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엔 말 못했지만 오늘은 진짜, 진짜로 말 할거다. 


선배, 우리 헤어져요.

선배? 우리 헤어져요.

선배! 우리... 헤어져요!


하루 종일 결의를 다지며 연습한 대사. 잘 할 수 있어, 영은수! 이번엔 꼭 황시목이랑 헤어지는거야! 각오를 다지고 크게 숨 한번 몰아쉬면서 선배의 사무실 문을 개운하게 열어젖히고 들어간다.


허, 이럴 줄 알았어. 바쁜척 하더니 여자랑 있잖아. 단 둘이.

황시목 나쁜새끼!






"객관적으로 영검사는 예쁜 얼굴이 맞습니다. 아시아권에서 통계적으로 미인으로 분류되는 밝은 피부 톤과 계란형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한데 조화를 잘 이루고, 쌍꺼풀이-"

"야, 야, 시목아! 임마. 뭘 또 농담에 죽자고 달려들어. 어휴 그래, 네 시보 예쁘다 예뻐. 잔이나 받아!"

그날 낮에 내가 뭔가 큰 삽질을 했고, 형사3부 전체 회식 자리에서까지 서동재 부부장의 타박에 기가 폭삭 눌려 있었고, 화살은 내 사수 황시목에게 돌려져 '네 못난 시보 제발 잘 관리해라'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저 선배가 술도 입에 안 댔으면서, 저렇게 대꾸를 했다. 이건 누가 들어도 공개고백 아냐?

저 사람, 나 좋아하나봐! 

저 날 빨게진 얼굴을 감추려고 술잔을 얼마나 비워댔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들어보니 본인은 정말 담백하게 팩트만 전달 한거라고 하더라. 참 나, 생각하니 또 짜증난다. 왜 저런 말을 해서 사람 착각하게 만들어? 그때 안 그랬으면 지금 이렇게 골머리 썩을 일도 없었을 것을.



어쨌든 그 날 이후로 각 잡고 진지하게 따져보니 저만큼 조신하게 잘 큰 남자가 드물더라? 능력있지, 허세 안 부리지, 집도 자가에, 술 담배 도박 음담패설 음주가무 전혀 안 즐기고. 실 없는 소리 안 해. 비주얼도 상위권에 내 취향이야. 그 동안 나한테 모진 척 굴었던게 다 츤데레였나 싶어서 귀엽기까지 했다. 사내연애 라는 점이 좀 걸리긴 했지만 몰래 하면 되지. 

선배가 먼저 공개적으로 선수 쳤으니 나도 여지를 줘야겠다 싶어서 은근히 꼬셨다. 맨날 묶던 머리를 풀어서 샴푸향 풍기기, 눈 마주치면 귀여운 척 혓바닥 내밀고 데헷 웃어보기, 밥 사달라 술 사달라 조르기, 주말에 카톡 보내기.

몇 달을 은근히 꼬셔도 안 넘어오네? 뭐야, 먼저 들이대놓고 왜 갑자기 비싸게 굴어.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대놓고 도발했다. 술 먹고 취한 척 기대면서 흉통 만지기, 질문 할 거 있다는 핑계로 집에 쳐들어가기, 선배는 앞에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괜찮으면서 하고 자존심 건드리기. 

대놓고 도발을 했더니 반응이 오긴 왔다! 선배가 정치권 비리 특별조사팀으로 임명 되면서 날 '팀 시목' 명단에 넣겠덴다. 물론 단 둘이서 하는 프로젝트는 아니지만, 내가 필요하다는 거지.

근데 저 선배는 나의 사랑이 아니라 팔뚝 힘과 잡일 처리 스킬이 필요했던 거다. 하루 종일 서류 나르고 자료에 구멍 뚫어 인덱싱하고 공용폴더 정리하고 인쇄, 복사, 스캔 하느라 허리 펼 세가 없더라. 매일밤 기본 11시 퇴근에 나는 하루하루 시들어갔고. 피로가 겁나 차곡차곡 적립되더니, 하필 그날과 겹치는 바람에 컨디션이 영 아니던 날 적립금이 터졌다. 하루 연차를 내고 회사를 째도 시원하게 회복을 못했다. 출근해서도 골골거렸더니 그때부터 이 인간이 퇴근 때만 되면 나를 지 차에 집어넣고 지하철역 입구로 꼬박꼬박 배달 시켜가면서까지 부려먹었다. 

"퇴근하니."

"네."

"가자."

특별조사팀 하는 동안 선배랑 사적으로 대화한 내용은 저 세마디가 다였다. 지하철역까지는 차로 5분, 차 안이 너무 쾌적하고 엉덩이도 뜨끈해서 비몽사몽 나도 모르게 살짝 졸다가 내리기 바쁘니까 대화도 딱히 없고. 몇 주간 그렇게 건조하게 지내고 나니 그제서야 정신이 좀 들었다. 

황시목은 나한테 관심이 없구나. 

금사빠니까 또 금방 짜게 식을 수도 있다. 이런 성격이 쓸모가 있어 다행이었다.



아, 그 때 정말 정신을 제대로 끝까지 번쩍 차렸어야 했는데. 




"영검사님, 소개팅 하신다더니 오늘이죠? 옷차림 보니까 딱 알겠네. 화사하니 넘 이쁘세요."

"네에. 오늘은 칼퇴 해야되요! 실무관님 저 도와주실거죠?"

"당연하죠. 계장님도 합류했어요. 온 우주가 영검사님 칼퇴와 소개팅 성공을 기원합니다."

벚꽃도 절정이고 따스한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니까 뭔가 마음이 살랑살랑 동했다. 때마침 친구가 소개팅을 물어다 주길래 덥썩 잡았다. 연하남에 키도 나보다 20cm는 크다고. 몇 년 만의 소개팅에 신이 나서 평소엔 잘 안 입는 베이지색 치마 정장에 살짝 굽이 있는 구두를 신었다. 또각 또각, 경쾌한 굽소리가 마음에 들었는데, 선배한테는 그게 거슬렸는지 하루 종일 자꾸 날 쳐다봐서 눈치가 보였다.

"영은수, 아까 그거-"

6시 5분, 슬슬 가방을 챙겨서 나가려는데 선배가 갑자기 날 불렀다.

"아, 저, 선배님. 진짜 죄송한데, 제가 오늘은 약속이 좀 있어서요. 급하신거 아니면 내일 오전에 해도 될까요?"

"특별조사팀 기간에 왜 약속을 잡아."

"네?......"

왜 남의 사생활에 간섭이야? 공산당이야? 특조기간에 약속 잡으면 불법이야? 

