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AKqGw5PiH4I


*BGM-꽃물_공주의남자 OST



연모(恋慕) - 첫번째 장.

W.수미



녹음이 드리운 널따란 청운궁에 이른 아침부터 까르르 어린 생각시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갓6세를 넘긴 세손과 나이가 엇비슷한 생각시들이 세손의 아침수라를 물리자마자 청마루를 뛰어다니며 잡기 놀이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세손의 아침 놀이는 흰머리가 보이기 시작한 최고상궁도, 곁에서 지켜보던 어미 세자빈 윤씨도 막을 수 없었다. 현조 12년, 그가 왕권을 통치하며 그토록 기다려왔던 손주이자 왕손 ‘현’은 천상천하 세손독존 그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왕가의 기다림이자 복이었기 때문에. 다만, 장차 아비인 세자 정해군의 뒤를 이어 세자가 되고, 종래엔 이 나라의 미래를 등에 지게 될 운명인지라 무엇보다 훈육과 교육이 대신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거론되었다.



“전하, 세손 마마의 글공부를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거, 말만 잘하지 않는가. 사내가 건강해야지, 조금 더 뛰놀게 합세.”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아직 나도 굳건하고, 세자도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경들은 내 일찍이 죽기를 바라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옵니다! 전하! 단지 벌써 천자문을 외우셔야 하나 소인들 걱정이 되어 청을 올리나이다.”



우리 손주놈 공부 시키면 할아버지 싫다고 편전에 안 올 것 같단 말이지. 고 조막만한 것이 할바마마 하며 뛰어오는 것을 보는 낙으로 지겨운 상소문을 읽고 있건만. 언성을 높이는 신하들 사이로 심기가 불편해진 현조의 미간에 내천자가 새기어졌다. 세손의 교육을 생각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제게는 말했듯 아들인 세자도 있고, 저도 아직 굳건하다. 아이는 조금 더 아이처럼 자라나도 되는 것이 아닌가. 벌써부터 왕가의 무게를 주고 싶지 않았다. 이마를 짚으며 고민에 빠진 현조의 시선이 문득 고개를 조아리고 선 영의정에게로 향했다.



“영의정 자네.”

“예, 전하 말씀하시옵소서.”

“자네, 늦둥이를 보았다지? 아이가 세손가 나이가 동 하던가.”

“그렇사옵니다. 전하, 하온데 하명하실 일이 있으시옵니까.”

끄덕이며 흡족한 듯 영의정의 말을 귀담아 듣던 현조가 신하들을 향해 외쳤다.

“좋다. 신들이 그리도 세손의 교육을 자청하고나 하니, 내 직접 세손의 예동을 들이겠다. 영의정의 아들이 좋겠군, 출신도 분명하고 나이도 같고. 자네를 닮았다면 꽤나 충신이 될 게야. 빠른 기일내로 입궐시키도록 하라.”



현조는 명을 내리면서도 흡족한 듯 손짓하며 신하들을 물렸다. 갑작스런 세손의 예동에 갸웃하면서도 어명이 떨어진 일, 군말 없이 신하들이 편전을 벗어났다. 다만 그 자리에 영의정만이 홀로 남아 의문을 담은 목소리로 조아리며 물었다. 어째서 자신의 아들이냐고. 궁 안은 모조리 또 다른 전쟁터였다. 자신들이 살기위해 무슨 방법으로든 반(反)에 선 자들을 끝내 죽이고야 마는 그런 곳. 정치란 지긋지긋한지라 자신의 선에서 끝내고 싶었다. 일찍이 젊은 나이에 올라온 이 자리에서 그 얼마나 살아남기 힘들었는가. 장성한 아들과, 이제야 막 걸음마를 뗀 것 같은 그 맑은 눈의 막내아들을 보며 그들의 자유와 풍족한 삶을 위해 수년을 그 경쟁 속에 버티고 버티었다. 제 아들들만은 정치에서 자유롭게 해주리라 생각했건만, 현조의 입에서 떨어진 예동 발탁과 아들의 입궐은 그에게 벼락같은 명이었다.



“그대는 나의 명이 우스운가.”

“그것이 아니옵니다 전하. 제 모자란 자식이 세손 마마에게 무슨 득이 되오리까.”

