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우 X 스콧 랭

-대학AU


The End of the World



겨울은 혹독하리만치 추웠다. 그러나 그 추운 날씨에도 나는 산책로를 걸었다. 학교에 이렇게 사람이 없는 건 드문 일이었고, 나는 그렇게 조용한 시간들이 자꾸만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까웠다. 바람이 부는 소리와 나뭇가지가 서로를 때리는 소리밖에 없는 호숫가에서 담배를 몇 대나 연달아 태우곤 했다. 나는 온전히 혼자일 수 있었다.


"지미!"


그가 있지 않았다면.


"안녕하세요."


그의 모습은 간혹 기꺼웠고 대개는 성가셨다. 대화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으나 항상 웃고 있다는 점이 나를 들끓게 만들었다. 그의 해사한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질투의 감정을 느꼈다. 젊은 나이에 강의까지 맡은 백인 남성이 가질 수 있는 여유는 내가 죽었다 깨나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매번 나한테 말을 걸었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졌다. 정말 싫었던 건 내가 그 농담을 한 번도 물리치지 않고 받아줬다는 점이다.


"날씨가 냉동실 같아요."

"들어가 보셨나봐요."

"네. 냉동창고에 갇힌 적이 있어요."

"사막에서?"

"그렇죠. 전기도 없는 곳의 냉동고에서 얼어죽을 뻔했죠."

"어떻게 탈출했어요?"

"알고 보니 당기는 문이 아니라 밀어서 여는 문이었더라구요."


왜 그런 농담에 죽을 맞춰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처음엔 내 안에 있는 열등감이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그와 인사를 하고 돌아서면 잠시간 미소를 띠고 있는 내 얼굴을 느낄 때마다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그런 사소한 대화에 목이 마른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담배 있어요?"


이렇게 쉬운 것을 왜 그간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는지 이해하려 노력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쯤 마주쳤다. 두 번이 될 때도 있었고 어떤 주에는 평일 내내 마주치게 되기도 했다. 그는 그 때마다 반갑게 웃으며 나를 먼저 불렀고, 나는 언제나 내 신발의 코 끝에서 그의 웃는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냉동고처럼 추운 날씨에 나는 매일같이 산책로를 걸었다. 지난 겨울에도 그랬는지는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지기도 했고 발을 맞춰 조금 더 걷기도 했으나 얼어붙은 분수대 앞에서는 언제나 작별을 했다.


바람은 똑같이 차가웠지만 호숫가가 녹아내리고 싹이 트고 햇살이 더 많은 면적을 어루만지는 계절이 되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신발을 내려다보며 걷지 않았다. 그가 자꾸 멀찍이서 내 이름을 소리치듯 부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그를 발견하려 주위를 둘러보며 걸었다. 내가 싫어하던 풍경- 다양한 사람들이 혼자, 혹은 무리를 지어서 걸어다니고 그들 중 누구도 나만큼 불행해보이지는 않는 그 풍경은 이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회색 하늘과 회색 아스팔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은 나에게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못하고 조금 옅거나 짙은 회색으로만 보였다. 회색이 아닌 것은 파란 골덴 재킷과 붉은 셔츠, 색이 바랜 청바지 뿐이었다. 연록색의 눈동자와 하얀 살갗, 거뭇한 수염자국이 얽힌 소년과 같은 미소만이 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깨닫게 되었을 땐 이미 완연히 봄이 되어 있었다. 나는 땅을 보고 걷느라 계절이 그런 식으로 바뀐다는 걸 오래 잊고 살았다. 햇살이 비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얼음 결정들이 녹아내려 모든 것이 생기를 띠었다. 이제 다시는 땅과 내 발끝을 보며 걷지는 못할 것 같았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내가 유일하게 가깝게 느꼈던 나의 동료가 학교로 돌아왔다. 그녀는 나보다 여덟 살이 어렸지만 영특하여 나와 같은 시기에 석사과정을 시작한 흑인 여성이었다. 타고나길 밝고 명랑하여 나만큼 우울에 빠져 있진 않았지만 종종 타자가 되는 경험을 한다는 점에서 나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며,


"연애라도 하는거야? 얼굴이 엄청 밝아졌는걸."


이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땅을 보며 걷지 않기로 했어."

"잘됐다.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걸어다니면 목 디스크 걸린대."


나는 웃었다. 그녀는 내가 웃는 모습에도 놀라는 것 같았다. 우리는 같이 점심을 먹었다. 식당 건물의 그리스 음식점에 나란히 서서 음식을 기다릴 적에 그를 발견했다. 스콧 랭. 그는 갈색의 재킷에 연미색 셔츠를 입고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으나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그를 부를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내 시선이 한동안 머무르는 것을 보고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아는 사람이야?"