"황검사님 어떤거 찾으세요? 제가 해드릴게요."

계장님이 날 구원해 주셨다. 밥 살게요! 눈빛을 쏘고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 따가운 시선이 뒷통수에 붙는 것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하고서.


소개팅남은 존잘에 완벽했다. 날 배려해서 소개팅 장소도 이 근처로 예약하는 센스, 다정한 매너에 세련된 애티튜드, 적절히 치고 빠지는 유머감각, 비슷한 취미. 저쪽도 나한테 보내는 시그널이 긍정적이었다. 오랜만에 이성과 쌍방교류를 하니까 죽은줄 알았던 연애세포들이 깨어나고 여자로서 자존감도 살아났다. 그래 이게 연애지. 들이대는 만큼 당겨주기도 하고. 주거니 받거니가 척척 되야 하는데 누구는 그게 참 안되더라. 쯧. 눈 앞에 완벽남을 두고 황시목에게 까인 기억들을 떠올리는건 예의가 아니다. 더더욱 힘주어 입꼬리를 당겨 이 만남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선배... 네... 아... 지금요?"

미친거 아냐? 육성으로 튀어나오는 욕을 겨우 삼켰다.

"급한 일 있으세요?"

"어쩌죠? 지금 들어오라는데요... 너무 죄송해요. 요새 특별조사팀 기간이라 갑자기 일이 터지기도 해서요."

"괜찮아요. 바쁘신거 알았는데요 뭐. 제가 오히려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네요."

"어휴 아니에요!"

"검찰청까지 바래다드릴까요?"

오 이것봐, 이번 소개팅은 잘 될 거라니까.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완벽남과 나란히 지검 쪽으로 걸어갔다.

"주말에는 출근 안하시죠?"

"네. 이번주는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저랑 영화보러 가실래요?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번에 안 보면 스포 당할 것 같아서 꼭 봐야겠는데."

아싸, 애프터 신청까지 후루룩 들어오고요.

"맞아요! 이번 주말 지나면 다들 보고 와서 이야기하겠죠? 주말에 꼭 봐야겠네요."

"저랑 같이 보러 가실거죠?"

"영은수."

정문 근처를 걸으며 다음 약속을 잡는 중요한 순간에 바깥에 나와 있던 선배가 날 부른다. 에효. 눈으로 대충 인사했다.

"왜 밖에 나와 계세요?"

일 안하냐. 퇴근한 사람을 도로 오라고 했으면서 왜 밖에서 노닥거려.

"타."

날 불러놓고 시선은 완벽남을 쳐다보면서 자기 차를 향해 고갯짓을 까딱, 하면 누구한테 타라는 거죠?

"네?"

"집에 가야지. 태워줄게."

"네??"

이제 대놓고 빤히 완벽남을 쳐다보는 선배, 나와 선배를 번갈아 보며 어이없어 하던 완벽남.

"...제가 두 분 사이를 방해했네요."

결국 황시목이 이겼다. 완벽남은 나한테 눈길 한 번 안주고 그냥 뒤돌아서 갔다. 완벽하게 파토가 났다.

"하루 종일 일만 하시더니 이제 드디어 미치셨어요? 전화는 왜 하셨는데요? 급한 일 있는 것처럼 사람을 불러놓고!"

"급한 일 있다고는 안 했는데. 지금 지검으로 오라고 했지."

"아이 진짜, 왜 불렀냐고요!"

"일단 타."

그래, 탔다, 어쩔래. 씩씩거리며 안전벨트 채우는 것까지 확인하더니 선배는 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탔는데 어쩌라구요."

"......"

"저기요. 선배?!"

끝까지 말을 안한다. 정말 짜증난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옆모습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 화 낼 사람은 나잖아. 지가 왜 말을 안해. 어이 터지는 중에 지하철역 입구가 보였다. 내리려고 하는데 멈추지도 않고 그냥 휙 지나쳐갔다.

"어! 저 내려야하는데-"

"네 집까지 가."

"왜요?"

"글쎄."

말을 말자. 황시목에게 친절한 설명을 바라면 안되지. 창 밖으로 지나가는 가로수만 쏘아보다가, 다시 앞을 보고 신호등을 쏘아보다가, 또 가로수, 아, 못 참겠다.

"진짜 왜 이러는지 얘기 안하실 거에요? 선배 때문에 제 소개팅 망했잖아요. 잘 되고 있었는데."

"잘 되고 있었다고? 확신하는 근거는."

"주말에 영화도 보러 가기로 했는데 잘 되는거지 그럼. 아 진짜, 간만에 영화관도 가보나 했더니만."

"무슨 영화."

하! 무슨 영화면 어쩔건데? 뭐, 소개팅남 대신 나랑 영화라도 봐줄거야?




그리고 진짜 우리는 그 주 주말 지검이 아니라 영화관에서 만났다. 매일 보던 정장 차림이 아닌 밝은 회색 니트 차림의 선배는 좀 산뜻했다. 안 그럴 것 같아도 의외로 빡세게 정성껏 손질하는 머리가 이 날 따라 더더욱 동글동글 잘 말려 이마에 붙어 있었고. 양 옆구리에 팝콘 두 통을 끼고 조신하게 서 있는 상상도 안 해본 모습이 퍽 웃겼다.

"팝콘으로 식사하실 거에요? 두 통씩이나."

"네 팝콘 취향을 몰라서."

가만 보니 한 쪽은 캬라멜, 한 쪽은 플레인. 각각 다른 맛이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캬라멜을 집었다. 그래도 콜라는 하나였다. 빨대가 두 개 꽂힌. 그냥 내 쪽으로 건네주길래 받아 챙겼다.

"마블 영화 하나도 안 보셨다고 했죠? 이거 어벤져스 마지막편인데. 이해 안 되시겠네요."

내 소개팅을 파토낸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다. 180분 동안 알지도 못하는 외계인이랑 온갖 히어로들이 왜 힘자랑 하면서 박터지게 싸우는지 이유도 모르고 시달려봐라.

"이제 봐서 스토리는 알아. 인피니티 워 까지는 봤어. 솔로무비들은 못 봤지만."

"에? 그래요?"

엔드게임이 뭐냐고 되묻던게 분명 이틀쯤 전이었는데 나랑 같은 시간에 출퇴근 해놓고 그걸 다 봤다고? 밤 늦게 집에 가서 어벤져스 시리즈를 찾아 틀어놓고 열심히 보는 황시목 선배의 표정은 어땠을까. 맥주도 마시면서 봤을까. 사건 파헤치듯 메모하면서? 영화도 일처럼 열성적으로 달려드나 봐. 여러모로 대단하네. 

