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적하고 뜨거운 여름공기는 타워의 침실을 침범하지 못했다. 클린에너지로 쉬지않고 돌아가는 에어콘 덕분에 한여름에도 피부가 맞닿는걸 개의치 않고 욕심껏 상대방을 탐할 수 있었다. 단점이라면 유난히 빈 옆자리가 차갑게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오전 7시. 빌어먹게 부지런한데다 자기 관리에 엄격한 애인을 둔 게 죄겠지, 토니는 투덜거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까치집마냥 엉망진창이 된 머리카락이 풀럭거렸다.  

타워의 넓은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한몸에 받으면서 브루스는 한 쪽 다리로 서서 조용히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토니는 브루스가 내려둔 커피를 홀짝이면서 그 모습을 감상했다. 토니는 요가처럼 정적인 운동보다는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는 편을 좋아했지만, 브루스가 그의 고백을 받아준 이후로는 요가를 꽤 기껍게 여겼다. 얇은 트레이닝복 너머 노골적으로 보이는ㅡ 요가 덕분인지 절제된 식습관 때문인지ㅡ 나이에 비해 탄탄하게 올라붙은 브루스의 엉덩이와 여과없이 드러나는 섹시한 발목과 손목을 즐거이 감상할 수 있었다. 사실 말하자면, 유연한 신체 덕분에 여러가지 자세로 섹스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제일 좋았다. 토니는 입맛을 다셨다. 정신을 수련한다는 지극히 순수한 의미로 꾸준히 요가를 하고 있는 브루스가 들었다면 가차없이 등짝을 매섭게 내리쳤을 게 뻔했다.

브루스의 주변에는 언제나 차분하고 온화한 공기가 맴돈다.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공존하는 긴장감을 감지한다면 토니처럼 전기충격기로 옆구리를 찔러보고 싶은 충동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브루스는 자기통제에 능했고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시계추처럼 규칙적인 생활과 육식을 멀리하는 식습관에,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 만일 토니가 그에게 반하지 않았다면, 더럽게 재미없는 인간이라고 경멸하면서 가까이에도 가지 않았을 타입의 사람이었다. 토니는 브루스 배너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다만 지금까지도 불만스럽게 여기는 건 지나치게 스스로를 억누른다는 점이었다. 

브루스는 내부의 격정을 외부의 정적으로 내리눌렀다. 듣는 노래는 늘상 클래식이었고 시끄럽고 사람이 많은 장소는 기피했으며ㅡ덕분에 쇼핑을 할 때마다 토니는 백화점 하나를 통째로 빌려야만 했다ㅡ, 심지어 섹스를 할 때조차 신음소리를 내리누르는 브루스 때문에 토니는 종종 저가 변태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심각한 고민을 하면서 제 연인을 괴롭히곤 했다. 

언제나 난감하다는 듯이 미소짓는 얼굴을 보고있자면 어떻게든 휘저어서 다른 표정을 드러내도록 만들고 싶어진다. 두 사람의 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터진 토니의 스캔들 사건에 대해서도 브루스는 화내지 않았다. 화내기는 커녕 아무런 말도 안했다. 물론 그 스캔들은 터무니없는 조작이었으므로, 토니는 브루스가 화를 낸다면 침착하게 그 때 그 여자는 내가 커플링 고르는걸 도와주던 친절한 직원이었다ㅡ라고 설명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기사를 읽고서도 일언반구조차 안하는 브루스를 보고서, 토니는 그의 코앞에 그와 커플링 고르는걸 도와주던 친절한 직원이 다정하게 찍힌 사진을 들이밀면서 제발 화를 내던지 내 뺨을 때리던지 헐크로 변하던지 반응을 좀 해달라고 칭얼거렸었다. 그리고 전주곡마냥 삑삑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심박측정기 때문에 겁을 집어먹고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분노든지, 감정의 소용돌이를 삼키는 행위는 좋지 않다. 나쁜 감정은 증폭되고 행복은 금방 사라져버린다. 토니는 브루스가 어떻게 해서든지 무언가를 밖으로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통로를 찾기를 바랐다.

토스트와 잼 너머로 불쑥 디밀어진 CD 몇장을 보고서 브루스는 눈을 깜박였다. 요란한 자켓에 시선을 두었다가 토니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토니, 이게 뭐에요?"

"뭐긴. CD지. 내가 요즘 좋아하는 신인 밴드인데 꽤 괜찮아. 한번 들어보라고."

