조금만 편하게 대해주면 안 될까?"


내내 올곧이 저를 향하는 시선에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져 고개를 푸욱 떨군다. 네, 그럴게요. 웅얼거리듯 대답하자, 그제서야 김남준 시원스럽게 두 눈을 휘어뜨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정국이 중학생 때 과외했었다며."

"네? 그걸 어떻게..."

"애들이 하는 얘기 들었어."

"아...."


그의 입에서 나온 전정국 세 글자에 퍼뜩 반응해버리고 만다. 번쩍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김석진을 향해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학생이랑은 작은 소문이라도 안 나는 게 좋아, 석진아."

"아...."

"특히 교생 실습 중에는 더더욱."


그대로 평가로 들어가니까 말야. 차분한 목소리로 그가 뒷말을 덧붙였다. 무슨 뜻인지 알지? 그의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면서,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의 말이 전부 맞았다. 


여전히 전정국은 열아홉 살의 미성년이었다. 그리고 저 또한 완연한 어른은 아니었다. 









/ 61.

너를 부를 수 있는 말이 내게는 없었다. 그것은 우리 사이를 명확히 정의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서다. 그래서 나는 너를 그저 '그 애'라 칭했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그러한 불분명의 거리감으로. 딱 그 정도의 미완성으로. 


그러나 그 애를 한순간도 빠짐없이 사랑해 왔던 김석진. 너를 사랑해 온 미성숙한 어른. 전정국을 사랑해 버린 김석진. 너를 부르는 이름이 곧, 사무치도록 들끓는 애정이 되어 버리고 만 미완의 어른. 


"....정국아."


일부러 하루 종일 피해 다녔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전정국은 교문 앞에 서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그림자마저 몰려온 어둠에 잡아먹힌 뒤였다.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고도 몇 시간이나 훌쩍 지난 시각이었다. 일부러 더디게 남은 업무를 마무리 짓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애는 그곳에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어른의 거짓이 더는 통하지 않는 그 눈으로. 


"또 도망치게요?"

"....그, 그런 거 아니야."


거짓말. 어른은 또다시 거짓말을 한다. 그럴 줄 빤히 알았다는 듯, 전정국은 소리 없이 작은 숨을 내쉰다. 


"얘기 좀 해요."

"....여기서 말고."

"선생님 집으로 갈래요?"

"아니... 거기도 말고."


낮에 김남준 선생님이 했던 충고가 머릿속을 왱왱 맴돌았다. 교생 실습 중에는 괜한 구설수에 오르지 말라는 말이 하루 종일 저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나 사실 김석진을 돌연 머뭇거리게 만든 건, 비단 그의 조언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직 평범함을 갈구해 왔던 김석진의 인생을 덜컥 집어삼켜오는 전정국의 폭발성과 그 애의 잠재성이 무서워서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질량으로 팽창하여 제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가 터뜨려 버릴지 모를 그 애의 무한함이 두려웠다. 그리하여 미성숙한 어른은 또다시 지레 겁을 먹고 돌연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이다. 잘못된 어른은 또다시 그러한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 것일지도. 미래의 두려움과, 불명확한 미지수에. 


"그럼 우리 집으로 가요."


전정국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의 제안을 거절할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그대로 그 애의 집까지 함께 걸었다. 마치 그날처럼. 결코 맞닿을 리 없는 삶을 살아온 전정국과 김석진이 맞물리며, 황혼의 시간 속으로 향해 쏟아져 내렸던 그날처럼. 


"정국아."


그때처럼 그 애의 이름을 불렀으나, 전정국은 대답도, 걸음도 멈추지 않는다. 그 애의 등 뒤로 황혼의 물감이 잔뜩 번졌던 그날의 정경을 문득 떠올린다. 그 애의 시선은 늘 빗겨들지 않고 곧장 마주해 오곤 했다. 모든 것을 꿰뚫어버릴 것 같은 눈으로. 어른의 거짓을 무력화시키는 그 눈으로. 결핍되고 겁 많은 어른이 일부러 한 발 뒤로 물러나면, 그 빈 발자국 위로 본인의 운동화 앞코를 거침없이 내딛었던 그 애. 


"네가 무서워, 나는."


