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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는 존재하는 거라고 누군가 그랬던가. 


남준인 지민일 만나기 전에는 드라마에서 들어보던 재벌 집 자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 물론 인생의 대부분을 학업에 매진하며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살긴 했지만, 무언갈 가진 삶이 당연했고, 가진 게 많아서 노력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것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즐겼다는 얘기야.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에너지를 소모하는 연인관계보다는 하룻밤 인연들을 선호해왔어.


 모임에 참석하면 이미 날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다가오는 여자들은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도 다정한 인사와 함께 팔로 허리를 감고 뺨에 입을 맞췄지. 그리고 내키면 그날 머물려던 호텔 방 호수를 알려주곤 했지만, 하룻밤 이상의 관계는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어. 중간에 마음이 바뀌거나 다른 사람이 눈이 들어오면 가차 없이 바람을 맞혔지. 뒷수습은 간단해. 비서에게 호텔 이름과 호수를 보내면 비서가 거기로 미리 준비해 놓은 것들을 보내는 것.

 남준이와 두 번째 밤을 그리다 텅 빈 호텔 방에 혼자 묶게 된 여자 쪽에서 기분이 상하겠지. 그 불쾌한 기분에 대해 곱씹을 시간을 주면 안돼. 자정이 되면 최소 30년산 이상의 포트 와인과 그에 어울리는 달콤한 디저트, 꽃바구니, 마지막으로 기념품으로라도 삼으라고 명품 브랜드의 손수건 같은 간단한 선물이 배달되었지.   


이 조합은 정신과 의사인 친구 컨설트를 받은 거였어. 바람맞고 약이 올라 날뛰지 않도록 해주는 조합. 99%의 성공률을 보이는 대단히 성공적인 컨설팅이었지. 규칙은 하나 이걸 보낼 때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기. 선물 자랑을 하다가 자기도 같은 선물을 같은 상대에게 받았다는 얘기는 흘러나가지 않는 게 좋을 테니까 선물도 매번 다른 브랜드로 바꿨지.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사실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빈 호텔 방에 혼자 묶었단 말은 꺼내지 않을 테니 크게 걱정스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성의 표시였다고 할까. 나에게 목매달고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매달리는 사람도 없었으니 크게 잘못하고 산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남준이 입장이었지. 하룻밤의 친절이라도 그걸 마음 깊이 담아두고 사랑으로 키우는 사람도 분명 있었을 테니까.


지난 일들이 차곡차곡 업보로 쌓이기라도 한 걸까? 지민이를 만나고 하루하루 더 바라는 것도 없고 모든 것이 딱 좋았던 때에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어. 지난 주말은 지민이가 준비하던 시험을 치느라 바빠 만나지 못하고, 이번 주엔 남준이도 금요일까지 출장이어서 2주를 가까이 떨어져 있었던 거라 돌아오는 주말은 두 사람 다 무척이나 기다리던 날이었어. 지민인 오는 길에 딸기 생크림 케이크도 샀고, 오늘은 집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었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집‘안’에서요.

-네에 ^^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여자 구두가 제일 먼저 보였어. 빨간 구두. 힐이 아주 높아 저런 얇은 게 사람 무게를 지탱할 수 있긴 할까에 대해 의문스러운 지경인 얇기였지. 


“누구… 계세요?”


지민인 현관에서 조심스럽게 집 안을 살피면서 누군가 있나 둘러봤는데 마침 거실 소파에 앉아 화장을 고치고 있던 여자가 뒤를 돌아보더니 여유롭게 웃으면서 집이 깨끗해서 오늘은 그냥 돌아가도 되겠다고 가보라고 하더라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고가 되지 않아 지민인 일단 케이크를 주방 카운터에 가만히 내려놨어.



“아, 남준씨가 부탁한 거구나? 나 온 걸 벌써 알았나? 은근 로맨틱한 구석이 있다니까.”

“저는 일하는 사람이 아….”


여자는 지갑을 뒤져서 오만원권 한 장을 꺼내서 건넸어. 그리고 곧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남준이가 넥타이를 늘리면서 들어섰지. 여자가 지민 어깨를 살짝 치고 지나가면서 너무 반갑게 남준이를 맞이했어.


“남준씨-”


누군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고 눈을 찌푸리면서 여자 얼굴을 쳐다보는데 아, 두 달 전쯤 선을 본 계열사 사장 딸이었어. 아니 정혼자였지. 할아버지가 그렇게 정하셨으니까. 남준이도 더는 선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OK 한 건이었어. 


