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뭐 하고 있어.

“자려고 누웠어요.”

- 나 안 보고 싶어?

“…글쎄요.”

- 너 변했다.



마냥 어리광을 부리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살다 보면 아저씨가 곁에 없는 날도 많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익숙해져야 할 필요는 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보고 싶다. 고작 못 본 지 하루밖에 안됐는데. 아저씨의 빈자리는 역시나 예상했던 것처럼 크게 느껴졌다. 알바를 하는 내내 아저씨가 앉아있던 자리를 얼마나 쳐다봤는지 몰라. 뒤돌아보면 있을 것 같은데. 없으니 그게 또 허전해서 눈물이 핑 도는 거 있지.

매일같이 보던 얼굴인데, 어떻게 보고 싶지 않겠어. 근데 애처럼 굴면 안 되는 거잖아. 이 정도는 참을 줄도 알아야 하는 거잖아.



- 딴 생각하지마.

“…귀신이네.”

- 그래서. 진짜 안 보고 싶어?



빨리 대답해. 보고 싶어요. 보고 싶은데, 차마 말할 순 없을 것 같아.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겨우 삼켜내고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당겨 웃었다.



“응.. 괜찮아요.”










불행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지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괜히 빈자리를 느끼게 되면 우울해지니까. 적응의 동물이라는 인간도 결국은 적응까지의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자리를 비운 게 고작 5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얼굴을 못 본 지 족히 50일이라도 된 것처럼 유난 떠는 내가 웃겼다.



(사진)

예쁘지

다음에 같이 올까?



아저씨는 하루에 한 번씩 풍경을 찍은 사진을 보내곤 했다. 주변에서 볼 수 없던 서양풍 건축물과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더욱이 이 섬나라에 아저씨가 없다는 게 실감이 됐다. 그게 뭐 그리 우울할 일이라고. 결국은 같은 하늘을 보고 있을 텐데. 일종의 불안함인 걸까. 같은 곳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에 대한 서글픔일까. 종일 우울함과 공허함이 목을 조르듯 옥죄어 오는 것이 썩 달갑진 않았다.

알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자꾸만 옆을 힐끔 바라보곤 한다.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달까.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는 사람이었으니까. 기대 심리라는 게 작용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나타나달라고, 깜짝 놀라게 해도 좋으니 눈앞에 나타나 줬으면 좋겠다고. 바보 같은 생각인 걸 잘 알지만, 내겐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망이었다.










언제나처럼 집에 돌아와도 반겨주는 이가 없다.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마냥 익숙하지 않아서 문제였다. 아침에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약간의 햇살이 들어오던 집은 늦은 밤이 되면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둑했다. 간신히 핸드폰 화면을 비추어 거실 등을 켜니 썰렁한 집이 나를 반긴다.


샤워까지 마치고 잘 준비를 끝낸 뒤 핸드폰을 확인했다. 배터리가 없어 충전기를 꽂아놓고 씻고 왔는데, 핸드폰을 보자마자 떠 있는 부재중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하니 귀신같이 전화가 울린다.



- 씻었어?

“…진짜 귀신이라니까.”

- 넌 내 손바닥 안이야.



전화 너머 목소리에 집중하려 스위치를 끄니 곧 어둠이 내려앉는다. 침대에 누운 채 이불을 끌어올리고 통화 모드를 스피커로 전환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숨소리가 마치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것 같았다. 한동안 아무 말도 들리지 않더니 곧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뭐해요..?”

- 누웠어.

“오늘 일정 다 끝났어요?”

- 아니. 한 시간 정도 있다가 다시 나가봐야 해.



그전에 너 재워주려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멎고 숨소리가 방을 가득 메운다. 배려가 묻어나는 말에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다. 평소에도 잠에 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걸 알아서 그런지 바쁜 틈에도 짬내서 전화를 해주는 아저씨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으니 전화 너머에서 푸스스 웃는 소리가 들린다.



- 오늘 하루는 어땠어?

“그냥.. 똑같았죠. 학교 끝나고 알바갔다가 집에 오고….”

- 고생 많았네.



목소리를 조금 더 가까이 듣고 싶어서 핸드폰을 배게 옆에 두었다. 옆으로 누워서 환하게 켜진 화면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감은 눈으로 불빛이 새어 들어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꼭 감았다. 억지로라도 잠에 들려면 어쩔 수 없었다.



- 나한테도 물어봐 줘.

“…오늘 하루 어땠어요?”

- 내 하루는 아직 안 끝났어.



