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똑똑’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방 책상에 단아하게 앉아 만년필로 글을 쓰고 있는 지민을 한참 말없이 바라보던 정국이 살짝 노크를 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저 오늘 드라마 오디션으로 나가요. 지민 씨는?”

“호석 씨가 불러서 이것 마무리하고 바로 나갈 예정이에요.”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정국이 지민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정수리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나도 삼백 년 살 고 싶어요.”

“네?”

“우리 둘이 꼭 안고 삼백 년 만 후훗”

지민이 싱그럽게 웃으며 정국의 볼을 톡톡 쳤다. 




날이 흐리고 꽤 쌀쌀 해진 가을 날씨에 바람까지 불어 호석과 지민이 서 있는 재건축 공사현장에는 흙먼지가 잔뜩 일고 있었다.

호석의 지인인 김 회장은 미신을 신봉하는 이었는데 공사를 위한 기초작업을 하던 중 사상사고가 계속 일어나 두 명이나 사망을 하자 지민과 호석에게 도움을 요청을 했고, 호석이 먼저 둘러본 뒤 지민을 부른 것이다.

“보셔야 하는 게 있습니다.”

호석이 지민을 현장 사무실로 데려가 앉힌 뒤 작은 나뭇조각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포크레인이 땅을 파다 묻혀 있던 상자를 하나 파손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수습해서 귀신사로 보내고 남은 잔해입니다.”

“꽤나 큰 봉인 상자였습니다. 흙이 안에 꽉 차 있었다고 합니다. 흙도 같이 공양 보내 놨습니다.”

지민은 가만히 손으로 나무를 쓰다듬다 갑자기 인상을 썼다. 머리에서 ‘삐’ 하는 소리가 울렸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남겨 두신 건가요? 같이 보내시지 않고..”

지민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너무 지독한 저주인데요 이건…”

지민이 고개를 저었다.

호석이 나무의 한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손가락을 따라서 시선을 옮기던 지민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이 문양은….”

“화전민입니다.”

“그들의 물건이 여기 왜”

“묻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요. 상자는 조선시대 것이 맞는데 문양 잉크가 현대의 제품인 것 같습니다.”

“요즘 세상에 이런 무서운 저주를....”


지민이 가만히 생각에 잠긴 사이 호석은 자신의 식신 종달새를 불렀다.

“연화야 화전민의 후손에 대해 알아보거라.”

“네, 걱정 마세요. 수다쟁이 새 요괴들은 금세 알아내 줄 거예요.”



지민이 호석을 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느낌이 좋지 않아요.”

호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사는 언제까지 중지죠?”

“안전검사 재 시행하기 때문에 한 달 정도입니다.”

“상자는 두 개 일 거예요. 그래야 완성이니까.”

“네”

“어서 찾아보도록 하죠.”

“태”

지민이 늑대 태를 불렀다.

“인영으로 가서 정국 씨 일 끝날 때까지 있어줘요.”

“네”






“폐하 이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여태껏 전 장군님께서 때마다 청에 가서 화목을 다졌는데 한순간에 이렇게 배신을 하는 건 정말..”

상윤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조선에서 자꾸 청나라를 도발하니 그런 것 아닙니까”

상윤의 동료가 그를 달래며 말했다

“당파싸움에 이용하려고 이런 짓거리를 벌이니 가뜩이나 세력 확장하려는 강황제가 가만있겠습니까 이용하려고 하지”

어전은 상윤의 말을 끝으로 침묵에 젖어 들었다. 어느 누구도 말을 더 보태지 못했다.



운호국은 청나라와 러시아 조선 사이에 끼어 있는 그리 크지 않은 나라였다. 그리고 조선에서 넘어와 이 나라에 자리를 잡은 사람이 백성의 삼분의 이는 되었다.

전염병과 기근이 심해 먹고살기 어려운 데다 오래된 당파싸움과 임금 승계로 나라가 어지러웠고 신분 차이로 인한 병폐도 끊임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왕은 당파싸움에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청나라를 반대하는 시위를 자꾸만 벌였는데 그것이 청나라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가만히 있으면 체면이 서지 않아 벌써 군대가 출발 직전이었다.

문제는 청나라는 조선까지 침략을 할 의도는 없이 본보기를 보여줄 요량으로 사이에 낀 운호국으로 향했다는 것이었다.



“청에서는 우리 군대로 조선을 공격하라고 하오.”

정국이 대신들과 윤기에게 말했다.

