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을 쓸 거라면 기왕이면 재미난 것, 행복한 것에 대해 써서 기쁨을 널리 퍼뜨리자’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역시 생각은 쉽고 실천은 어렵다. 이번에도 그다지 신이 안 나는 이야기를 할 판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보드게임이라는 문화에 영혼을 팔아온 사람으로, 에너지와 시간이 넘치던 시절에는 보드게임 관련으로 별짓을 다 했다. 그냥 사서 갖고 놀기만 한 게 아니라 리뷰도 적지 않게 썼고, ‘까짓거 해보지 뭐’라는 생각으로 팟캐스트 방송도 했으며, 매거진에 칼럼도 썼고, 크라우드 펀딩으로 내 게임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만큼 보드게임은 내게 높은 가치를 갖는 유희였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기에 오래도록 변함없이 행복한 취미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그 가치가 흔들리는 게 절실히 느껴진다. 아마 내가 절찬리에 여유를 잃어가는 중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새 게임이 공급되지 않아서 비슷비슷한 행위에 질려가는 중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특히 심각하게 전과 다른 부분은 바로 보람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 사람이 뭘 해도 보람, 효능감을 느껴야 원동력이 되는 법이니까 이건 아주 무서운 증상이다. 그런데 정말로 예전에는 꺼낼 때마다 굉장히 재미있고 웃기고 신날 것 같던 게임들의 80%가 이제 ‘굳이 이걸 할 필요는 없지’ 싶은 영역으로 넘어가서 애초에 시도도 하지 않게 되었고, 나머지 15%도 또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해봤다가 ‘어째 예전이랑은 다른데’ 하고 고개를 젓기 일쑤다. 얼마 전에는 내가 수년 전에 열과 성을 다해서 번역한 게임을 꺼내서 해봤는데, 친구들도 그리 흥이 나지 않는 듯했고 나 자신도 보스와의 일전이 박진감 넘치는 두뇌 활극이 아니라 복잡하게 움직이는 목각 인형과의 단순 훈련처럼 느껴져서 이래저래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나머지 5% 정도는 또 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실제로 해봐도 재미있어서 다시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긴 한다. ‘반지의 제왕’처럼 커다란 캠페인 안에서 스토리가 이어지는 게임, ‘광기의 저택’처럼 여차하면 아슬아슬한 국면이 몰려오는 협력 게임, 혹은 ‘도미니언’처럼 무작위 조합이 아주 다양해서 매번 색다른 전략을 시도해볼 수 있는 게임이 여기에 속하는데, 문제는 이렇게 수명이 긴 게임은 십중팔구 물리적으로 부피가 크고 무거워서 카페 같은 곳에 갖고 다니며 할 만하지가 않다는 점이다. 가만히 숨만 쉬어도 체력이 회복되던 20대 시절이라면 모를까, 자연적으로 체력이 떨어지고 있는데 그것을 끌어올리기에 합당한 노력도 잘 하지 못하는 요즘은 감당할 수 없다.


그리하여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카드 두어 뭉치로 이루어진 ‘방탈출’ 류의 보드게임이다. 이건 그럭저럭 스토리도 있어서 무슨 이야기든 감상할 수 있고, 물리적으로 가벼우며, 복잡한 퍼즐이라는 위기 국면도 나름대로 존재한다. 제법 이상적이다. 다만 ‘일회용’이라 한 번 답을 보면 가치가 소멸해버린다는 게 치명적인 단점이다. 따라서 매번 새 게임을 준비해야 하는데 이것도 금전적으로 만만치 않은 일이고, 모든 방탈출 게임이 만족스러운 수작일 수는 없는지라 딱 한 번 하는 게임인데 이따위 문제가 다 있냐며 분통을 터뜨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게 상당한 위험부담이다.


그런데 이런 저런 게임으로 잃어버린 즐거움을 찾으려 애쓰면서도 벗어나기 힘든 함정이 있다. 바로 ‘의미’를 찾는 심리다. 사실  보드게임이야 원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재미를 느끼게끔 열심히 궁리하여 만든 것들이라 일단 하면 어느 정도의 재미는 있기 마련이다.  게임 안에서 내가 몰랐던 새로운 면을 발견하면 보람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만족할 만큼 충분한 ‘의미’를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보드게임이라는 유희가 ‘없던 문제를 굳이 만들어내서 해결하는 방법과 수준을 겨룬다’는, 별 의미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의미가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전략을 시험하고 승리를 거머쥔다고 얼마씩  불우이웃에 기부되는 것도 아니고, 나라는 인간의 가치가 높아지거나 내가 느끼는 고통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재미있거나 즐거울 뿐이다.

취미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여기서 잠깐, 재미있거나 즐거울 뿐이라니, 그럼 그게 ‘의미’가 아니란 말인가? 분명 올바른 지적이다. 나를 포함해서 누군가를 즐겁게 했다면 이미 충분한 의미가 있는 일이 맞다. 그런데도 굳이 다른 의미를 더 찾으려는 것은 아마 뭐든 더 발전하고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더 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주먹만한 눈사람을 만들 때, 사람들은 보통 잘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 않고, 만든 뒤에도 다음에는 더 잘해야만 한다는 초조함을 느끼지 않는다. 순수한 재미를 느끼고 끝내는 것이다. 아마 나도 보드게임을 처음 할 때는 순수한 재미만 느꼈을 텐데, 시간이 지나며 분석을 하고 제작을 하다 보니 게임에서 뭘 배워야 한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으리라. 게다가 모임 내에서 게임을 전담하다시피 한 기간이 십수년째라 항상 사람들을 다 즐겁게 해야 나도 더 나은 인간이 될 거라는 강박을 느끼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요컨대 ‘성과’와 ‘의미’를 혼동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흔한 자기계발서라면 ‘성과’와 ‘의미’를 혼동하지 말자, 나에게 즐거움만이 가득한 안식을 주자, 그게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이니까…… 같은 말로 끝맺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성과는 중요하고 발전은 멋진 일이니까. 다만 그것을 추구해야 할 때와 하지 않을 때를 확실히 구분짓는 재주를 갖추고 싶다는 생각은 든다. 그리고 이 오랜 취미의 시들함이 만약 자연스러운 취향의 변화로 인한 것이라면, 내게 순수한 즐거움을 선사할 새로운 취미나 여유가 하루빨리 생기길 바랄 따름이다.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카카오 페이지)을 썼습니다. 일상 속에서 느끼는 두서없는 잡상들을 올립니다. 간혹 게임이나 영화 얘기도 합니다. 트위터 @memocap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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