늘 그렇듯 팝콘은 광고 타임에 이미 다 먹어버렸고, 옆에서 스윽 내미는 플레인 맛도 20분만에 해치우고, 3시간 내내 웃다가 울다가 드디어 이제 스포를 당하지 않아도 되는 후련함으로 영화관을 나섰다. 우리 만남의 목적은 영화였고, 다 봤으니까 각자 집에 가면 되나? 애매한 생각에 빠진 내 발걸음 속도에 맞춰서 선배의 발걸음도 느릿했다. 나란히 걷는 신발 앞코들을 보다가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선배. 나 좋아해요?"

"글쎄."

어휴 저 글쎄무새.

"그럼, 아이언맨 좋아해요?"

"아니."

"캡틴아메리카는?"

"아니."

"나는?"

"글쎄."

"뭐 대답이 맨날 그래요."

이번에는 그 김빠진 글쎄, 라는 대답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내 오른손을 가져가더니 자기 왼손이랑 겹쳐 잡았다.

"...이거면 대답이 되나."

깍지까지 껴가면서. 한층 단단하게 내 손이 선배의 손에 얽어 메였다.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 나올까봐 입을 꾹 닫고 걸었다. 선배의 단정한 손이 크고 따스해서 마음에 들었다. 조금 늦게 내민 감은 있지만. 이 조신한 남자가 다시 좋아졌다. 이래서 금사빠가 좋다니까.



근데 그렇게 뒤늦게 들이대서 식은 마음 다시 붙잡아 끓게 만들었으면 눈치껏 잘 해야하는거 아닌가? 어째 점점 저 선배는 덤덤하고 안정적인데 나 혼자만 좋다고 설쳐가는 아이돌 덕질같은 관계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요즘엔 자존심 자부심 이런걸로 버텨온 내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초라해보인다. 






얼레벌레 사귀고 나서 한동안은 얼떨떨하게 온종일 구름 속을 걷는 사람처럼 붕붕 떠다녔었고, 좀 진정되어 구름이 걷히고 땅에 내려서서 보니 황시목이랑 내가 연애를 하는건지 선후배로 의리를 다지는건지 좀 헷갈리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봐. 여기, 차변 대변 흐름이랑 뒤쪽 상세 내역을 비교해야 돼. N사 사건 기억나지? 그땐 횡령이었지만 봐야할 부분은 비슷해. 차변에서 뭘 봐야한다고 했지?"

"선배."

"응."

"지금 여기가 어디죠?"

"양평."

"아. 난 또. 재무관리 전공수업 강의실인줄."

"30분만 더 보면 될 것 같은데. 20분 안에 끝내고 너 좋아하는 연잎핫도그 먹으러 가."

날씨 좋은 주말. 드라이브 가서 핫한 카페도 가고 두물머리 산책도 하자고 하길래 좋다고 따라 나섰다가 1시간 째 카페에서 황시목 교수의 재무제표 특강을 듣고 있는 내가 불쌍해. 먹을걸로 낚인게 초딩때 돈까스 먹으러 나갔다가 치과 끌려가서 어금니 뽑고 온 뒤로 20여년 만이다. 요새 자꾸 나한테 배정되는 사건들이 분식회계, 주가조작, 불법증여 건들이라 회계 쪽으로는 자신 없어 하는걸 아는 선배가 조금씩 살펴봐 주다가 아예 날잡고 과외를 해준다. 난 이제 그 방 시보도 아니고, 명색이 여자친구인데. 여자친구 대접을 조금은 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이, 진짜! 나 그만할래요."

잡았던 펜을 던져버리고 빨대로 쪽쪽 애꿎은 얼음만 뒤적거렸다. 선배는 하효, 한숨을 푹 쉬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저렇게 웃으면 내가 또 마음이 약해지는데.

"그래. 그만하자."

"빨리, 핫도그 빨리 가요. 줄 서야 해요."

"대신 나한테 네 사건 봐달라고 하지마. 혼자 해결해."

"치사하네."

"차장님이 갑자기 호출해서 브리핑 하라고 해도 나 찾지 말고."

"참 나. 이런걸로 삐지고 그래요."

"서동재 검사한테 혼나도 이제 몰라."

"......"

웃으면서 하는 협박이 제일 무섭다. 던졌던 펜을 내 손에 다시 쥐어주면서 슬쩍 손을 잡고 안 놔준다. 병주고 약주고. 짜증나.

"20분이랬죠? 1분이라도 넘기기만 해봐."

"네가 2분쯤 잡아먹었어. 그 시간은 제외야."



내 남자친구의 촉은 꽤 잘 맞는 편이었다. 다음날 출근 하자마자 차장님이 기습적으로 지금 맡고 있는 사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셔서, 열심히 파헤친 척 회계용어를 적당히 섞어 말할 수 있었다. 형사3부 회의 시간에도 부장님이 원하는 수준까지는 읊을 수 있었고. 인정하긴 싫지만 과외 효과가 있네.

그런데 문제는 재무제표 따위가 아니었다. 새로 들어온 사건을 배분할 때 벌어졌다.

"이번에 서교동 존속살해 사건, 영검사가 해."

"넵."

"부장님, 그건 제가 하겠습니다."

"황프로가? 넌 지금 특수강도, 사체훼손, 집단강간 하고 있잖아. 존속살해까지 욕심내냐."

풉, 저렇게 표현하니 황시목이 저걸 다 직접 저지른 천하의 몹쓸 놈 같다.

"요즘 언론의 관심이 최고로 몰린 사건입니다. 영은수는 이제 시보를 겨우 끝냈는데, 역량이 안 될 겁니다."

뭐라고? 이 인간이 지금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무슨 소릴 하는거야.

"흠."

부장님? 그 반응 뭐에요? 왜 끄덕거리세요?

"제가 할 수 있어요. 저 할게요."

"지금 불법증여 공판 준비 하는것도 버겁잖아."

"공판 다음주에 끝나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부장님이 저한테 배정 해주셨잖아요."

"그 건 조서에 구형 타당성의 논리 흐름도 깔끔하지 않고, 오타에 용어 오류 꽤 있던데. 그걸로는 결재 못 받아. 그 건이나 다시 조사해."

"......"

내가 진짜 못 참는 말이 딱 두개가 있다. 재수없다, 싸가지 없다, 독한년, 또라이 등등은 다 들어도 괜찮은데, '못생겼다'와 '멍청하다' 이 두 말은 정말 못 참는다. 그리고 지금 황시목이 공개적으로 나의 멍청함과 능력없음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야, 둘 다 그만하고, 황프로, 진짜 다 할 수 있어?"

