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도조사 원작 소설만 팝니다.

- 기억은 남망기가 잃었는데 고생은 위무선이 하는 이야기






하루 아침에 저를 아주 낯선 것 보듯 내외하는 망기에게 네가 기억을 잃어봤자 너와 나는 삼배를 올린 부부 사이라고, 남씨 족보에 떡하니 적힌 제 이름 세 글자 보여주며 납득은 시켰는데, 기억을 잃어도 점잖은 성품은 어딜 가지 않아 그게 무슨 헛소리냐며 호통을 치는 대신 눈동자만 파르르 동공지진하는 남망기 한참 바라보다 이내 웃으면서 정이야 다시 쌓으면 될 일이니 우선은 가서 쉬라고 정실로 등 떠밀어 보내는 위무선.. 


이때는 벌써 위무선이 운심부지처에 둥지를 튼 지도 꽤 연차가 된 차라 남망기도 차근차근 설명을 듣고 최선을 다해 제 도려라는 사람을 다시 끌어안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암만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본디 마음이 움직이면 몸도 따라가는 법이라지만 그 반대를 행하려니 아주 고역이 따로 없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 나름대로 배려를 해주련 모양인지 '도려'가 자신이 기억을 잃고 깨어난 첫 날처럼 같은 침상에서, 제 품에 안겨 잠들지 않고 침구를 따로 쓰며 나름 거리를 둔다는 것 하나 뿐이었을 테다. 천지신명 앞에 한 맹세를 끊을 순 없다며 퍽 당돌하게 제 권리를 주장한 것 치곤 유한 태도에 남망기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음. 


다시 듣고 새겨 들어도 도무지 믿을 수 없었으나 저와 저 남자가 사랑을 했다 하니. 있었던 것이 비워진 자리는 언젠가 차오르지 않겠는가. 다만 시일이 문제일 뿐. 


위무선은 위무선대로 제게 정은 없으나 예로써 대하려 애쓰는 남망기를 안쓰럽게 여겼음. 버릇처럼 밖을 쏘다니다 제 집처럼, 기실 제 집이 맞다만은, 정실문을 벌컥 열었을 때 반사적으로 검을 쥐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던 남망기가 어색하게 얼굴을 풀며 어서오라며 먼저 인사를 건네주는 것도 그랬고 하루에 몇 마디라도 먼저 붙여보려 노력하는 것도 그랬음. 


되려 기억을 잃기 전보다 잃은 후에 더 말을 많이 걸어왔으니 말 다했지. 이전에는 종일토록 위무선이 쫑알거리는 것에 맞추어 몇 마디 대답을 해주는 게 전부였던 남망기가 이렇게 변했으니 위무선은 남망기가 기껏 먼저 말을 걸어와도 그게 껄끄럽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음. 만들어진 호의를 받는 저도 기분이 이런데 하물며 호의를 쥐어 짜내는 상대는 어떠랴. 


며칠이 지나지 않아 위무선은 저와 접촉을 많이 한다고 남망기의 기억이 더 빨리 돌아오진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을 얻었고, 그러니 그만 제 소박한 욕심을 놓아주기로 마음 먹었음. 방을 따로 쓰는 게 어떻겠냔 제안에 딱딱하게 굳는 남망기의 얼굴을 일견 집요할 정도로 살핀 위무선은 그럴 필요 없다는 거절의 말도 귓등으로 흘렸음. 힘겹게 쥐어짜낸 성의는 받아줄 이유도, 매달릴 가치도 없었으니. 


숱한 감정이 요동치는 금빛 눈동자에서 기어코 안도의 감정을 건져낸 위무선은 빙긋 웃고는 말없이 제 짐을 하나하나 챙기기 시작했음. 그야 마음이 놓이겠지. 손끝에 틀어박힌 가시 같던 이가 스스로 멀어진단 게 얼마나 기껍겠어. 


