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 속에서 죽었다. 나는 푸른 지느러미를 가진 인어였고, 무서운 사고 없이 주어진 명줄을 모두 채운 뒤 눈을 감았다. 마음 한 구석 도저히 빼낼 수 없는 까만 진주를 품고 나는 물 속에서 죽었다. 죽었었다, 그러니까 전생의 나는 그랬던 것 같다. 사리분별이 가능한 순간부터 지금껏 쭉 꿔왔던 꿈이 알려주는 바에 의하면 그랬다는 거다. 꿈 속의 나는 끝이 예정된 사랑을 했고, 그 끝을 알면서도 찰나의 순간에 모든 마음을 쏟았다. 나는 인간 하나를 온 영혼으로 사랑했다. 그 순간부터 버릴 수 없는 미련이 남아 죽는 순간까지 그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얼굴이 흐리게 보여 기억할 수가 없다. 그건 내가 꿈을 꾼 뒤 깰 때마다 섧은 울음을 터뜨리는 이유였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진짜인지 알지도 못하는 꿈에 휘둘리는 삶이 좆같다는 생각도 했다. 다리 병신인 것도 좆같은데 머릿속마저 미친놈이 되면 나는 어쩌지?


"겜, 나 바람 쐬고 싶어."


"지금? 휠체어 가져다 줄까?"


"아냐, 괜찮아. 요 앞 백사장에 잠깐 앉아있다 올 거야."


휴가철이다 뭐다 해서 서핑하는 사람들이 좀 늘긴 했지만, 요 앞은 제법 구석진 곳이라 바람을 못 쐴 정도는 아녔다. 돗자리와 담요를 챙겨든 채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문을 열면 바닷가의 짠 바람이 머리칼을 스친다. 적당히 서늘하고 딱 좋다. 늘 앉던 자리도 비어있고, 시간이 이른 아침인 덕인지 사람이 보이지도 않았다. 만족스럽다. 이 병신같은 다리론 십 분 이상 걸을 수가 없어서 더 멀리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 진한 눈썹과 함께 신이 챙겨준 아주 좆같은 선물이었다. 그래도 십 분은 걷는게 어디야. 궁시렁대며 자리를 펴고 앉아 수평선 위를 바라보면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편해진다. 꼴에 꿈 속에서 인어 노릇을 한 덕인지 고향집에라도 온 것 같은 친숙함이 있다. 파도 소리, 소라고둥의 울리는 소리, 모래가 작게 바스라지는 소리.... 조용히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리면 눈물을 줄줄 흘리게 만들었던 이른 아침의 꿈이 조금씩 흐릿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감상에 젖어있다 눈을 뜬 건 낯선 소리 하나가 바닷바람과 함께 귓가를 스친 탓이다. 물기가 느껴지는 묵직한 발소리에 호기심이 일어 고개가 들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바로 눈 앞에 버티고 선 커다란 인영을 보고는 숨이 잠깐 멎을만큼 깜짝 놀라고 만다. 물귀신이다. 커다란 물귀신이다. 이른 아침부터 짠 바닷물을 뚝뚝 흘리며 이쪽을 내려다 보는 남자 하나가 물귀신처럼 내 앞에 서있었다. 비명도 못 지르고 눈을 깜빡이다, 이게 사람이든 귀신이든 어쨌거나 나한테 할 말이 있으니 이러고 있겠지 싶은 마음에 이쪽이 먼저 말길을 트기로 했다. 그래서 떨리는 속을 쟤도 나도 모르게 꼭꼭 숨기고 담요를 꼭 쥔 채 한마디 하기를,


"뭐 꼽냐, 시발놈아?"


앗, 씨발. 이게 아닌데. 그러니까 뭐 할 말 있냐 그런 뜻이니 저쪽에서 알아서 잘 받아들이기를 바랄 뿐이다. 물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를 놈은 그 말을 듣고 요상한 표정을 지었고, 혼잣말 하듯 조용히 시발놈…? 하더니 내 앞에 쭈그려 앉아 시선을 맞췄다. 이상하게 욕 들어먹고도 화난 것 같진 않은데. 그러더니 하는 말이 또 가관이다.


"나 좀 살려주라…. 춥고 배고파."


"왜, 졸리진 않냐?"


"그래야 돼?"


춥고 배고픈데 졸리기까지 하면 완벽한 거지일텐데. 정말 간절하고 꺼져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며 손을 덥석 맞잡는 모습이 이제 생각하니 제법 애처롭다. 그러니까 이건 물귀신이 아니라 물에 빠진 거지새끼였던 거다. 집에 겜이 아직 있을라나? 지금 시간이면 아침 준비 중일테니 양해를 구하고 자리나 하나 더 만들어 봐야겠다. 평소같으면 이런 부탁을 매정하게 쳐냈겠지만 이상하게도 얘한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잡힌 손을 놓고싶지 않단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아침부터 찬바람을 너무 쐰 모양이다. 뇌가 얼었구만. 바닷물에 축축한 손이 뭐가 좋다고.


"가자, 나 따라와. 욕실이랑 옷 빌려줄게."


이상한 마음이 커져 나를 또 덮어버리기 전에 생각의 방향을 돌린다. 담요를 접고 일어나 탈탈 턴 돗자리를 놈의 손에 들린 채 집으로 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조용히 저벅저벅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발자국 소리, 조용히 모래를 쓸어내리는 파도 소리, 포말이 자글자글 터지는 소리……. 익숙하고 이상한 아침이었다.



* * *



낯선 손님을 맞이한 겜은 의외로 큰 내색 없이 식탁 한 자리를 내 주었다. 이제 와서 짐작하는 거지만 이 모든 자연스런 호의는 저놈의 잘난 얼굴이 한 몫 했을 거다. 욕실을 빌려 따뜻한 물로 멀끔히 씻고 나온 놈의 모습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봐줄 만했다. 숯으로 그린 듯한 짙은 눈썹, 서글서글하고 예쁜 파란 눈동자와 온기를 되찾아 발갛게 혈색이 도는 뺨이 동화 속 왕자님과도 비슷했으니까. 겜도 나도 잘생긴 거에 약했다. 그치만 누구나 잘생긴 거 좋아하지 않나? 겜은 졸지에 일 인분 아침을 더 만들게 됐지만 전혀 귀찮은 내색 없이 준비를 해줬고, 어쨌거나 일을 벌린 죄가 있는 나도 휠체어 위에 앉아 식사와 곁들일 밀크티를 탔다. 겨우 세 잔을 다 탈 즈음엔 겜이 걸리적거린다며 날 식탁 앞으로 치워버리긴 했지만, 어쨌든 나도 가만 앉아있진 않았다는걸 모두가 알아주면 좋겠다. 밀크티 세 잔을 올린 쟁반을 든 채 휠체어 째로 식탁 앞에 배달된 나를 보고 우리의 물귀신이 놀란 표정이 된다.


