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IME

백현 x 경수









1구역에 온 지도 벌써 6개월이나 지나갔다.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김주혁은 딱 한 번 찾아왔었다. 아마 그가 아니었다면 여기에 온 목적을 잊고 살았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잘 지내셨나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안부 인사를 건네오는 김주혁에게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호텔에 내려준 뒤로는 저를 찾으러 오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무작정 변백현의 소유인 호텔에 덩그러니 저를 내려다 주고 알아서 찾아보라 했던 그의 무책임했던 행동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그리고 어떻게 알았는지 백현이 마침 출장 가있는 상태에서 대놓고 집으로 찾아왔다. 게다가 이미 손을 어떻게 써놓은 상태인지 가정부들과 문앞에 늘 서 있던 가드들이 김민석 비서 대신 온 줄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당당히 집에 들어온 김주혁에 당황한 건 경수 오로지 하나였다. 그런 그가 저를 찾아왔다. 그것도 6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잘 지냈겠습니까?”










말이 당연히 좋게 나갈 리가 없었다. 사람 마음을 들쑤실 땐 언제고. 이때까지 백현과의 관계가 얼마나 스펙터클 했었는지는 그는 가늠도 못할 것이다.








"음? 그간 들리는 소문으로써는 세상 무심하던 변 전무님이 칼퇴까지 한다는 소리가 자자 하던데... 집에 꿀단지라도 숨겨 놓은 거 아니냐면서.”






“..."






능청스레 경수와 백현의 사이를 돌려 얘기하는 김주혁의 얼굴에서는 정말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표정이었다.



한숨을 한번 푹 내쉰 경수는 용건이 뭐냐는 듯 한쪽 눈썹을 지켜 올리며 팔짱을 꼈다.








"와, 변전무님 옆으로 바로 붙여준 건 저인데 고마워해야 하지 않나요?”






"제가 왜요? 도와주겠다고 하고 1구역 오자마자 저 혼자 내버려두신 거요? 힌트랍시고 준거는 호텔에 저 혼자 두고 가신 거요?”








"그래서 선물이라고 시간도 많이 드렸잖아요. 아, 설마 다 쓰신 건가요? 그럴 리가. 변전무님이 옆에 있는데?”











알면서도 김주혁은 저러는 거다. 비꼬을려는 의도를 도저히 파악을 못 하겠다. 사실 김주혁은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저가 백현의 옆에 있으니 시간 걱정할 리는 만무했다. 실제로도 넘쳐나는 시간 덕분에 카운트 바디 시계가 있었는지는, 백현이 가끔가다 누워서 온몸에 뽀뽀세례를 날리 때서야 깨닫는다.










식탁에 앉아 홍차만 홀짝이던 김주혁은 난데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편에 앉아있던 경수의 바로 옆까지 다다라 고개를 내리고 속사였다.










"제가 이렇게까지 오래 안 찾아온 이유는 그동안 도경수씨가 변전무 옆에서 뭐 좀 제대로 알아내기를 바라서였습니다. 하지만 아닌 거 같네요. 이렇게 옆에서 연애까지 하실 줄이야.”






“...!"






경수는 고개를 팩 돌려 옆으로 다가온 주혁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의 얼굴에서는 언제 자기가 웃었었느냐는 듯 내리깐 그의 눈만이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변전무가 수인을 싫어하는 건 알게 됐나요?”






“당신은, 그걸 알면서..도!”






자리를 박차 일어나 김주혁의 멱살을 잡았다. 그는 얌전히 경수의 손을 잡혀주었다. 








"당신 대체 뭐 하자는 거에요. 내가 당신 말 믿고 여기까지 왔어요. 오직 당신이 내 아버지를 안다는 그 하나만으로. 그리고 나보고 모든 걸 알아내라며.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 당신은 다 알잖아. 모든 걸. 근데 나한테 왜 그래..”









말을 하다 그간 백현과 좋았으면서도 힘들었던 시간이 생각이 났다. 김주혁의 멱살을 잡고 있던 경수는 그대로 손을 놓으면서도 화를 주체할 수 없는 기분에 그대로 몸을 웅크리며 땅바닥에 다리를 모으며 앉았다. 화때문인지 아니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서러움 때문이지는 모르지만, 경수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런 경수를 주혁은 자신의 무릎 한쪽을 꿇어앉으면서 경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경수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도경수씨. 맞아요 저는 다 알고 있어요. 근데 경수씨가 혼자서 다 알아내셔야 그의 따르는 도경수씨의 본인 생각과 행동이 나올 거에요. 게다가 제가 말해줬더라면 믿지 않았을 수도 있고, 충동적으로 무언의 행동을 취했을지도 몰라서 얘기 못 한 거에요.”








“..."







"봐요. 지금 변백현씨와 같이 좋은 시간 보내고 계시잖아요. 수인을 싫어하는 변백현과 함께. 물론 변전무는 경수씨의 비밀은 모르겠죠. 근데 경수씨는 알면서도 변전무랑 지금 잘 지내고 있잖아요. 그건 순저히 경수씨의 본인 의지를 따른 행동이죠.”