사실 이 혼담에는 그 계열사는 보다는 계열사 사장의 친형이 경쟁사 회장이라는 게 더 중요한 포인트였지. 경쟁사 사장이 아끼는 조카. 아군으로 두면 좋을 사람. 하는 일이 미술관 큐레이터라고 했던가 서울, 뉴욕, 런던, 파리를 오가면서 일한다고 했었어. 저번에 만났을 때 남준이만큼 이쪽도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고 둘이 생각이 맞아서 한 번 자고 헤어진 거 그게 다였던 것 같은데….


“지현 씨. 어쩐 일이시죠?”


허리를 휘감은 두 팔을 밀어내면서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자고 가려고. 정 비서님이 열어줬어요. 약혼녀한테 어쩐 일이냐니 너무한 거 아니에요? 하고 뭐가 그리 웃긴지 깔깔거리면서 웃기까지 했어. 그리고 지민이한테 돌아와서는 오만원권을 받으라고 다시 내밀었지.


“이제 가보셔도 될 것 같아요. 아, 주말엔 안 오시는 거죠? 오시면 제가 좀 불편할 것 같아서.”


그걸 받은 지민인 천천히 돈을 카운터 위에 다시 내려놓고는 카운터 바 스툴에 올려놨던 백팩을 다시 매고는 현관문으로 향했어. 그 상황에서도 남준인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자기 옆을 스쳐 지나가는 지민일 그대로 내버려 뒀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남준인 주먹을 꽉 쥐고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면서 얘기했지. 그때랑 지금은 다르다고. 그때의 나랑 지금의 나도 다르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했어.


“난 괜찮은데, 큰아빠가 괜찮다고 하시려나 모르겠네?”

“부탁합니다.”


남준인 90도로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했어. 지민이를 생각하며 스스로가 뱉은 말과 한 행동의 무게는 몇 달 만에 두 번째로 마주한 약혼녀는 알고, 남준이 본인은 몰랐지. 이제 '나'는 사랑을 알고, 사랑을 위해 집안끼리의 약속을 깨는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얘기였는데 말이야.


여자를 마중해주는 것은 생략하고 지민이가 도망치듯 빠져나간 현관문으로 따라나섰어. 엘리베이터는 벌써 1층에 있었지. 다리를 달달 떨면서 기다리는데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계속해서 다른 층에 멈췄어. 마음이 급해져서 결국 비상계단으로 내려갔어. 9층부터 계속 뛰었지. 1층에 도착했을 땐 숨은 거칠고 옷은 온통 땀에 젖어있었어. 넥타이를 더 끌어 내리고 현관문을 나서서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저 멀리 산책로 쪽에서 입구로 걸어 나가는 지민일 발견했지. 밖은 어둑해진지 오래였고 오늘처럼 저 사방에 펼쳐진 조경들이 거추장스럽게 여겨진 적이 없었어. 지민인 미로 같은 산책로를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면서 자꾸만 시야 밖으로 사라졌어. 겨우 따라잡아선 지민이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깊은숨을 한번 들이쉬고는 다시 곧은 자세로 고쳤지.


“아….”


지민인 뭔가 생각이 난 듯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집 열쇠를 내밀었지. 남준인 그걸 내려다보고는 헛웃음을 한번 웃곤 받아들었어. 


“이게 다예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지민인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려고 했어. 남준인 그런 지민이 팔을 거칠게 잡아서 강제로 입을 맞췄지. 지민인 있는 힘껏 남준이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쳤고 결국 또 다른 팔마저 잡혀서 꼼짝을 못하게 되었어. 힘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금방 포기했어. 억울하고 울고 싶은 건 지민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두 손을 파르르 떨고 있는 건 남준이었지. 지민이 몸에 힘이 빠지자 남준이도 잡았던 팔을 놔줬어. 이번엔 지민이가 땅바닥에 머리가 닿기라도 할 듯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바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지.


지민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던 남준인 한 손은 허리에 짚고 한 손은 이마에 짚었다가 입을 가렸다가 잠시 몰려오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진정하기가 어려웠어. 속에서 불이 붙었다가 재가 되고 흩어지는 이 기분은 뭘까, 분노일까? 그게 아니면 대체 뭘까. 분명히 분노라고 생각했어. 내가 그깟 사람 하나 때문에, 사랑 때문에 이렇게 동요할 리가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어 자기감정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게 남준이었지.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포기했을까. 어떻게 그렇게 미련 없이 돌아섰을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수록 마음속에 그런 질문이 끊임없이 떠올랐어. 가만히 생각해보면 첫 만남도 내가 원해서, 그 후로 한 달 만에 재회를 했을 때도, 집에 찾아오던 것도 전부 다 내가 원해서. 박지민이 나를 원한 적은 없는 거구나. 바싹 말라있는 씨앗도 그렇게 물을 줬으면 싹이라도 텄을 텐데 쓸모없는 짓을 했구나. 감히 별 볼일도 없는 어린애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잘도 나를 속였구나. 분노는 잘못된 곳으로 향해. 자꾸만 헛웃음이 나왔지. 보고 싶다고 속삭이던 일, 매번 몸을 섞을 때마다 부끄러워 얼굴을 숨기던 일, 웃음소리, 흥분에 찬 숨소리… 전부 다 거짓이었나 봐. 문 앞에 다 다라서는 현관문을 열지 못하고 그대로 기대어 주저앉아서는 지민이가 준 열쇠를 바닥에 내던졌어. 