"예."

"그럼 이번까지는 황프로가 해. 영은수 검사, 불법증여건 결재 올리기 전에 한 번 가져와."




"얘기좀 해요."

"그래. 안 그래도 전화 하려고 했는데. 조서 부장님한테 가져가기 전에 같이 보자."

"내가 그렇게 한심하고 무능력한 검사에요?"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해. 경력이 쌓이면 저절로 해결 될 것들이야."

"그러니까 지금, 너 풋내기다, 애송이다 뭐 그런거?"

"그런거 아니야. 오타 문제는 별개지만. 차분히 다시 읽어보는 습관을 들이면-"

"아아. 네 저는 역량이 안 되서요. 죄송하네요."

"화났니. 내가 뭐 잘못한거 있니."

"진짜 몰라서 묻는거에요?! 공개적으로 여자친구 망신 시켜서 좋으세요?!"

"은수야. 첫째, 공과 사를 구분하자고 제안한건 너야. 공적인 자리였기 때문에 사적인 감정 배제하고 팩트만을 이야기했어. 둘째, 너에게 도움이 되려고 했지, 망신 주려는 의도는 없었어. 그렇게 느꼈으면 미안하다."

내가 이런 AI같은 놈이랑 뭘 잘 해보겠다고 헤실거렸을까. 팩트? 아이씨, 듣고 보니 맞는 말들이라 더 싫다. 재수없어.

"짜증나니까 앞으로 아는 척 하지 마세요."

불법증여 판례나 다시 검토 할란다. 그리고 공판 끝나면 저 AI랑도 그냥 끝내야겠다.




선배는 아는 척 하지 말랬다고 또 말 참 잘 듣더라. 서로 일주일 동안 쌩깠다. 그 사이 부장님께 두어 번 깨지고 이틀 연속 밤새고 준비해서 불법증여 공판을 겨우 끝낼 수 있었다. 구형한대로 판결이 나서 만족스럽게 재판정을 나오는데, 로비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몰려있었다.

"우리 아들은 무죄야! 니가 뭔데! 검사면 다야?!"

대충 들어보니 피고인의 모친인 것 같다. 그리고 당하고 있는 사람은

"피고는 유죄가 맞습니다."

황시목 선배가 법복을 붙잡고 늘어지는 손을 떼어내며 덤덤하게 말하고 있다. 이게 무슨 난리야. 오늘 선배는 집단강간 사건 공판이랬는데, 강간범 엄마가 상당히 뻔뻔하네.

퍽!

누군가 뒤쪽에서 날계란을 던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다들 어버버 하다가 난리통이 되었다. 청원경찰들이 뛰어와서 피고인 가족들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선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잘 생긴 이마에 맞고 깨진 계란이 앞머리를 타고 얼굴에 흐른다. 바보같이, 화라도 좀 내지! 닦지도 않고 그걸 가만히 두냐?! 쌩까던걸 까먹고 나도 모르게 후다닥 달려가서 법복 소매로 선배의 얼굴을 닦아줬다. 두 번째 계란은 내 등 뒤에 꽂혔다. 그리고 세 번째 계란은

"영은수, 이리 와."

날 자기 품에 넣고 감싸 안은 선배가 맞았다.




"어휴, 이게 진짜 무슨 일이래요. 쌍팔년도도 아니고 날계란이 거기서 왜 나와."

"그러니까요. 영검사님까지 피해 보시구. 아들이 강간을 했는데 무죄는 무슨? 어이가 없네."

실무관들과 나는 빨래터 아낙네들처럼 나란히 여자화장실 세면대에서 법복을 벅벅 빨고 있었다. 선배 법복을 문지르던 선배네 방 실무관이 특히 더 열이 받아있다.

"황검사님이 이 사건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앓으셨는데. 피고인도 4명 씩이나 되지, 증거는 다 옛날거라 건질 거 없지, 피해자는 진술도 제대로 안하지, 변호사들이 지랄하지, 아 욕해서 죄송해요. 근데 어휴, 가족들도 진상이야."

끄덕끄덕, 나와 우리방 실무관은 격하게 고개로 동의하며 다시 벅벅, 빨래 중.

"제일 나쁜건 부부장님이에요. 원래 이거 자기한테 배정 된건데, 딱 봐도 골치 아프고 각 안나오니까 영검사님한테 떠넘기려고 했다니까요? 그거 알고 황검사님이 나서서 하겠다고 한거에요. 영검사님 그 때 다른 공판 코 앞이셨잖아요. 근데 황검사님이 요즘 맡는 건들이 하나같이 꼬여있고 만만한게 없거든요. 서검사님도 그거 다 아시면서. 진짜 너무한거 아니에요?"

이건 또 무슨 말이람.




"선배, 그거 원래 내 건이었어요?"

"노크좀."

"아. 죄, 죄송합니다."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마침 선배는 수건으로 방금 감은 젖은 머리를 털면서 셔츠를 갈아입고 있었다. 민망해서 얼른 돌아섰다. 그래도 따질 건 따져야지.

"다른 사건도 많은데, 그냥 나 시키면 되잖아요. 왜 그랬어요! 혼자 험한 꼴 다 보구."

"넌 괜찮아? 근데 아는 척 안 하기로 했는데, 우리."

"지금 그게 문제에요?"

씩씩거리며 다시 뒤를 돌아봤더니 멀끔하게 옷을 갖춰입은 선배로 돌아와 있었다.

"이런 복잡한 건은 나중에 경력 쌓이면 실컷 해."

"자꾸 이렇게 중간에서 가로채면 내 경력은 언제 쌓아요?"

"천천히. 시간 많잖아."

선배 쪽으로 다가가다가 문득 책상 위에 한가득 펼쳐진 사건파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왓더, 저게 다 뭐람?!

"우욱!"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왔다. 훼손된 사체의 단면 사진들, 자상, 강간 피해자의 신체 부위, 자살자의 모습, 등등 온갖 그로테스크한 증거사진들이 너무... 심하게 적나라했다. 영화에서 보는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수준. 생전 처음 보는 비주얼 쇼크에 아찔해 있는 동안 선배는 재빠르게 파일들을 덮어버렸다. 그래도 계속 눈 앞에 잔상이 남았다. 구역질이 멈추질 않았다.

"물 좀 마셔."

선배가 떠다주는 물을 마시고나니 조금 정신이 들었다. 근데 내가 저런 사진들을 본 적이 있었나? 시보 때에도 선배가 담당하는 강력범죄들을 몇 건 옆에서 보조하긴 했는데 사진은.. 어떻게 피해갈 수 있었을까. 시보가 끝나도 숫자만 한가득 팠지, 강력범죄는 다룰 기회가 거의 없었고. 