그럼에도 기쁘게 내치지는 않았으니 너는 기억을 잃어도 이렇게 다정한가. 

혹은, 고루한 예법에 묶여 꺼리는 감정을 제대로 표출하지도 못하는지. 


제 눈에는 잡동사니로만 보이던 물건들을 위무선이 하나하나 주워서 천 보따리에 던져넣는 걸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관하던 남망기는 위무선이 옷장으로 방향을 틀자 저도 모르게 그 앞을 가로막았음. 위무선이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붙잡아 밀어내려 하는 것도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음. 


(음슴체 못 쓰겠어요.. 문체 바꿀게요ㅠ) 


이게 아닌데. 이러면 안 될 텐데. 마주보는 얼굴은 싱그럽게 웃고 있었고 습관처럼 둥글게 휘어진 눈동자는 고요했어. 각방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찰나간 안도했던 저열한 제 속을 들키기라도 한 듯, 불시에 치솟는 수치에 남망기는 고개를 바닥으로 떨궜어. 


- ..제가 더...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위무선은 칼로 깎아낸 격식이 빼곡하게 덮어 씌운 자신없는 목소리에 도리어 아까보다도 더 속이 쓰렸어. 어쩌면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평생 할 필요 없다고 단언하던 네 마음이 이와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잘못을 깨달은 아이처럼 완강한 거부에 잠시 난감하게 볼을 긁던 위무선은 조심스럽게 남망기의 어깨를 토닥였어. 괜찮아, 남잠. 


- 넌 충분히 노력하고 있어. 

- ..... 

- 그러니, 무리할 것 없어. 


착하지. 열 밤만 더 자면 기억이 돌아올 거야. 열 밤이 아니라도 괜찮아. 어쩌면 백 번, 혹은 천 번. 


만 번의 해가 뜨고, 만 번의 달이 져도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 어쩌면 영원 같은 평생일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우리는 이미 '미안해'와 '고마워'를 주고받을 필요 없는 사이가 되었으니 너는 내게 기억을 잃은 것을 미안해 할 필요도, 기다려주어서 고맙다고 할 필요도 없어. 


너도 기다렸잖아. 너도 나를, 기다렸잖아. 천 번의 낮 동안. 만 번의 밤 동안. 


나는 비록 이 방을 나가서도 같은 지붕 아래에서, 같은 땅을 밟고,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너를 기다릴 수 있지만 너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공허 속에서도 나를 기다렸어. 내 형편이 아무래도 너보다는 낫지 않겠어? 


- 다름아닌 네가 해낸 일이야. 나라고 못할 리 없어. 


그렇게 단언하는 목소리는 지극히 담담한데, 그 앞에 선 나는 어찌 온몸이 젖어드는 것 같은가. 눈물의 태를 입지 못해 목소리를 빌려 쏟아지는 흐무러진 감정을 버텨내지 못한 남망기는 무력하게 위무선의 손에 의해 밀려났어. 돌아오겠단 여지를 남기는 것처럼 정말로 몇 개의 의복만 챙긴 위무선은 개운해진 얼굴로 마루 아래로 내려서서 손을 흔들었어. 


- 나 없어도 밥 잘 챙겨먹어! 비록 본 노조가 무능하여 네 기억은 붙들지 못했지만 네 몸은 확실히 내 거니까 쓸데없이 고민하다 함부로 상하게 두지 말고! 


발랄하다 못해 망측하기까지 한 당부를 마지막으로 중문을 넘어 홀랑 사라지는 검은 옷자락을 멀거니 바라보던 남망기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어. 손이라도, 마주 흔들어 주었어야 했을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그거였으니 아무래도 아직 반은 정신을 놓은 모양이지. 





처음 위무선이 남망기와 각방을 쓰겠노라 선언했을 때 그 파장은 굉장했어. 당장 남계인마저도 여느 때 같은 울화통의 핏물이 아니라 마시던 찻물을 뱉었을 정도였으니 더이상의 부연이 필요하겠어?