“우리가 청을 대적한다면 승산이..”

대신의 물음에 정국이 말을 자르며 답했다.

“전멸입니다.”

윤기가 대신들에게 물었다.

“이 중 조선에 칼끝을 겨눌 수 있는 이가 있는가”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부모, 형제, 누이가 살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도달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윤기가 당 실의 식신 담당자에게 물었다.

“일주일입니다.”

“식신들로 파발을 띄우시게.”

“뭐라고...”

“나라를 버리고 떠나라고. 한시라도 빨리.”

“폐하..”

“어서, 그리고 호석을 데려오거라.”

“네”

“이만 물러들 가시오. 내일 준비가 되면 다시 소집하겠소.”




“폐하”

대신들이 다 물러가고 정국과 윤기만 남은 어전에 호석이 들어왔다.

“공주를 데리고 지금 당장 봉황산으로 가거라.”

“어찌하여..”

“전쟁이네, 청이 군대를 끌고 오고 있어. 일주일 안에 올 것이네.”

“폐...폐하!!!! 어찌..!!!”

“주위가 시끄러워 눈치채기 전에 어서 데리고 기도하러 가게.”


호석이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라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그리해서는...아니 되옵니다. 폐하.”

윤기가 심각한 표정으로 호석을 보았다.

“공주가 죽는 것을 볼 수 있는가”

“하지만....혼자 살아남으신다 해도....”

그때 정국이 호석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청에 함락이 되면 궁 안의 미인들이 어찌 되겠느냐. 그냥 죽이겠느냐.”

“장군님..”

“노리개가 되어 죽지도 못하고 그보다 더한 일을 평생 겪을 터인데...그게 더 낫겠는가.”

“아니면 군인의 옷을 입혀 전쟁터로 데려가 한 칼에 죽임 당하게 만들어야 하는가..”

“자결을 하라 해야겠는가. 어째야 하는 건가..”


호석이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정국을 바라보았다. 그때 윤기가 호석을 보고 나지막이 말했다.

“자네가 살리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하고 지켜주게. 부탁한다. 호석아.”

“네 명 받들겠습니다.”

“어서 서두르시게.”

“폐하.....부디.....”

호석은 윤기와 정국에게 건넬 마지막 말을 찾지 못해 눈물만 흘리며 망설였다.

“어서..”


윤기가 고개를 숙이고 호석에게 말하자 호석이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때 정국이 호석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손으로 감고 머리를 맞대며 말했다.

“자네가 있어 맘 놓고 떠나.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

“네 맘을 아는 내가 그걸 이용하며 이리.....무서운 부탁을 하는구나...”


“아닙니다. 제가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고맙다. 호석아.”

“장군님...마지막 인사도 못하시고....”

정국은 눈가가 빨개진 채 호석의 등을 밀었다.

“어서 가시게. 부디 평안히...”

호석은 정국과 윤기에게 깊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어전을 떠났다.





“뭐해”

정국은 누군가 자신의 턱에 손을 대고 머리를 올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전쟁이.....”

“응?”

정국이 잠 결에 중얼거리자 태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아 태 님, 아닙니다. 꿈을...”

“오디션 끝났어?”

태가 정국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피며 물었다.

“인터뷰는 끝났는데 카메라 테스트한다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어쩐 일로”

태는 정국의 옆좌석에 앉으며 말했다.

“지민 님이 가 보래서.”

정국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무슨 일 있으신 가요?”

“아니, 그냥 너 지켜보래.”

“아..네..”

그때 매니저가 차 문을 열며 정국을 불렀다.

“정국 씨 차례 되어갑니다.”

“네.”

정국이 태를 보자 그도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가자”




“정국 씨 정면 보고 아까 드린 대사하시면 됩니다.”

“네”

“난, 이런 기록을 본 적이 없어”

“전화를 건 사람한테는 걸기만 했고, 온 적이 없어. 전화가 온 상대에게는 단 한 번도 본인이 먼저 한 적이 없고. 그리고, 심각할 정도로 규칙적이야.”


“네 좋아요. 이번엔 좀 덜 착해 보이게. 형사 역할이니까 조금 카리스마 있어 보이게 해 볼게요.”


“방금 참고인에서 용의자 되신 겁니다.’

“경찰서로 오시는 것보다 제가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오, 눈 세워 뜨니까 인상이 확 변하 시네. 청순한 줄만 알았더니 거의 무사 같은데요. 좋아요.”

“웨스트, 바스트, 클로즈 다 땄지?”

