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엇갈린 시간, 엇갈리는 마음



  

"소자, 어머니를 뵙습니다."

"그래, 어서 일어나거라."

"네, 어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 소경염의 얼굴빛이 좋지 않다. 정 귀비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은은한 색의 옷이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잠시. 무엇이 아들의 마음을 바꾸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변방을 떠돌기만 하던 자식이 한 순간 돌변한 것이다. 욕심이라고는 없어보였던 경염의 변화. 어미의 눈에는 항상 어리게만 보였던 아이였는데, 어느새 저리 변하였는지 정비는 가끔이지만 제 아들이 낯설다.


"잘 지내고 있는것이니?"

"네."

"그런데 얼굴이 이게 뭐니. 밤에 잠은 제대로 자고 있는지 걱정이로구나."

"괜찮습니다. 이제 신경이 쓰이던 일들은 다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이 어미는 항상 네 걱정뿐이니, 부디 어디에 있든지 몸부터 조심해 주렴."

"네. 어마마마."


경염의 손을  잡는 정 귀비의 마음이 어지럽다. 경염은 어미에게 거짓을 말하는 아이가 아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감은 아들이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 하고 있다. 잡고 있는 손에서 느껴지는 어지러운 맥이 그 증거이다.


"요즘 신경쓰는 사람이 있다 하던데..."

"아, 어머니께도 소문이 흘러들어갔을지는 몰랐습니다."

"그 사람은 누구니?"

"소 선생이라고, 저를 이 자리에 오기까지 도와준 사람입니다."


얼굴에 활기가 도는 아들의 모습에 그제서야 안심이 된다. 한가지 걸리는 것은, 이토록 아들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이 참으로 오랫만이라는 데에 있었다. 13년전, 그 어느날 소경염의 곁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그 때 이후 처음이다. 가슴이 철렁한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그 소 선생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시니?"

"학문 뿐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 두루 걸쳐 혜안을 지니고 있어, 크게 쓰일 인재입니다."

"내 신세를 졌으니 한번 뵙고 싶다만..."

"아... 그러시다면."

"되었다. 어미가 실언을 하였으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

"봄사냥때 혹시 어떠신가요?"

"구안산에 갈 때 말이냐?"

"네. 어머니."

"아바마마께서 벌써 윤허하신 일이니, 어머니께서 괜찮으시다면 기꺼이 소 선생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래. 기대하마."

"네."

"기왕 왔으니 소 선생께 선물드릴 다과도 가져가도록 하고."

"네, 감사합니다."


여느때의 모습으로 우물우물 개암과자를 먹는 아들의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볼이 볼록해질 정도로 좋아하는 과자를 먹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경염을 변하게 한 것은 대체 무엇인지. 세월의 흐름이라는 것은 참으로 야속하여, 변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까지도 변하게 만들어버린다. 시간은 그리 매정하고 무례하다.

눈길이 저절로 다과함에 머문다. 혹여 소 선생이라는 자가 정 귀비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 미리 함 안에는 개암다식을 모조리 빼놓은 상태였다. 소 선생의 상지기를 빌려다주며 숨겨진 비밀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경염의 둔함때문이 아니라 정 귀비가 예리한 탓이었다. 주석에 있는 글자에 획이 빠져있는 것을 알아차린 정 귀비는, 임수를 떠올렸다. 임수 어머니의 아명에 해당하는 글자의 한 획이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경염은 수의 어머니 아명까지는 차마 모를테니 알아차릴 수가 없다. 


"그럼 조심해서 가거라."

"네, 어머니. 소자 물러가겠습니다."


씩씩하게 걸어나가는 뒷모습에 정 귀비의 마음이 어지럽다. 끝까지 지켜지는 비밀은 없거늘... 부디 아들이 받을 상처가 가볍기를 빈다. 부디 마음이 어두워진 경염이 그에게 상처주지 않기를 기원한다.



*



황제의 봄 사냥이 시작되었다. 말이 좋아 사냥이지 실상은 황실의 권위를 만방에 떨치고, 백성들에게 내보이기 위한 행위에 가까웠다. 의례적인 예식이 거행된 후, 형식적으로 맨 앞에 황제가 나서서 숲으로 말을 달렸다. 뒤로 그의 아들들과 황족들이 따랐다. 숲으로 사라져버린 일행들 뒤로 매장소와 비류가 멍하니 모습을 바라보다 천막으로 돌아간다. 긴장이 풀려 어깨가 절로 내려간다.


