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극 엔딩 직후 시점입니다. 분위기 반전이 자주 일어납니다.

* 아템을 인간이 아닌 반신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 카이바의 캐릭터성이 평균과 조금 다르게 전개될 수 있습니다.









카이바는 ‘듀얼몬스터즈 카드게임’, 줄여서 듀얼이라 부르는 이 대중적인 게임에 ‘솔리드 비전’이라는 홀로그램 기술을 접목시켰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듀얼리스트들은 작은 탁상 위에 종이 카드를 쌓아두고 일일이 손으로 뒤집어 내용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 낡은 불편을 없애고 듀얼의 현장감과 스릴을 고조시킨 것이 바로 솔리드 비전 시스템을 탑재한 KC의 듀얼 디스크다.


배틀 시티를 개최할 무렵에 보급된 듀얼 디스크의 구조는 대략 이렇다. 유저가 디스크에 카드 덱을 장착하면 그 데이터가 인공위성을 거쳐 KC의 센트럴 서버로 송출된다. 서버는 이미지 데이터를 다시 디스크로 보내고, 그때 솔리드 비전 시스템이 작동하며 디스크 주변에 몬스터가 실체화되는 것이다. 즉 디스크와 카드, 그리고 서버의 상호 작용으로 홀로그램이 구현된다.


그 시스템의 설계자인 카이바는 지금 난관에 부딪쳐 있었다. 관련 특허를 수십 종씩 보유한 그조차 일 년의 공백을 따라잡기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상대가 일 년 뒤의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솔직히 막막했다.


일단 명계에서 파손된 듀얼 디스크의 외형은 아템이 원래대로 수복해 주었다. 카이바는 복구된 헤드기어와 디스크 본체를 살펴보고 크게 놀랐다. 서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작동하는 구조라니! 이 작은 기계가 수백 억짜리 슈퍼컴퓨터와 맞먹는단 말인가. 아템의 말로는 ‘전뇌 데이터(두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활용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하기야 인간의 뇌에 접근할 수만 있다면 그 잠재된 성능은 무궁무진하겠으나.


“믿을 수 없군….”


카이바는 원초적인 의문을 떠올렸다. 왜 자신은 이렇게까지 괴물 같은 기계를 만들어야만 했는가…. 지금도 KC의 경영 상태는 안정적이며 부채 하나 없이 튼튼한 재무구조를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고작 일 년 사이에 과학계의 난제로 손꼽히는 뇌와 우주를 건드려서까지 신기술을 개발한 절실함의 근본은 도대체.


“…넌 정말 대단해.”


아템이 맞장구를 쳤다. 어쩌면 그가 카이바의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의 말은 부연하지 않았다.


어쨌든 당분간 연구가 필요하므로 둘은 명계에서의 식사와 거주에 대해 의논했다. 일단 아템은 인간의 사이클을 완전히 벗어나 있어서 식사가 필요하지 않고, 규칙적인 수면을 취할 일도 없다. 다만 가끔 신격화 의식이 ‘잠’과 ‘눈물’의 형태로 아템을 습격해 난데없이 쓰러지는 경우는 있었다(예를 들어, 복도를 걷다가 털썩 쓰러져 마하드가 침대로 옮겨주기도 한다). 따라서 아템과 카이바가 합을 맞춰 지내기란 근본적으로 무리였다.


다행인지 카이바는 눈을 뜬 이후로 허기를 느낀 적이 없다고 했다. 머리를 다쳐 기절했던 것일 뿐 졸음기도 별로 없었으므로 그 역시 식사와 수면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다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동안은 커피나 차 등의 습관성 카페인이 필요했다. 또 피로가 누적될 수도 있으니 그때는 아템의 침대를 빌려 수면을 취하기로 합의했다.


아템은 그의 연구를 도울 만한 지식이 없음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카이바에게 하루 두세 번 정도는 커피나 차를 대접하겠다고 일렀다.


그다음 아템은 KC 연구개발실을 본뜬 스무 평 정도의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침실과 그리 멀지 않은 복도로 나가, 아무것도 없는 벽에 손바닥을 대고 눈을 감는다. 그러자 아템의 희미한 기억이 신의 권능을 빌어 실체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KC 로고가 크게 새겨진 출입문이 생기고, 주변으로 번지듯이 카이바의 연구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다소 과거의 모습이지만, 그나마 한 번은 초대를 받고 방문한 경험이 있어서 이만큼이나마 재현할 수 있었다.