어쩐지 옆에서 내 등을 두드려주는 사람에게 정답이 있는 것 같다.

"선배, 솔직히 말해봐요. 나 디게 옛날부터 좋아했죠?"

"이제 아는 척 해도 되는거니."

"말 돌리지 말고."

아니... 나 진짜 헤어지려고 맘 먹었다니까? 근데 평소에 표정도 없는 사람이 뭐가 좋아서 저렇게 또 웃는건데. 헤어지자는 말을 못 꺼내겠다.

"근데 왜 자꾸 웃어요?"

"네 화가 풀린 것 같아서. 웃지 말까?"

"아이 참, 아뇨. 그... 저도 강력사건 잘 할 수 있어요. 하나씩 해보고 싶으니까, 선배가 좀 도와줘요."

"그래. 알았어."

빤히 마주보는 시선에 내 얼굴이 뚫릴 것 같다. 귓바퀴부터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들킬까봐 머리속에 떠도는 아무 말이나 붙잡고 뱉었다.

"식사시간 다 됐네요. 밥이나 먹어요." 



헤어지기 1차 시도 실패.






조신한 내 남자친구 황시목 검사는 우렁서방처럼 묵묵히 배려하고 챙겨준다. 근데 너무 조신하다. 지나치게 묵묵하다. 어느 정도로 날 배려하냐면, 봄에 사겨서 이제 여름에 접어들었는데 진도가 뽀뽀가 끝이라면 믿겠는가. 키스 말고. 유치원생들도 다 하는 그 뽀뽀.


"선배. 그..."

"왜. 할말 있니?"

쪽,

퇴근길 날 태워주는 차 안에서 선배의 오른쪽 얼굴에 입술을 살짝 붙였다가 떨어졌다. 선배에게서 달큰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향기가 났다. 또 이놈의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오는 줄 알았다. 이렇게 내가 직접 신호를 줬잖아? 그러니까 이제 선배가 나한테 다가와서 딥하게 진득하게 입술끼리 ~~ 할 차례겠지. 눈을 살짝 감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배는 잠깐 오른쪽 뺨에 손을 댔다가 떼더니

"아."

아? 아?? 그게 끝이야?

"잘 자. 내일 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수석 문을 닫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섹슈얼한 매력이 없나. 저 선배가 혹시 고.. 고... 그런건가.

또 오기가 생겼다. 어느 쪽일지 확인을 해봐야겠다.



한국에서는 라면 먹고 간다 그러고, 미국에서는 넷플릭스 보고 간다고 그런다지? 그렇다면 난 둘 다 한다. 

"선배, 넷플에 나 보고싶은 영화가 올라왔는데. 이따 퇴근하고 선배네 집에서 라면 먹으면서 볼까요?"

"너 내일 아침에 공판인데. 푹 쉬어야 컨디션이 좋지 않을까."

"아. 아니 뭐, 공판은 공판이고 영화는 영화지. 괜찮아요!"

너무 조급해서 공판 있는걸 까먹었다. 젠장. 일단 저질렀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나 막 밤새 침대에서 시달리다가 공판 망하는거 아냐? 그건 좀 곤란한데. 


퇴근 후 선배네 집에 입성했다. 여러 번 들어온 적은 있었지만 오늘은 좀 다른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네?! 

"짠, 와인도 사왔어요."

하효. 가볍게 한숨을 쉬던 선배가 살짝 날 노려보더니 찬장에서 유리컵을 꺼낸다. 와인잔은 없데나. 뽕, 우아하게 와인을 따더니 한 잔에만 졸졸 따라서 나에게 건네줬다.

"너 영화 봐. 라면 끓여다 줄게."

"네? 혼자 보라구요?"

"시간의 효율적 분배. 최대한 빨리 집에 보내줄게. 난 운전해야 되서 와인은 됐어."

아니, 그게 아닌데? 건강한 30대 성인 남자라면 집에 가지 말라고 해야 정상 아닌가?


그 날은 그렇게 라면 잘 얻어먹고, 와인 기분 좋게 마시고, 영화도 재밌었고, 주인장님 덕분에 잘 놀다가 갑니다 하고 후퇴했다. 그 뒤로도 몇 번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신경써서 적당히 야한 영화들을 고르고 속옷도 세트로 챙겨입고 갔구만 써먹지도, 아니 바깥 구경도 못시켜줬다. 저녁에 잘 먹지도 않는 라면 때문에 다음날 얼굴이 퉁퉁 붓고 속만 더부룩하고. 이게 뭐람. 

그래서 작전을 바꿔보았다. 얼마 진도 나가지 않은 초라한 스킨십이지만 그걸 저언혀 하지 말아보자. 나만 이렇게 애가 타겠어, 설마? 손도 안 잡고 팔짱도 안 끼고 기본 50cm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일주일을 보냈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짜증나.


요새 살이 좀 붙긴 했지. 내가 매력이 없나보다. 다이어트를 할까. 머리도 좀 하고... 아니, 아니지. 아직 확인할게 하나 더 남았다. 선배가 고... 그것일지. 마침 내 생일이 다가오니까 그 카드를 써먹어야겠다. 기념일이 연인들끼리 분위기 잡기 제일 좋은 날이잖아. 나는 뭐든 쉽게 포기하는 법이 없지! 




근데 이것도 뜻대로 되질 않았다. 내 생일은 상반기 감사보고서 작성 시즌과 붙어있었다.


"영 검사님, 자료가 또 왔어요. 어떡해요."

"으아, 으아아! 계장님 살려주세요..."

딱 죽겠다 싶게 일이 몰려와서, 스킨십이고 생일이고 뭐고 자동으로 잡생각이 사라졌다. 안 그래도 이미 받아둔 서류들 때문에 숨이 턱 막히는데, 오늘 또 새로운 자료들이 박스떼기로 겁나 많이 쌓여갔다. 내일은 내 생일이라 어떻게든 오늘 다 해치우고 가벼운 마음으로 내일을 즐기고 싶은데. 아 내 밑에도 시보든 후배든 들어오면 좋겠다. 막내는 잡일이 너무 많다고. 궁시렁 거리면서 무슨 박스부터 뜯을까 고르고 있는데 똑똑, 조신한 노크소리가 들렸다.

"바쁘니."

"네. 보이실텐데."

황시목 선배는 사방을 둘러싼 박스더미들을 스윽 훑어보았다.

"도와줄까."

그걸 말이라고.

"안 그래도 선배 방에 두 박스 갖다놨어요."

"그래. 얼른 볼게."

"넵."