 아니, 하루 열두시진을 꼬박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몸이라도 가지겠노라 쫑알거려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것 같던 놈이, 지금 뭐라고? 각방? 가아아악바아앙? 그런 대경실색을 앞에 두고도 위무선은 퍽 쑥스럽다는 듯이 몸을 모로 꼬며 웃었어. 


- 남 선생님, 원래 연애는 이렇게 때때로 밀고 당겨주는 맛이 있어야 오래오래.. 

- 썩 꺼지거라. 


칼같은 축객령에 난실에서 쫓겨난 위무선은 입술을 삐죽이다 슬그머니 남계인이 자식처럼 아끼는 난초 세 뭉텅이를 뽑아두었어. 누가 뭐라 그러면 죽고 못 살던 도려가 기억을 잃어 눈에 봬는 게 없다고 드러누워서 굴러야지. 그러고도 성에 차질 않아 토끼밭에서 남망기가 유독 아끼던 토끼들만 골라서 괴롭히던 위무선은 해거름에 토끼들 밥을 챙겨주려 온 남사추가 오늘 하루종일 식사 때도 보이질 않더니 여기서 뒹굴고 있었냐고 기겁을 하며 이끄는 손길에 못 이겨 입맛을 짝 다시며 방으로 돌아갔어. 


하긴, 밥 먹으러 들어갔다가 짐만 싸서 나왔으니 종일 굶긴 했네. 


그런 주제에 막상 밥상을 앞에 두니 있던 입맛도 뚝 떨어져서 위무선은 성의없이 반찬 몇 개를 뒤적이다 상을 고스란히 문 밖에 내놨어. 토끼밥은 토끼나 주라지. 나는 사람이라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평소 제 식사를 챙겨주던 남망기가 없으니 영 식욕이 동하지 않은 위무선은 제가 마지막으로 제대로 밥을 챙겨먹은 게 언제였는지 손을 꼽아 세려보다, 이렇게 계산할 필요도 없이 남망기가 기억을 잃은 당일부터였단 걸 깨닫곤 힘없이 손을 내렸어. 


생각하지 말걸. 자각하니 더 배가 고프잖아. 뒤늦게 현기증처럼 밀려오는 허기에 위무선은 냉큼 텅 빈 침상 위로 몸을 던졌어. 내일은 채의진에 좀 다녀와야겠다. 다 사람 살자고 하는 짓인데 밥은 먹어야지. 남잠도 기억은 없어도 삼시세끼는 꼬박꼬박 잘 챙겨먹었잖아. 


속은 비었고, 혼자 누운 침상은 차가웠어. 쉬이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구르던 위무선은 창틀 새로 스며들어오는 한기에 어깨를 부르르 떨며 일어났어 이른 새벽에 일어났단 것에 놀라기도 잠시, 제가 왜 이 시간에 깨었나 곱씹던 위무선은 다시 한 번 밀려드는 오한에 팔뚝을 문지르다 잠이 깬 이유가 추워서라는 걸 깨닫곤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웃었어. 


세상에. 내가 추워서 깨다니. 


남망기와 삼생의 연을 약속한 이후론 언제나 제게만 허락되는 너른 가슴팍을 침상 삼아, 등에 둘러지는 단단한 팔을 포단 삼아 잠들었으니 추위가 생소할 만도 했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어색함에 묘한 표정을 짓던 위무선은 손끝으로 창문을 밀어 열었어. 


심산유곡 특유의 습윤하고 서늘한 바람이 제멋대로 뺨을 스치자 잊고 있었던 계절의 변화가 훅 다가왔어. 


겨울이 오는구나. 

난 또, 하도 맘이 시려서 진즉에 온 줄 알았더니. 


머리맡에 널부러진 머리끈으로 대충 머리를 동여맨 위무선은 옷을 갈아입고 기운차게 문을 열고 뛰어나갔어. 남잠은 어디 도망 안 가니까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 술도! 


