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부터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란 무엇일까, 대관절 그 감정이 무엇이기에.’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뇌리에 되새긴 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 같네요. 그리고 이것은 아마, 글 속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수와 휘경 역시 똑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시간이 가고, 사랑이 가고.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생각하며 상념을 이어갔을 터입니다.

그중에서 먼저 맞닥뜨린 것은 이수였네요. 이수는 사랑을 환멸이라든가 너절하다든가 하는 표현으로 수식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사랑을 싫어하지? 물론 우리나라가 연애에 과하게 관심이 많은 사회이기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페이지를 넘기던 도중 이런 문장을 마주쳤답니다.

 

아마 내 대학생활 중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문인(文人)을 꼽으라면 기형도, 사강, 나쓰메 소세키, 그리고 재이일 것이다.

 

재이의 글이야 제가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고, 사강 역시 제대로 접한 적까진 없어 제쳐두고 이야기해 보자면. 그렇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대해 세밀하게 이야기하는 나쓰메 소세키라든가, 사랑을 찾아 미친 듯이 헤매었다는 기형도를 읽고서, 이수는 사랑이 주는 환멸을 읊고 있더군요. 신기했어요.

이수는 누군가를 사귀어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예닐곱은 넘게, 여덟이었던가요. 여하튼 적지 않은 이들과 만났다 헤어졌다고 했습니다. 똑같이 저보다 매달리는 사람들을 만나, 져주지 않는 연애를 했고, 필연적으로 헤어지는 끝을 마주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너무 일방적으로 받아만 온 끝에 사랑에 무뎌진 걸까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 시시하고, 하찮고, 너절하다는.

그런데 사랑은 늘 환멸이었다는 이수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게 문득 생기더군요. 환멸의 뜻이, ‘꿈이나 기대나 환상이 깨어짐. 또는 그때 느끼는 괴롭고도 속절없는 마음.’ 이잖아요. 이수 너는 사실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게 아니니, 여분의 찌꺼기 같은 것이라고 일컬으면서도, 결국은 완전히 외면하지는 못하는 그런 마음이 조금이나마 있었던 게 아닌가. 기대를 해야 깨어질 마음이 있는 것 아니겠냐고, 그런 걸 문득 물어보고 싶더랍니다. 짓궂게도.


사랑을 환멸이라고 칭하며 외면하고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던 수와는 달리, 휘경에겐 오히려 사랑이 무거운 종류의 것이더군요. 휘경의 가볍고 부드러운 언행과는 다르게요.

 

한번 시작하면 한없이 무거워져 버려서, 그 무게에 허우적대는 모습이 꼴사납기 짝이 없어서. 사랑은 도무지 가벼워지지가 않았다.

 

사실 휘경은 사랑을 가볍게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달콤하게 굴면서 어떤 책임의 무게도 지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벼움과 경박함을 갖고서 대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뜻대로 되는 게 얼마나 있겠어요. 되려 온몸이 짓눌려 허우적거리게 할 정도로 무거운 사랑을 시작하고야 말잖아요. 본인도 그걸 알아요. 모를 수가 없겠지요. 가슴을 빠듯하게 채워오는 감정이 저 자신에게 있는 힘껏 외치고 있었을 테니까요.

 

가볍게 살자. 적당히 즐기자. 누구에게도 사랑을 구걸하지 말고, 지나간 일들에 연연하지 말고, 물 흘러가듯 그렇게 살아가자. 하지만 그런 생각들을 행동에 옮기는 것마저도 내겐 녹록지 않아서, 가볍게 굴자, 말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제일 가볍지 못하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둘이 만나는 동안 먼저 애정 표현을 하는 것도, 마음을 드러내 힘껏 부딪혀 오는 것도 휘경입니다. 표현하는 사랑이 무조건 더 크다는 법칙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휘경이 하는 양을 보면, 가슴 속에서부터 사랑이 흘러넘쳐 견딜 수 없는 탓에 자꾸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는 것 같아서. 아, 정말로 사랑하는구나. 그런 감각이 먹먹하게 저를 건드려오는 것 있지요. 휘경이 진심으로 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요.

 

각자의 사랑에 대한 인식과 온도는 달랐으되 마주친 시선의 높이는 같았기에, 둘은 손을 맞잡을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인연을 엮어나갈 수 있었고, 서로의 일상에 녹아들 수 있었어요.

하지만 아주 다른 삶과 생활 습관, 생각의 양상을 가지고 살아온 별개의 사람들이 만나는 거니까요.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수와 휘경은 점차 싸우는 빈도가 잦아지고 있었고, 더 이상 다툼의 횟수를 세는 게 무의미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휘경이 모르게, 이수는 점차 제 마음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였을까. 말을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게 때론 서로를 위해 좋을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게 된 건. 점차 입을 다무는 날이 많아진 건. 넘어진 사람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듯, 어떤 지루한 기다림에 익숙해진 건.

 

헤어지는 과정은 휘경보다는 이수의 시점에서 전개가 됐었지요. 그중에서도 ‘시간이 간다, 사랑이 간다’ 장을 읽는 동안 저는 몇 번을 끊어 읽었는지 모릅니다. 너무 몰입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 안에 남아 있는 어떤 기억들을 불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 수의 마음이 너무 공감되어서요.

특히 연립을 나와 문을 더듬거리며 잠그는 장면에서, 웃음 끝에 결국 눈물을 흘리는 내용에선 괜히 제가 울컥하는 통에 진정하고 읽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의 시를 원래도 좋아하는 저였지만 이렇게나 가슴 깊이 새길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에요.

아, 그리고 서로가 헤어지고 난 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수의 독백 중에 와 닿은 말이 또 있었어요.