"소형아, 저기 크은- 개!"


팔을 쭉 뻗어서 활짝 벌려 말하는 비류. 묶어두었던 끈이 풀렸는지 저 멀리서 불야가 긴 털을 휘날리며 매장소에게 달려오고 있다. 체구도 커다란 것이 잘 하면 매장소를 덮칠지도 모른다 생각하던 찰나, 그대로 그에게 엎어지는 불야. 신이나서 여기저기 매장소를 핥으며 정신없이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 꼭 커다란 개와 흡사하여 곁의 모든 이들이 웃는다.


"비류야, 이건 개가 아니란다. 늑대야 늑대."

"늑대?"

"조...종주, 괜찮으십니까?"


종주 걱정에 홀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려강이 물어보면 헐떡거리며 매장소가 말한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게. 불야가 덩치는 커도 아주 온순하다네. 우리 비류처럼 말일세."

"종주, 온순해 보이지 않습니다만..."

"나는 괜찮으니 걱정말게나."

"소선생, 괜찮으십니까? 불야가 갑자기 말을 듣지 않고 내달려서... 죄송합니다."


헉헉거리며 달려온 열전영이 그제야 안부를 묻는다. 보아하니 불야에게 끌려다니다 놓친 듯하다.


"괜찮습니다. 불야가 저를 좋아하나봅니다."

"아, 그....그렇네요. 좀처럼 사람을 따르지 않는 불야인데..."

"이래뵈도 동물에게 인기가 많아서, 불야에게도 그게 통하나봅니다."

"아, 그렇습니까?"


처음보는 이를 진심으로 반기는 불야가 이상하다는 표정의 열전영의 얼굴이 그제야 펴진다. 아직까지 덩치에 답지 않게 껑충껑충뛰면서 난리를 치는 것이 흥분을 가라앉히기에는 시간이 걸릴 듯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열전영이 억지로 불야를 매장소에게서 떼어낸다. 팽팽하게 당겨진 목줄이 턱에 세 겹, 네 겹의 주름을 만들어내 구겨진 수건마냥 얼굴이 우스꽝스러워지는데도, 불야는 매장소 앞에 발을 턱 붙이고는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불야, 어서 가서 밥 먹어야지. 말 안들으면 안돼."


낑낑거리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인 양, 가다 돌아보고 가다 또 돌아보는 불야가 귀엽다. 비류는 불야 뒤를 졸졸 따라갔다가 소경염의 천막에 다다르자 다시 뒤돌아 매장소에게 온다.


"불야가 소형아 좋아해."

"비류도 눈치챘구나."

"응."

"소형아는 인기가 아주 많단다. 특히 작은 생명체들에게 말이야."

"응."

"그러니 비류도 이 형님을 좋아해주는거지?"

"응, 소형아 좋아."

"형을 좋아해줘서 고마워, 비류."

"응."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푹 안아오는 비류를 토닥인다. 시선이 숲쪽으로 이동한다. 오늘 하루는 길텐데. 과연 체력이 끝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



"소 선생.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오후의 햇살이 슬슬 넘어가기 시작할 무렵, 소경염의 부름을 열전영이 전한다. 생각보다 늦은 부름에 의외라 생각하는 매장소이다.


"알겠습니다. 지금 가면 됩니까?"

"네."

"그럼 같이 가시지요."


앞서가는 열전영의 뒤를 따른다. 바로 앞에 있는 소경염의 막사에 들어가기 전, 잠시 숨을 고른다. 


"오셨소."

"네. 전하를 뵙습니다."

"내 소 선생께 부탁이 있어서 오시라 하였소."

"네. 말씀하시지요."

"어머니께서 뵙고 싶어하시오. 그러니 같이 가주시겠소?"

"네?"

"무얼 그리 놀라시오? 어머니께서 지난번 소 선생이 빌려준 상지기를 읽으시고는 궁금증이 이셨나보오."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소경염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내심 빠르게 걷는다고 걸었는데도 거리가 벌어진다.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소경염이 뒤를 돌아보고 기다린다.