그렇게 우스울 정도로 싱거웠던 헤어짐 후에 남준인 무서울 정도로 멀쩡했지. 노는 것도 지나치지 않게 적당히 했지만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하룻밤들이 반복되면서 처음으로 남준이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들이 퍼져나가. 관계할 때 얼굴이나 머리카락에 손이라도 대면 무섭게 손을 쳐냈어. 키스는 상대방이 원하는 곳이 입술만 아니라면 어디든 해줬지만 더한 애정표현을 요구하거나 두 번 이상 신경을 거스르면 바로 옷을 챙겨입고 나갔어. 더는 값비싼 와인도 향 좋은 꽃도 없었지. 감정도 표정도 없는 남자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어. 


한편 지민인 살기 바빠서 이별에 앓고 있을 시간이 없었어. 물론 밤에 쉬이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거리거나 그러다 보면 떠오르는 지난 추억에 눈물 흘리다 잠든 밤도 있었지만 내 주제에 감히 그런 사람을 넘봤으니 이런 꼴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는 자학적인 생각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했지. 이별의 아픔은 사치같이 느껴졌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을까? 

자기가 벌어 학비며 생활비를 다 감당하고 큰돈은 아니어도 한 달에 10만 원 정도는 꼬박 저축에 넣으면 정말 남는 게 하나 없었지. 아버지는 몸이 불편해져서 일하지 못하게 된 후로는 늘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어. 그리고 최근에 집에서 전화가 왔지. 큰돈이 필요하다고. 


“얼마? 이천만 원??? 그런 큰돈이 왜 필요해?”

“너희 아빠가….”


도박에 손을 대고 사채를 끌어다 썼다는 이야기. 은행권에서 돈을 빌리는 신세가 못되니까 사채에 500을 빌린 게 한 두 달이 되니 2000이 되었다고 했지. 당장 통장에 모아둔 돈을 다 긁어봐도 500이 안되었어. 삼백 얼마...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늘렸는데 사채 이자가 늘어나는 속도를 따라갈 순 없었어. 설상가상으로 엄마가 직장 마치고 저녁에 집 근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쓰러지셨고 결국 지민인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집으로 내려가게 되었어. 정 안되면 야반도주라도 하면 된다고 지민이가 우스개처럼 얘기하면서 부모님을 위로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날 저녁 아버지가 죄책감을 못 이기고 결국 모아놨던 수면제를 한 번에 털어 넣고 응급실에 실려 가게 되었어. 위세척하고 꼬박 하루를 혼수상태였다가 깨어나서는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미안해서 살 수가 없다고 하셨지. 


“아빠 죽으면… 그 빚 갚아져??? 그거 다 내 빚이고 엄마 빚이야!!”


지민인 아빠 환자복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병원 바닥에 주저앉아서는 통곡을 했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국 지민인 아버지가 돈을 빌려 쓴 사채업자가 운영하는 불법 도박장 웨이터로 일을 하게 되었지. 엄마는 아들이 그렇게 팔려 가는 꼴을 볼 수 없어서 당신이 가겠다고 했지만 지민이 역시 그 험한 곳에 엄마가 일을 하러 가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어. 그래서 엄마가 챙겨둔 짐가방을 새벽에 몰래 들고나왔어. 스스로 사채업자를 찾아갔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그냥 더는 빚을 늘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 곳에 발을 들인 거지. 


