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NING 

<그녀가 공작저로 가야 했던 사정>의 후반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2018년 9월 20일 작성글 백업본

ⓒ 고래, 밀차 2017 / D&C MEDIA

“이제 이기적으로 굴기로 했거든요.”


#
유서 깊은 샤말 후작가 장남에 직위는 근위대 기사단장, 거기다 꽤 까다로운 미남판독기 레리아나의 기준을 통과한 분 되시겠다. 혈통 좋지, 직업 좋지, 외모 좋지, 거기다 성격도 좋다! 귀족적으로 생겨서는 유들유들하고 넉살 좋은 도련님. 사람 차별하지 않고 누구와도 편하고 즐겁게 대화할 줄 아는 이 친절한 남자는 사실,

개복치다. 잘생기고 다정한 개복치.

극도로 예민해서 별의별 해괴한 이유로 돌연사한다는 그 개복치 맞습니다. 

동의어: 쿠크다스, 유리멘탈, 하남자


#
당연히 개복치라는 게 신체적으로 약하다는 얘기는 아니고. 이 인간 나름 노아, 아담과 함께 왕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임. 가문빨로 근위대 기사단장 자리 차지한 거 아니라는 얘기. 참고로 노아와의 상대 전적은 1승 1패 2무이다. 그러나 인생의 패배자가 되었지

그러나 그 미모와 실력이 아깝게도 그는 그다지 강직한 멘탈을 갖고 있지 못하다. 

다정하지만 약하고, 약해서 배려를 못하는 사람.


#
사실 표면적인 성격을 보면 오히려 배려가 넘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이 드신 아버지의 잔소리를 가만히 들어드리고, 철없는 여동생이라 할지언정 늘 걱정하고 있으며, 처음 보는 이가 제게 실수를 해도 상대가 너무 민망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풀어주는 그에게 배려심이 없다고 하면 누구에게 배려심이 있다 하겠나.

 그는 살갑고 친화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통성명 한번 하지 않았는데, 정말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지인처럼 친근하게 이야기를 건넸다.


/ 연재본 41화, 단행본 2권

저스틴과 함께 있으면 분위기는 늘 편안하고 즐겁다. 기사단장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것도 없고, 신분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나는 용병 잡화점 주인장이나 도서관의 사서도 모두 그를 편하게 “저스틴”이라 부르며 친구처럼 지낼 정도이니. 그러나 문제는 그가 늘 그렇게 ‘편안하고 즐거우려는’ 데에 있다.

이 인간은 갈등을 마주할 줄 모른다.

그는 극도로 갈등 상황을 회피한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이 싫고, 누군가와 나쁜 관계로 틀어지는 것도 싫다. 원래 사람의 성격이라는 게 동전의 양면 같아서, 저스틴의 유들유들하고 사람 좋은 면모의 이면엔 그의 지극히 회피적인 성격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념과 사랑을 위해 아버지와 싸울 용기가 없다. 철없는 여동생을 혼내거나 다그쳐 바로 잡아줄 힘도 없다. 저스틴은 절대 깊은 곳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늘 수면 위에 떠 부유하고 있을 뿐. 마치 개복치처럼.


#
첫사랑에 실패한 것도 결국 그에게 현실의 갈등과 문제들을 정면으로 마주 볼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리고 클로에. (중략) 그녀는 저스틴을 신분 상승용 예쁜 유리 구두로 취급해 제 옆자리에 앉혔다. 샤말 후작만 아니었더라도, 그녀는 유리 구두를 신는 것에 성공할 수 있었으리라. 2년이었다. 아들의 애원에도 샤말 후작의 반대는 완고했다. 


 충분히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한 클로에는 결국 라킨 백작을 선택하기로 했다. 될 지 안 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허상 같은 사랑 놀이를 더 이상 지속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연재본 48화, 단행본 2권

언뜻 보기엔 아버지의 반대 때문인 듯 보이지만, 여기엔 저스틴 본인의 문제도 상당히 크다. 클로에가 진심이었든 아니든 저스틴은 그녀를 정말 사랑한 게 확실한데, 아무런 결정도 못 내린 채 끈 시간이 자그마치 2년이라니. 여자가 혼기 놓치면 큰일 나던 사회에서 연인한테 잘하는 짓이다 이놈아.

근위대 기사단장씩이나 되는 직위에 인맥도 짱짱할 놈이 대체 왜 아버지에게 강경하게 맞서지 못했나. 후작과 사이가 틀어지면 클로에가 자기를 떠날까 봐 두려웠나? 그 정도로 클로에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다면 왜 자기가 가진 것들을 이용해서 그녀를 붙잡을 방도를 마련할 생각은 하지 않은 거니?