뭐야.. 그럼 왜 물어보라고 했어요. 씁, 어른 말 잘라먹으면 못 써. 이럴 때만 어른이라고 그러더라…. 나를 놀리려는 건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던 아저씨가 짧은 숨을 내쉰다. 하-.



- 나한텐 아직 하루가 절반 이상 남았는데, 사진만 족히 백 장은 찍은 것 같아.

“사진 찍는 거 좋아해요..?”

- 좋아하는 편이지. 근데 요즘엔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찍어.



혼자만 보기 아깝다고 해야 하나. 해외출장은 여러 번 나와봤어도 이번처럼 주변을 둘러본 것도 사진으로 담아낸 것도 처음이야. 매번 바빠서 일만 마무리되면 일본으로 돌아가곤 했거든. 그땐 여유가 없기도 했고 애 때문에라도 서둘러야겠더라고. 이런 말 좀 웃긴데, 나도 내가 부성애가 그리 강한 줄은 몰랐어.



“…아빠니까요.”

- 응.

“많이 보고 싶겠어요….”

- 보고 싶지.



아빠는 아빠라고 이럴 때 보면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실히 느껴지곤 한다. 근데 걘 나 귀찮아해. 전화 좀 그만하라나 뭐라나. 서운함이 묻어나는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울리지 않게 진짜로 서운해하는 것 같아서 그런가, 그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이런 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



- 보고 싶어.

“말이 그렇지, 아마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예요. 그니까 너무 서운해 하지,”

- 아니, 너.



너 보고 싶다고.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밝은 화면의 빛이 천장을 비추니 그 위로 그림자가 보인다. 너는 나 안 보고 싶어? 매일 같이 묻는 말이다. 보고 싶지 않냐며 묻는 말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지만, 오늘도 역시 대답을 할 순 없을 것 같다.



- 또 대답 안해주네.

“…….”

- 하, 인생 서러워서 살겠나.



열흘 꽉 채워서 갈 테니까 걱정 마. 삐진 듯한 말투가 귀에 닿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갔다. 정말 기분이 상했는지, 그 이후론 부스럭거리는 침대 소리와 한숨 소리만이 들렸다.



“아저씨.”

- 왜.



그래도 대답은 해주네.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고 허공에 손을 뻗었다. 검지손가락만을 세워 천장을 종이 삼아 글씨를 써내리기 시작했다.

오늘도 들려주지 못할 대답을



보 고 싶 어 요



이렇게나마 전해지길 바라며.










어느덧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시간이 금방 가는 것 같으면서도 아직 삼 일이나 더 남았다는 사실에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처음보단 허전함이 덜했다. 역시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는구나, 새삼 또 깨달았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결국 해결해 주는 건 시간밖에 없다는 걸.

여느 때처럼 학교를 마친 뒤 카페로 향했다. 요즘 들어 잦은 소나기 때문에 항상 한 손은 우산이 차지하고 있다. 카운터에서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니 우중충한 하늘이 또 비를 쏟아낼 것 같았다. 비가 오지 않았던 날이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한 달 내리 장마인가 싶을 정도이니 말 다 했지. 기상청도 틀리기 일수라 어쩔 수 없이 우산을 가지고 다닐 수밖에 없는 요즘이다. 그래서 그런가 비를 피하려 카페로 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자꾸만 말썽을 부리는 날씨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

“드시고 가세요?”

“어떡할래?”

“좀 있으면 그칠 것 같은데 먹고 가지 뭐.”



먹고 갈게요. 앉아 계시면 음료 가져다드릴게요. 여전히 불안정한 날씨에 비를 피해서 온 손님들이 하나 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카페 매출이 올라서 좋기는 하다만, 그래도 맑은 하늘이 보고 싶다. 화창한 하늘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야 아저씨도 무사히 오실 수 있을 테니까.


두 시간쯤 지났을까. 아직 하늘은 우중충하긴 했지만, 포슬포슬 내리던 비는 멎었다. 비를 피하려 왔던 손님들이 모두 빠져나간 지 오래인지라 카페가 한적했다.

저녁 일곱 시 즈음인 시간임에도 아직은 떨어지지 않은 해 덕분에 바깥이 그리 어둡진 않았다. 바닥에 흥건한 소나기의 흔적을 닦아내려 대걸레를 가지러 가려고 하니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오세,”



……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인물의 등장은 나를 당황케 만들기 충분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두 사람에 심장은 배로 요동친다.



“안녕하데여.”

“…….”

“초코 먹을 거야?”

“웅!”



배꼽에 손을 대고 꾸벅 인사하던 아이가 제 엄마의 물음에 씩씩하게 대답을 한다. 아이에게 줄곧 가 있던 여자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닿는다. 차갑게 식은 두 눈이 나를 훑는다.