"너 어디 아파?"


"그냥… 다리가 좀 등신같아서 오래 못 서있어."


당연하지만 이 사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진 못한다. 그냥 사는 데 좀 불편하니 좆같다 싶을 뿐이지.


"경고하는데 동정하는 눈으로 쳐다보면 존나 죽여버릴 거야."


"난 원래 생긴 게 울상이야. 그냥 밀크티가 마시고 싶어서...."


어쩐지 시선이 좀 아래로 내려가 있더라니. 괜히 날 세운 듯해 머쓱한 기분으로 쟁반을 탁자 위로 올려놓고 놈의 몫을 앞에 밀어준다. 하기야 이른 아침부터 물에 푹 젖어서 덜덜 떨었으니 속이 찰 거였다.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아끼던 맨시티 담요를 덮어 씌워주자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시선이 내게 따라붙었다. 아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부담스러운 눈이다. 뭐야? 밀크티가 그렇게 맛있나? 물론 내가 차 하나는 끝내주게 타긴 한다. 그래도 저렇게 좋아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눈 깔아와 뭘 봐 씨발 중에 뭘 말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이 놈이 먼저 선수를 쳤다.


"너도 맨시티 좋아해?"


"내가 지금 마시는 게 공기인 것만큼 당연한, 잠깐, 너도라니?"


씨발, 맨시티? 진짜? 얘기가 나와서 하는 소린데 겜은 정말 좋은 친구지만 축구 얘기를 하기엔 다소 맥이 빠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 한적한 바닷가 동네에서 다른 맨시티 팬을 찾기가 쉬운 일도 아니고, 그냥 혼자 티비로 경기 보면서 열이나 올리는 정도지. 근데 얘가 지금 맨시티 얘기를 꺼냈다. 최근 중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식사를 완성해 가져오다가 이 대화를 들은 겜이 하하 웃으며 내가 얼마나 맨시티를 좋아하는지를 늘어놓았고(반쯤 푸념에 가깝긴 했다) 그 얘기를 들은 물귀신은 정말 기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진짜, 진짜? 대꾸하는 것이다. 나도 티는 안 냈지만 할 말이 많았다. 존나 전설같은 맨시티의 행보에 대해 어떻게 얘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겠는가. 겜은 아침식사가 길어지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내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덩달아 기뻐해주는 그 상냥함을 잘 알고 있었다. 기실 내게 축구 이야기로 더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를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노엘, 이 친구 이름이 뭔데?"


"물귀신…… 아니지, 나도 몰라."


그러고 보니 이제껏 이름을 안 물었다. 겜의 적절한 지적이 있은 뒤에야 놈의 이름이 뭔지 조금 궁금해졌고, 또 너무 자연스레 놈을 물귀신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질문을 들은 물귀신은 아까 처음 봤을 때처럼 묘한 표정으로 물귀신…? 하고 잠깐 중얼거리다 눈썹을 슥 들어올리곤 대답한다.


"갤러거. 리암 갤러거야."



* * *



아침을 먹으며 나눈 이야기는 생각보다 놀라운 사실들이 산재해 있었다. 먼저 리암 갤러거는 이름만 들으면 아는 기업의 막내 아들이라는 것, 미디어에서 자꾸 잘난 형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기사를 내는 바람에 조금 짜증이 나 있고, 그 여파로 홧김에 가출해서 바닷가에 왔다가 지갑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됐는데 엎친데 덮쳐 바닷물에도 빠지고 말았다, 그런 서사였다. 지갑은 어젯 밤에 잃어버렸다는데 그런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돌아가서 집에서 택시비나 가져올 것이지 왜 미련스레 바닷가에 버티고 있었냐 물었더니 그냥 밤바다가 보고 싶었단다. 아직까지 새벽 바람은 찬데 미련스레 밤을 샜다가 물에 빠져 진이 다 빠진 것 같았다. 춥고 배고프고 저체온증으로 얼어 죽을 것 같으니 도움을 청하긴 해야겠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주변에 사람도 보이지 않아 정처 없이 걷다가 날 봤다고.


"그래서, 이제 집에 돌아갈 거야?"


"그게……."


이제 배도 채웠고, 잘 마른 옷도 입었고, 돌아가겠다고 하면 차비를 빌려줄 수도 있다. 하지만 영 뭔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대답을 미루는 걸 보니 리암은 아직 가출을 끝낼 마음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잠깐 끙 소리를 내며 입을 쭉 빼더니, 이내 몸을 옆으로 틀어 겜에게 작게 귓속말을 했다. 얼씨구, 앞에 사람 두고 귓속말 하는 건 무슨 예의야? 그러나 더 어이가 없는 건 리암의 속삭임을 듣고 표정이 모호해지더니 이내 깔깔 웃음을 터뜨리는 겜의 태도였다. 겜은 정말 재밌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숨 넘어가게 웃어대다가, 진짜 숨이 넘어가서 뒤지기 직전에 간신히 식탁을 탁 짚은 채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짧게 덧붙이길 노엘 허락만 있으면 난 상관없어, 그러는 걸 보면 대충 내용 짐작이 가긴 하지만. 심드렁하게 무슨 얘기냐 물으니 리암이 이제는 내 손을 꼭 붙잡고 애원한다.


"나 여기 좀만 더 있다 가면 안 될까? 진짜 존나 심각한 척 하고 가출해서 지금 들어가면 개망신이란 말야!"


"아니, 뭐……."


이 얘기를 듣고 그렇게 웃을 일이야? 겜에게 알 수 없단 표정을 지어준 뒤 잠깐 생각을 해 보면, 뜬금없이 낯선 손님이 생기는 일인데도 그렇게 성가시단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게 너무 신기하고, 또 다리가 이 모양이 된 이후(그러니까 내 온 평생을 말하는 거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인연이 생기는 일이 드물었으니 덩달아 기분이 들뜨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손님 방도 있겠다, 받아들일 그럴 듯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매정하게 내칠 이유가 있지도 않았다. 겜도 상관없다고 했으니 선심 한 번 쓴다 치지 뭐.


"저기가 빈 방이야. 짐이…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아무튼 저기 써."


꾸준히 청소를 해주긴 하지만, 빈 방이 된 지는 좀 오래인 것 같으니 먼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손님인데 먼지 쌓인 방에 재울 수는 없지. 확인을 위해 몸을 일으킨 뒤 손님 방까지 걸어가려는데.... 그냥 그러지 말 걸 그랬다. 아침엔 별로 움직인 것 같지도 않은데 두 발자국을 채 떼기도 전에 하체에 힘이 풀려 다리가 꺾였다. 혼자 있을 때 넘어져도 쪽팔려 뒤질 것 같은데 이 좆같은 게 하필이면 지금. 그냥 휠체어 타고 갈 걸, 후회해 봐야 내 몸은 일 초 뒤 바닥에 꼴사납게 처박힐 운명이었다.