연구실 앞에 선 카이바는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시큐리티 락에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러자 패드에 닿은 지문을 인식한 스캐너가 카이바의 눈동자에 붉은 레이저를 쏘아 홍채를 분석한다. “어서 오십시오. 미스터 카이바.” 보안을 해제하는 기계 목소리도 기억 속의 연구실 풍경 그대로였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카이바가 문턱을 밟고 서서 고개를 돌렸다.


“네 녀석… 정말 나와 어떤 관계가 있었나?”

“….”

“이곳은 연구진 외에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을 터….”

“…외형은 그럴싸해도 난 이쪽엔 젬병이거든. 작동하지 않는 기계가 대부분일 거야. 도움이 될지는 장담할 수 없으니 잘 살펴보는 게 좋아.”


아템이 대놓고 말을 돌리자 카이바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내용도 중요해 어쩔 수 없이 화제를 따라가야만 했다.


“가능하다면, 퍼스널 컴퓨터를 한 대 추가해라. 하드웨어만 멀쩡하다면 소프트웨어는 만들어 내면 그만이니.”

“응.”


고의적인 무시를 알아채고 기분이 나빠졌을까. 카이바는 흥, 하고 몸을 돌리더니 아템이 뒤따르기도 전에 출입문을 닫아버렸다. 아템은 다시 굳게 잠긴 시큐리티 락을 보면서 무안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하여 고대 이집트 왕궁 안에서 첨단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기묘한 나날이 시작됐다. 퍽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카이바의 존재가 불안정하지만 않았다면 좋을 대로 머무르다 가도록 허락했을 것이다. 그 화려한 목숨을 불사른 목적이 아템과의 듀얼이었다니 얼마든지 상대해 줄 수 있었는데(물론 신의 이름을 걸고 질 수는 없다).


망자의 세계라고는 하지만 명계에도 나름의 질서와 생활이 존재한다. 통치자 아템의 영향으로 신비로운 고대 문명의 형태를 띠게 된 소우주. 더 이상의 죽음도, 어떤 욕망과 죄도 없는 이 세계는 일견 따분할 것 같지만 의외로 그렇지도 않다. 시간의 지배조차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아템은 하루의 대부분을 옥좌에 앉아 보낸다. 수천 년 전에는 인간의 몸으로 국가를 통치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태양처럼 단지 존재함으로 모든 망자를 구원하는 명계의 신ㅡ아템. 그의 신념은 명계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가 어떤 부정한 것도 원치 않으므로 망자들에게는 죄악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아템은 이미 지루함이라는 감정을 벗었다. 마음만 먹으면 며칠, 몇 달, 심지어 수 년도 옥좌에 앉아 보내버릴 수 있지만 굳이 그러지 않을 뿐이다. 영생하게 된 그는 언젠가 현세의 친구들을 모두 떠나보내게 될 것이다. 망자로 재회한들 과거의 추억이 남아있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에 아템은 지금의 1분 1초를 소중히 보내기로 했다.


“파라오, 무탈하셨습니까. 귀환을 보고드립니다.”

“아, 마하드. 수고가 많아.”

“아닙니다. 별고 없었으므로.”


그즈음 수호신관 마하드가 명계 순찰을 마치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마하드는 아템의 사지와 오감을 대신하는 존재다. 그의 주기적인 순찰은 명계의 모든 정보가 아템에게로 모여들고 다시 신의 의지가 되어 퍼져나가는 통로였다. 그 외에 외부로부터 간섭과 침범이 있는지 감시하는 역할도 겸했다. 카이바가 명계에 처음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알아차린 자가 바로 마하드였다.


“그 자가 깨어 있군요.”

“응. 사정이 있어서 좀 더 머물 예정이야. 그가 방해를 당하지 않도록 각별히 보호를 부탁한다.”

“유념하겠습니다.”


카이바를 이르는 대화였다. 마하드는 아템의 강한 의지를 느끼고 머리를 깊게 숙였다. 하지만 곧 시선을 들어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허락하지 않는 욕망으로 들끓는 자입니다. 아직 반신이신 파라오께 부정한 영향을 미칠까 염려됩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아템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카이바는 기억을 잃었어. 전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마하드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기색을 누르는 것 같았다. 수천 년 전부터 충성을 바쳐 온 신하는 종종 이렇게 과보호 기질을 보일 때가 있었다.