"근데 요새 왜 화났니. 내가 뭐 또 잘못한거 있니."

"아뇨. 그런거 없어요."

흠, 굳은 표정으로 날 보던 선배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 둔해 터진 인간. 이제서야 촉이 오냐. 내가 요즘 거리를 두니까 뭔가 있는 것 같지? 답답해 죽겠지? 근데 일단 지금은 보고서가 먼저. 생일날까지 우울하게 서류에 깔려 죽어가고 싶지는 않거든.


선배는 퇴근시간까지 열심히 두 박스 분량의 자료들을 검토하며 요약해서 보고서를 만들어줬다. 이럴 땐 사내연애가 좋긴 하네. 근데 저 인간 내일이 내 생일인건 알긴 할까? 잡생각을 하는 중에도 손은 휙휙, 서류를 넘기느라 바빴다. 똑똑, 또 조신한 노크소리.

"퇴근 안 해?"

"이걸 두고 어떻게 가요. 왜요."

"아. 난 오늘 일이 좀 있어서, 그럼 먼저 퇴근해도 될까."

"네에."

"......"

진짜 간만에 일에 대해 텐션이 타올라서 바쁜데 오늘따라 자기를 봐달라는 듯, 왜 이렇게 사연 많은 남자 표정이실까? 무슨 일인지 물어봐줘야하나? 뭐 또 사건현장이나 뽈뽈거리고 가려나보지.

"집에 갈때 꼭 연락해."




선배가 나가고나서 대충 한 두시간 쯤 지난 줄 알았다. 뻣뻣한 목을 돌리며 시계를 보는데 밤 11시. 와우. 이제 거의 다 정리가 됐는데, 그냥 흐름 탄 김에 아예 다 해치워버릴까? 그럼 내일 편하게 선배랑 생일을 보낼 수 있지. 영은수 넌 정말 부지런해. 일도 사랑도 놓치질 않아! 셀프칭찬으로 정신승리하며 그냥 쭉 하던 일을 이어서 마저 하기로 했다. 

마무리를 하니 새벽 2시. 하얗게 불태웠다. 눈알이 빠질 것 같다. 택시 타고 집에 가기도 귀찮아서 당직실에서 대충 씻고 자려고 누웠다가 확 열이 뻗쳤다. 내가 늦게까지 아무 연락도 안 했는데 선배는 왜 연락도 없지? 12시 넘었으니까 이제 내 생일인데. 진짜 모르나? 모르기만 해봐라. 손절한다 이번에는 진짜로. 




아침이 되어 휴대폰을 확인해도 선배의 연락이 없자 이것 저것 쌓인 감정들이 섞이고 뭉쳐서 눈덩이처럼 크게 불어났다. 기분나쁨이 절정에 달했다. 업무는 여유가 생겼지만 마음은 그저 팍팍하기만 했다. 너무하네 황시목. 일만 잘하는 잘 생긴 멍청이. 그냥 대놓고 물어볼까? 고자세요? 나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요? 근데 내 생일인건 알아요? 

똑똑, 노크 후 들어오는 조신남은 오늘도 잘 생겼다. 누구는 새벽까지 일하다가 집에도 안 가서 쩔어있는데. 

"집에 갈때 연락 하라니까 왜 안했어."

"집에를 안 갔으니까요. 당직실에서 잤어요. 그러는 선배는, 왜 먼저 연락 안해요? 그렇게 궁금하면 먼저 해보지 그랬어요."

"일이 좀 있었어. 미안."

진짜 내 생일도 모르나봐. 난 그래도 오늘 끝나고 데이트라도 하려나 싶어 내심 기대했고 그 마음 하나로 새벽까지 달린건데.

"짜증나."


이제는 진짜 구차하다. 뭘 해도 무감한 이 남자에게 목을 메는 내가 초라해 보였다. 이런 단단함이 좋았던건데 그게 오히려 내 자존심을 밟는다. 매번 나만 이렇게 실컷 기대하고, 난리쳐야 유지되는 관계야, 우리가? 이 연애는 나의 현실을 아주 잘 깨닫게 해주는 장점만 있다. 영은수 넌 능력도 한참 모자라는 신출내기 애송이고 게다가 여자로서 어필도 별로야. 이렇게 매번 확인 받는 연애.

그렇다면 나는 그냥 안 할래.

 


선배는 물끄러미 날 응시하기만 했다. 왜, 뭐, 또 저런다. 화 낼 사람은 나라니까. 

"퇴근 때 이야기하자. 나 오늘 하루 종일 외근이야." 

"그래요. 나도 할 얘기 있어요." 


진지하게 우리 다시 생각 해봅시다. 황시목씨.  






퇴근 시간이 다 됐는데 또 아무런 연락도 없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없다. 혹시나, 만에 하나 꽃배달이 서프라이즈로 오는건가 싶어 문만 열리면 저절로 눈이 문으로 돌아갔는데. 그것도 없다. 먼저 연락해서 쌍욕이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을 23594번쯤 했지만 참았다. 어차피 오늘 쫑낼건데. 

"실무관님, 같이 나가요."

황시목 선배네 방 실무관이 우리방 실무관과 같이 퇴근하려고 부른다.

"근데 선배는 외근가서 아직이에요?"

아무렇지 않은 척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아, 황검사님 아까 오후에 들어오셨어요."

뭐? 왔다고? 근데 날 제꼈어? 나 지금 까인거야?

이건 아니지. 

저번엔 말 못했지만 오늘은 진짜, 진짜로 말 할거다. 

선배, 우리 헤어져요.

선배? 우리 헤어져요.

선배! 우리... 헤어져요!

하루 종일 결의를 다지며 연습한 대사. 잘 할 수 있어, 영은수! 이번엔 꼭 황시목이랑 헤어지는거야! 각오를 다지고 크게 숨 한번 몰아쉬면서 선배의 사무실 문을 개운하게 열어젖히고 들어간다.


허, 이럴 줄 알았어. 바쁜척 하더니 여자랑 있잖아. 단 둘이.

황시목 나쁜새끼!




"무슨 일이야."

너랑 헤어지려고 왔다.

"외근 가셨다더니, 들어왔네요."

"안녕하세요!"

밝게 인사를 건네는 초면의 여자. 오밀조밀 귀엽고 매력있게 생긴 발랄함이 같은 여자가 봐도 눈에 쏙 들어온다.

"난 아직 조금 남았는데. 기다릴래?"

저 여자는 뭔데?

"...이쪽은 용산서 한여진 경위님. 경위님, 형사3부 영은수 검사입니다."