"내 선생을 생각하지 않고 너무 빠르게 걸었나보오."


무심결에 내뱉는 말이겠지만, 이전의 다정함이 느껴져 그만 울컥한다. 그러나 티내지 않고 고르게 숨을 내쉬며 말한다.


"송구하옵니다. 소모, 정왕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정 귀비의 처소 앞에서 잠시 긴장한다. 어디까지 알아차렸을 정 귀비일지 모르겠지만 쉽지 않은 시간이 될 것이다. 천막 안은 깔끔하였다. 미리 신경을 쓴 모양인지 춥지않은 온기가 가득하다. 눈이 마주친 정 귀비가 매장소를 보고 살며시 미소짓는다. 온화한 그 얼굴에 긴장이 순간 풀어진다.


"어마마마, 이쪽이 소 선생입니다."

"소철이 정 귀비마마께 인사드립니다."


복잡한 얼굴이 된 정 귀비가 조금씩 다가온다. 하지만 생각보다 허약해보이는 모습에 눈동자가 흔들리며 말을 하지 못한다.


"어마마마, 어디 몸이 안좋으십니까?"


정왕이 어머니를 부축하며 묻는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정 귀비가 정신을 차리며 말한다.


"소 선생, 오시느라 수고 많았겠군요. 자, 앉아요."


매장소가 감사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감정을 추스른 정 귀비는 몇 마디를 나누고는, 매장소의 맥을 짚는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정 귀비를 본 소경염이 깜짝 놀란다. 매장소는 우아하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정 귀비를 차마 바라보지 못한다. 정 귀비가 정왕을 일부러 내쫓는다. 매장소와 단 둘이 천막에 남기 위해서였다. 소경염은 갑자기 자신을 내치는 어머니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께 말 못할 사정이 있을거라 생각하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간다. 정 귀비의 의도를 알아차린 매장소는 올 것이 왔다는 마음이 된다.


"오늘까지 얼마나 힘들었니..."

"전 괜찮습니다."

"화한독(火寒毒)은 그리 쉽게 잡힐 독이 아닌데, 겉모습이 이리 달라질 정도면 그동안 힘들었겠구나."

"제가... 체질이 튼튼해서 괜찮다고 하더군요."

"괜찮을 리가? 가장 중요한 것은 심신의 안정이야. 그런데 네 모습을 보니 그렇지 못한 것 같구나."

"마마..."

"...아마 경염 때문이겠지."


한숨을 내쉬며 매장소의 손을 꼭 잡아오는 정 귀비였다. 눈치가 이렇게도 빠른 정 귀비이기에, 매장소는 경염이 자신에게 하고 있는 행동을 알아차렸을 것이라 생각한다.


"휘두르고 있겠구나. 경염이 너를."

"아닙니다."

"이래놓고도 아니라고 말할 것이니?"


정 귀비가 매장소의 철에 맞지 않게 두툼하게 둘러진 목 수건을 살짝 내리자, 며칠전에 경염이 남겨놓은 흔적이 드러난다. 이[齒]로 문 듯한 자국이 분명해 보여, 참담함에 그만 정 귀비가 눈을 감는다. 경염이 매장소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는 증거이다. 보이는 곳이 이 정도라면 보이지 않는 곳에는 도대체 얼마나....

그러나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가 더 깊은 법이다. 매장소의 몸에 새겨지는 상처들보다는 사실 마음 속에 남는 상처가 더 크고 깊었다. 정 귀비는 아직 거기까지는 읽어내지 못한 것같아 다행이라 생각하는 매장소이다. 

12년의 세월이 지나 만난 소경염과 매장소는 눈높이가 달랐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이는 같을 수가 없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높이가 다르면 보이는게 달라지게 된다. 도달하려는 곳이 다르기에 생각도 행동도 같을 수가 없다. 매장소는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수야, 경염을 미워하지 말아줘. 그 아이는 너를 잃은 기억 속에서 여전히 자라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아이란다."

"...알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열 아홉의 아이가 임수를 잊지 못해 지옥을 헤매고 있어."

