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어그램의 비과학적, 철학적, 종교적 요소에 대하여

 사실 에니어그램은 성격을 분류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건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9가지 이야기이다. 인간의 3대 요소(몸과 마음, 생각)와 칠죄종(7대 죄악)을 합하여 지금의 9가지 분류가 만들어 졌다. 후자는 오타쿠적으로 재미있으니 이하에 적어두겠다.


1번 : 분노

2번 : 교만

3번 : 기만(거짓말)

4번 : 시기

5번 : 인색(탐욕)

6번 : 의심

7번 : 식욕

8번 : 음욕

9번 : 나태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고대 에니어그램은 이런 것이었구나 정도로 생각하면 좋다.


에니어그램은 현대에 재발굴되어 실시간으로 연구되며 이론적으로 보강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이 아니고 철학이다. 비견하자면 종교, 관상, 사주, 풍수지리와 같다. 과학적이진 않지만 그 안에 오랜 역사에 걸친 인문적 정보가 집약되었기에, 요점을 파악하고 사용하면 어떤 지점에선 과학보다 편리하다는 점이 닮았다.

그러니 에니어그램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태클은 무의미하다. 성격의 분류는 사람의 수 만큼 있다는 표현이 정말 맞다. 그러니 성격에 대해 어떤 줄기를 말하고자 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대애충 이정도를 하나로 치자"라는 어렴풋한 경향성을 띌 수 밖에 없다.

 그러니 현대 과학이 인간의 성격에 대해 정의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대신 타고난 신체 기질 혹은 어떤 상황에만 한정하여 통계를 짜고 기록하는 방법을 택했다.

현대 과학이 별로고 에니어그램이 대단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원래 인간의 성격을 분류하고자 하는 시점에서 부정확함을 동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본능적으로 성격분류에 집착할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와 저 사람은 어쩌다 성격이 이따구인가? 왜 사람은 바보 같은 행동을 끝없이 반복하는가? 이런 고민의 어떤 답을 찾아 내고 싶기 때문이다. 그 때는 에니어그램만큼 좋은 게 없다.


 혹시나 해서 첨언하지만, 심리적 문제 상황에선 심리상담이 에니어그램보다 훨씬!! 도움이 되니 기꺼이 병원을 찾아가 상담을 받도록 하자. 애초에 모든 삶의 트러블이 오직 자기 성격에 국한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에니어그램은 정신질환이나 가족환경 같은 외부 요소는 감지할 줄 모른다.




에니어그램은 건강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종교적 영적 깨달음에 비견한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객관적 인지능력 사고능력 정서능력의 강화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총합적 지능이 성장하는 과정이다.)
  이 영적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각 종교에서는 나름의 방법을 제시하지만, 그 방법이 모든 사람에게 알맞게 통용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기독교는 봉사 정신을 강조하는데, 이 방법은 타고난 봉사정신을 가진 에니어그램 2번에게 유리하다. 불교의 경우엔 욕심 없는 삶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물욕이 없는 5번에게 유리하다. 도교에서는 흘러가는 삶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느긋한 성격의 9번에게 유리하다. 성리학과 유교는 1번에게 유리하다.
 어느 종교를 폄훼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으며, 각 종교에서 그보다 더 깊은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람은 전혀 성장하지 않고도 특정 종교의 가치를 방패로 이용해 자신의 성격이 멋지고 고결한 것처럼 꾸미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니어그램은 사람을 9가지 분류로 나누어 각각의 방법을 따로 제시하기로 한 것이다.



운동은 낭비야. 그 시간에 공부를 하는 게 낫지.


에니어그램 가로되, 사고형 5번은 사고 능력이 과하게 발달되어 있고, 감정 기능은 의도적으로 억압되어 있으며, 본능 기능은 방치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5번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본능 기능을 다시 깨우는 것이다. 어려운 말은 필요 없다. 제발 바깥에 외출하고 운동을 꾸준히 하라는 소리다.
  에니어그램에서 말하는 성격 교정 방법은 놀라울 정도로 귀신같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었던 그걸 쏙쏙 골라서 다하라고 말한다. 평생 중요하다는 건 알았지만 애써 모른 척 했던 그것들 말이다. 아니 근데, 대체 운동과 두뇌의 현명함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가? 건강하면 공부를 더 오래 할 수 있으니까? 그건 말이 되긴 하네...


 문득 어렸을 적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체육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체육 시간에 비가 오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체육시간이 자습시간이 된 것을 억울해 하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혼자 생각했다. 