PD가 조연출에게 물었다.

“네”

“고생하셨습니다.”


PD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정국의 어깨를 토닥이다 한구석에 서 있는 태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분은 매니저신가요?”

“아 아닙니다. 제 지인이십니다.”

“와, 저분 촬영해 봐도 되나요? 저렇게 화려하게 생기신 분은 또 첨 뵙는데. 영화배우 뺨치시네.”

“아...싫어하실 거 같은데..”

정국의 말을 듣기도 전에 PD가 태에게 다가가 손을 뻗으며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십니까. 김영수 PD라고 합니다.”

태는 무표정한 얼굴로 비스듬히 서서 대꾸도 없이 PD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내민 손이 민망한지 PD는 뒷머리를 긁으며 괜히 웃어댔다.

“저 카메라로 살짝 한 번만 찍어보면 안 될까요. 너무 멋있으신데.”

태는 한쪽 입으로 씩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PD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정국을 불렀다.

“끝났으면 가자.”

“네”

“아, 저 한 번만 찍어보면..”

“나 카메라 싫어해. 미안.”

태는 PD의 어깨를 톡톡 치며 싱긋 웃어주고는 꾸벅 구십 도로 인사하는 정국을 돌려세워 등을 밀었다.


“와 저 두 사람 투 샷 뭐예요. 이 세상 그림이 아니네.”

“갑자기 자괴감 든다. 그죠?”

조연출과 스탭들이 정국과 태의 뒷모습을 보며 한 마디씩 거들었지만 영 아쉬웠던 PD는 계속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지금 여기서 벗어나 자유를 꿈꾸는 사람은 그대로 떠나도 좋다.”

윤기가 커다란 백호를 옆에 두고 갑옷을 입고 줄지어 서 있는 군사들에게 말 했다.

“우리는 이제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한다.”

“각오가 되어 있는 자 들만 함께 할 것이다!!”

“넵!!!!!!!”

“우리는 방파제가 될 것이다!! 우리 가족들과 백성들을 위해 희생할 것이다!!! 각오가 되어 있는가!!!!”

“네에엡!!!!!!!”

“죽더라도!!! 단 한 명도!!! 운호국을 지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알겠는가!!!!!!!!”

“으아아아아압!!!!!!!”


윤기와 정국은 대열의 앞에서 적군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겨울이 막 시작되는 바람이 남동풍으로 불어오며 운호국의 깃발과 그들의 옷자락, 머리카락을 날리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눈앞에는 현재 모인 병사의 10배는 되어 보이는 군사가 서슬 퍼렇게 말굽을 쳐 대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윤기는 자신의 애검(劍)인 얇은 선예도를 자랑하는 빛나는 백호도를 정국은 자신의 몸집만큼 커다랗고 위용을 뽐내는 화용도를 들고 바닥을 끌며 서서히 걸어 나갔다.


“폐하 지금 누가 제일 보고 싶어.”

“공주”

“사랑했나?”

“온 맘으로.”

“나랑 싸울래?”

“하하하하하”

“웃어?”

“그보다 너를 더 사랑했다. 형제여”

“형, 한날한시에 죽어서 영광이다.”

“갈까.”

“가자.”

“으아아아아아아!!!!!!!!!!!!!!!!!!!!!!!!!!”

두 사람은 거칠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용맹한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지민아! 꼭!! 다시 만나자!!! 사랑한다!!!’





정국은 달리는 차 밖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깨어 있어도 보인다. 전설 같은 옛날이야기들이.

눈물은 흘리지 않을 것이다. 폭풍처럼 다가오는 감당하기 힘든 이 시간을 견딜 것이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잡고 또 잡았다.

그리고 그런 정국을 묘한 눈빛으로 태가 바라보고 있었다.



“정국 님이 과거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듯합니다.”

준이 태에게서 마음을 건네받아 지민에게 말했다. 

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준과 석에게 말 했다.

“석은 귀신사에 가서 해주 스님과 저주받은 흙 뿌리는 것을 도와주시고, 준은 같은 기가 나오고 있는 곳이 있는지 찾아봐 주세요. 멀지 않은 곳에 나머지 하나의 본체가 있을 것입니다.”

“네”

“위험하니 혹 발견하거든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말해 주세요.”

“네”


과거가 뒤 섞여 어지러운 현실에 태초부터 있었던 변함없는 달빛만 스산한 계절을 깊어 가게 만들고 있었다. 지민과 정국은 서로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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