사채업자는 지민이가 돈을 안 갚고 일하는 척만 하다가 가족이 다 같이 야반도주라도 할까 봐서 지민이를 봉고차로 싣고 다녔어. 매일 다른 장소에 내려놓으면 지민인 그냥 그 곳에 들어가 밤새 거기서 일을 했어. 테이블을 세팅하고, 술, 담배 심부름을 하고 끝나고 나면 판을 정리하고 그런 허드렛일. 물론 그날 일이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은 양아치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기도 하면서 말이야. 발에 채이고 머리채가 잡히는 일에는 더이상 고통을 느낄 수가 없을 정도로 무뎌져 있었지.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 같은 생활이 거의 한 달이 계속되고 있었어. 허름한 여관에서 머물게 하면서 지민일 감시하는 조직원은 매일 밤 술집 여자를 끼고 잠을 자. 지민인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보지만 소용이 없었고 천박한 신음소리, 살끼리 부딪치는 역겨운 소리가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어. 가끔 관계가 끝나고 남자가 깊게 잠이 들면 지민이가 있는 매트리스 위로 올라와서 등을 긁고 유혹하는 술집 여자의 소름 끼치는 긴 손톱의 느낌도 악몽 같이 느껴졌지. 그런 게 계속되다 보면 남과 몸을 섞는 게 얼마나 달콤하고 동시에 열정적이면서 황홀했는지 그딴 건 기억나지 않게 되어버리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어.


한편 남준인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어. 눈을 감으면 부드러웠던 피부의 감촉이 생각나, 마치 옆에 누가 누워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 느낌에 소스라치면서 깨어나고 다시 잠에 빠져들려고 하면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고 그래서 또 눈을 뜨게 되는 일의 연속이었지. 출근하면 일도 손에 잘 안 잡혀. 할아버지는 자기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 얘기가 오가고 있는지 진척이 있다면 어느 정도인지 매일같이 물어봤지. 하루는 점심을 같이하자고 하더니 약속한 일식집에 가보면 그 여자가 그 자리에 같이 있었지. 결혼하고 말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가신 일이었어. 


퇴근 후 집에 들어와서 거실 무드 등만 켜놓고 와인을 땄어. 잠을 좀 자고 싶어서. 무거운 재즈 사운드가 은은하게 깔리고 와인이 한잔, 두잔, 들어가니까 쓸데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게 되는 거지. 그리고 한 달을 잘 참았는데 너무 잘 참았는데 그 시간들이 다 소용이 없어지는 짓을 하고야 말았지. 메신저에서 뒤로 밀려난 지민이 이름을 찾고, 나눴던 대화를 들여다보는 데 없는 사용자로 떴어. 전화번호를 눌러보면 당연하게도 없는 번호로 뜨겠지. 남준인 와인잔엔 핸드폰을 처박았어. 병째로 와인을 마시고 새벽에 엄청난 두통을 가지고 눈을 떴고 눈을 뜨자마자 한 일은 와인잔에 처박힌 핸드폰을 꺼내서 정비서에게 전화해 사람을 시켜서 지민이를 찾아오라 한 것이었지. 그리고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알게 된 건 지민이가 더는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지 않은 것이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려서 간단히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 

그 얘기를 듣고 갑자기 숨을 막히기 시작해. 남준인 사무실 책상을 붙잡고 겨우 쓰러지지 않고 버텼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람을 몇 명을 사던지 박지민이 어디 있는지 찾아오라고 지시했지. 감히 그렇게 사라지다니. 꽃뱀 같은 어린애한테 걸렸다는 생각. 그게 어디서 또 누구를 홀리고 있을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분노했어. 


“저, 상무님 꼭 찾으셔야겠습니까?”

“왜요? 뭐 잘못됐습니까?"

“이게 파고들다 잘못 엮이면 좀 시끄러워질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고 받게 되는 지민이의 집안 사정. 아버지가 사채를 끌어다 쓰고 최근엔 음독자살 기도를 한 일, 그리고 그 후로 얼마 가지 않아 지민이의 핸드폰도 해지가 되고 생활 흔적이 사라져 버린 것. 


“조직폭력배들이 연루된 불법 도박장에서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제보가 있습니다만..”


남준인 손톱 끝을 이로 씹으면서 전에 본적이 없이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지. 지난 한 달 자기가 했던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가. 그리고 지민이가 겪어야 했을 일들도 같이 말이야. 남의 불행에 이렇게나 동요한 적이 살면서 있었나? 분명 없었을거야.  제발 살아만 있어라, 제발…. 그런 마음으로 그 길로 바로 지민이의 본가로 내려가게 되었어. 운전에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아서 비서에게 운전을 맡기고 뒷좌석에서 억지로 눈을 붙여보는데 눈을 붙일 때마다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지민이 모습이 그려져서 다시 눈을 떴어. 남준인 여전히 모든 일이 지민이 탓이라고 생각했어. 도와달라고만 했다면, 차고 넘치는 그까짓 돈 같은 거 얼마든지 줬을 텐데. 네가 그냥 도와달라고만 했다면….