라고 물었다.


"응."

"누군데?"

"스콧 랭."

"아, 전기공학과?"

"알아?"

"유명하잖아."

"유명하다고?"

"핌 교수님 제자잖아, 맞지?"

"아마.. 도."

"그래. 들어본 적 있어."


그녀는 나에게 그가 무엇으로 유명한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가 말하지 않은 내용에 대해서는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때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리는 조용히 밥을 먹고 학과사무실로 돌아왔고, 다시 각자가 소화해야 하는 텍스트에 빠져 예전처럼 며칠씩 대화를 나누지 않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코트를 벗고 다시 가디건을 꺼내는 계절이 되었을 때 지도교수가 나를 불렀다. 몇 달간 언급하지 않아 나 또한 미뤄 왔던 박사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나는 그에게 아직 특별히 생각해본 바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그 해에 화제가 되었던 아시아계 미국인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해서 다루고 싶진 않습니다."

"그걸 주제로 잡으라는 건 아니야. 자네 연구 방향과 다르기도 하고. 그냥 생각나서 얘기한 것이네."


그가 말을 꺼낸 작가는 중국계 미국인도 아니었다. 나는 지도교수보다도 그 작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을 터였다. 지도교수도 별 수 없는 사람이었다 - 그는 대체로 친절하고 사려깊었지만 가끔 그렇게 신경을 거슬리는 말을 했고, 나는 그에 대해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나를 보면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정도의 무신경함이었다. 그 해에 꽤 화제가 되었으니, 어쩌면 내가 백인이었어도 그는 나에게 그 아시아계 작가에 대한 얘기를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해당 발언에 대해 깊이 파고들 수 없었고, 삼십 분 정도 더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눈 뒤 연구실을 빠져나와 의식도 없는 채 호숫가로 향했다. 발소리. 나는 내 발걸음 소리를 귀기울여 듣다가 내가 화가 난 상태임을 깨달았다. 속도가 빠르고 소리가 큰 발자국 소리를 듣던 나는 문득 멈춰 서서 아무런 맥락도 없이 스콧 랭을 떠올렸다. 나에게 발자국 소리에 대해 얘기했던 사람이 스콧이라는 사실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를 생각했고, 멈춰 선 채로 실로 오랜만에 내 발끝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걸었다. 멈추지 않고 걸었다. 내 산책로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벤치가 있는 곳까지 걸었다.

그는 어김없이 그 곳에 누워 있었다. 이제는 벤치에 누워서 한참을 있어도 괜찮을 정도로 날이 풀려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 위에 덮인 책을 걷어내었다. 그는 정말로 자고 있었던 듯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연록색의 눈이 빛에 적응하지 못하고 잠시 찌푸렸다가 나의 눈과 마주쳤다. 그는 환하게 웃었다.


"나인 걸 알았네요."


나는 숨을 골랐다. 나도 모르게 너무 빨리 걸은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가 눈이 빛에 적응하듯 점차로 그 짧은 한마디에 젖어들어갔다. 왜 그는 내가 자신이라고 확신하고 책을 걷었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그냥 벤치를 다 차지한 사람을 물리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는데.


"벤치를 혼자 다 차지하면 어떻게 합니까?"


나의 신경질적인 말에 그는 입가에 미소를 내려놓지 않은 채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 있었어요?"


가슴이 뛰었다. 그 정도로 빨리 걸어온 것 가지고 이렇게 숨이 차다니, 운동이 부족한 게 틀림없었다.


"항상 벤치에 누워 있잖아요."

"미안해요. 졸려서 그랬어요."


왜, 대체 왜, 강의까지 맡은 박사학위자가 잘 곳을 찾아 언제나 이 호숫가까지 걸어나와야 했나.


"그렇다고 여기서 자요?"

"좋잖아요. 풍경이."

"항상 눈을 덮고 있잖아요."

"항상 나인 걸 알았군요."

"이런 데 아무렇게나 누워 있을 사람이 당신 말고 또 누가 있어요."


나는 그의 눈꼬리가 입꼬리와 맞닿을 듯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무슨 일 없었던 거 맞아요? 화났는데. 진짜 나 때문이에요?"


나는 대답 대신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욕을 뱉었다. 있어야 할 담배가 없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다가 자기 주머니를 뒤져 노란 필터가 달린 담배를 내밀었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라이터를 달라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더니 내 손 위에 라이터도 올려놓았다. 유치한 분홍색의 싸구려 라이터가 내 손바닥 위로 올려졌다. 내가 담뱃불을 붙이는 동안 그도 입에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라이터를 돌려 줄 적에 그의 꺼슬한 턱이 내 시선에 걸렸다. 나는 도통 진정되지 않는 숨을 담배의 탓으로 돌렸다.