둔한 고통을 예감한 뇌가 내 눈을 감겼고, 어깨가 잔뜩 움츠러든 채로 추락을 기다리는데… 이상하게 아무 느낌이 안 든다. 뭐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용기를 내 눈을 뜨자, 왕창 놀란 표정을 한 리암이 내 허리에 팔을 두른 채 병신이 꺾인 몸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설마 그 순간에 날아와서 날 붙잡은 거야?


"고맙…다? 이제 이거 놔라…?"


"말이 왜 그래?"


"둘 중에 무슨 말을 할지 고민돼서 둘 다 했어."


"그럼 처음 거를 들은 걸로 하자."


흐흥. 당당한 놈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고 그래라 한다. 어쨌든 진짜 고맙긴 했으니까. 비록 놈의 방을 살피기 위해 움직이다 이 사단이 난 거지만 붙잡아 줬으니까 고마워 해야 한다는 건 나도 안다. ...그치만 이제 겜이 휠체어를 갖다준 걸 얘도 나도 다 알지 않아? 인제 이 허리 좀 놔줬으면 좋겠다. 어째저째 이것 좀 놓으라고 다시 말할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무슨 공주님 마냥 놈한테 계속 안겨 있게 돼서, 지푸라기라도 잡듯 겜에게 도움을 바라는 눈길을 보냈더니…….


"여기서 이러지 말고 둘이 방 잡지 그래?"


그런 소릴 한다. 얜 아침 먹은게 체했나. 무슨 생각 하는 거야?


"헉, 존나 좋아! 그래도 돼?"


얼씨구, 너도?



* * *



정신 없는 하루를 보낸 날 밤, 정말 행복한 꿈을 꿨다. 꿈 속에서 나는 또 다시 인어였고, 희고 가느다란 다리를 가진 채 왕자의 품에 안겨 백사장 위를 서툴게 걸었다. 감당할 수 없을만큼 거대한 기쁨이 내 마음을 파도처럼 휩쓸어 소년이 내게 주는 사랑을 와르르 묻힌 채 바다로 돌아가는 듯했다. 바다에 빠져버린 소년의 사랑을 아까워 하기도 전에 내 입술과 이마, 콧등, 온 뺨에 따뜻한 키스가 쏟아져 내려왔고 파도는 계속해서 그것들을 삼켜 짜고 달큰한 향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푸르고 넓은 바다 모든 곳에 그의 사랑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바다는 내 고향이었고 피와 살과 영혼을 진주로 품어준 나 자신이었음을 내 마음속에 덩달아 가라앉은 사랑들로 다시금 확인하게 된 것이다.


잠에서 깬 뒤 한참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도 그 탓이었다. 항상 아픈 꿈을 꿨잖아. 그를 잃고 난 뒤 바닷속에서 보낸 영원하고 무감각한 시간들, 예쁜 과거를 곱씹으며 모랫바닥에 진주를 심던 기억들만 늘어놓다가 왜 이제 와서 이런걸 보여주는 거야? 턱 끝까지 답답하게 차오른 숨이 뱉어질 생각을 않는다. 모든 게 멈춘 것 같았다. 심지어는 공기 중에 떠있는 먼지까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짧지만 영원한 침묵이 가득했다. 정말로 왜 이런 걸 또 보여주는 거야, 이제 다 소용없는 다른 삶을 살게 된 마당에 왜 이제 와서.


"뭐야, 씨발……."


그렇게 멈춰있다 한계까지 몰린 숨통 탓으로 컥, 컥 하는 괴로운 기침을몇 번 내뱉을 즈음에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직 해도 뜨기 전인 새벽인지 창문 밖이 온통 새까맣고 고요했다. 들리는 소리라곤 희미하게 울려퍼지는 파도 소리, 내 것인 무거운 한숨소리, 그리고 옆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숨소리가… 아니, 씨발, 잠깐. 뭐?


"뭐?"


요 몇 년 놀랄 걸 어제오늘 몰아서 다 놀라는 것 같다. 해도 해도 너무 몰아서 놀라는 것 같긴 한데, 누가 있으면 안 될 내 옆자리에 누군가 누워서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자고 있는 걸 발견하면 만사가 태평한 겜이라도 기절할 만큼 놀라고 말 거다. 당장 악 소리가 튀어나오려는 입을 틀어막고 침착한 채 아래를 살피니 범인은 다름 아닌 내가 주워왔던 리암 갤러거라는 놈이었다. 이 새끼는 지가 쓸 방도 내 줬구만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사실 이 놈이 이상한 건 오늘 오후 내내 봐왔던 놈의 행동으로 어느정도 알고 있긴 했다. 방을 내주고 나선 바다를 구경하든 모래 장난을 치러 가든 너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하루종일 나를 졸졸 따라다녔던 정신 나간 것 같은 놈이었으니까. 조금 비약해서 내가 화장실 갈 때를 빼곤 어디든 따라다녔다. 물을 뜨러 부엌에 가도 따라오고,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열러 갈 때도 따라오고, 바닷가에 다시 바람을 쐬러 갈 때도 따라와서 내 옆에 찰싹 붙어있었단 얘기다. 하다 하다 너무 어이가 없어 겜한테 이 새끼 좀 떼어 달라고 말도 해 봤는데 전혀 들어먹히질 않았다. 내가 때려서 걜 없애기라도 하겠어, 설마? 그냥 적당히 받아 줘, 하던 겜의 태평한 한마디에 내 속만 터졌다 그 말이다.


하지만, 암만 해도 해도 그렇지 침실까지 따라왔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자는 시간 만큼은 제발 나를 혼자 있게 해주지 않겠냐는 간절한 부탁에 놈도 어느정도 수긍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방에 불을 끄자 순순히 자기 침대에 눕기에 알아들은 줄 알았더니 기어코 내 옆에 와서 붙어있는 걸 보면 모든게 나만의 착각일 뿐이었다.


"존나 이상한 새끼…."


하도 어이가 없고 얄미워 색색 고른 숨을 내쉬는 놈의 입을 콱 틀어쥐고 막아버렸다. 보는 것만큼 부드럽고 얄썅한 입술이 억세게 눌러 닫히자 놈의 짙은 눈썹이 슬그머니 찌그러진다. 쌤통이다, 이 자식아. 하지만 짖궂은 심술도 놈의 투정 섞인 칭얼거림에 재빨리 끝을 보이고 만다. 입술을 틀어 잡힌 리암이 끄응 소리를 내며 내 허리를 좀 더 세게 끌어안는데 그 모습이 너무… 모르겠다. 내 기분을 또 이상하게 만들 것 같아서 털어내듯 손을 놓았다.


