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은 쏜살같이 지나가버렸고, 우린 개학을 맞았다. 방학 내내 날 힘들게 하던 더위는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달라붙어있었다. 하루하루를 더위에 허덕이던 우리에게도 오아시스 같은 소식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내일이 학교 개교기념일이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개교기념일의 아침이 밝았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오전 내내 집안을 뒹굴 거렸다. 오징어를 질겅거리며 컴퓨터 앞에 앉아 어제 받아두었던 드래곤 길들이기 3를 열었다. 그리고 과자 박스로 손을 뻗는데, 팝콘이 없다! 분명 엊그제 사뒀는데! 박스를 꺼내 탈탈 털어도 빈 박스뿐 이었다.

팝콘 없는 영화는 앙꼬 없는 찐빵이 아니던가. 결국, 난 무거운 몸을 일으켜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으로 가는 길에 우연이를 만났다. 혼자 골목에 쭈그려 앉아 돌멩이로 장난을 치고 있는 모습에, 무슨 일인가 싶어 이름을 부르자 바나나 우유 언니라며 날 알아봤다. 다가가가서 일으켜 세워주고, 엉덩이를 털어줬다. 손목시계를 보니, 1시가 거의 다 되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점심시간 아닌가?


“우연아, 유치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여기 있어?”

“... 밥, 먹기 싫어서요.”


밥을 먹기가 싫어? 이것이 급식단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내 일생에서 밥을 거부하는 아이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이건 돈가스와 스파게티 둘 중 어느 것이 먹고 싶은지 묻는 질문보다 힘든 문제다.

머리를 쥐어 싸고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우연이는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우연이의 손을 잡고 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고 난 후, 손을 잡아 이끌었다. 하지만 망부석이라도 된 듯 우연이는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유치원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투정을 부렸다.

인생 최대의 고민을 가진 난 심각한 표정으로 편의점에 들어갔다. 내 레이더에 걸린 이상,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사려던 콘소메 맛 팝콘 한 봉지와 우연이에게 줄 바나나 우유, 베이컨 에그 샌드위치를 사 왔다.

 정 그러면 이거라도 먹고 가라는 말에, 우연이는 샌드위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세상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포장을 까더니 이리저리 훑어보며 냄새를 맡았다. 샌드위치가 마음에 안 드나? 혹시... 베이컨을 못 먹나? 아님 달걀 알레르기가 있나?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도 팔아요? 난 샌드위치 전문점에서 팔고 있는 것 밖에 안 먹어 봤는데...”


?? 뭐 이런. 아니,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여태 모르고 산 거 야? 이 친구, 인생 헛살았네... 편의점 샌드위치가 얼마나 싸고 맛있는데, 이런 가성비 갑인 샌드위치를 모르고 살았다니... 측은한 눈빛으로 우연이를 바라봤다.

우연이는 샌드위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빨대를 꽂아둔 바나나 우유를 제 입으로 가져갔다.


“... 맛있다.”


이 말을 끝으로 우연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샌드위치를 열심히 먹었다. 샌드위치 한 입, 바나나 우유 한 모금. 이 루트를 지키면서. 다람쥐처럼 두 볼을 잔뜩 넣고, 오물 오물거리며 말이다.

우연이는 샌드위치와 우유로 가득 찬 배를 통통 두드렸다. 아무래도 밥을 먹기 싫었던 게 아니라 유치원에 가기가 싫었던 게 아닐까. 정말 밥을 먹기 싫어서 유치원에 가지 않은 것인지 묻자 우연인 입을 오물오물거리며 날 쳐다봤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우연이는 잠시 머뭇거렸다.


“... 애들이 괴롭혀요. 엄마가 안 계시다고 무시해요.”

“...”

“밥 먹을 때도 나만 빼고 먹고, 놀 때도 나만 빼고 놀고, 인사해도 받아주지도 않고.”

“...”

“엄마 없는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

“...”


우연이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굴곡 없는 어조로 말을 뱉었지만, 목소리 끝이 잘게 떨렸다. 덤덤해 보이려 노력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우연이를 데리고 유치원으로 갔다. 아무리 밥을 먹기 싫다고 해도 일단 유치원에 가기는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시소를 타고, 모래성을 쌓고, 그네를 타고 있었다. 놀이터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 차있었다.

우연이는 놀이터를 텅 빈 눈동자로 놀이터를 응시했다. 그때, 정글 짐에 꼭대기에 있던 남자아이가 이쪽을 쳐다봤다. 남자아이의 아우라가 순식간에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야, 찌질이 왔어!”


그 한 마디에 시끌벅적하던 놀이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들리는 말들은 우연이를 향한 비난과 나에 대해 궁금해 하는 내용이었다.

정글짐에서 내려온 아이는 우리 앞에 섰다. 다가와서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비스듬하게 비튼 채, 나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내 손을 잡고 있던 우연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손에 힘을 주어 다시 꽉 맞잡았다. 놓지 않겠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우연이 사촌 언니야.”

“꼴에 사촌 언니도 있나 보네. 엄마는 없으면서.”