안타깝게도 신나게 산길을 뛰어내려가던 위무선이 체력을 아껴야 한단 사실을 눈치챈 건 이미 기력이 똑 떨어져 다리가 후들거릴 무렵이었어. 며칠이고 식사를 제대로 않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 게다가, 언제나 남망기가 어검을 해서 데려다줬기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채의진은 운심부지처에서 20리는 족히 떨어진 마을이었어. 그걸 두 발로 걷다 못해 아주 뛰어가려고 들었으니... 


누굴 탓하겠어. 호의와 애정에 길들여진 저를 탓해야지. 


겨우 채의진에 당도해 눈에 보이는 아무 음식점에나 기어들어간 위무선은 금단을 맺어야겠단 의지를 불태우다 첫술을 뜨며 그 의지를 목구멍 너머로 꿀떡 삼켜버렸어. 수련을 도와줄 남망기가 저꼴이 되었으니 당분간은 수련도 못할 터라. 


남잠이 없으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채의진도 마음대로 못 오고 수련은커녕 늦잠도 잘 수 없다니. 

대체 언제부터 내 일상이 남잠에게 점령당한 거지? 함광군, 이 무서운 사내 같으니라고. 


천자소를 앞에 두고 그런 생각으로 애꿎은 제 속을 들쑤시던 위무선은 얼마 못 가 실없이 웃으며 잔을 비워냈어. 복잡한 머릿속도 함께. 


온 일상에 남잠이 있는 게 당연하지. 도려란 본래 그런 거 아니겠어? 


누가 들었다면 뼛속까지 고소 남씨라며 혀를 내둘렀을 기특한 생각으로 상념의 물꼬를 막아버린 위무선은 운심부지처의 옥패를 내보여 외상을 달아두고 가게 밖으로 나가 잠시 구름안개에 가린 먼 산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어. 내려올 때도 지옥이었는데 저걸 두 발로 올라가는 건... 좀.... 


지금이야 제 외박을 걱정할 남망기도 없으니 위무선이 힘들게 운심부지처로 돌아가야 할 이유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어.


- ...같은 지붕 아래에 있기로 했는데... 


...뭐, 딱히 상관없나. 내일이면 사추라도 찾으러 올 테고. 머릿속의 천칭이 한쪽으로 기울자 위무선은 거침없이 객잔으로 향했어. 고소 남씨의 위명에 힘입어 가장 방풍이 잘 되는 따뜻한 방의 열쇠를 받아낸 위무선은 아직 해도 다 지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냉큼 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어. 부족한 아침잠 대신 저녁잠을 늘릴 요량으로. 


그런데, 내 일상은 온통 남잠인 게 당연하다지만, 

그럼 남잠은? 


위무선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찾아온 남사추와 남경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어. 잘 찾아왔네. 똑똑하기도 하지. 남경의는 운심부지처로 가는 내내 저랑 사추가 얼마나 걱정했는지를 투덜거렸어. 위무선은 빈말로도 남망기가 저를 걱정했냐고는 묻지 않았어. 만일 남망기가 저를 걱정했으면, 남경의 성격에 함광군의 이름부터 득달같이 튀어나왔을 테니. 


남사추는 남망기의 뒤통수를 후려치거나 사술을 부려서라도 잊은 기억을 되찾기 위해 난동을 부릴 것 같았던 위무선이 달포가 넘도록 얌전하고 조용하기만 하니 불안을 감추지 못했어. 성격이 급한 남경의가 참지 못하고 그 점을 지적하자 위무선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으며 웃었어. 


- 아니 뭐... 남잠이 죽은 것도 아니고, 여전히 계속 볼 수 있고, 날 내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본인이 저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내가 부채질 해봤자 부담밖에 더 되겠어? 남잠 요즘 잠은 잘 잔대? 