"...................."

"그러니 부디 그에게 상처입더라도, 견뎌줘. 경염에게 상처 주지 말아줘. 못난 어미가 이기적이고 염치없지만 부탁한다."

"마마, 저는 괜찮으니 심려치 마세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한참동안 정 귀비는 매장소를 응시했다. 결국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일은 두 사람이 풀어나가야 하는 법이었다. 아무리 곁에서 마음을 써도, 정 귀비는 자신이 할 일이 적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마, 이제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혼자 계셔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래. 어서 가 보거라. 경염에게는 내가 알아서 할게. 부디 몸 조심하고..."

"네, 마마."


매장소가 큰 절을 하고 천막을 나온다. 힘든 시간이 지나간다. 이번 인생에서 얼마나 이렇게 힘든 시간들이 남아있을까? 가늠도 되지 않는 날들이 있겠지만, 오늘은 무척이나 힘이 들어 일찍 자리에 눕고만 싶은 매장소였다. 몇 발자국 걸어나오지 않았는데도 저만치에 정왕이 서 있다. 긴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잠시 풀렸던 긴장이 다시금 매장소를 덮친다.


"어마마마께서 나를 내보내시고 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소?"


정왕의 추궁을 받고도 매장소는 말을 아꼈다. 할 말을 고른다. 될 수 있으면 모나지 않은 말을 입 밖으로 내뱉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엿들으시면 쉬울 것을 왜 이리 번거롭게 하십니까?"

"어마마마께서 내가 듣기를 원하시지 않으신 듯하여 참은 것 뿐이오. 허면, 내게 하지 못할 말이라도 하였단 말이오?"

"그것은 아닙니다만."

"아니면?"

"단지 마마께서는 제게 정왕전하를 잘 보필하라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진정 그것이 다란 말이오?"

"제가 정왕전하께 거짓을 고할 자로 보이십니까?"


의심의 눈초리가 가시지 않았지만, 소경염은 굳이 더 묻지 않았다. 어색한 기운이 흐른다. 각자의 막사 앞에 다다르자, 서로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려 들어가버린다.

막사 안에 혼자가 된 경염이 생각에 잠긴다. 정왕 소경염에게 매장소는 다가설수록 달아나는 사람이었다. 원한다면 쉽게 손을 뻗어 취할 수 있었지만, 끝내 온전히 가질 수 없는 사람. 소경염은 이대로 한없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타락해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망가진 삶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댓가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부터 절대 자신의 것이 되지 않을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누구의 것도 되지 않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런 사람에게 빠지고만 자신의 탓이다. 수월할리 없었다. 그렇게 쉽게 잘 될 리가 없었다. 자신의 삶은 13년전 그날부터 저주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부러 더 험하게 굴었지. 그리하면 어쩐지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었거든."


기괴한 관계가 이어졌다. 불면의 밤이 찾아오면 소경염은 조용한 발걸음으로 밀실로 그를 불렀다. 그를 끌어안고 서늘한 체온을 확인하면서 반대로 뜨거운 임수를 떠올렸다. 열 아홉 찬란하였던 그 시간이 눈 앞으로 스쳐 지나간다.

임수와 경염에게는 끝나지 않을 시간들이 있을거라 생각했다. 함부로 마구 써버려도 다 쓰지 못할 만큼의 흘러넘치는 행복한 시간들이. 끝이 없을거라 믿었기에 그 순간이 그렇게 지나가버릴 줄은 몰랐다. 거짓말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빛나는 시간들은 아쉽게 지나가버렸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태양은 사라졌고 어둠에 삼켜진 경염은 마음 둘 곳 없어 지금도 방황한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놓칠 수가 없다 이말이오."


급하게 열전영을 불러 소 선생을 건너오라 한다. 마음이 동한다. 소 선생을 밤새 괴롭히리라 마음먹는 경염은 오늘밤이 더디새었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어둠에 눈이 마비되어 세상 모든 것이 검게 물들 때까지 이제는 둘이서 그 어둠을 헤매일 것이다.