“뭐?”


우연이의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그러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자국을 남겼다.

우연이의 가는 속눈썹이 흔들렸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차올랐다. 툭 치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우연이는 고개를 숙여 애써 그 모습을 감췄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차오르는 분노에 핏대가 섰다. 이게 정말 유치원생의 입에서 나온 말인 걸까. 요즘 애들이 무섭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해도 되는 말이 있고, 하면 안 되는 말이 있는데. 뱉는다고 다 말인 줄 아나. 지금 자신들이 하는 그 말이 상대에겐 얼마나 큰 상처와 아픔을 남길 수도 있는데.




감정이 북받쳐 화를 낼 뻔했지만 잠시 진정하고 함부로 말하던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만약, 너희가 우연이의 입장이었다면 어떨 것 같은지. 단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했다면, 이런 말을 그리 쉽게 뱉을 수는 없다고. 누군가는 우연이처럼 엄마가 안 계실 수도 있지만, 아빠가 안 계실 수도 있고, 두 분 다 안 계실 수도 있는데, 그런 아이를 만날 때마다 이럴 거냐고. 이런 행동은 나쁜 거고, 앞으로는 그러지 말고 보듬어주며 함께 어울리라고.

아이들은 내 말이 잔소리처럼 들리는지 되바라진 태도로 날 바라봤다.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우연이가 말을 꺼냈다.


“... 우리 엄만 일찍 하늘나라로 갔어."

“... "

"그곳은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곳이래.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

“보고 싶어도 보지를 못하고 닿고 싶어도 닿지 못하는 마음을 너희는 모르잖아...”


   우연이는 밀려오는 울음을 참아내며 그 애들에게 말했다.


   감히 가늠할 수나 있을까. 겪어보지 않고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그 아픔과 슬픔을.

우연이는 그 애들에게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더는 자신에게 상처주지 말라고.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은 놀란 듯 한참 말이 없었다.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자 하나 둘 우연이에게 쭈뼛쭈뼛 다가와 사과를 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은 아픈 일이다. 분명 내 곁에 있었지만 이젠 내 곁에 없는 누군가를. 분명 내 기억의 한편을 차지했을 테지만 이젠 그 한편이 어디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소중한 누군가를 회상하는 일은 고달픈 일이다.


“언니 가봐야 해. 너무 오래 있었어.”


내 옷자락을 꽉 쥐고 있던 우연이가 내 앞으로 왔다. 아직도 떨면서. 그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우주와 비슷한 향이 깊숙이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우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우연이는 내 목을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난 우연이를 더 깊이 안았다. 답답할 만도 한데, 우연이는 그대로 안겨 있었다. 그때, 우연이가 누군가를 불렀다.


“오빠...”

"?"

“... 은하린?”




급하게 뛰어오던 우주는 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당황한 듯 초록색 아우라가 보였다. 우연이는 내 품에서 벗어난 후, 우주에게 달려가 안겼다. 우주는 어정쩡하게 우연이를 안고는 내게 물었다.


“하린아, 여긴 어쩐 일이야?”

“어... 그게...”


우연이는 우주의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우연이에 우주는 당황한 듯 했지만 이내 우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말해주며 달래줬다. 우주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우주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쭉 해줬다. 마트에서 만난 이야기부터, 우연이가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듣고 있었는지까지 전부 다.

조용히 듣고 있던 우주는 우연이의 눈물 자국을 어설프게 매만져주며 우연이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세심하게 떼어주었다.


“우연이, 많이 힘들었겠네... 먼저 알아채지 못해서 미안해.”


그 말에 우연이는 자신이 말을 안 했는데 오빠가 어떻게 아냐며 오히려 우주를 위로했다.


“다음부터 누가 우연이 건들면 바로 오빠한테 말해야 해, 알겠지?”


우연이는 우주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이는 지쳤는지 우주의 품에 안겨 뭉그적거리다, 이내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우주의 주변엔 파란색과 붉은색이 맴돌았다.


“... 왜 화났어?”

“...”


우주는 우연이의 머리칼을 정리해주던 손을 멈췄다.


“... 잘 모르겠어. 그냥... 나한테... 화가 난 것 같아.”

“...”

“매일 같이 이야기하고 보고 함께 있는데도... 우연이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어서... 그래서 화가 난 것 같아. 나한테.”


우주는 말을 하던 도중, 고개를 숙였다,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말을 끝내고는 발로 애먼 잔디들을 지르밟았다.


“우연이가 다시 상처받지 않았으면 했는데, 이렇게 상처 주게 되네...”


말끝을 흐리는 우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우연이를 안고 있는 어깨가 더 웅크려진 것처럼 보였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우주에겐 어떤 상처가 있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고마워. 도와줘서.”


그날, 처음으로 슬퍼 보이는 우주를 마주했다.




TMI

- 하린이가 집에서 영화를 보는 이유는 색안 때문에 사람 많은 곳에 잘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프롤로그 편 참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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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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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5 - 2019.04.05  전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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