위무선과의 대화는 늘 그런 식이었어. 시작은 위무선의 이야기였고 끝은 늘 남망기의 이야기였지. 밥은 잘 먹어? 하긴, 남잠은 원래 그 절간식단을 먹고 자랐지. 잠은 잘 자고? 흠, 나랑 같이 방을 쓸 땐 종종 깼었는데 잘 잔다니 다행이네. 아무래도 내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지. 


- 그런 주제에 가지 말라고 날 붙들다니, 과연 함광군. 용기가 가상해. 


파란이 일다 못해 폭풍처럼 운심부지처를 휩쓸 것 같았던 사건은 그렇듯 뜻밖의 고요로 침잠했어. 차오르는 안개에 눈이 가리고 숨이 막히는 적막으로. 이야기를 듣고 드물게 위무선을 걱정해 고소로 행차한 강만음은 처음엔 퀭하게 마른 창백한 안색에 당장이라도 노호를 내지를 것 같았다가 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며 고소의 밥은 맛이 없다며 징징 떼를 쓰는 제 사형의 철없음에 치를 떨며 운몽으로 돌아갔어. 그래도 며칠 지나지 않아 운몽의 간식이며 연밥따윌 보내왔으니 걱정이 아주 죽진 않은 모양이지. 


자색 비단에 감싸여 먼 길을 온 간식이 부스러기만 남고 사라지고 구운 연밥이 가득찼던 주머니가 텅 빌 즈음, 이르게 고소를 방문한 겨울은 꼬박 이레에 걸쳐 온 산천을 희게 물들였어. 운심부지처에서 유일하게 백에 지지 않을 색채를 지니고 있던 이가 예고 없이 쓰러진 것도 딱 그 무렵으로. 


불려온 의원은 지극히 뻔한 병명을 읊었어. 식사를 제때 챙기지 않아 몸이 상하고, 수면부족으로 기력이 쇠한 와중에 날까지 차서 한기가 들었다고 했지. 중병이 아니란 사실에 남망기를 대신해 불려온 남희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남사추는 반대로 작은 충격을 받았어. 


먹고 자는 것. 고작 그런 기본적인 일상조차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는 위무선이라니. 남망기의 보호 아래에 있을 적엔 상상이라고 할 수 있던 일이던가. 


남사추를 더욱 속상하게 한 것은 쓰러질 때까지 미련하게 참고 버틴 위무선이 아니라, 그가 쓰러질 때까지 그점을 눈치채지 못한 제 자신이었어. 




몸이 마르고 안색이 하얗게 바래는 것을 안쓰럽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야, 함광군이 기억을 잃었으니 그 도려인 위무선이 걱정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그러니까, 힘들고 아파하는 게 당연하다고.. 


조금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었는데. 


위무선의 식사는 언제나 남망기가 챙겼으니 평소에 그가 무엇을 먹고 지내는지 몰라 달리 식단을 바꿔주지 않았다. 

따뜻한 운몽에서 살았던 사람인 건 알았지만 얼마나 추위를 타는지도 몰랐기에 따로 화로를 챙겨주지도 않았다. 

홀로 잠 못 이루는 밤이 얼마나 고독한지, 표출할 길 없는 원망이 얼마나 시린지조차도. 무엇도. 누구도. 

눈앞의 평안에 홀려 값싼 안도로 심장을 다독이는 사이 빛을 잃은 그늘이 바득바득 갈려나가고 있을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실은, 누구라도 불빛을 손에 들고 들여다보았더라면 간단히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을. 


위무선의 일상에 남망기가 있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여, 있었던 자리가 공허로 비워진 후에도 감히 의심하지 않았더랬다. 무언가가 채우고 있을 줄 알았지. 어떤 것이 지탱하고 있을 줄 알았지. 하다못해 얄팍한 낙관이라도, 막연한 확신이라도, 그를 대신할 것이 있을 줄 알았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그리 한결같이 웃을 수 있겠는가 싶어서. 