뭐 그래도 사랑 앞에선 누구나 겁쟁이가 되니까. 답답할지언정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갈팡질팡하다가 사랑을 놓칠 수도 있지 뭐. 그것 때문에 상처 받아서 훌쩍 실연 여행 떠날 수도 있지 뭐. 그래서 자기 할 일 다 내팽개치고 1년 반 가까이 떠돌 수도 있지 뭐!ㅋㅋㅋㅋ

그렇게 떠돌고 다시 돌아온 후에도 마음을 못 잡았지만! 때마침 저스틴은 운명적으로 어떤 여자를 만났고, 호감을 느꼈고, 그래서 클로에를 잊을 수 있었고, 그래 뭐 여기까진 괜찮았는데.

그 여자가 레리아나라는 게 비극이었다.


#
이후 저스틴은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이미 약혼자가 있는 여자에게 앞뒤 분간도 않고 달려드는데.

 “아니, 왜 하필……. 세상천지 여자가 그렇게 많은데, 왜 맨날 임자 있는 여자를…….”

 “말은 바로 해야지. 저번 여자는 뺏긴 거고.”

 “이번 여자는요.”

 “빼앗을 예정이고.”

 “미치셨습니까?”


/ 연재본 59화, 단행본 2권

(정말 미쳤니? 도랐니?)

그의 이런 극단적인 사고의 기저에는 그만의 정신 승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직 가문과 돈을 보고 정략결혼을 한 자신의 옛 연인. 그리고 그 여자를 놓쳤던 우유부단한 과거의 자신. 상처로 인해 방황하고 있을 무렵, 제 앞에 새로운 여자가 나타났는데..! 미인에, 매력적인 성격에, 자꾸만 마음이 간다. 그런데 이 여자가 ‘정략 약혼’을 했다고 하네? 마치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그 첫사랑처럼?! 이럴 수가, 내가 구해줘야 한다. 그런 결혼은 옳지 않아! 그런 정략혼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두 번 다신 없어!!!

와 같은 상태라고 해야 하나.

처음엔 몇 번 반복된 우연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호감 단계였던 감정이 별다른 전조 없이 그저 레리아나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말을 들은 후 극적으로 팽창되는데, 이게 정상적인 애정일 리 없다. 원래 사랑은 고난이 주어질수록 비정상적으로 불타오르는 법이라고? 아니 이건 고난이 아니고 그냥 실연 트라우마가 있던 놈한테 ‘정략혼’이라는 키워드가 트리거로 작용한 거겠지.

이건 사랑이 아니다. 이건 그저 과거의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심, 여자를 불행한 정략혼에서 구해낸다는 영웅심리, 그리고 이를 통한 자기구원을 실현하고야 말겠다는 오기일 뿐.


#
저스틴은 노아와 레리아나가 정말로 서로에게 감정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정략적인 목적만을 가지고 약혼한 상태라고 오해하고 있었으니 좀 정상참작해서 감경해줘야 하지 않냐 라고 한다면,

글쎄요. 그 변명도 얼마 못 가 나가리 됐을 텐데.

 “반지를 돌려드리려고요. 어쩌다 줍게 되는 바람에 제가 잠깐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노아가 반지를 쥐며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반지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빙그르 돌며 굴러간 반지가 저스틴의 발 앞부리에 걸려 멈춰 섰다.

 

 “레리아나의 것이 아닌 것 같군.” 

 

 노아는 몸을 돌렸다. 표정을 굳힌 저스틴이 반지를 주워 들었다.


 “무슨 뜻이십니까.” 

 “자네 목에 걸려 있던 그 반지는 레리아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뜻이야.” 


 그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저스틴은 반지를 꾹 쥐었다.


/ 연재본 66화, 단행본 2권

분위기 읽는 데에 능수능란한 저스틴이 노아와 레리아나 사이의 기류를 정말로 못 읽었을까?

처음에야 오해할 수 있었어도 그는 노아와 레리아나를 상당히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으며, 그때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고 있다고 아주 만천하에 광고를 하는 상태셨다. 특히 나중에 가서는 부정할 수도 없는 게,

 레리아나는 창에 바짝 달라붙어서 노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중략) 손을 내렸다. 그 아래 노아가 잡힐 듯 보였다.


 “좋아해요.”


 바람이 불었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귓전을 스친 것 같아 문득 노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 * *


 “……?”

 

 레리아나는 제 손목을 잡아끌고 마주 본 채 선 저스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 연재본 71화, 단행본 2권

두 사람 마음이 통하지 못하도록 대놓고 훼방을 놓는다.

이랬는데 저스틴이 눈치 못 챘을 수도 있다고 하는 건 기만입니다…….


#
그래도 만약 저기서 멈췄다면 아 이놈이 처음엔 진짜 몰라서 그랬구나, 하고 감경해줄 수 있었는데. 이놈의 진짜 업보는 이다음이다.

이놈은 다 알고도 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또 도망간다.