이대로 뺨을 한 대 친 다음 깨워서 놈의 방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나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이 새끼는 정말 이상한 놈이다. 이제야 말이지만 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럿이 부대끼며 지내는 것보단 혼자가 편했고, 마침 다리가 이렇게 태어난 걸 핑계로 평생을 혼자에 가깝게 살아오기도 했다. 겜을 제외하면 친구랄 사람도 딱히 없는데 그런 겜 마저도 이런 식으로 같이 자 주겠다고 말하면 내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제 처음 본 놈이 갑자기, 정말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서 내 모든 방어기제를 무시한 채 여기에 있다. 이게 너무 어이가 없고 신기했다. 그리고 수 많은 의문이 그 위에 눈처럼 쌓인다. 어째서 이 낯선 놈이 여기 이러고 있는 게 싫지 않은 걸까? 나는 왜 지금 이 새낄 깨워서 쫓아내는 대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는 걸까. ……나는 왜 지금 평생 들은 적 없는 낯선 노래를 자장가처럼 흥얼거리고 있는 걸까?



* * *



아침에 일어난 리암은 의외로 다른 말이 없었다. 변명을 하려고 들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도 자기가 왜 내 침실에 있었는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그게 뻔뻔한 거짓 행세건 아니건 굳이 따지고 들 생각은 없어서, 그냥 또 그러지 말란 소리를 끝으로 새벽의 작은 소동은 끝을 맺었다. 한 가지 걸리는건 겜의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방에서 리암과 내가 같이 나오는 걸 본 겜 표정이 썩 심상찮았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늘 그렇듯 잘 모르겠지만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제발 이상한 오해 하지 말라고, 침대에서 같이 잠만 잔 거라고 구차한 해명을 하다가 상황이 더 악화됐다는 건 그냥 잊고 넘어가기로 하자.


아침의 그 난리가 진정된 이후, 리암에게 오늘은 뭘 할건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딱히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급하게 식사를 해치운 리암은 곧장 겜의 샌들을 빌려 신고 바다로 뛰쳐나갔던 것이다. 내 신발을 빌려주려고 했는데, 놈은 내 발을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말도 없이 겜에게 고개를 돌렸었다. 망할 새끼. 리암더러 계획을 묻긴 했지만, 어쨌거나 나도 마땅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리암을 향해 불합리한 앙심을 품은 채 해변을 향해 난 창으로 놈이 하는 양을 구경했다. 바다를 구경하러 왔다는 게 진짜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물 만난 개새끼가 따로 없다. 리암은 한 시간 가까이 파도 치는 하얀 백사장을 내달렸고, 구석에 박힌 작은 바위를 들춰보는가 하면 가만 쭈그려 앉아 모래바닥을 뚫어져라 살펴보다 땅을 파기도 했다. 땅은 왜 파냐? 저거 완전 미친 새끼다. 내가 어이 없는 표정으로 저 꼬라지를 쳐다보고 있으니 겜도 슬그머니 구경 왔다가 사이좋게 할 말을 잃었을 정도로 놈은 미친듯이 온 바다를 만끽했다. 그러던 놈이 밀려오는 파도에 떠밀려온 뭔가를 주웠고, 바다 쓰레기를 이리저리 관찰하다가 돌연 해맑은 얼굴로 집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다. 저 또라이 새끼가 바다 쓰레기를 주워 집으로 달려오고 있다. 내가 달릴 수만 있었으면 당장 현관으로 가서 문을 잠글텐데, 안타깝게도 내 휠체어가 채 부엌에 닿기도 전에 놈이 벌컥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쓰레기야!!"


"뭐? 다짜고짜 왜 나 욕 해!"


"니 손에 든 게 쓰레기라고! 바다 쓰레기 우리집에 주워오지 마, 이 시발놈아."


대체 저렇게 신난 표정으로 주워온 게 뭔지 궁금해서 놈의 손을 봤는데, 봐도 도무지 모르겠다. 뭔가 하얀 레이스에 끈이 달린 것 한 쌍인데, 한 쌍인 걸 봐서 어른의 티팬티도 아니고 용도가 뭔지 짐작이 안 간다. 쓰레기 소리에 일단 울컥했던 리암도 내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알아차렸는지 또 헤쭉 웃는 얼굴이 됐다. 밸도 없나, 뭐가 좋아서 저렇게 웃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쟤랑 엮이면 모르는 게 너무 많이 생긴다.


"아, 이거… 이거 내가 모래밭에서 주운 건데, 너한테 채워주고 싶어서 가져왔어. 해주라, 노엘."


"하겠냐? 하겠어? 나는 그거 뭔지도 모르겠거든."


"이거 이상한 거 아니고 발에 하는 거야. 보자마자 그냥 네 생각부터 나서 가져왔단 말야. 응, 노에엘, 한 번만!"


놈이 손에 든 것을 덜렁대며 성큼 다가왔다. 마침 실내화만 신은 맨발인 게 나에게는 커다란 불행이고, 놈에겐 행운이었다. 저 놈 눈을 보니 저 축축한 허연 것을 진심으로 내게 채울 작정인 것 같다. 존나 축축하고 찝찝하겠지, 저 시발놈이 진짜….


"나 아직 된다고 안 했거든?! 아 씨발, 그거 주인이 무좀이라도 있었음 어쩔건데! 치워, 치워!"


리암 갤러거는 씨발놈이다. 벌써 내 왼 발에 빌어먹을 축축한 하얀 레이스가 들러붙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힘차게 달릴 수 없는 내 다리를 원망했다.


"괜찮아! 내가 바닷물에 잘 씻어왔어!"


이 좆같은 새끼!


"눈으로 욕하네……."


옆에서 이 모든 꼬라지를 지켜보던 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이새끼 좀 말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자신이 없다며 슬그머니 발을 빼는데, 저거 다 구라인 거 안다. 놈도 내 고통을 즐기고 있었다. 이 집에 내 편은 아무도 없다. 거짓말처럼 내 오른발에까지 축축하게 들러붙은 이 레이스 쪼가리가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양 발이 축축하고 찝찝하다. 내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하얗고 순결한 발목용 티팬티 두 쌍이 나를 좀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은(아님 모르는 척 하는 중이든지)리암은 정말 뿌듯한 표정으로 내 무릎 위에 입맞췄고, 내가 무릎을 들어 놈의 강냉이 몇 개를 뽑아볼까 고민하는 사이 나를 덥석 붙잡아 일으키기까지 하는 것이다.


"봐봐, 잘 어울리고 예쁘잖아. 기왕 발 젖은 김에 나랑 물놀이 하고 놀자!"