안일한 방심의 대가는 뼈아팠어. 계절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환절의 길목에서 평상복만 몇 개 챙겨들고 정실을 나왔던 위무선은 고소에 터를 잡고 난 이래 처음으로 혹독한 한기와 다투다 그대로 몸져눕고 말았어. 


미소가 사라진 후에야 메마름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드러났지. 위무선이 남망기를 걱정할 때에, 다른 누군가가 똑같이 위무선을 걱정하기라도 했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나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남망기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어. 정확히는, 들어가지 못했어. 


남망기는 제 나름대로 결핍으로 도려내진 시간의 공백을 다시 채워넣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고 기억을 잃고 나서 위무선과 함께 지내는 동안 얼핏얼핏 내비치던 불안증세도 한결 나아진 참이었거든. 이제사 겨우 평정이 돌아온 호수에 돌을 집어던져봤자 혼란이 가중되기밖에 더 하겠냔 결정이었어. 


거기다 위무선의 병세가 딱히 심각하지 않단 것도 그에 무게를 더했어. 중병이면 응당 알려야 할 테지만 고작 풍한을 가지고 무얼. 그런 판단은 현실과도 적당히 맞아떨어져 다행히 위무선은 삼 일만에 그럭저럭 정신을 차렸어. 


가뜩이나 금단도 없는 몸에 해로운 짓만 골라서 자행했으니 병이 나는 것도 어쩔 수 없단 너스레 앞에 남사추는 안절부절못했어. 괜찮지, 않을 텐데. 조금도 괜찮지 않으실 텐데. 얼굴 좀 펴라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손길에도 기운이라곤 요만큼도 없었어. 왜 환자보다 죽상이냐며 등을 떠미는 손길에 마지못해 방을 나온 남사추는 목 끝까지 울컥 치민 갑갑증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어. 


아까 깨울 때 남잠, 이라고 부르셨지. 나를.

함광군께서는 위 선배가 없는 하루에 벌써 익숙해지셨는데. 위 선배는 아직도. 


둘 사이에 드리워진 안온의 천칭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명확했어.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았던 게 아닐까. 남사추는 심장을 들썩이게 만드는 불안을 천천히 곱씹었어. 처음부터, 이렇게. 함광군을 배려해서 거리를 둘 게 아니라 둘 모두가 불편하더라도 함께 이겨냈더라면. 당장의 역경 앞에 돌아서지 않고 힘껏 부딪혔더라면.  


도려란 본디 그러한 것이 아닌가. 


위무선의 밥상은 만족할 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풍족해졌고 방 안에도 커다란 화로를 들였어. 화로 안에 달군 숯을 채우던 날, 침상에서 구르듯이 내려온 위무선은 하얀 입김이 폴폴 나는 얼굴로도 이제야 살겠다며 활짝 웃었어. 


남경의는, 비록 성격은 급할지언정 눈치는 있는 소년이라 왜 진작 화로를 넣어달라 청하지 않았냔 말은 꾹 참았어. 왜 말을 않았겠어. 그간은 그럴 일이 없었으니 말할 필요도 모르고 살았겠지. 남망기가 어련히 위무선을 살뜰히 보살폈을까.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위무선의 기침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어. 한번 떨어진 입맛이 스스로 붙을 리도 만무했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잔병치레'가 무엇인지 알게 된 위무선은 시도때도 없이 터지는 기침 때문에 모로 누워있다 문득 제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보았어. 이리 보니 빈자리가 더욱 선명하구나. 먹은 것도 없는 속이 쓰라리니 숨 쉬기가 다소 버겁더라도 천장을 보고 누울 수밖에. 


그래도 잊은 것이 내가 아니라 너라서, 다시는 무엇도 잊지 않겠다던 나의 맹세는 지킨 셈이니 다행이야. 