본능으로는 깨달았는데 그걸 인정하지를 못한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감정이 있다는 걸 인정해버리면 본인이 쌓아 온 정당화 논리가 모두 무너져버리니까. 일종의 방어기제였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레리아나는 반드시 ‘불행한 정략혼’을 앞둔 상태여야만 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명확한 정황들은 완전히 무시되고, 그의 상태는 전보다 더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다.

 승자가 던진 동백꽃은 거절할 수 없다. 싱글싱글 웃는 저스틴을 보며 레리아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레리아나는 슬쩍 눈동자만 돌려 노아를 훔쳐보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싸늘한 표정으로 저스틴을 응시하고 있었다. 입이 바짝바짝 말라 갔다. 

 

 (중략) 저스틴은 파죽지세로 승리를 이끌어갔다. 검을 잘 모르는 레리아나도 이름을 알 만한 기사들이 하나둘씩 그의 앞에서 검을 놓았다. 그와 함께 동백꽃은 더 수북하게 쌓여 갔다.


/ 연재본 78화, 단행본 2권

그나마 주위의 시선을 신경 써서 레리아나의 얼굴도 가려줄 줄 알던 저스틴이, 이제는 수만 관중과 그녀의 약혼자가 앞에서 보란 듯이 레리아나에게 대쉬를 한다. 레리아나가 단호하게 전한 거절의 말이 그에겐 들리지 않는다. 질투와 분노로 얼룩진 노아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걸 다 떠나서, 자신의 행동이 레리아나를 얼마나 난처하게 만들지조차 그는 더 이상 고려하지 않는다.


#
결국 다정하고 배려 넘쳐 보이던 그의 성격은, 버거운 현실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지독한 자기방어였을 뿐. 현실이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자 그는 ‘배려’라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짙은 회피적 성향은, 아무리 현실이 버겁고 힘들어도 그 안에서 버티고 싸우며 발버둥 치는 노아나 레리아나와는 완벽하게 대비되는 태도다. 무엇이든 ‘책임지려’ 하는 두 주인공과 달리 저스틴은 늘 ‘도망친다’. 남주와 여주가 너무 티타늄 멘탈이다 보니 밸런스를 위해 서브남을 개복치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짜잔


#
생각해 보니 저스틴 정말 노아가 극혐하는 부류구나. 사랑에 빠져서 혼자 비련의 주인공 놀이하며 자기 할 일과 책임들을 내팽개치는 인간…. 둘이 부서(?)가 달라서 다행이지, 같은 소속이었으면 네이슨이 힘들다고 울기 전에 노아가 칼같이 저스틴 사표 수리했을 듯. 그에 비해 평생 이루어지지 못할 짝사랑 중인 시아트리히는 상대적으로 저스틴에게 너그러운 면이 있다는 점도 재밌네.


#
무섭게 까기만 했는데ㅋㅋ 저스틴이 싫었던 순간만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놈이 딱 한 번, 정말 중요했던 순간에 옳은 결정을 했거든.

그건 다름 아닌, 동생 비비안의 편을 든 것.

쓴 소리 한 번 못하고 오냐오냐 키운 탓에 아름다운 혐성으로 성장한 비비안이지만, 동생이 가장 위기에 처했던 순간 도망치지 않고 제대로 편을 들어준 것. 그것도 식구라고 무작정 근거 없이 나선 게 아니라, 비비안의 죄가 정확히 어디까지인지 먼저 나서서 파악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변호를 하려고 한 것.

사실 비비안이 지은 죄의 피해자가 레리아나였기 때문에, 사랑(이라고 해줍시다)에 눈이 멀어 레리 편 든답시고 비비안 몰아세웠으면 정말 차원을 넘어 저스틴 머리채 잡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ㅋㅋ 이때는 기대 이상으로 이성적으로 조사부터 하고 피해자에게 사과를 한 뒤 비비안의 책임이 아닌 것들을 명확히 구분하려고 애쓰던 모습이 정말 오빠다워서 좋았다. 저스틴이 유일하게 도망치지 않았던 순간.


#
이런 현실도피형 하남자 캐릭터가 내 취향이 아니라는 사실(저는 이런 부류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못합니다)과는 별개로, 저스틴의 입체적 캐릭터성과 그 캐릭터성의 섬세한 빌딩 과정은 너무너무 좋아한다. 왜냐하면 이 녀석은 단순히 남주의 질투를 유발하기 위한 도구적 서브남이 아니잖아요ㅋㅋ

다정하고 친절한, 그러나 동시에 갈등 회피적인 인간.

재독하면 보이는 거지만, 사실 첫 등장 장면─아버지 샤말 후작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혼나던 순간 말을 돌리며 자리를 피하던 씬─에서부터 이미 그의 현실도피적인 면모가 배어나서. 이런 자연스러운 빌딩의 단계들이 보이니까 그공사의 캐릭터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웹소설 좋아하는 사람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