"시끄러운 음악 싫어하는거 알잖아요."

"오, 자기. 제발 한번만 들어봐. 저번에 당신 때문에 나는 오페라도 보러 다녀왔었잖아."

브루스는 어깨를 흥건히 적시면서 숙면하던 토니를 떠올리고서야 CD를 받아들었다. 토니는 그날 내내 꼭 들어보라고 브루스를 닦달해댔다. 한번만 더 CD에 대해서 말을 꺼낸다면 일주일동안 각방을 써야할 거라는 협박을 듣기 전까지.

그 날 이후로 사흘이 흘렀고, 그동안 브루스는 CD나 음악, 밴드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토니는 들어보기는 한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이전의 협박이 아직까지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토니는 정말 별 생각 없이 브루스의 연구실로 찾아갔다. 오늘 저녁은 연어요리가 어떨까 달링, 이라고 말할 준비를 하던 토니의 입은 연구실 문을 열자마자 딱 다물렸다. 그동안 연구실의 방음이 지나치게 훌륭하다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고막을 찢을 듯한 드럼과 날카롭게 내달리는 기타, 허공을 찢는 듯한 보컬의 목소리가 토니를 후려쳤다. 놀라움과 마음 깊은 곳에서 밀려올라오는 진한 감격을 만끽하며 토니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치솟는 입꼬리를 자제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의자에 앉아 스크린을 두드리는 브루스의 고개가 박자에 맞추어 끄덕거리고 있었으며, 브루스는 절정 부분에서는 드럼에 맞추어 허공에 손을 휘둘러댔다. 토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귀여워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끅끅 웃고 있었다. 유쾌함이 도를 지나쳐 웃음소리도 안나왔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숨이 넘어가게 웃고 있는데도 브루스는 음악소리에 묻혀서 꽤 한참 뒤에야 토니가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브루스는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변해서는, 더듬더듬 진실을 털어놨다.

"사실은, 흠, 그날 들어봤는데 꽤 좋더라구요. 그래서, 토니. 그만 웃어요. 그래서 괜찮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창피해서 말 못했어요. 그만 웃으라니까요!"

"당신, 지금, 얼굴, 흐....푸하하하하!"

토니는 그날 밤 굳건히 닫힌 연구실 앞에서 내가 잘못했다고 스무번은 더 빌어야만 했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던 브루스의 연구실 벽면에 밴드의 포스터가 하나 둘씩 늘어갔다. 브루스는 그 밴드의 음악 뿐만 아니라 밴드의 멤버들에 관해 찾아보면서 종종 인터넷 서핑을 했다. 두 사람의 대화 주제에 밴드와 락이 추가되었다. 토니는 처음에는 브루스가 취향이 같은 음악을 즐기게 됐다는 사실이 기뻤다. 무엇보다도 락을 들으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다던 브루스의 말이 그를 감격케 했다. 그러나 브루스의 연구실을 차지한 포스터의 갯수가 늘어날수록, 그 밴드가, 그 밴드의 음악이, 밴드의 보컬이, 기타가, 드럼이, 베이스가, 따위의 주어로 시작되는 말이 잦아질수록 왠지모르게 기분이 뒤틀렸다. 

그 밴드가 뉴욕에서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브루스는 한 번 가보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마에 "나는 정말 꼭 가보고 싶어요"라고 써붙인 연인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리지 못하고 토니는 티켓을 예매했다. 토니는 마지못해서 이야아, 그거 참 재미있겠는데! 라고 교과서 다이얼로그에 나올 법한 대사를 지껄였지만 브루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젊은이들로 가득한 공연장에서 브루스는 스스로의 나이가 면구스러운지 연신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얼굴에 만연하게 드러나있어서, 토니는 피식 웃었다. 이토록 들떠있는 브루스의 모습은 보기 힘들었고, 게다가 평소와는 달리 티셔츠에 청바지를 갖춰입은 브루스의 모습이 신선해서 좋았다.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힘으로 두사람은 스테이지에 가장 가까운 스탠딩을 차지할 수 있었다. 토니는 무대 위에서 부지런히 공연을 준비하는 가수들보다 두근거림을 감추지 못하는 브루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러다 공연 중간에 헐크로 변하지는 않겠지, 하는 별스러운 걱정이 불쑥 머리를 들이밀긴 했지만.

스테이지의 불이 한꺼번에 켜지고, 드럼소리가 심장을 때리면서 콘서트가 시작됐다.