놈의 진정한 목적은 이거였는지도 모른다. 한 시간을 혼자 미친 망아지처럼 놀았더니 질린 거지.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바닷물에 들어가본 적이 없었다. 내가 거리낌 없이 몸을 담그는 물이라곤 욕조에 받은 목욕물이 다다. 내 다리가 이 모양인데 바닷물에서 깔짝대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 때는 내 목숨에 참사가 일어나니까, 우습지만 바닷가에 사는 주제에 한 번도 바닷물에 발을 담근 적이 없었다. 대신 백사장에 앉아서 그림의 떡 보듯 쳐다보기는 무지 쳐다봤지.


"나 다리가 이래서 바다에 들어가본적 없어. 너도 어제 어떤지 봤잖아."


집 안을 돌아다닐 때도 예고 없이 비틀비틀 쓰러지는 몸으로 바다에 들어갔다간…. 말을 더 길게 하지 않아도 대충 알아들은 듯 리암이 잠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묻기를, 그래도 들어가보고 싶긴 했지? 그러면 거기에는 거짓 없이 그렇다고 대답을 한다.


"그럼 내가 도와줄게. 가서 다리까지만 담가 보자."


"나 바닷물 먹기 싫은데……."


"도와준다니까, 봐봐, 여기. 나한테 업혀."


얘가 농담을 하나 싶었는데 진심인가 보다. 이쪽으로 등을 보인 채 앉은 리암이 고개만 돌려 얼른, 얼른 하고 목소리를 높여 재촉했다. 기실 이렇게까지 나오면 더 거절하기도 계면쩍다. 솔직히 말하자면 구미가 돋지 않는 것도 아니고. 언제고 바닷물에 발을 담가보고 싶긴 했다. 휠체어를 밀고 그 지랄을 할 수 없으니 이제껏 없는 셈 쳤던 욕심이지만 이렇게 열과 성을 다 해 도와준다는 놈이 있는데 거절할 이유는 또 뭔가.


"놓치면 진짜 죽일 거야…."


그래도 이 나이 먹고 남의 등에 업히긴 좀 부끄럽기도 하고. 괜히 불퉁한 표정으로 놈의 등에 가슴을 댄 채 힘을 빼자 내 다리를 단단히 붙드는 놈의 손이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다. 그럼 괜한 걱정 않기로 하지 뭐. 알게 모르게 허벅지 안으로 파고드는 손길에 놈의 등짝을 아프게 한 대 쳐주고 난 뒤, 놈의 등에 딱 달라붙었던 상체를 조금 뒤로 내뺐다. 심장이 뛰어도 너무 세게 뛴다. 괜히 들뜬 것처럼 보일 거 아냐. 이 소리가 리암한테 안 들렸으면 좋겠다.


리암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가뿐히 나를 업은 채 바닷가로 향했고, 나는 생전 처음 바닷물에 다리를 담근 채 발가락을 옴찔거렸다. 바닷물은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좀 더 따뜻했고, 퍽 포근하게 내 몸을 감쌌다. 하지만 멀쩡하지 못한 다리 탓에 막연한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 리암의 등을 바짝 끌어안게 만들었다. 그러면 얜 그게 좋다고 헤헤 웃으며 찰박찰박 물을 가르고 앞으로 걸어간다. 이제 바닷물은 리암의 허리께까지 올라와 있었고, 나도 허벅지가 온통 젖어들었다. 신기한 마음에 가만히 아래만 쳐다보고 있을 즈음엔 이 새끼가 심심해졌는지 장난을 걸어오기도 했다.


"아, 시발! 하지 마! 바닷물 먹기 싫다니까?"


"먹어봤어? 맛이 그렇게 나쁘진 않은데."


그 장난이 내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어서 문제긴 했지만. 놈이 순간 균형을 잃은 것처럼 몸을 기울여서 꼼짝없이 물에 빠지는 줄 알았는데, 기민하게 내 다리를 고쳐 잡고 낄낄 웃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이건 장난이었던 모양이다. 이 시발놈이 진짜! 당장 걸을 수 있을 것 같을 때 여기서 내려서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다리를 워낙 단단히 붙들려서 리암의 도움 없이는 바닥에 발을 딛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얘한테 내 목숨줄을 존나 통으로 맡긴 거다. 기우뚱 기우뚱, 내가 불안해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놈은 계속해서 짖궂은 장난을 계속 쳐 댔다.


"아, 그러지 말라고!! 떨어뜨리면 너 진짜 죽인다!"


"으하하, 나 갑자기 입발린 칭찬이 너무 듣고싶은데 어쩌지?"


이 새끼를 고통스럽게 죽이자.


"존나 위대하고 얼굴이 천재이신 리암 갤러거 님, 제발 똑바로 걸어주세요. 됐냐, 이 씨발놈아!!"


"씨발놈은 당신을 더 업고있을 수 없는 것 같다……."


"으흐흑, 이 씨발새…… 리암 님, 제발 제대로 좀 걸어라, 응? 무섭단 말이야."


진심이 섞인 칭얼거림을 덧붙였더니 드디어 내 간절한 마음을 알아 들은 모양이다. 얼굴이 천재, 흐흥, 그런 소리를 중얼거리며 흐뭇한 목소리가 된 리암은 드디어 걸음걸이를 똑바로 고쳤고, 나는 평온하게 물 구경을 마칠 수 있었다. 기실 그 뒤로는 대화가 많지 않았다. 대화가 있기 보단 오히려 퍽 조용한 게, 리암도 분위기를 즐기는 듯했고 나도 그게 나쁘지 않았다. 가슴팍에 맞닿는 놈의 등과 그 따뜻한 온기가 잔잔한 파도같은 안정을 가져온다. 그건 원래 내 것이었던 것처럼 익숙했으며 어쩐지 반갑게 느껴지는 구석도 있었다. 내게는 온통 처음인 경험들인데, 왜 이런 감정들이 느껴지는 걸까? 또 다른 굵직한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리암이 조심스레 발을 매만지는 손길이 그냥 좋았다. 잔잔한 파도소리에 박자를 맞춰 흥얼거리는 놈의 콧노랫소리도 그냥 좋았다. 눈을 감고 찰랑거리는 물결을 느끼는 게 기분 좋았다. 도통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가 없는데 그냥 다 좋았다. 이전에 없던 일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이 모든 게 리암과 엮인 일이기 때문일까. 낯설어야 할 네가 왜 이렇게 낯설지 않을까?