'나는 움직이는 것 보다, 차라리 공부하는 게 더 나아! 차라리 공부가 더 재미있잖아! 발야구니 피구니 그런 거에 영혼을 불태우는 건 인생의 낭비야. 그 에너지로 공부를 더 하는 게 낫지!'

운동보다 공부를 더 좋아하는 나는 남들보다 좀 더 인텔리하고 멋진 것 같았다.

 
  아... 물론 공부를 진심으로 즐거워 한다는 것은 장점이다. 그렇다고 운동보다 공부를 더 좋아한다고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진 않는다. 지극히 5번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아, 나... 진짜 5번 맞네..'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질병인 허리 통증 때문에 현실에 승복하고 필라테스를 시작한 지는 이미 좀 되었다. 이것보다 더 열심히 하기는 힘들 거 같았다. 운동을 더 하려면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 텐데, 그건 너무 아까웠다. 운동하는 시간 = 버려지는 시간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내가 만약 통 속의 뇌라면? 최고로 행복할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며 거드름은 그만 피우고 운동은 그냥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라고 쉽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본인이 신체 친화적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길 바란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태어나지 않으니까.


나는 내 신체가 거추장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미 그랬다. 내 몸은 무거웠고 걸핏하면 숨이 차고 어지러웠고 자주 넘어지거나 아프거나 다쳤다. 윗몸일으키기, 앞구르기, 뜀틀 넘기, 모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다. 억지로 도전할 때 마다 괜히 자신감만 잃었고, 체육 선생들도 결국 나를 포기했다.
   내가 느끼는 내 몸은 이상하게 유리같은 신체였다. 자칫하면 깨질 것 같았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 마다 미끄러지고 넘어질까봐 항상 긴장됐고 실제로도 몇 번씩이나 넘어졌다. 내가 그렇게 스스로의 몸을 다루기 힘들다고 느낄 즈음부터 천천히 살이 찌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전까지는 정상체중이었다.
  내가 살이 찌자 부모님이 다이어트를 하라고 PT를 등록해주었다. 그 당시에는 운동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였는지, 트레이너가 실력이 없던 건지, 어린 나에게 바로 과도한 운동을 시켰다. 내가 빈혈 때문에 정신이 까딱까딱 거려도 이 정도는 원래 다들 버티는 거라며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서 얘는 왜 이것도 못하지? 하면서 혼자 갸우뚱 거리곤 했다. 

'다들 이 정돈 한다는데 왜 난 못하지...? 그래, 난 역시 쓰레기 몸인가보다! 이제 포기할래! 그러니까 당신도 그냥 날 포기해!'

 어린 나는 속으로 외쳤다. 애써 운동이 끝나도 1시간 동안은 앉아서 숨을 골라야 했다. 빈혈이 진정되고 나서야 터덜터덜 집에 걸어 들어갔다.


다 읊으려면 분량이 넘친다. 아무튼 내가 운동을 싫어할 이유는 평생에 걸쳐 충분했다. 내 몸은 평생 쓰레기였으며, 운동은 아프고 다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어느새 운동은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단순히 귀찮은 정도를 넘어서서 말이다.


고등학생때 즈음부터는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빨리 세상의 기술이 발달해서 내 신체에서 뇌만 싹 도려냈으면 좋겠다. 어차피 내 몸뚱아리는 무능하고 쓸데도 없는데 적어도 두뇌만은 좀 쓸만하니까. 뇌만 평생 살 수 있도록 통 속에 담아둔다면 그것만큼 효율적인 삶이 없을 것이다. 아니면 몸을 다 기계로 교체하는 것도 좋겠다. 그러면 책상에 100시간 앉아있어도 허리가 아프거나 하지 않겠지. 그대로 영영 하고 싶은 공부만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어차피 몸뚱아리란 것은 뇌에 에너지를 공급을 해서 목숨을 살려 놓았으면 본분을 다 한 것 아닌가?

신체를 벗어 버리고 통 속의 뇌가 되는 삶! 상상만 해도 너무 행복했다. 어른이 되어서, 당장 최근까지도 몸이 무겁다고 느낄 때 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진짜 문제는 긴장과 예민함


에니어그램을 좀 더 뒤적거리다가 인상적인 문구를 발견했다. 5번은 외부 정보에 예민하여 유독 신체 긴장도가 높고, 그것이 인간관계와 활동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평생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나를 둔한 곰탱이라고 불렀다. 과묵하며 표정이 없고 자주 사색에 잠겼으며, 툭하면 잘 넘어지고 귀도 어둡고 정신이 부산하여 물건을 잘 찾지 못하고 잘 잃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둔하고 무심한 내가 사실은 잘 긴장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니? 그냥 타고 나길 게으른 쓰레기 몸인게 아니었나?