7시간을 달려서. 불법 도박이 열리는 장소에 도착했어. 허름한 여관의 지하실이라는데 전에 맡아본 적이 없는 물 썩은 냄새에 쾨쾨한 공기. 문을 두드리니 험상궂은 얼굴의 조직원 하나가 지하실 문밖으로 고개만 내밀었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어떻게 왔냐고 물어보니 남준인 대답 대신 팔목에 값비싼 시계를 흔들고 현찰을 지갑에서 꺼내 보이고는 금방 들어갈 수 있었어.


쟁반에 술이랑 안주를 들고 나르는 작은 체구는 뒤에서 보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어. 저 다 헤어진 스니커즈도 말이야. 신발도 좋은 거로 선물했는데 원래 신던 신발이 길이 들어서 편하다는 얘기를 했었던 기억이 났어. 남준인 모르는 척 빈 자리에 앉아 지민이가 테이블을 세팅하러 올 때까지 기다렸지.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갈라지는 목소리와 그보다 더 트고 갈라진 입술. 한층 더 말라버린 팔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보였어. 그리고 남준인 패를 까는 지민이 손에 자기 손을 올렸지. 여기서 일하면서 아예 처음 있는 일은 아니라 당황하지 않는 지민이를 보면서 남준인 지난날 회기의 어떤 골목 벤치에서 손을 잡히고 소스라치게 놀라던 지민이가 생각났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반응이었지. 그동안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잘 지냈냐고 못 물어보겠네.”


지민인 익숙한 목소리에 손이 멈칫했어. 남준이와 눈이 마주치자 잠깐 눈동자가 흔들리고는 다시 깔던 패로 돌아갔지. 터진 입술에 손을 올리는 남준이의 손가락이 너무 뜨거워서 지민인 눈을 질끈 감았다가 한 발짝 물러섰어. 뺨에 긁힌 상처를 보려고 손을 올리니 몸을 움찔거리기까지 했어. 어젯밤 같은 방을 쓰는 조직원이 자기 여자를 건드린 게 너냐고 추궁하면서 다짜고짜 손찌검을 했었어. 그대로 내버려 두면 정말 지민이가 맞아 죽을까 봐 무서웠던 여자가 지민이가 아니라고 이실직고한 덕에 이 정도의 상처와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정도로 끝났지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 베개에 피가 묻어있었어.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건 분명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지. 이걸로 귀가 영영 안 들리게 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만큼 삶에 대한 의지가 사라져있는 상태였어.


“여기까진 어떻게 오셨어요?”

“어떤 쪽을 믿을래요. 도박하러 온 거? 아님 지민씨 데리러 온 거?”

“...저를 왜요?...그거 아세요? 세상에는 엮이면 안 되는 팔자가 더러운 인간도 있어요. 그게 저예요. 하나도 도움이 될 게 없는 인생이니까 제발 모른 척해주세요.”


지민이 목소리엔 힘이 없었어. 예전 같은 순수함도, 설렘도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 입술을 터지고 얼굴 이리 저리에 멍이 들고 머리는 언제 잘랐는지, 마지막으로 빗질을 한 게 언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지민이 몰골을 보니 남준인 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 


자긴 이제 없는 사람인 셈 쳐달라고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으면서  돌아서는 지민이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어. 병원 VIP 병실에서 눈을 떴고 뉴스에서 S사 후계자의 일탈 불법 도박장 출입이니 원한이 있는 보복성 폭력이니 뭐니 하는 추측성으로 쏟아지는 보도들을 접했지.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건 대중에게도 회사의 주가에도 중요한 일이 아니었어. 주가는 폭락했고 하루아침에 남준인 안하무인에 불법 도박을 하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니 종업원을 붙잡고 주먹을 휘두른 갑질 재벌 2세가 되어있었어. 그래도 상관이 없었던 이유는 눈을 떴을 때 엉망이 된 자기 손에 얼굴을 묻고 제발 깨어나라고 울고 있던 지민이 때문이었을 거야.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쾌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게 아니라. 게임에서 이긴 것처럼, 마지막 스테이지라도 깨고 게임을 클리어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거야. 


“제가… 어떻게 보상을 해드릴까요.”

“이런 상황을 지민씨가 어떻게 보상을 하려고 했는지 들어나 볼까?”

“...물론 전 가진 것도 없고…, 드릴 게 없어요. 그래도 하라고 하는 대로 할게요.”

“그쪽에 어차피 몸으로 때우려고 했던 거지? 그럼 나한테도 몸으로 때워요.”

“...네.”

“그럼 이걸로 딜이네. 아, 한 가지만 얘기할게요.”

“말씀하세요.”

“앞으로 다시는, 감히 내 앞에서 등 돌리지 마.”

“............네.”




편안한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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