"랭 씨."

"스콧이라고 해요. 제발."

"..당신 진짜 귀찮은 사람인 거 알아요?"

"알아요. 여러 번 들었죠."

"나는 보통 여기서 혼자였어요."

"그것도 알아요. 근데 말해두자면, 오늘 먼저 나한테 말을 건 쪽은 지미예요."

"처음이잖아요."

"처음이죠."

"담배를 빌린 것도."

"맞아요. 근데 그건 내가 먼저 빌려 준 거예요."

"당신은 모든 일이 그렇게 딱딱 맞아떨어지나요?"

"그럴 리가요."


그는 담배를 아주 깊게 한모금 빨아들이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드문 일이죠. 이렇게 맞아떨어지는 건."


나는 그의 흉내를 내어 담배를 아주 깊게 한모금 빨아들이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망할 놈의 담배 때문이었다.


"어떤 점에서요?"


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았던 건 착각이었을까.


"자꾸 희망을 가지게 만들어요."

"좋은 거 아니예요?"

"다시 절망할 준비가 된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요, 절망에 빠져 있느니 그게 낫죠."

"당신 때문에 사람들이 날 똑같이 봐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요?"

"아니라는 진실을 깨달았죠."

"그게 내 잘못인가요?"

"당신 말고 다른 원인이 없어요."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그는 공연히 웃었다.


"나 말고 당신을 같은 사람처럼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뜻인가요?"


그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으나 말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나왔다.


"그래요."


그리고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제법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조금만 잘못하면 서로의 담뱃불이 우리를 다치게 할 정도로. 그는 두 모금 정도 남은 담배를 튕기며 꺼 버렸다. 나 또한 그의 흉내를 내어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밟았다. 그는 내 발끝을 바라보았다.


"그랬다면 미안해요. 나는 사람을 차단하는 법을 몰라요."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법을 모르는데요."

"우리 각자의 불행이 있는 거네요."


그는 나를 올려다보며 잠시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시선은 이제 내가 보지 못하는 곳을 향했다. 지금 여기 어디에도 없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아무리 따라도 내가 볼 수 있는 건 이 계절에는 없는 두꺼운 낙엽더미 뿐이었다.


"혼자 상처받았다고 말하지 말아요. 나도 똑같이 느꼈으니까."


대체 왜.


"같이 있을 때를 빼면,"


대체 왜 그렇게 숨기는 것에 미숙했는지 모르겠다.


"남들이 사는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지잖아요."


우리 둘 다 그랬다. 우리는 숨기는 것에 능숙하지 못하여 자꾸만 마주치고 시선으로 서로를 찾았으며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날엔, 서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한없는 외로움에 빠지고 있었다. 우리는 윌리 웡카가 소유한 유리 엘리베이터 같은 곳에 갇혀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그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남들의 세상에 섞여 들어가지는 못하고 살았다. 그리고 나는, 그가 남들의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 순간에,나의 엘리베이터가 와장창 깨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거기까지였다.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는 걷지도 않고 담배도 꺼 버렸음에도 여전히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막혔다. 나는 그의 뒷통수를 손으로 쥐고 그를 끌어당겼다. 메마른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고 우리는 이제 막 말을 배우는 갓난아이처럼 목적성 없이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금세 떨어졌다. 그는 나를 잠시 보다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고는 재빨리 나에게서 멀어졌다. 그래봤자 벤치는 그다지 넓지 않아 크게 떨어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 손은 여전히 그의 뒷통수를 쥐고 있었다.


"가요, 빨리."


그는 내 가슴팍을 밀어내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도 빨리 뛰는 심장을 그의 손길이 느낄까봐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나를 정말로 잠시간 쳐다보다가 먼저 일어나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뒷모습으로부터 그가 자신의 입술을 더듬는 모습을 보고, 그가 멀어져가는 걸 바라보다가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내 걸음걸이는 점차로 빨라져 기숙사 건물이 가까워졌을 때는 거의 뜀박질에 가까워져 있었다. 굵은 혈관의 다발이 끊어질 것처럼 죄여 왔다. 나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주체할 수 없이 뛰는 것은 운동이 부족해서가 아님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기숙사 건물의 벽면에 머리를 대고 나는 가슴팍이 다 구겨지도록 옷을 쥐었다. 가쁜 숨을 한참동안 내쉬어도 목구멍에 남은 숨이 전부 토해지지 않았다.



모레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