제이크는 노래를 불러제끼다 관객석을 보았다. 맨 앞자리에서 왠 아저씨 두명이 시야에 확 들어왔다. 둘 중에서도 음악에 취했는지 멍한 시선을 그로부터 떼지 못하는 쪽을 보고서, 그는 피터에게 말했다.

"피터, 저기 앞에 얌전하게 생긴 아저씨 있잖아."

"아, 어. 시작할 때부터 저러고 있던데."

"존나 귀엽네."

그럼 팬서비스라도 해주던지. 피터는 어깨를 으쓱했다. 곡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제이크는 쪽지에 무어라고 휘갈겼다. 다음 곡의 절정 부분에서 제이크는 관객석으로 몸을 날렸다.

브루스는 그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제이크를 보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환호성이 한층 커지고, 스탠딩의 관객들이 저마다 손을 뻗어댔다. 토니는 제이크가 무슨 짓을 하던 신경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가 노래를 부르다 말고 브루스의 목덜미를 움켜잡지 않았더라면.

제이크가 브루스에게로 손을 뻗었다. 브루스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얼어붙었다. 토니의 뇌가 순간적으로 기능을 멈췄다. 제이크와 브루스의 입술이 닿았다. 환호성과 비명과 야유가 섞여서 토니의 귓가를 울렸다. 브루스의 턱이 움찔거렸을 때, 토니는 단순히 입술이 닿은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토니가 마악 두사람을 떼어놓고 제이크의 턱에 어퍼컷을 먹이려는 작정을 한 순간, 입술이 떨어지고 제이크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무대 위로 올라가버렸다. 토니는 그의 뒷통수에 대고 씨팔, 야, 너 거기 안서, 이 개새끼야, 야, 거기 서라니까, 나 앤소니 스타크야, 야, 야! 하고 외쳐댔지만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묻혀 제이크에게 닿지 못했다. 

콘서트가 끝나고 차를 타고 타워에 돌아오고 나서까지 토니는 분을 참지 못해 씨근덕거렸으며 브루스는 구름을 밟고 서 있는 듯한 표정을 내내 유지하고 있었다. 토니는 제이크를 욕하고 밴드를 욕하고 소속사를 욕하고 사회와 국가, 나아가서 우주를 비난하다말고 브루스의 표정을 보고서는 입을 다물었다. 토니의 손이 브루스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볼을 눌러서 억지로 입을 벌리게 한 뒤에 혀를 집어넣었다.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 입천장과 볼 안쪽을 샅샅이 핥고서는 혀를 빨아올렸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호흡이 꼬인 브루스가 등을 퍽퍽 내리칠 때가 되서야 토니는 입을 뗐다. 토니는 으르렁거리면서 말했다.

"그놈하고 한 키스가 그렇게 좋았어?"

브루스는 그제서야 토니가 꽤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지금 한 키스로 인해서인지 좋아하는 가수가 선사한 팬서비스 때문인지, 브루스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오, 토니. 그건 그냥 팬서비스였어요."

"'그냥' 팬서비스로 딥키스를 한단 말이야? 개자식, 틀림없이 당신한테 흑심이 있는거야!"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아요. 그냥 젊은사람들 틈에 아저씨가 끼어있으니까 신기했던 거겠죠. 그리고 사실 나보다야 토니가 훨씬 잘생겼잖아요."

"당신은 스스로에 대해서 너무 몰라!"

토니는 한동안 브루스를 잡고 쪽쪽거리면서 불평불만을 토해냈다. 당신 표정을 스스로 봤어야 된다고, 입은 헤 벌어지고 눈을 풀려서 첫키스를 경험한 틴에이저같았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이건 실질적으로 바람을 핀 것과 다름없으니 연구실에 있는 포스터는 전부 불태워야겠다고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브루스는 웃으면서 그건 정말 별거 아니었고, 나는 그런 표정을 한 적이 없다며 토니를 달랬다. 브루스가 제이크의 키스가 형편없었다는 (거짓)말을 하고나서야 토니의 기분은 좀 나아졌다. 

샤워를 하려고 브루스가 티셔츠를 벗었을 때, 티셔츠 앞주머니에서 떨어진 쪽지를 발견하기 전에는. 

[전화해요, 테디베어. 0XX-XXXX-XXXX. -제이크]    

토니는 타워에 있던 그 밴드의 CD를 모조리 긁어모아 타워 밖으로 던지려고 했고, 브루스는 토니를 말리기 위해 말도 안되는 온갖 요구에 응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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