하지만 생각해보니... 나는 평균적으로 긴장이 많긴 했다. 사회 초년생 무렵, 나는 회사에 꽤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묘하게 사무실이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꿉꿉한 사무실 냄새와 직원들의 체취 냄새 때문인가, 회사에 들어가기만 하면 스스로의 숨이 옅어 졌다. 집에 돌아오니 몸이 돌덩이 같았다. 몸이 너무 아파서 전문 마사지사를 찾아 갔다. 선생님이 어깨가 이렇게 돌처럼 뭉친 건 오랜만에 본다며 놀랐다. "최근에 스트레스 많이 받으셨어요?" 스트레스...? 모르겠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았나? 그냥 회사 일 얼추 그냥저냥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다음 날 회사에서 일하다가 문득 내 몸을 자각해 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몸 전체에 긴장이 꽉 차 있었다. "뭐지?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 중인가? 지금?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라고? 뭐 때문에??" 이상하게 스스로의 스트레스를 인지하기 힘들었다. 생각해보니 자주 이런 식으로 긴장하곤 했다. 그 이유는 영영 알 수 없었다.

그러고보면 확실히 나는 감각 능력이 독특한 거 같기도 햏다. 나는 피부에 뭔가에 닿을 때 마다 기겁하며 놀랐다. 부모님이 안아줄 때 마다 피부에 소름이 끼쳤다. 미용실에서는 남이 내 머리를 만지는 게 힘들어서 이를 꽉 물기도 했다. 고등학생 즈음 되서야 남이 내 머리를 만져도 어느 정도 괜찮아졌지만 하지만 친구들이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거나 하는 건 여전히 힘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내가 그런 상황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나의 고통을 겉으로 크게 티낸 적이 없다.

 가장 민감한 곳은 역시 시각이겠다. 어떤 것을 봐도 아주 섬세한 것까지 다 바라보아야 비로소 보았다고 느꼈다. 만약 시야를 넓게 보려고 하면 갑자기 볼 것이 너무 많아져서 눈이 어지러웠다. 그래서 무언가를 보고 기억하라고 하면 남들보다 좀 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물건을 잘 못 찾았던 것 같다. 한 두 물건이 확대된 것 처럼 크게 보였기 때문에 물건의 위치관계를 한 번에 인식하는 것이 힘들었던 것이다. 그 때는 남들도 다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보는 줄 알았다. (미술을 배우고 미술 기법을 배우고 나서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보다 시야를 훨씬 넓게 쓴다는 걸 알았다.)

그러고 보니 청각도 예민했다. 나는 스피커에서 나는 기계 소리가 너무 싫었다. 찢어지는 기계 소리는 내 온 몸의 털을 솟구치게 했다. 운동장에서 큰 노래가 울려 퍼지면 그 진동 소리에 숨이 막히고 멀미가 났다. 클럽이나 공연장에 가면 정말 미칠 것 같아서 식은 땀을 흘리며 애써 서 있기만 한다. 싸구려 이어폰을 쓸 수 없어서 항상 이어폰을 구매할 때는 기꺼이 돈을 투자하곤 한다.

'뭐야... 그러고보니 나 진짜 예민한가본데? 그런데 난 그걸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나는 존재한다, 생각할 때만.

5번이라면 내적으로 어떤 예민함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있으나 모든 5번이 그런 것은 아니며, 모든 예민한 사람이 5번이 되는 것도 아니다. 5번의 특징은 스스로의 몸과의 연결을 끊는 기술 자체에 있다.

사람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으면 신체의 감각을 잃어 버린다. 영화를 보다 보면 먹은 지도 몰랐던 팝콘이 텅 비는 것 처럼 말이다. 5번은 스스로의 사고몰입능력을 이용해서 현실과의 접속을 끊어 버린다. 왜 현실을 인식하지 않으려 했는 지는 5번마다 각각의 다른 이유가 있어 이론화할 수 없다. 뛰어난 몰입 능력이 몸의 연결을 끊은 것인지, 몸의 연결을 끊었기에 뛰어난 몰입 능력이 발달한 것인지, 그건 도저히 알 수 없다. 아무튼 이 두 가지 습관은 물레방아처럼 강화된다.