눈으로 하는 말을 알아들은건지 하효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소개를 해준다. 누가 이름 궁금하데? 뭔데 애인 생일도 제끼고 여자랑 같이 있는거냐고. 

"아. 제가 손님 계신지 모르고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저희는 괜찮아요! 다 끝났어요. 일어나려던 참인데, 두 분 말씀 나누세요. 황검사님, 녹취파일까지 다 받으셨죠?"

'저희'라는 대목에서 더 이상 표정을 숨기기 어려웠다. 뒷말은 듣지도 않았다. 그냥 뒤돌아서 굴욕의 장소를 빠져 나왔다.


최악의 생일이다 오늘은. 




[영또라이 생일 축하해]

사무실에서 가방을 챙겨 나서려는데 문자가 왔다.

- 고맙다 박또라이

고등학교때부터 절친인 친구의 문자. 역시 우정이 최고다. 사랑? 개나 줘버려. 어디서 나온 명대사였더라. 

[생일인데 이벤트 잘 했냐? 겁나 부러워 ㅋㅋ]

- 뭔소리여 내 몰골을 봐 어제 회사에서 밤새고 계속 달렸음

셀카를 화면 가득 얼굴로 채워 한 장 찍어 보내주고.

[헐 화장좀해라 ㅋㅋ 근데 그럼 이벤트는 못 한거야?]

- 뭔 이벤트

[너 남친분이 저번에 연락와서] 

[너가 좋아하는 케익랑 꽃이랑 그런거] 

[물어보길래 난 또 뭐 준비하는줄]

??? 내 남친이 황시목 말고 또 누가 있나? 



혹시 선배가 날 사찰이라도 하나 싶게, 화들짝 놀라는 이 정확한 타이밍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뭐에요?"

"뭐가."

"내 친구랑 연락했어요? 왜?"

"너 오늘 생일이잖아. 뭘 좋아하는지 물어보려고."

"생일인거 알고 있었어요? 근데 왜 모른척 했어요?"

"모른척 한 적 없는데. 네가 서프라이즈 좋아하는 것 같아서 말을 안 한거지. 어제 12시 맞춰서 파티 해주려고 준비 해놓고 연락 기다렸어."

"아니, 그럼 내가 말이 없으면 먼저 연락을 했어야지!"

"감사 때문에 바쁜 줄 알았지. 방해 되기 싫어서."

"아 진짜!"

"왜, 내가 뭘 또 잘못했니."

"네. 너무 잘못이 많아요. 그... 그러니까..."

헤어집시다! 이제 그만 합시다! 라고 말을 왜 못하냐, 왜! 


"영은수."

불러놓고 살짝 뜸을 들이더니 지긋이 바라보면서 성큼 다가오는 선배. 숨 닿을 거리까지 훅 다가와버렸다. 갑자기 내 손을 잡는다. 이러니까 더 헤어지자고 말을 못 하겠어.

"너무 늦게 말해서 정말 미안하다. 생일 축하해. 직접 얼굴 보면서 말 해주고 싶었어."

"아..."

"눈."

"네?"

"감는게 좋을텐데."

선배는 왼팔로 내 허리를 확 감싸 당기더니 오른손으로 스륵 눈을 감겨주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파악이 안 되는데 곧이어 따스하게 입술로 몰려오는 말캉한 감촉. 살짝 보인 틈으로 촉촉한 혀가 내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아랫입술을 약하게 물다가 혀로 치열을 따라 훑으면서 순식간에 내밀한 곳까지 샅샅이 어루만진다. 황홀하다. 숨을 못 쉬겠어. 거칠어지는 내 숨소리가 부끄럽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났다. 복도에 누가 지나가는 것 같다. 문도 제대로 안 닫았는데, 누가 보면 어쩌지? 

"아, 잠깐-"

걱정이 되어 선배의 어깨를 밀어냈다. 다시 나에게 붙어오며 꿈쩍도 안한다. 퍽퍽 가슴을 쳤다. 오히려 더 거세게, 깊숙이 파고 들어온다. 슬쩍 눈을 뜨고 본 선배의 감은 눈 끝에 달린 속눈썹이 제법 길었다. 아 모르겠다, 나도 선배의 뒷목에 팔을 두르고 본격적으로 황홀함에 몸을 맡겼다.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또 겹쳐온다. 숨 좀 돌리다 또, 그리고 또. 그렇게 휘몰아치더니 이젠 짧게 쪽, 쪽. 버드키스를 이어가던 선배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했다.

"나머지는 집에 가서 마저 할까."

... 나 어제 집에 안가서 편의점에서 대충 산 속옷이라 디게 구린데. 망했네.






선배네 집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아까 하던걸 이어서 하느라 어떻게 침실까지 갔는지 기억이 안 난다. 정신을 차려보니 달큰하고 묵직한 선배의 향이 가득 서린 침대 위. 

"해도 될까."

톡, 톡, 내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던 선배가 물어본다. 이미 여기까지 왔으면서 뭘 또 물어봐.

"치, 하지 말라면 멈출거에요?"

"아니."

귓바퀴를 지분거리는 입술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난 손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겠는데 선배의 손은 능숙하게 블라우스 안으로 슥 들어오더니 속옷 후크를 한 손으로 기가 막히게 푼다. 아쭈? 질 수 없지. 나도 선배의 넥타이를 열심히 풀어 헤쳤다. 근데 생각보다 잘 안 된다. 

"그렇게 하는거 아니야."

피식 웃으면서 직접 넥타이를 벗어 던지는 선배가 섹시해 침이 꼴깍 넘어간다. 선배 셔츠의 단추를 푸는 손이 달달 떨렸다. 또 피식 웃더니 이번엔 아래로 손을...

"아흣...!"

더 떨려서 단추고 뭐고 포기. 호흡 조절하기 바빠졌다. 오늘도 내 심장은 열일하는지 입으로 뛰쳐 나오려 하고 있다. 

"입술 아프겠다."

나도 모르게 깨물던 아랫입술을 살짝 빼주더니 혀로 살살 핥다가 다시 입술을 포개고. 저절로 온 몸에 힘이 빠진다. 내 입술에서 떨어진 선배의 입술이 내 온 몸 구석구석을 탐색했다. 조용한 방 안에 촉, 촉 소리와 나도 모르게 자꾸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만 흐른다. 그 소리들이 다시 자극이 되어 돌아왔다.

"아프면 얘기해."




"선, 배, 아.. 너무, 흑,"

"응, 조금만, 미안."

아프면 얘기하라며! 말로만 미안하다면서 행동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다. 조신하던 황시목 어디 갔어?! 




어쨌든 내 남자친구는 고... 그거 절대 아니다. 

다행이야.  