“득실을 따지는 것이 아니네. 그저 이 궁 안에 세손의 벗이 아무도 없느니. 손주가 외로이 지내는 것이 할애비가 되어 안쓰럽지 않은가. 허락 해주게. 자네, 성균관시절 나와의 옛정도 있지 않나. 자네만큼 내 훌륭한 벗은 없었네. 세손도 그리했으면 좋겠어. 필시, 좋은 벗이 되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네.”



진심을 담은 목소리와 흔들림 없는 현조의 두 눈에 영의정은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제가 현 왕의 벗이었기 때문에 그의 명에 여기까지라도 대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는 선을 넘는 것, 그가 세자일 때와 군주로 있을 때는 엄연히 다르다. 자신의 반대는 어명을 어기는 것, 영의정은 현조의 뜻을 헤아려 고개를 끄덕임과 함께 -



“성은이 망극 하옵나이다.”

착잡한 걸음으로 편전을 벗어났다.




*




정사가 바빠 아침 문안을 드릴 때 말고는 대면하기 힘든 아버지가 오늘따라 제 작은 손을 꼭 잡고 아침을 같이 먹고, 곱게 다린 다홍색의 두루마기까지 입혀주니 경수의 두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아버지, 꼭 마실가는 것 같아요.”

“그래, 가는 길에 정과 하나 사주련?”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정과라는 말에 침을 꼴딱 삼키는 아이를 보았으나, 반짝 뜬 눈으로 괜찮다 고개를 도리 저으며 제 손을 잡아오니 그것이 너무도 대견해 연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작고 작은 아이를 어찌 그곳에 보내오리까. 전날 밤, 아이의 입궐을 알리자마자 제 품에서 흐느끼는 부인을 밤 새 달래었다.



“경수야.”

“예, 아버님.”



아이는 또래와 달리 나이차가 많은 형님이 있는 덕인지 몰라도 글을 빨리 깨우쳤고, 말도 빨랐으며 답지 않게 점잖았다. 영특한 너를 너무도 빨리 보이고야 마는구나. 분명 너를 욕심내는 자도, 시기하는 자도 일찍 나타나고야 말텐데.



“지금 세손 마마를 뵈러 아비와 함께 가게 되면, 세손 마마에게 꼭 예를 갖추어 인사하고, 아주 아주 좋은 벗이 되어 줄 수 있겠느냐?”

“세손 마마는 벗이 없어요?”

“음, 앞으로 많이 생기실거란다. 가령, 경수 너도 세손마마의 벗이지.”

“좋아요!”



아비의 썩어 문드러져가는 속을 알리없는 경수는 티 없이 밝고, 맑았다. 앞마당에 비추는 햇살이 눈부시도록 두 부자에게 향했다.




*




청운궁에 들어선 경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의 집보다 몇 배는 큰 궁을 두리번거리다 세손의 처소에 오며 더욱 놀람을 금치 못했다. 와, 세손 마마는 이렇게 큰 곳에서 사시는 구나. 상궁의 손에 이끌려 툇마루로 향하는데, 상궁이 아뢰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경수와 비슷한 키를 가진 아이가 달려 나왔다. 그 뒤를 여러 궁인들이 따르며 ‘마마, 다치십니다!!’ 아연실색해 안절부절 했다. 곧 달려 나온 아이가 몸을 틀어 고개를 굽히고 선 경수를 향해 다가왔다. 경수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으나 그것이 세손 마마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세손 마마, 소인 도 가의..”

“아니야! 마마라고 하지 마!”

“하지만 아버님이..”

“너! 내 벗으로 온 아이 맞지?”



머리를 굴려 아버님께 잠깐 배운 궁의 예절과 법도를 상기시키며 조막만한 입으로 제 소개를 마치려 하자 그런 경수를 제지한 아이가 버선발로 돌계단을 밟고 내려와 경수의 얼굴을 작은 두 손으로 들어 살펴보았다. ‘흠.’ 요리조리 둘러보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개구지게 웃었다. 예복도 다 풀린 채로 경수의 손을 잡아 올려 흔들더니 그 앞에 선 김 상궁을 마주하자 급히 제 앞섬을 고사리 손으로 여미기 시작했다.



“김 상궁! 그것이, 그!”

“예, 반가우셔서 그리 하신 거지요? 빈궁마마께는 눈감아 드리겠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꼭 예복을 챙겨 입어주세요 마마, 봄이라고는 하나 바람이 차갑습니다.”

“약조해!”