“아이스 초코랑 따뜻한 바닐라라떼요.”

“…드시고 가세,”

“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아온 대답에 뒷말을 꾹 삼켜야 했다. 카드를 받고 결제 승인이 떨어지기까지, 고작 그 몇 초 안되는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다. 떨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고 두 손으로 카드를 건네니 카드를 홱 채가던 여자가 짧은 한숨을 내쉰다.



“…앉아 계시면 자리로 가져다,”

“잠깐 시간 있어요?”

“…….”

“잠깐이면 돼요.”



할 얘기 있잖아요, 나랑.



















에스프레소 샷을 어떻게 내렸는지, 스팀은 또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멍했다. 그저 지금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음료를 트레이 위에 올려둔 뒤 들어올리니 하마터면 손에 힘이 빠져 떨어트릴 뻔했다. 간신히 힘을 주고 두 사람이 앉아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니 아이가 배시시 웃는다. 트레이를 테이블에 놓고 여자와 아이의 앞에 음료를 내려놓았다. 고맙쯥니다.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살짝 미소를 보인 뒤 의자를 끌어 여자의 앞에 앉았다.



“흘리지 말고 먹어.”

“웅.”

“‘네’라고 해야지.”

“넹.”



짐짓 엄한 표정으로 아이에게 말하던 여자가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라떼를 한 모금 입에 담던 여자가 미간을 찌푸린다.



“쓰네.”

“…다시 만들어 드릴까요?”

“됐어요.”



시간 낭비야. 머그잔을 저에게서 조금 멀리 내려놓던 여자가 아이를 흘끔 바라보다가 내게 시선을 돌린다.



“남편은 해외로 출장 나갔어요.”

“…….”

“아, 이미 알고 있겠구나.”



남편이라고 지칭하는 대상을 떠올리니 숨이 턱 막혔다.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여자에 침 조차 삼킬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여자의 눈을 제대로 마주보지 못하고 테이블 끝만 보고 있으니 맞은편에 앉아있는 아이가 예쁜 눈을 깜박이며 나를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작은 입술로 빨대를 오물거리는 게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본론만 얘기할게요.”



정리해 주세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더는 아이의 맑은 눈망울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한 가정의 가장이고 아이 아빠예요, 그 사람. 그쪽하고 만나는 게 아이 정서에 좋진 않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린타로가 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나는 이 가정 깰 생각 눈곱만치도 없어요.”

“엄마 화나써..?”

“그니까 정리해요. 돈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까 그쯤 해요.”



허벅지를 꼬집으며 눈물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내가 눈물을 흘릴 자격이나 있을까. 내가 속상하고 가슴 아파할 자신이나 있을까. 말마따나 한 가정의 가장이며 아빠인 사람을 마음에 품은 내가.. 그럴 자격이나 있을까 싶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엄마의 팔을 붙잡고 늘어지는 손짓이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설마.. 사랑하는 건 아니죠?”

“…….”

“뭐 사랑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요.”



그만…. 당장 여자의 말보다 이 이야기를 옆에서 듣는 아이가 걱정되었다. 엄마아 그마내……. 울망한 얼굴로 제 어미와 나를 번갈아 보는 아이의 눈이 불안해 보였다.



“…죄송합니,”

“린타로는 버리는 것도 쉽거든요.”



모르는 거 같아서 알려주는데, 참 헤픈 사람이에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버릴걸요? 나처럼 우리 아이랑 같이 버려질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사는 것보다 학생 인생을 사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만…. 제발 그만…….



“…말씀대로 할게요. 지금 아이가 듣고 있으니까.. 그만,”

“부끄러운 건 아나 보네.”

“…….”

“나는 내 새끼 학생처럼 불행하게 만들진 않을 거예요.”



좀 알아봤는데 부모님이 어릴 때 이혼했다면서요. 그럼 잘 알 거 아니야. 그 삶이 얼마나 불행했는지.

여자의 말에 순식간에 머리가 하얘졌다. 불행…. 내 삶은 불행했던가. 내 삶이 불행이라는 단어와 걸맞는 시간이었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사람 사는 게 그렇듯 마냥 행복한 삶을 살 순 없는 거니까. 누구에게나 절망, 그리고 아픔이 있을 수 있다고. 내 삶 또한 특별히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내 삶에 대해 정의를 내린 것은 처음이라 뭐가 맞고 틀린지 모르겠다.



“누나 괜차나..?”

“…엄마 말하고 있을 때 끼어드는 거 아니라고 했지.”