그 애의 폭발성과 그 애의 솔직함과 그 애의 두려움. 그 애의 결핍과 그 애의 망가진 세계를 이용하여 애정을 갈구했던 미성숙한 어른. 철저하게도 외롭게 태어난 김석진.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육에게도 고민 없이 버려진 김석진. 오직 평범과 안정 혹은 안전만을 바라왔던 김석진. 가장 보통의 것들이 가장 위대했던 김석진. 그러나 누구보다도 사랑받길 원했던 김석진. 누군가를 사랑한 적도, 사랑받아본 적도 없는 결핍한 어른은 평범하지 않은 그 애의 삶을 이용하여 추악한 애정을 갈구하며, 그 애를 갈망해왔다. 아무한테도 사랑받지 못해서, 아무한테도 사랑 주는 법을 몰랐던 불우한 어른은, 도무지 그 애를 적당히 사랑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다음부터 우리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미성숙한 어른은 그 애를 향해 되려 묻는다. 우리의 관계는 뭘까. 우리는 어떻게 불려져야 하는 걸까. 명확히 답을 내릴 수 없는 미로 속을 헤맨다. 애정의 기운과 늘 동반하는 죄책감의 무게를 별수 없이 덜어내며, 그 애가 갈구하는 애정을 무기 삼아 타당성을 부여하며, 습관처럼 본심을 머뭇거리며. 잘못된 어른은 또다시 휩쓸리는 척, 못 이기는 척. 그 애가 선뜻 정의 내려주길 바라며.


"우리 관계는... 뭐야?"


두 손가락을 마구 꼼지락거리며 그 애를 향해 묻는다. 나를 사랑해 줘. 나를 원해 줘. 너 또한 나를 사랑이라고 불러 줘. 나를, 나를. 너만은 나를,


"선생님."


온 감각을 사로잡는 그러한 부름과 함께 그 애의 시선이 집어삼켜 먹을 것처럼 얼굴을 훑는다. 결핍만을 탐구하며 살아온 미완성의 존재를 순식간에 헐벗은 나체로 만들어 버리는 그 애. 그 애의 눈. 그 흑백의 눈. 


"그게 뭐라도 돼요?"


전정국은 여전히 왼쪽 손목에 찬 밴드를 무의식적으로 매만진다. 여전히 열네 살의 전정국 속을 헤맨다. 어두컴컴한 미로 속을 아무런 이정표도 없이 무책임하게. 


"그딴 거 하고 싶지 않은데요."

".....뭐?"

"관계를 정의 내리는 거."


그 흑백의 눈이 집어삼킬 것처럼 저를 향하고.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저 눈. 저를 올곧이 바라보는 저 눈. 속을 알 수 없는 저 무서운 눈. 그 끝을 알 수 없는 흑백의 눈. 


"아무 의미 없는 거잖아요, 그런 거."


그 애의 목소리는 그 어떤 감정 하나 없이 서늘했다. 그래서 소름이 끼쳐 오르고 말았다. 


"그, 그게 무슨..."


그 애. 전정국. 뒤틀린 그 애의 세계. 무겁고 어두운 그 미로 속. 깊이 없이 존재하던 그 애의 어둠. 흑백의 세계. 또다시 조우하는 그 애의 뒤틀림. 열네 살의 그 애. 열아홉 살의 전정국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그 아이. 


그 모든 감각들이 마치 올가미처럼 제 목을 조여온다. 갑작스럽게 숨이 턱 막히며 시야가 아찔해진다. 전정국. 그 애. 흑백의 눈. 열네 살. 그 애. 전정국. 그 애. 돈 봉투. 그 여자. 그 애의 엄마. 그 애의 방에서 떡치고 있던 모자母子.


"전정국!!"


그때였다. 


"전정국."


소름 끼치는 감각과 함께 덜컥 몰아쳐온 그 낯선 목소리의 끝에는,


".....김현수."


또다시 어두컴컴한 그 애의 미로 속이었다. 









未完의 矯正.












* 정국이는 아직도 열네 살 트라우마 속에서 갇혀 있고, 그 때의 불우했던 기억으로 인해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는 것 같아요. 아마 '부부'라는 정해진 틀 안에서 뒤틀린 삶을 살아온 부모에 대한 극렬한 반감일지도 모르겠어요. 사족이 넘나 길어서 이번 편은 실패.... 흑흑


* * 포타를 접고 쉬는 동안 미완결로 마무리 지을 뻔했던 미완이...(급고백 제가 M 편을 데려올 수 있었던 건 미완이를 기다려주신 독자님들 덕분입니다ㅠㅠ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랜만에 집필해서 그런지 이래저래 아쉬운 M 편... 다음편부터는 좀 더 이입 씨게 해서 더 잘 데리고 오겠습니다. 싸랑합니다. 하뚜하뚜(수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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