"근데 나 해주려던 이벤트 어떤거였어요? 궁금하다."

선배를 보고 모로 누워 선배의 쇄골 라인을 손가락으로 덧그리다가 생각이 났다.

"거창한건 아니었어. 케익이랑, 꽃, 와인이랑 라면."

"라면? 생일에 라면을? 너무 심한데?"

어이가 없네.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퍽퍽 선배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네가 라면이랑 와인을 너무 좋아하길래. 요즘 계속 그렇게 먹었잖아."

"와 세상에."

"내가 또 뭐 잘못했니."

"그거는, 그, 내가, 어? 아니, 하도 진도가 안 나가길래 어떻게 해보려고 핑계 댄거죠!"

"아."

"그래. 나 그것도 궁금하다. 내가 선배 집에 저녁마다 와서 은근히 눈치주고 그랬는데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어요? 내가 그것때문에 얼마나 고민했는데."

"동침하는거? 네가 어디까지 마음의 준비가 됐는지 판단이 서질 않아서 기다린거야."

"으, 단어 선택 좀."

"동침? 이게 마음에 안들어? 그럼 뭐라고 할까. 섹-"

"으악! 하지 마요!"

베개를 집어 저 요망한 입을 막아버렸다.



"선배 근데 좀. 실망이야."

"왜 또."

"잘 해서. 너무 능숙하고."

"그래서 싫으니."

"아니 뭐..."

"근데 은수야. 너는 내가 능숙한지 잘 하는건지 어떻게 알았어?"

"에?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요?"

"비교대조군이 있다는 뜻이네. 결론을 도출할 데이터도 충분히 쌓인 모양이고."

"예? 아니요?"

갑자기 입꼬리를 일자로 꾹 늘어트린다. 내 쪽을 보고 있던 몸을 똑바로 정자세로 돌려 반듯하게 눕더니 눈을 감아버렸다. 참나, 또 이러네, 이번에도 삐진건 내가 먼저 했는데 왜 본인이 더 난리이신지? 얄미워서 선배가 덮고 있던 이불을 확 걷어치워버렸다. 

"추워."

"여름에 뭐가 추워요."

"난 여름에도 이불 덮어야 해서."

어느새 또 옆에 붙어서 날 자기 팔 안으로 단단히 가둔다. 난 덥다고. 

"...이제 됐어."

뭐, 난 원래 더운거 잘 참는다. 이정도 붙어있는 열기는 전혀 문제 없지. 그래서 밤새도록 그렇게 껴안고도 아침까지 푹 잘 잤다. 


"근데 너 아까 할 말 있다고 했잖아. 무슨 말이었는데. ... 은수야? ... 잘 자." 



결국 또 못 헤어졌다.






"니네 뭐냐."

"네? 뭐가요?"

"둘이 왜 똑같은 냄새가 나지? 응?"

점심시간, 다 같이 둘러 앉아서 버너 위에 얹은 동태찌개가 끓길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 온 우리 형사3부 귀여운 막내, 남자 시보가 엄청 싹싹하고 친절하고 야무져서 이제 이런 식당에 오면 수저 세팅부터 찌개 배분까지 알아서 쫙 다 하니까 내가 할 일이 없다. 흐뭇하다 흐뭇해. 기분 좋게 시보가 떠주는 찌개를 건네받고 있는데 서동재 검사가 킁킁거리며 황시목 선배와 나 사이에서 코를 왔다갔다 거리더니 갑자기 요상스런 질문을 투척했다. 

미친, 개코야 뭐야,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머리를 굴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 바빴다. 그런데 정직한 내 몸은 또 당황해서 찌개를 받던 손이 삐끗거렸고, 블라우스와 바지 위로 찌개를 조금 쏟아버렸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역시 우리 센스쟁이 막냉이 시보, 재빠르게 물티슈며 휴지며 잔뜩 뽑아 수습을 도와준다. 막내랑 같이 상이며 바닥이며 옷이며 열심히 닦고 후다닥 정리를 했다. 잔뜩 쌓인 휴지더미를 치우자니 그제서야 맞은편에서 황시목 선배가 나에게 물티슈를 건네려 내밀었던 팔을 스윽 거두는게 보였다. 


"아하하! 황시목 선배는 섬유유연-"

"같은 바디 제품을 사용해서 그럴겁니다."

-제 어떤거 쓰냐고 물어보면서 자연스럽게 피해가려고 했는데 망했네. 망했어. 다 끝났다. 

"......"

"샴푸도요."

미쳤네. 황시목 미쳤어. 

"아니 난 그냥 물어본... 그... 부장님. 제가, 제가 지금 뭘 들은겁니까? 예?"

"서프로, 동재야... 이게 다 뭐냐."

보글보글 찌개 끓는 소리만 들렸다. 8명쯤 되는 사람들이 모든 동작을 멈추고 나랑 황시목만 번갈아 쳐다봤다. 막냉이 시보는 갑자기 터진 폭탄에 아무 말도 못하고 눈알만 도륵 굴리며 끓고 있는 찌개 불을 껐다.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사회생활에서 별 꼴을 다 본다 싶을듯. 

근데 선배는 아까부터 왜 시보를 저렇게 노려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질문 한 건 서동재 검사인데. 애가 선배 눈치를 보며 잔뜩 쫄아있네. 불쌍하다.

"영은수랑 저 교제합니다."

결국 핵폭탄도 터졌다. 전멸. 

모두들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놨다. 선배 혼자만 식사를 시작했다. 생선뼈를 열심히 발라내더니 도톰한 살코기를 내 밥그릇에 얹었다. 부장님이 탄식했다. 서동재 검사가 욕 비슷한 말을 중얼거린 것 같다. 저쪽 테이블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막냉이 시보는 이리저리 눈치보느라 눈알을 더 바쁘게  굴렸다. 


에이씨. 아 모르겠다. 선배가 준 살코기랑 밥을 한 숟갈 크게 떠서 오물거렸다. 두고보자. 왜 맘대로 커밍아웃해? 퇴근하면 진짜 가만 안 둬!



이제 1시간 내로, 아니 30분 안에 전 서부지검에 황시목과 영은수 사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거다. 그러니 선배, 나한테 더 더 더 잘해요. 내가 헤어지고 싶어지면 지검 모든 사람들한테 있는 욕 없는 욕 평생 먹을 거 한 번에 먹게 될테니. 






온리전 출품했던 글입니다. 장장 19,800자 스크롤 내리기도 힘든 긴 글 읽어 주셔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ㅠㅠ 감사합니다. 

달달한 심은 보고 싶어서 가볍고 밝은 분위기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잡식에 죠필을 곁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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