나를 위로하듯 건넨 말이 여자에게 화를 불러왔는지, 화난 눈초리로 아이를 바라보는 탓에 아이의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툭 떨어질 것처럼 일렁인다. 그러다 이내 또르르 추락하는 눈물에 아이가 눈을 비비적 문지른다. 눈물을 닦아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위치에 있는 내가 야속하고 미웠다. 너에게도 나는 상처 덩어리일 뿐이겠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거겠지. 흔히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말하는 나쁜 사람이 바로 나 같은 존재일 테니까.



“그 사람 3일 후면 돌아와요.”

“…….”

“딱 일주일 줄 테니까 그 안에 다 정리하고 떠나줘요.”



할 말이 끝난 듯 보이던 여자가 일회용 물티슈를 뜯더니 아이의 입을 벅벅 닦는다. 입술에 잔뜩 초코가 묻어있던 아이의 입은 물티슈의 여파로 입술 근처 여린 살들이 벌겋게 물들었다. 괜히 나 때문에 아이에게까지 감정이 옮겨진 게 아닌가 싶어 속상했다.

죄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뿐이 방법이 없었다. 눈을 마주 보는 것도 죄스러웠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차마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여자가 갈 때까지 죄송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생각이었다. 분명 그러려고 했는데….

테이블 위로 놓인 하얀색 봉투를 보고 천천히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부탁할게요.”

“…….”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사라져 주세요.”










여자와 아이가 카페를 나선 뒤에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말씀하신대로 정리하고 떠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어느덧 마감을 해야 하는 시간이 훌쩍 다가왔다. 어둑어둑해진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가 테이블을 치우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차게 식어버린 라떼와 반절도 먹지 못한 아이스 초코. 두 음료를 트레이에 나란히 올려둔 채 카운터로 가려고 하니 손에 힘이 빠져 놓치고 말았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유리 파편이 튀었다. 카페에 손님이 없어서 다행이지, 있었다면 2차 사고의 위험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사달을 내긴 내는구나. 멍하니 서서 바닥을 내려다보니 온통 유리 파편으로 가득했다. 제대로 깨졌네. 어쩐지 불안하더라니.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에 한숨만 푹푹 새어 나왔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와서 이곳저곳을 꼼꼼히 쓸었다. 여러 번 돌아다니면서 빗자루로 쓸어내고 대걸레질까지 마치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카페를 마감하고 집으로 가는 길,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언뜻 들은 라디오의 기상정보에 의하면 당분간 흐린 날은 계속되지만 비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귀찮게 우산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정말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려나. 기상청을 믿어도 될까.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집 근처 골목에 다다랐다.

의아했다. 왜 눈물이 나오지 않을까. 아까 전까지만 해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는데.

어쩌면 예견된 일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항상 끝을 생각하곤 했으니까. 말마따나 떳떳하지 못한 사랑을 지속할 순 없으니까. 끝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면서도 애써 무시한 채 맹목적인 그리고 어리석은 사랑만을 쫓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릴 자격조차도 없는 거야. 그 사랑이 어떻게 돌아올지 뻔히 알면서 시작했으니까.

그러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 따위가 슬퍼할 자격은 없다.


불이 반쯤 나간 가로등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다. 연신 깜박거리는 가로등 아래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흐린 하늘은 모든 것을 가리고 있다. 빛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에 결국 의지할 수 있는 건 언제 꺼질지 모르는 가로등뿐. 어째 나와 비슷해 보이는 처지에 조금은 서글펐다.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던 중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아저씨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사진)

(사진)

(사진)



아저씨가 보낸 사진은 맑은 하늘 사진과 어느 길거리의 카페 사진, 그리고 광장으로 보이는 작은 분수 사진이었다. 천천히 사진들을 보다가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를 보곤 힘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프레임에 담긴 피사체가 너였으면 좋겠다



외국 나가더니 표현도 감성적이네…. 그 자리에서 답장으로 보낼 말을 썼다 지웠다 수없이 반복했다. 그러다 액정 위로 물방울이 툭툭 떨어지고 다급히 우산을 폈다. 역시 틀린 기상정보였구나.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다시금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메시지를 받은 지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답장을 하지 못했다. 멍하니 이저씨가 보낸 사진을 바라보고 있으니 다시금 액정 위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우산에 구멍이 뚫렸나. 고개를 들어 우산을 올려다보니 미세한 구멍조차 보이지 않았다. 분명 어디선가 새고 있음이 분명한데,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위태로운 가로등 불빛 아래서 얼마나 서 있었는지. 결국 답장을 보내지 못한 채 집으로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

우산으로도 가릴 수 없는 비가 있다는 것을.













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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