즉 5번은 현실에서 아무리 큰 스트레스를 받아도 깊은 생각에 몰입 할 수만 있다면, 모두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터득하였다. 시끄러운 주변도, 압박적인 상황도 전부 무시할 수 있다. 심지어 뭔가를 생각하는 것은 정말 재미있고 보람차기까지 하다!


결국 5번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골똘하게 고민하는 상태를 유지해야만 제대로 삶을 사는 것 같은 어떤 강제적인 필요성을 평생 지니게 된다. 행동을 반복할 수록 더욱 더 몸과의 연결은 멀어진다. 그러니까 뒤늦게 몸을 쓰려고 했을 때는 이미 쓸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뜀틀을 뛸 때는 점프하는 나의 다리, 뜀틀을 짚는 나의 손, 그리고 공중에 떠오르는 나의 몸, 착지하는 나의 몸무게, 이것들을 계속 느끼고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사람은 이렇게 자신의 몸에 집중하려면 필연적으로 생각도 정지시켜야 한다. 머리가 빈 상태에서만 리듬게임이 가능한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생각이 멈추는 건 5번에게 있어서 위험벨이고 비상사인이다. 생각을 멈추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어떤 강제성을 느낀다. 그러니까 몸을 쓰면서도 자신의 신체를 감각으로 느끼지 못하고, 계속해서 생각하려고 한다.

"내가 어느 위치에서 점프해야 되지? 얼마나 뛰어야 하지? 그 다음엔 손을 어디에 짚어야 돼? 어? 이거 길이가 원래 이렇게 긴가? 얼마나 긴 거지? 이렇게 긴 걸 넘으려면 얼마나 힘을 줘야 되지...?"

이런 걸 계속 생각하고 있다보면 내가 아무 것도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무모한 도전을 하는 것 처럼 느껴진다. 분석은 미처 끝나지도 못했는데 이미 뜀틀이 바로 내 앞에 있다. 멈추지 않는 사고 덕분에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 버리고 힘 조절에 실패한다. 결국 그대로 뜀틀에 앉아 버린다.

5번은 평생 이런 상황을 마주한다. 결국 5번은 자연스럽게 몸을 쓰는 활동에서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위축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대화란, 순간 순간의 티키타카이며 감정과 감정의 교류이지만 5번은 본인의 생각을 끊을 수 없기 때문에 입으로는 말을 하면서도 대화의 논리를 분석하거나 대화의 내용을 머리 속으로 메모하듯 정리하고 있거나 상대방의 행동까지 확인하고 분석하여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그래서 대화의 타이밍을 잡지 못하거나 본인의 말 속도, 목소리 크기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런 것들이 인간관계의 위축으로도 이어진다. 그리고 그 위축이 또 다시 스스로의 예민함을 강화시킨다. 다시 물레방아처럼 빙글빙글 돈다.

P.S: 6번도 걱정이 많은 성격에 사고 과다로 비슷한 고통을 겪는다. 다만 6번은 깊은 사고를 이용하여 자신을 주변과 차단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20대 초반 어느 날, 나는 내 뇌만 세상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괴상한 감각을 느꼈다. 나의 생각만이 선명하고, 나의 몸과 내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이 다 가짜 아바타과 가짜 배경 같았다. '나'라는 별도의 정신이 있고 신체를 컨트롤러로 조종하면서 움직이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 때 만약 누군가가 사실 네 몸은 네 것이 아니고 너는 다른 이에게 빙의한 것이다라고 하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최근 들어 알았지만 이걸 이인증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이인증은 그 자체만으로는 병이 아니고, 원래 일반 사람들도 가끔은 느낄 수 있다. 나도 물론, 마지막에는 "설마 진짜 그렇겠어!" 하고 넘기곤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그 위화감을 느끼곤 했다.
 5번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나니, 그 동안 내가 왜 그런 느낌을 느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예민함과 긴장과다로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 보았다. 정말 어린 시절 나 그대로였다. 부모들은 아이가 둔해서 걱정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 아이들은 예민한 아이들이었다! 다른 아이처럼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기 보단, 스스로 세상을 무시하는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요즘의 아동 교육은 많이 발달해서, 이같이 몸의 연결이 잘 안 되는 아동들에게는 자기 몸을 다루는 법을 가르친다. 안타깝게도 나는 너무 일찍 태어나서 그런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야 알았다! 내 몸은 특별히 연약하거나 스포츠 재능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지나친 신체의 위축 때문에 몸을 쓰는 방법을 잊어 버린 평범한 5번이었다.
 훨씬 어린 시절, 유치원 다닐 적의 나는 뒷산 오솔길 사이를 기꺼이 달려가며 앞서 오르던 아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엔 자전거 타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두 세번의 시도만에 그렇게 어렵다는 두발 자전거를 탔다. 나중에는 자전거 뒤에는 동생을 태우고 자전거로 드리프트를 하는 겁없는 놈이었다. 그래, 나에게도 분명 그런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그저 방법을 잊어 버렸을 뿐이다.