*


한가롭게 봄사냥이 진행되던 구안산에 예왕의 반란소식이 전해졌다. 정왕 소경염은 목숨을 걸고 황제를 보호하였고, 반란을 제압한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정왕이 드디어 황제에게 그 능력을 인정받는다. 결국 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소경염. 그 뒤에 매장소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없었다. 그늘에 숨어 그를 조용히 태양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매장소. 12년간 계획하여 온 일들이 서서히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었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다만 딱 한가지가 마음에 걸리는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순조로웠다. 그 한 가지는 끝까지 숨길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매장소였다. 소경염의 마음을 얻겠다던 책사가 사실은 자신의 친우이자, 마음 속 정인이었다는 것을 13년만에 깨달으면 어찌 될까. 태자 소경염이 몰랐으면 좋겠다. 빛의 자리에 올라선 그가 사실을 알아차리는 날이 오지 않는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하지만 비밀은 새어나가기 마련이고 배신을 당한 사람은 또 다시 배신당할 수밖에 없었다. 상처가 덧난다.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소경염이 매장소를 죽일 듯이 쏘아본다.


"...소 선생.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것이오."

"전하."

"그래, 소 선생을 내 손바닥 위에서 굴리고자 하였던 것은 온전히 내 잘못이오."

"................................."

"허나, 이제와 보니 굴려지고 있던 것은 나였군. 그대의 손 안에서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던 것은 나였어."

"태자 전하."

"그토록이나 나를 속여왔다니, 한없이 기쁜 마음이었겠군."

"아닙니다."

"차라리 거짓이라 고하시오. 내가 모르는 이라 칭하시오.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것이오, 왜!"

"...이제 진실을 말해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12년 동안 마음이 없이 지냈다. 그리고 2년동안 마음이 없는 내게도 마음이라는 것이 다시 자라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 그대가 다시 짓밟았다."


복잡한 표정의 경염이 등을 돌린다.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았는데 다가갈 수가 없다. 방 안이 온통 얼어붙는다.


"소모, 전하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죄는 내가 그대에게 지었지."

"................................."

"미안하오. 소 선생. 아니, 수야. 미안하다. 다 내 탓이야. 내가 부족한 탓...."

"........경염."

"................................."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소경염 곁에 매장소가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가간다. 작게 구겨진 채, 초라해진 소경염이 마음의 문을 다시 걸어잠그고 있다. 매장소가 발걸음을 멈춘다. 존재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경염의 모습을 외면하며 입을 연다. 시선은 벌써 먼 곳을 바라본다.


"경염, 너의 빛을 지켜주고 싶었어. 그런데 네게 돌아오는 시간이 너무 오래걸려서 너는 그만 순수함을 잃고 말았지. 그래서 나는 너의 순수함을 찾아주고 싶었어. 혹시 찾아줄 수 없다면 내가 빛이되어 너의 길을 비추어주고 싶었지. 하지만 이제는 힘이 들어. 그러니 다시는 빛을 잃지 마. 순수함을 잃고 어둠에 빠지지 마. 어둠에 빠진 것은 나 하나로 족할테니..."


매장소가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그대로 밖으로 나간다.

소경염은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엉망이다. 왜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가. 원하는 것을 하나도 이룰 수가 없는가. 가지고 싶은 단 하나를 끝내 가질 수가 없는 것인가. 모두 자신이 그를 휘두른 탓이라 여긴다. 자신이 그에게 저지른 업보가 이제 모두 고통스럽게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지옥에서 살아나와 어렵게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 소중한 이를 끝내 알아차리지 못하고 상처입혔기에, 그 상처가 고스란히 되돌아온 것이라 생각한다. 

소경염은 눈을 감는다. 뒤늦은 후회의 눈물이 흐르지만, 늦어버렸다.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이나 시련을 겪었고, 실연당했다. 엇갈린 시간 속에서 엇갈려버린 마음은 이제 하나가 될 수 없다. 절망속에서 존재가 한없이 작아진다. 스스로 발을 들인 어둠은 끝이 없었다.










참고.

기존 단편들 중 느슨히 또는 직접 연결되는 유사 세계관

[경염임수/정왕종주] 단풍 흩어질 때 떠나간 그대 http://posty.pe/10k0w2


갑자기 일이 몰아쳐 올리는게 좀 늘어집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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