* * *



그 날 이후 리암은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고 빠르게 내 일상 속에 녹아들었다. 놈은 여전히 새벽마다 내 침대 속에 파고들었고, 그러기를 일주일을 넘긴 시점에서는 그냥 내 방에서 같이 잠들잔 소리도 하게 됐다. 빈 침대보다 따뜻한 인간 난로가 있는 편이 잠들기에 더 좋다는 사실을 안 까닭이었다. 그런 우리 둘을 오묘한 눈으로 보던 겜도 이제는 모든것에 익숙해진 듯 별 다른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에 아주 은밀하고 결연히 콘돔 한 줄을 꼭 쥐어주기에 그런 거 아니라고 삼십 분을 얘기해야만 했다. 아량이 넓어진 건 좋은데 너무 오픈했다, 겜. 그리고 반나절 뒤, 겜의 그 기행을 전해들은 리암은 정신 사납게 뛰쳐 나가 내가 기어코 거절했던 콘돔 한 줄을 받아들고 와 침대 옆 서랍에 얌전히 넣어놓았고, 나는 리암과 겜의 등을 존나 아프게 한 대씩 때렸다. 이 사랑스러운 등신들같으니.


동시에 내 꿈의 레파토리도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나는 항상 행복했다. 왕자였던 소년과 백사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손수 무릎을 꿇어 내 발에 하얀 앵클릿을 신겨줬다. 그러고 보니 리암이 주워왔던 티팬티같은 게 그것과 같은 종류였던 모양인지 보기에 낯설지 않았다. 꿈 속에서도 나는 걷는 게 영 미숙해서 맨발로도 비틀비틀 걸어다녔는데 불안한 표정으로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소년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걸음이 꼬여 조금 주춤거리기만 해도 옆으로 후다닥 달려와 팔짱을 껴주는 다정함이 싫지 않았다. 결국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바닷물 위로 넘어지는 사고를 친 내가 우스웠고, 그런 나를 번쩍 안아든 채 신랑과 신부가 한 뭉치가 되어 진행된 결혼식이 즐거웠다.


꿈 속에서 결혼하고 일어난 다음날, 눈 앞에는 역시나 리암이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나를 안은 채 잠들기를 즐겼고 나도 그게 좋았다. 온 평생 빈 것 같던 마음 한 구석에 따뜻한 바닷물이 차오르듯 묵직한 충만함을 느꼈다. 리암과 내가 끌어안으면 원래 내 것이어야 했던 게 드디어 자리를 잡은 것처럼 모든게 꼭 들어맞았다. 손 하나 찔러넣을 틈 없이 가깝게 들러붙은 그의 몸이, 숨을 쉬느라 오르내리는 가슴팍이 설탕을 탄 우유보다 더 달콤한 잠을 가져다 준다.


또 어느 날 꿈에서는 소년이 남자가 되었고, 왕이 되어 있었다. 그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내 껍데기에 기뻐했다가, 절망했다가, 초조해 했다가 끝내는 화를 냈다. 사랑을 말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달큰했지만 점점 묵직해지는 소유욕과 초조함이 가려짐 없이 내게 와 닿았다.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내가 사는 긴 시간동안 평생 그와 함께할 수 없음을 나는 잘 알았다. 울적한 얼굴로 내 품에 고개를 파묻고 칭얼거리는 그를 다정히 끌어안은 채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즈음 해서 꿈이 이어지지 않았다. 찝찝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봐도 더 보이는 게 없으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눈을 뜨면 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 것도 여전했고, 무리해서 떠올려 보려고 하면 온통 까만 그림자를 뒤집어 쓴 것 같은 괴랄한 모습으로만 상상이 되어 그냥 다 관두기로 한지가 이십 년은 더 되었다. 하지만 이제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아니, 울긴 하지만 나를 꼭 끌어안고 쉬 쉬 달래주는 리암 덕분에 재빨리 울음이 그쳤다고 하는 쪽이 더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언제부턴가 리암은 항상 울면서 잠을 깨는 나를 눈치 챈 듯했고, 그 사실을 안 순간부터 매일을 나보다 먼저 눈을 떠 다정한 목소리를 속삭였다. 그러면 꿈 속 그의 얼굴 위로 리암의 모습이 덧씌워지고, 그 둘이 같은 사람이 아님을 알면서도 너무나 커다란 안정이 물 밀듯 나를 다독여 눈물이 마르고 마는 것이다. 고마워, 리암. 울음으로 진이 빠진 채 일어나지 않는 일은 생각보다 내 아침을 크게 바꿔놓았다. 난 그게 고마워서 리암에게 인사했고, 리암은 별 거 아니야 하며 내 이마에 키스했다.


겜은 가끔 콘돔이 떨어지지 않았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아직 하나도 쓰지 않았다고 말했더니 리암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한 데 묶이기 싫어서 밀크티를 핑계로 부엌에 도망갔던것 같다. 어쨌든 겜도 리암이 있는 삶을 달가워 하는 것 같았고, 뭣보다 더이상 내게 축구 이야기로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너무 고마웠는지 리암에게 맨시티 모자를 사주기도 했다.


결국 이 장황한 이야기의 요지는, 겜과 나 모두 리암을 자연스레 우리 식구처럼 받아들였단 사실이다. 어느 순간부터 리암이 언제 가출을 끝낼 것인지 궁금하지가 않았다. 리암은 아침이면 당연스레 내 옆에 있었고, 내가 바닷바람을 쐬러 백사장에 나갈 때도, 점심을 준비할 때에도, 잘 준비를 하고 이를 닦을 때에도 항상 내 곁에 있다. 인정해야 했다. 그는 이미 내 삶의 반을 끌어안고 있었다.



* * *



오늘은 날이 썩 맑았다. 그리고 바람이 셌다. 리암은 최근 근처에 있는 서핑 교실에서 파도 타는 법을 배우고 있었고, 나는 그게 다 무슨 지랄이냐 놀리면서도 은근히 그것을 응원했다. 들썩이는 파도 위로 넘실넘실 떠다니는 리암은 보기에 썩 멋있고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하루 쉬었으면 했는데…. 볕은 좋았지만 아침부터 세게 부는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대단한 기상청같은 건 아니지만, 인생의 거지반을 바다를 지켜보며 지냈으니 어딘가 불안한 냄새를 맡는 법도 잘 안다. 파도가 유난이 모진데 괜찮을 거라고 부득부득 우기는 리암이 조금 걱정된다. 한 번만 더 말려 볼 걸. 뒤늦게 걱정을 해 봐야 리암이 이미 바다 위에 있으니 하느니만 못한 걱정이다. 백사장 위에 돗자리를 깔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별 사고가 없기를 비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것의 다였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 감이 안 좋아. 불안하다. 많이 불안하면 나오는 버릇이 도졌는지 나도 모르게 또 손톱을 딱딱 물어 뜯고 있었다. 너덜너덜한 게 수습도 안 될 정도로 물어 뜯겨 있는 걸 보니 정말 뭐가 잘못되긴 한 것 같다. 그러니까, 도무지 안 되겠다. 읽히지도 않던 책을 덮어두고 리암더러 그만 돌아가자고 소리를 치려던 순간…….