나는 여기, 지금 이 순간, 존재한다.


5번은 생각을 끊는 법을 배워야 한다. 5번은 자신의 사고능력=자신의 전부라고 믿어버린 나머지, 사고를 끊으면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대화를 할 수도 없을 것 같다고 착각한다. 뛰어난 자신의 사고 능력을 이용해서 몸의 기능과 마음의 기능을 대리하려고 시도한다. 좀 더 치밀하게 집중하고 상황을 판단한 뒤에 몸을 움직이려고 든다거나(물론 더 긴장하게 되서 역효과다!), 심리학을 공부해서 사람의 마음을 알아 내려고 하는 둥이다.(당연히 역효과가 난다.) 하지만 아무리 사고 능력이 천재적이어도 뛰어나도 그것으로 몸과 마음의 능력을 완전히 대리할 수는 없다. 그것이 진실이고 현실이다.

 늦지 않았다. 나에게 몸과의 연결을 그걸 떠올려 줄 시간이 왔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나는 다시 또 넘어지고, 가끔은 다치기도 하겠지만, 내 신체를 영원히 두려워하며 살 수는 없다. 사람은 현실 세상에 스스로의 발을 딛고 살아야 한다.


왜 많은 에니어그램 글이 5번에게 명상을 꼭꼭 추천하는지 깨달았다. 명상이란 잡념을 끊고 자신의 몸과 연결되는 연습이다. 참고로, 명상 중에서 하루를 돌아 본다던지 등으로 어떤 고민에 집중하게 하는 명상이 있는데 이는 5번에게 적합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요가 니드라를 추천한다. 몸 구석구석의 감각을 하나씩 깨우며 잡념을 끊는 수련법으로, 유투브에 검색하면 언제든 무료로 체험이 가능하다.

명상을 매일 2주 정도 반복하자, 몸의 이야기를 듣는 느낌을 알게 되었다. 새삼 내가 얼마나 자주 긴장하는 지 깨닫고 깜짝 놀랐다. 불현듯 느껴지는 숨막힘, 스트레스, 압박감. 그런 것들이 느껴질 때 마다 나는 버릇대로 더더욱 머리를 쥐어짜며 뭔가를 고민하곤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말이다.

이제는 몸의 감각을 가장 먼저 살핀다. 내 전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명상하여 털어 버린다. 그러면 놀랍게도 그 즉시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가만히 명상하던 나에게 어떤 또렷한 감각이 찾아왔다. 주변 모든 물건의 크기, 열기, 주변의 냄새, 거리감... 세상 모든 것들을 향한 감각이 한 번에 내 몸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그 때 확실히 느꼈다. 그것들은 가짜가 아니다. 바로 이 공간, 이 시간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것을 감지하는 내 몸도 가짜가 아니다. 여기에 있다. 내 몸이 스스로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있다. 평생을 듣지 못했던 내 전신의 울림을 느꼈다.

눈을 떠 보았다. 내 방이 처음 만난 세상처럼 신선했다. 이전보다 구석구석 모든 것이 더 잘 느껴지고 잘 보이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다. 생각을 안 하는 법을 배웠더니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고 집중력이 높아졌다. 그게 정말 가능한 거였다니...


그 이후로는 운동을 할 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떤 생각이 들 때 마다 끊고, 다시 내 몸의 감각에만 집중했다. 실내의 공기를 마시고 뱉고, 기구의 촉감을 느껴보고 내 몸의 근육이 수축하고 뼈가 기울어지는 것을 몸의 흐름으로 바라보았다.

 예민함은 뒤집으면 섬세함이 된다. 그 순간 나의 예민함은 적이 아니었다. 감각들이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어떤 포즈인지 또렷하게 전해 주고 있었다. 복잡한 분석사고능력을 쓸 필요도 없이 내 위치는 명료했다. 새로 오신 필라테스 강사님이 날 보고 놀라며 물었다.

"혹시 예전에 운동하신 적 있으세요? 아니, 자세를 정말 잘 파악하셔서요!"

 

평생 그림이 업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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