며칠을 앓고 며칠을 살아나길 반복하다 무려 닷새에 육박하는 남사추의 꼼꼼한 감시 아래 겨우 기침을 떨쳐낸 위무선은 충동적으로 옷깃을 여미고 방을 나섰어. 아직 미열이 좀 남긴 했지만 안색이 워낙 창백해 정당히 발긋한 혈기가 도는 편이 낫기도 했고. 


목적지는 당연히 정실이었어. 제가 자리보전하고 있는 사이 사랑스럽고도 매정한 도려의 기억이 약간이라도 돌아왔을지가 궁금했거든. 평소처럼 경쾌하게 걷지 못하고 다소 비척이는 발을 끌던 위무선은 정실로 향하는 길에 남망기와 딱 마주치곤 두 눈을 동그랗게 떴어. 세상에, 남잠이네! 


- 어쩜 이런 우연이 다 있담! 역시 부부란 일심동체인가 봐. 떨어져 있어도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잘 헤아리다니! 정말이지 남잠, 넌 나를 너무 사랑한다니까.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 기다리면 내가 갔을 텐데! 


그 밖에도 터진 입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몇 마디를 더 주절거리며 호들갑을 떨던 위무선은 불현듯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어. 아차, 이이는 내 절륜하신 부군이 아니라 아정하고 점잖은 남이공자인데. 허나 그런들 이미 흘러나간 목소리를 무슨 수로 주워담겠어. 


마중나가듯 빠르게 걷던 발도 우뚝 멈춰 세우고 주춤주춤 남망기의 눈치를 살피는데, 놀랍게도 몇 달 만에 만나는 도려의 얼굴은 위무선의 도가 지나친 깨방정에도 불구하고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어. 이전처럼 눈동자를 마구 떨지도,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나지도 않았어. 


위무선은 저도 모르게 마음 속에서 싹 트는 희망을 재빨리 눌러 꺾었어. 섣불리 기대하지 않는 것은, 그에겐 생존본능과도 같은 일이라. 


- ...남잠..? 


아까보다 한층 조심스러워진 부름에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조용히 서 있던 남망기가 곧 결심을 굳힌 듯 천천히 다가왔어. 


- 오래간만....입니다. 


위무선은 흡사 실패한 반말 같은 어투에 묘한 표정을 지었어. 이미 시달릴대로 시달린 인내는 미처 붙잡기도 전에 짧았던 끝을 고했어. 


- 너, 기억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남망기는 여전히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로 답했어. 아직은. 

...하지만 약간은. 


주저하듯 덧붙인 말에 위무선은 이성의 통제를 끊어내고 제멋대로 뛰기 시작한 심장을 방치한 채 남망기에게로 바짝 다가섰어. 어떤 거? 무슨 기억? 남망기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어. 여태 곧게 마주하고 있던 눈동자가 슬그머니 궤적을 달리하자 위무선은 미간을 불만스레 꾹, 구겼다가, 미약하게 붉은 기가 도는 남망기의 귓불을 발견하곤 헤 입을 벌렸어. 곧이어 세찬 웃음이 차게 식은 겨울 공기를 가르고 높이 솟았어. 


- 알만하네! 말도 못할 정도로 난잡한 기억들이지? 근데 그거 다 네가 한 거 맞아! 


..나랑 같이 말야. 목소리의 끝은 노골적인 추파처럼 은근했어. 뻣뻣하게 굳어 있던 남망기는 이번엔 시선 뿐 아니라 고개까지 돌리며 작게 항변했어. 


- ...난잡한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위무선의 포복절도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은 자명했지. 웃음이 그치자 남망기는 위무선에게 함께 산책을 하겠느냐 권했어. 거절할 이유가 없는 위무선은 기쁘게 응했어. 


남망기는 발그스름하게 상기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왜인지 부끄러워 소복하게 흰 눈이 쌓인 돌길을 걸어가는 내내 위무선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어. 낮고 거칠게 갈린 목소리가 쉬지 않고 쫑알거리는 걸 열심히 듣기만 하던 남망기는 문득 떠오르는 의문에 고개를 설핏 기울였어. 