"안 돼… 안 돼, 안 돼, 리암!!"


이건 말도 안 된다. 잠깐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전에 없을 정도로 커다란 파도가 나타나 리암을 덮쳤다. 좀 전부터 수상하다 싶더니, 유난히 센 바람이 불러온 참사였다. 몇 없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뭍으로 달아난다, 하지만 서핑 보드와 함께 파도 위에 떠있던 리암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직 저만한 파도를 만나본 적 없던 리암은 추락하듯 아래로 떨어졌고, 그 모든 걸 지켜보는 순간이 영겁같이 느껴진다. 안 돼, 안 돼. 구해야 하는데, 뭐부터 하면 좋을지 생각이 잘 되지 않았다. 벌벌 떨리는 손을 어쩌지도 못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가진 채 바다를 살폈지만 리암은 저 물살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동시에 내 발이 바다를 향해 달음박질을 시작한다.


뛰어본 적 없던 병신같은 다리가 후들거리다 꺾이기를 반복해도 이를 으득 문 채 절대 넘어지지 않게 했다. 뭍을 향해 도망가는 사람들을 스친다. 요란한 비명이 등 뒤로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그들의 반대 방향으로 달려 뒷 일은 생각도 않은 채 넘실거리는 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번엔, 이번 삶에는 네 마지막에 함께하게 해 줘. 나도 데려가, 제발 혼자 두지 마. 겨우 만났는데! 나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절규가 가슴 속을 긁는다. 짜고 차가운 물길이 내 숨을 틀어막는 고통을 짐작하며 리암을 살피면 점점 더 간절한 마음이 내 눈과 귀와 공포를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모질고 차가울 것 같던 물 속이 거짓말처럼 편안했다. 리암을 향해 팔을 휘저어 나가는 움직임이, 물을 박차는 다리가 내 것이 아닌 것마냥 가볍고 능숙한 움직임을 가진다. 이 낯설은 익숙함에 당황할 틈도 없이 빠르게 물살을 갈라 리암의 몸을 붙잡는데,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TV에서 본 수영선수도 물 속에서 이렇게 움직이진 못한다. 그것도 이렇게 파도 치는 물 속에서는. 그러면, 나는 뭐야? 리암을 끌어안은 채 왔던 것만큼 빠르게 뭍에 다다를 때까지도 이 영문 모를 익숙함이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안 돼, 안 돼, 리암… 제발, 리암……."


하지만 여기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빠르게 도착하긴 했지만 이미 많은 물을 들이킨 리암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 벌벌 떨리는 서툰 손으로 언젠가 익혔던 응급처치를 시도한다. 고개를 젖히고, 숨을 불어넣고, 아니, 그 전에 배를……. 안 돼, 어쩌면 좋아. 리암을 잃는다는 생각에 눈 앞이 새하얗게 변한다. 리암의 몸을 꾹꾹 누르는 팔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이질감이 들다가, 이 가혹한 절망감에 기시감을 느끼고 숨을 멈췄다.


"이번에는. 이번 삶에는…."


나는….



* * *



나는 네 첫사랑, 네 하나뿐인 신부였다. 억겁을 돌고 또 돌아 너를 찾아내려 했던, 바닷속에 가라앉은 네 사랑에 잠들지 못했던 미련한 너의 인어다. 모든 게 거짓말처럼 생각난다. 꿈으로 조금씩 엿보던 과거의 기억들이 밀물처럼 내 머릿속에 밀려들었다. 결국 너야, 결국 너였어. 평생을 까만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던 그의 모습이 이제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너구나, 리암. 꿈 속에서 더 보여주지 않던 이야기의 나머지가 내 숨통을 틀어막는다. 나를 잃기 싫어 보이던 애증 섞인 네 눈물이 너무 마음아팠다. 내가 우는 건 괜찮았어, 하지만 네가 흘리는 눈물이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으니, 죽지 않기 위해 꿈에서도 보여주지 않았구나. 네가 흘리는 눈물은 진주가 되지 않고 거짓처럼 투명하게 사라져 내 가슴을 찢었다. 사랑해, 리암. 사랑해. 그렇게 말하는 나를 믿어주지 않기에 영원한 삶을 살고 또 살아 이렇게 너를 찾아왔잖아.


그런데 왜 눈을 감고 있어? 예쁜 목소리로 늘 하던 말을 해 줘, 리암. 또 네가 가는 모습만 지켜보게 만들 거야?



* * *



감당할 수 없는 기억에 살가죽을 쥐어 뜯으며 절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울다가 죽어버리든 허탈하게 웃든, 모든 건 리암의 눈을 뜨게 만드고 나서 있어야 할 일이었다. 무리하게 헤엄쳤던 다리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힘이 축 빠진 채 늘어졌지만, 리암의 가슴팍을 누르고 숨을 불어넣는 모든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움직여야 할 일이 생기면 모래밭을 기어서라도 움직였고, 팔이 후들거렸지만 아예 못 쓰게 되더라도 지금은 안 된다는 마음으로 악을 썼다. 내 입술이 차가운 그의 입술과 맞닿아 숨을 불어넣는다. 그 입술이 너무 차가워 자꾸만 울음이 났다. 새벽에 내 이마에 닿던 그 따뜻함이 없다. 겁이 났다. 널 잃을 수 없어, 리암, 제발. 그 많은 시간을 돌아 겨우 너를 찾았는데, 또 너를 내 눈 앞에서 보낼 수 없어, 신이 있다면 내게 이럴 수 없어……. 제발 떠나지 마, 리암. 조각난 유리 위로 온 몸이 쓰러지는 듯한 고통이 나를 찔렀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홍수에 절규하듯 눈물을 터뜨리면서, 다시 한 번 리암의 흉부를 꾹 누를 때다.


"컥, 컥…!"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절규에 응답하듯 마침내 어떤 반응이 있었다. 가득 삼켰던 바닷물을 울컥 토해낸 리암이 힘겹게 눈을 떴고, 가물가물한 시야를 다잡아 이쪽을 쳐다본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누구에게 올리는 건지도 모를 기도를 끝 없이 되뇌며 리암의 손을 꼭 붙잡자, 미약하지만 확실히 맞잡는 듯한 느낌이 들어 더 커다란 울음이 터졌다. 아, 너를 잃는 줄 알았어, 아무것도 못 하고 너를 잃는 줄 알았어…. 시야를 뿌옇게 흐리는 눈물이 굵게 방울져 뺨을 타고 흐른다. 그러면 그것을 다정하게 닦아주는 커다란 손이 있어 나를 더 울게 만들었다.


"이제 진주가 되지는 않는구나."