“참, 그에게 커피를 대접하기로 했지.”


우주를 통틀어 가장 믿음직한 신하가 아닌가. 아템은 씩 웃고 옥좌에서 일어나 카이바의 연구실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에 걸친 금빛 장신구들이 영롱하게 흔들리기를 반복했다.








왕궁의 면적은 작은 마을 하나쯤을 감싸 안을 수 있을 정도로 드넓었다. 산책하는 걸음으로는 삼 일 밤낮을 걸어도 다 둘러보지 못할 정도의 웅장함. 지평선이 보이도록 기나긴 복도를 걷고 있으면 이따금 그림자 같은 쓸쓸함이 늘어지곤 했다. 수천 년 전 현세의 왕궁을 가득 메웠던 신관들, 시종들, 병사들의 발소리는 이제 없었다.


그 황량한 복도에서 웬일로 기대감이 차오르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 길 끝에 카이바의 연구실이 있기 때문일까. 목적지가 생긴 여행이 작은 생동감을 품었다. 아템은 어느 새 푸른 교복 차림이었다.


연구실의 입구는 KC의 삼엄한 보안 체계를 재현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으로 아템이 손짓 한 번만 하면 스르륵 열리기 마련이다. 카이바도 알고 있어서 갑작스러운 방문에 동요하지 않는 눈치였다. 어쩌면 연구에 골몰해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는지도 몰랐다. 아템은 허공에서 소환한 아메리카노 머그컵을 잡아 들고 잠시 그 뒷모습을 보았다.


기억이 퇴행했어도 일 년 사이 듬직하게 성장한 차이바의 몸은 그대로였다. 애초 아템이 시선을 한참 올려야 하는 장신의 남자였지만, 호리호리하던 체구에 어느 새 근육이 짱짱하게 붙었다. 어딘가 위태롭던 조형이 비로소 제 모습을 완성한 듯한 균형미. 바쁜 나날 틈틈이 강도 높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소화했을 거라 생각하면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달그락, 아템이 머그컵을 책상에 올려놓는 소리가 났다. 여기저기 가득한 연구 메모들 위로 뜨뜻한 김이 올랐다. 그제야 카이바는 커피와 아템을 흘끗 보더니 인식했다는 눈치만 보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식을 텐데. 마시면서 좀 쉬었다 해.”


보다 못한 아템이 한마디 붙였으나 카이바는 작고 뾰족한 도구로 수십 가닥의 가느다란 전선들을 분리할 뿐이었다. 집념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가 식욕과 수면욕까지 탈피하니 그 집중력이 가히 통탄스러웠다. 아템은 당황을 숨기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카이바의 널찍한 어깻죽지와 선명하게 떨어진 견갑골 라인을 보는 일은 생소했다. 아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언제나 아템을 좇는 역할이었다. 앞서 달리기만 바빴던 아템이 카이바의 뒷모습을 오래 볼 기회는 드물었다. 어쩌다 끝자락만 맞닿아도 덤벼들 듯 형형한 눈빛을 발산하던 녀석이, 이렇게 아템을 무시하고 자기 일에만 열중하는 광경이라니.


“바쁜데 실례했군. 내가 필요하면 대전이나 내 침실로 와. 보통 거기 있으니까.”

“…알았다.”

“다른 곳을 산책해도 괜찮고. 왕궁에서 널 막을 자는 없을 거야.”

“고대 이집트 도시라고 했었나? 연구에 도움이 되진 않을 것 같군. 시간 낭비다.”

“뭐, 그렇지….”


모두 카이바의 뒤통수와 나눈 대화들이다. 방해인 것 같으니 나중에 다시 올까…. 뒤돌아 연구실을 나선 아템은 문득 원치 않는 쓸쓸함으로 참담해졌다. 일방통행이라는 것이 이렇게 많은 감정을 소모하는 행위였다. 그동안 카이바를 단지 ‘넘어서야 할 시련’으로 여겨 왔던 날들은 얼마나 이기적이었던가. 또 이렇게 반성하는 순간조차, 그가 명계로 와서 기억을 잃게 된 모든 당위가 아템을 시험하기 위한 우주의 안배가 아닌가, 그런 식으로 카이바를 또 시련처럼 여기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럴 만큼 쓸쓸했다.





▶ 4편에서 계속



관리인 트위터 @ISE_cr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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