 

추억은 이토록 잔인하다.

좋든 싫든,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늘 좋았던 기억 속으로만 날 끌고 들어가니까.

 

너무 공감되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귀던 중에, 더는 못 견딜 거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거나, 아니면 참고 넘겨왔던 것들이 이젠 참을 수 없게 되거나 하는 통에 헤어질 결심을 하기 시작하는 거잖아요. 분명 부정적인 기억들이 있기 때문에요.

그런데 웃기게도 시간이 지나고 기억이 풍화되고 나면 그런 건 잘 생각나지 않게 되더라고요.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좋았던 것들만 자꾸 떠오르는 기분이고. 물론 나쁘게 기억하는 것보단 좋게 마무리하고 기억하는 게 좋지요. 좋지만, 지나가 버린 시간에 괜한 후회를 얹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분이 들어서요. 그래서 저 문장에서 조금 쓰게 웃은 기억이 나네요.

 

아무튼, 이수와 휘경은 서로의 시간을 보내면서 많은 고민과 눈물을 맞닥뜨려요. 그들에게, 헤어지고 난 연인들에게 남은 선택지란 많지 않지요. 사실 일생의 모든 선택지가 그렇듯이요.

다시 만나느냐,

이대로 등을 돌려 걸어가느냐.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수는 괴로워하다가, 후회하다가, 울다가, 서성이다가, 전자를 선택한 모양이더군요.

 

여기서 잠깐 덧붙이자면 저는 <봄바람>을 읽는 동안 공부를 조금 곁들였어요. 기형도 전집이며 나쓰메 소세키 단편집, 사강의 소설과 평론집 따위의 것들을 사서 읽으며 <봄바람>을 읽고 있었거든요. 이수가 영향을 받았다던 문인들로부터 이수의 세계를 이해할 단초를 얻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중에서 기형도 전집을 뒤적이다가 시 하나가 눈에 띄었어요. 기형도 시인이 작고하신 뒤에 발견된 미발표 시 중의 하나라고 하더군요.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기형도 – 희망

 

이 시를 읽고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누군가를 떠올리며 이제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희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게 아닐까. 꼭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여겨졌어요.

그리고 기형도는 시간이 흘러 이젠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됐지만, 그와 달리 이수는 흐느낌을 품고서 휘경을 다시금 찾아갔잖아요. 눈물을 흘리며 다시 만났잖아요.

그러니 희망이 남아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어요. 서로의 마음이 더 깎여나가기 전에, 덤덤해지기 전에, 서로가 없는 일상이 더 익숙해지기 전에. 서로를 이유로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기 전에. ……더 늦기 전에. 그렇게 다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요.

 

그렇게 다시 만난 수와 휘경이 한바탕 울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서로를 부르기만 하는 모습에 괜히 저까지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네요. 멀어져 있던 현실을 조심스럽게 더듬고 추슬러 제 품에 안는 그 모습들.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요. 온기가 선명한 이 만남 위에다가요.

 

다시 만난 연인들은 종종 같은 이유로 헤어짐을 반복한다고들 합니다. 최초의 헤어짐을 결심하게 만들었던 이유가 고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런다고들 하죠.

최초의 헤어짐은 이수가 사랑에 제 자신을 잃을까봐 두려워해서, 많은 것을 숨겼고, 휘경이 제 사랑이 더 무거워지지 않았으면 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그런 것들로부터 시작된 균열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이들이 이제 그런 행동을 하지 않고, 서로를 믿는 게 다음의 과제라고 생각했죠.

여기서 잠시. 이 글의 초반에 언급했던 사랑이 뭘까, 하는 질문. 생각나세요? 리뷰를 쓰려고 작품을 네 번쯤 다시 읽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결론을 어떻게 내릴 수 있는 걸까.

한참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전 정답을 구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 사랑이 뭐고, 어떤 감정이고 하는 것들을 정의내릴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만큼 읽고 나니 그건 이제 저 둘에겐 중요하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사랑이 환멸이거나, 가볍거나, 무겁거나, 어떤 행동을 피하거나, 뭐 그런 것들 전부 다요. 사랑이 뭐든지 별로 큰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그냥 오늘 사랑하다가 내일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사람처럼 구는데, 그런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싶은 마음이 들어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이제는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니까요. 둘이 다시 만나 서로를 의지하고 함께할 거라고 말하니까요. 서로에게 확신을 주고 싶다고 하니까.

그런 둘을 향해 이 말들을 해주고 싶었어요. 수가 했던 말처럼. 이제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래 쌓여 굳어버린 눈 더미를 목도하지 않고, 질리도록 봄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나른한 오후, 따스하고 살랑거리는 봄바람 속에서 힘껏 사랑하기를. 더 많이 물러서고 더 치열하게 사랑하기를. 그런 응원을요.

여기에 더해, 마지막 외전에 등장한 글귀가 너무 좋았기에 한 번 더 적어봅니다.

사랑하기를. 사랑받기를. 언제나, 사랑이 그곳에 있기를.*

 


추신. 기형도의 시가 중간에 몇 번씩 등장했잖아요. 기형도는 겨울이라든가 안개, 진눈깨비라든가 눈과 같은 서늘한 주제의 작품들이 많은데, 휘경의 산문집 이름이 ‘봄바람’이라서 대조적인 기분이 조금 들었네요.

추신2. <둘만의 방>을 먼저 읽고 <봄바람>을 읽고 있는 독자로서, 이수의 신작 시집이 ‘둘만의 방’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는 부분에선 괜히 웃음을 지었답니다.


봄바람 - 골방의 초핀 작가님

https://ridibooks.com/books/2155006487?_s=search&_q=봄바람

@nynyp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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