“예, 소인 꼭 지키겠나이다. 안으로 드시지요. 곧 다과를 내어오겠습니다.”



청운궁에 배정 된 후로 갓난아이 일 때부터 돌봐온 세손을 다루는 법을 정확히 아는 김 상궁이 제눈에는 아직 어린 아이 같은 두 사람을 안으로 이끌었다. 정치의 때를 묻히지 않은 맑은 기운이란 것이 두 사람에게 있었다. 부디 이대로만 자라주시기를. 상궁의 소리 없는 바람이 새파란 하늘에 흩어졌다.




*




궁인들에 의해 수정과와 다식, 세손이 즐겨하는 탕 몇 개가 단촐하게 차려지고 저를 빤히 바라보는 세손의 앞에 자리한 경수가 두 눈을 굴렸다.



“김 상궁! 나 이 아이와 둘만 있고 싶다! 모두 물려라.”

“예, 마마. 그리 하지요. 두 분 편히 인사 나누시옵소서.”



김 상궁의 주도로 곁에 서 있던 나인들과 생각시들이 나란히 밖을 향하고, 문이 닫히는 것을 힐끔 확인한 세손이 앉아있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경수의 앞으로 불쑥 다가와 앉았다. 경수와 멀리 떨어진 다과상에서 탕을 집어 드는 것도 잊지 않고.



“너, 이것 좋아하느냐? 먹어 보았느냐?”

“예? 예, 지난번 마을 축제 때 형님이 사주어..”

“마을 축제? 그런 것도 있느냐?”

“지난번엔 단오에 축제가 있어 불꽃 놀이를 하였습니다.”



그래도 궁의 것과는 맛이 다를 수 있으니 꼭 먹어 보아라. 이곳에서 나가면 저 상을 물리니 먹지 못할 것이다. 경수의 손에 탕을 쥐어주고 예를 차릴 것 없다는 듯 무릎을 꿇고 앉은 경수의 다리를 통통 치며 편하게 앉을 것을 종용했다. 주저하는 경수에게 여기 내가 다 쫒아내고 아무도 없어. 나밖에 없으니 괜찮다. 안심시키며 경수에게 마을의 축제나 불꽃놀이 등에 대해 알려 달라 조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고작해야 정원을 뛰노는 것 말고는 재미있는 일이 없어 따분하다. 너는 어떠냐? 너도 나처럼 갇혀 지내느냐?”

“저는, 형님을 따라 서당에 가 본 적은 있습니다. 다만 시장은 축제가 아니면 어린 아이는 다친다고 내내 집에서 글공부를 합니다.”

“우리는 동지로구나! 좋은 벗이 생긴 것 같아! 나 너무 신이 난다.”

“아버님께서도 형님께서도 꼭 마마와 좋은 벗이 되라 하셨습니다.”

그으래? 이야기를 들은 세손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너, 나의 좋은 벗이 되고 싶다 하였느냐?”

“예? 예.”

“그렇다면 내 이름부터 불러 보거라. 내 이름은 세손 마마가 아니라 현이다. 백현.”

“제가 어떻게 마마의 ..”

“네 이름이 무엇이냐?”

“도 가의 경수 입니다.”

“그래, 경수야! 나는 현이라고 한다.”



오늘 중에 꼭 경수의 입에서 제 이름을 듣고야 말겠다는 세손의 고집이 시작되었다. 자리를 비켜주지 않고 두 눈 꼭 마주쳐오는 세손에 난처해진 경수가 달싹거리는 입을 열어 말했다.



“현이 마마.”

“틀렸대도.”

“현..이야..”

“좋아!”



앞으로, 네가 입궐할 땐 사람들을 모두 물릴게! 단 둘이 있는 곳에서는 내게 마마라고 하지 마라. 안 그럼 글공부를 하지 않을 것이다.



“알겠느냐?”

“예? 예..”

“내가 누구라고?”

“현이, 백현이.”



세손의 엄포에 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청운궁을 밝히었고, 나눠 먹는 다과가 이토록 달디 달았던가- 이야기꽃을 피우는 아이들의 입으로 하나 둘 사라졌다.


그렇게 세손과 경수는 타의에 의해 혹은 자의에 의해, ‘벗’이 되었다. 속내를 아낌없이 밝힐 수 있는 벗, 믿음과 충성 그 자체의 벗. 


거스를 수 없는 인연이 시작되었다.



잠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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