"으, 흐윽……, 끅, 그딴 거, 필요 없… 뭐……?"


그걸 네가 어떻게…?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 기분이다. 너무 놀라 눈물이 멎었다. 뿌옇게 시야를 가리던 장애물이 사라지자 리암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어서 눈만 깜빡이는데, 이어지는 리암의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 같기만 하다.


"바보야, 널 아프게 만든 새끼가 뭐가 좋아서, 뭐가 좋아서 쉬지도 못하고 날 찾아…."


"…온 바다에 네 사랑이 가라앉아서 잠들 수가 없잖아. 네가 못 자게 한 거야. 보고싶었어, 너무 보고싶어서 나는, 아, 리암…."


파도가 몰아치게 버려 둬, 네 사랑 속에 가라앉아 죽을 테니까. 그리고 또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 너를 찾고, 또 너를 찾고, 그 다음 삶에도 너를 찾고, 나는 파도에 휩쓸린 게 아니다. 물 아래에 가라앉아 너를 찾아왔던 거다. 이 긴 말을 꺼낼 엄두가 내지 않아 고개만 가로젓고 있자, 실낱같이 작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리암이 또 한 마디를 속삭였다.


"나를, 내가 한 모든걸 용서해 주는 거야? 나는… 너는 날 아직…."


네게 받고싶은 것 중에 사과는 없었다. 모든걸 기억하는 너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지독한 욕심을 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 커다란 걸 내게 안겨주고 마는 네게 용서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내 삶의 평생을 걸쳐 꾼 꿈 속에서 나는…….


"널 한 번도 미워한 적 없어, 리암. 이거 봐. 영원을 다시 살아서 널 찾아왔잖아."


저 멀리서 희미하게 구급차 소리가 들린다. 조금 더 고개를 드니 사색이 된 채 달려오는 겜이 보이고, 들 것을 든 채 달려오는 사람들도 보인다. 다시 고개를 내렸을 때 리암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내 손을 꼭 붙든 그의 손가락과 고른 숨소리가 있어 눈물은 더 나지 않았다.



* * *



곤히 잠들었던 리암은 병실에서 다시 눈을 떴다.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 리암은 해변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거면 됐다. 다행히 몸이 젊고 건강해 반나절에서 하루만 더 쉬면 된다고 했고, 큰 후유증도 없을 거라고 하니까 정말로 그거면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리암은 진짜 죽는 줄 알았다며 칭얼거리다 내게 등을 한 대 얻어맞기도 했다. 겜은 환자를 때리면 안 된다고 하면서 자기도 덩달아 한 대를 때렸다. 따갑다며 꺄아악 비명을 지르는 리암을 보며 겜과 내가 크게 웃었고, 불퉁한 표정으로 입을 쭉 내밀고 있던 리암도 내 웃음에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간 채였다. 그러니까 나는 거기서 모든 욕심을 그치기로 했다.


리암이 병원에 입원하는 동시에 그의 부모님에게도 소식이 가는 바람에, 리암은 몸이 회복되는대로 런던에 돌아가게 됐다. 리암이 가고 나면 아마 한참을 울겠지. 하지만 곧 익숙해질 거다. 이제껏 혼자 지내온 삶이 다시 돌아오는 것 뿐이라는 생각도 억지로 해 본다. 어쨌거나 리암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 했고, 이대로 리암과는 좋은 친구가 돼서 간간히 이메일을 주고받는 정도만 되어도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긴 시간 끝에 다시 찾은 소중한 내 진주, 큰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이번 생에는 그 때 너를 다시 만나서 널 미워한 적 없었노라, 못 해줬던 얘기를 마쳤으니까. 아까같은 끔찍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나는 울음을 참는 일을 정말 잘 했다. 티도 내지 않고 명랑한 목소리로 눈을 깜빡이며 마음과는 다른 얘기를 늘어놓는다.


"등신아, 다신 바다에 오지 마."


"그건 좀 싫은데."


이 시발새끼가, 누구는 힘들게 꺼낸 말을 일 초만에 잘라 거절한다. 한 대 더 때릴까 고민하는 사이 리암이 겜에게 수상한 눈길을 보내더니 혹시 지금 갖고 있어? 그딴 소리를 했다. 나는 당최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그 말을 들은 겜은 뭔가 알아 들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것이다. 얘네 둘이 나 모르게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감도 못 잡고 그냥 리암 등이나 한 대 더 때릴까 생각하는 새에 겜이 꺼낸 뭔가가 리암의 손에 들어가서 거기 시선이 홀랑 옮아버리고 말았다. 그건 까맣고 부드러워 보이는 작은 박스였다. 저 안에 뭐가 있나? 박스만 보고는 도무지 감이 안 잡혀 결국 리암의 허벅지부터 한 대 찰싹 때리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평소같은 칭얼거림이 아니다.


"있잖아, 노엘. 우리 만난지 얼마 안 된 것도 알고, 이게 미친 소리같단 것도 잘 아는데……."


잠깐. 잠깐, 잠깐, 잠깐. 이제야 감이 좀 잡히네! 작은 박스, 존나 심상찮은 예고, 존나 진지한 척 신뢰를 주려고 시도하는 표정, 이거 어디서 많이 봤다. 잠깐, 잠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한 만류는 그러나 뒤이은 리암의 한마디에 먼지처럼 사라지고 만다.


"나랑 결혼해 줄래?"


달칵 소리를 내며 열린 상자와 그 안에서 빛나는 진주 반지가 꿈 속의 그 때를 보는 것 같다. 내가 흘린 진주로 예쁜 것들을 엮어 기어코 내게 채워주던 네가 생각나서 숨이 턱 막혔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도 같은 선택을 하는 구나. 그 때와 다르지 않다.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 똑같이 사랑을 속삭이는 말들. 오히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내게 있었다. 이제는 너를 불안하게 만들 긴 삶이, 물결치는 듯한 인어의 머리칼이, 남을 홀릴 듯한 목소리가 없다는 사실이 네게 다행인 일이 될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전부가 없어도 너는 또 나를 잡아주는구나. 그만 울어버리고 싶었는데, 옆에서 Say Yes!!! 그런 소리를 외치는 겜과 타이밍을 잘못 맞춰 들어왔다가 덩달아 박수를 치게 된 의사가 너무 웃겨서 나를 울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비죽비죽 울음도 웃음도 아닌 감정이 얼굴을 들쑤신다. 존나 뜬금 없는 청혼을 한 주제에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지 리암의 표정은 양껏 굳어 있었고, 이 허탈하고 갑작스런 고백에 나는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답을 던져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만하면 관대한 줄 알아, 왕자 새끼야.


"연애부터 시작해, 등신아."


아직 키스도 못 했는데, 너는 단계를 뛰어도 너무 뛰었잖아…….




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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