본래 목소리가 이러하셨던가. 

...기억이 나지 않으니 모를 수밖에. 


한없이 짧고 위태로울 것 같았던 산책은 위무선의 욕심과 남망기의 미련에 힘입어 제법 오래도록 이어졌어. 


만일 남망기가 이전처럼 위무선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더라면, 하다못해 방문 앞까지 배웅해줄 만큼의 애정을 되찾았더라면, 그리고 위무선이 바보 같은 갈망에 어리석게 휘둘리지 않았더라면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갈라져 돌아오는 길에 위무선이 눈밭 위에 홀로 쓰러져 방치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이미 일어나 버린 것을 어찌할까. 

그저 후회할 따름이지. 


채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무리하게 찬바람을 맞아 다시 열이 오른 위무선은 그 언젠가 남망기에게 약속했던 열 밤이 지나고도 눈을 뜨지 못했어.


남망기는 약속을 지켜 이번에는 열 밤만에 위무선을 전부 기억해냈는데도. 





뜨겁게 끓어올라 무서울 정도로 앓는 이의 손을 붙잡고 며칠 내도록 영력을 불어넣어주며 남망기는 제 망각의 저편에서 오래도록 아팠다던 위무선의 일상을 상상했어. 


천을 덧대지 않아 외풍이 고스란히 들이치는 창문. 너른 방에 겨우 하나 놓인 화로. 몇 겹을 겹쳐 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는 없었을 얇은 옷. 허술한 간식거리 하나 올려져 있지 않은 서안. 그리고 버릇처럼 침상의 반을 비워둔 채 구석으로 파고드는 야윈 몸뚱이.


상상을 뒷받침할 근거란 그토록이나 차고도 넘쳐서, 남망기는 기어이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담고 말았어. 설령 상대가 해가 뜨지 않는 천 번의 낮과 달이 걸리지 않는 만 번의 밤을 외로이 버텨낼 각오를 마쳤다 해도, 제게는 일순의 찰나조차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는 것을. 


내가 네가 베풀어 준 평온에 안주할 동안 너의 일상은 어떠한 그림자 속을 걸었는가. 


맞은편이 비어 있는 식사 시간. 들어줄 이가 없어 목 안에 고여들었을 속삭임. 창졸간에 반쪽이 도려내어진 너덜한 삶을 끌어안고 잠들었을 새벽. 


그 모든 순간의 너는. 

그리고 나는. 


말갛게 웃는 낯으로 정실을 벗어나던 얼굴이 눈앞에 훤했다. 도망이라도 치듯 바닥에 널린 아무 물건이나 대충 주워담아 적당한 짐보따리를 만들던 손도 당장에 마주잡을 수 있을만치 선명했다. 가을이 꺾이던 계절에 옷의 두꺼움과 얇음을 살필 겨를도 없이 아무렇게나 움켜쥐던 다급함은 또 어떻고. 


내쳐질까 두려웠을까. 피하고 꺼리면 어쩌나 불안했을까. 그래서 밀어내기도 전에 스스로 물러난 것인가. 

그런 여지를 네게 남겨두었단 것부터가 나의 잘못이니, 그러니, 

내가 어찌 네게 사죄하지 않을 수 있겠어.


까칠하게 일어난 뺨을 문지르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두 마음을 묶었던 약속은 천금보다도 무거워 웃는 얼굴을 앞에 두곤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여, 후회는 굳게 감긴 눈꺼풀 새로 빛이 들이치기 전에 전부 토해내야만 했다. 


눈물로 넘치지 못한 감정은 사랑스러운 이름의 형태를 빌어 혀 끝을 떠났다. 그 언젠가 위무선이 제 앞에서 그리했듯이. 







2020년 10월 4일에 풀었던 썰

잔불의 기사 / 마도조사 (프로필 사진 - 배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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