"..알면서도 제가 숨기는 거죠. 들키게 되면 언젠간 저도 버려지겠죠. 지금의 이 짧은 찰 날이 좋아서..”











경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알고 있다. 저가 변백현의 대해서 모든걸 알게 되고, 변백현이 저에 대한 모든 것이 기억이 나고, 알게 되는 그날은. 우리에겐 좋은 끝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허한 빈자리를 채워오는 백현의 온기가 좋을 뿐이다.








"전 도경수씨 편이에요. 도와주려는 거라고요. 저를 의심하지 마세요. 경수씨만 힘들어져요. 저는 도경수씨를 매번 주시하고 있어요. 도경수씨가 박찬열씨랑도 그의 반려묘랑도 가깝게 지내는 걸 알고 있어요. 그 반려묘도 사실 수인인 것도 알고 있고요. 변전무가 알면 큰일 나겠지만. 늘 주의 시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렇다고 사생활까지 참견할 수 있는 건 아니죠. 감시처럼 느껴졌다면 미안해요. 미리 말 못해서도 미안해요. 다만 경수씨의 안전을 위해서였어요.”






"언제까지 이 행복이 이루어질진 모르잖아요”






"그렇죠. 다만 모든걸 다 알게 되는 그날의 경수씨가 그 모든 것을 그래도 감당할 수 있다면, 그때는 정말 불안감에 휩싸인 행복을 안 느낄 수 있겠죠.”






“..."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참아주세요. 조만간 더 알게 될 거에요.”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변회장이 퇴원했어요.”













김주혁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경수의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치켜들고 김주혁의 눈을 마주했다. 






왜 몰랐을까. 항상 백현 옆에서 안정된듯하면서도 불안정함을 느꼈었던 이유가 변회장이었다. 어릴 때 분명히...










경수는 변회장을 생각하자 어렸을 때의 일들이 갑작스레 떠오르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어린 날의 나날들이 경수를 괴롭히며 머리가 아파져 오자,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으며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놀란 마음에 김주혁이 경수를 흔들었지만, 경수는 점차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다시 한 번 떠오르기 시작했다. 왜 매번.. 왜 매번 지나고 나서야 생각이 나는 걸까. 










"모르고 있었던 거에요? 변회장이 어디 있었는지?”








머리를 도리질을 치는 경수에 주혁은 한숨을 크게 한 번 더 내쉬었다. 6개월 동안의 시간이 무색하게 느꼈졌다. 그냥 저가 얘기해줬었어야 했나 싶기도 해진다.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어요. 변백현도 처음 봤을 때 바로 생각난 게 아니었어요. 워낙 어릴때라 사실 모든 게 가물가물해요.”








“하아..."










자리에서 일어난 김주혁은 머리를 한번 쓸어넘기고 팔짱을 끼면서 한 손으로는 그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경수는 스스로 변회장을 어떻게 까먹고 있었을까 싶다. 그 누구도 아닌 변회장을. 어릴때도 저를 자신의 친아들 그 이상으로 바라보던 그의 더러운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변회장과 백현의 생김새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났었나 싶다.










"몰라도 너무 모르네요 정말. 대체 6개월 동안 뭘... 아니다. 말 못 해준 제 잘못이죠. 그건 그렇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변전무랑 변회장 사이 안 좋은 거 1구역 사람이 아니어도 다들 알고 있어요. 마주칠 일 없다는 뜻이에요.”






"그걸 위로라고...”






"위로죠. 조만간 변회장이 따로 변전무는 만날 수도 있지만, 도경수씨를 알지 못할 테니깐요. 다만 변회장이 퇴원했기 때문에 언론사에서 언급할 거에요. 그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은. 그러면 경수씨도 더 빨리 알겠죠. 진실을.”








말을 마친 김주혁은 자신이 할 말은 다 전했는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면서 갖고 왔던 코트를 가지고 현관으로 향했다. 








"빠른 시일 안에 다시 보게 될거에요. 이번에는 진짜로요."








싱긋 웃어 보이고는 김주혁은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경수를 한번 쳐다보고 나갔다. 












이거 위험한데.

















김주혁이 나가면서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다시 고개를 무릎 사이에 숙인 경수는 그렇게 한참이나 앉아있었다. 전화가 울리는지도 모르는 채.


































IN TIME

w. 펭귄 브라더스















"경수야!"








공항으로 마주나온 경수는 아무래도 신분이 신분인지라, 차 안에서 백현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백현은 경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얼굴을 그대로 부여잡으며 입을 맞췄다.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입맞춤의 농도가 달라졌다는 점. 백현한테는 바깥의 바람 냄새와 그리고 그의 은은하면서도 묵직한 향기가 함께 경수의 코를 웃돌았다. 짧은 시간의 출장이었지만 평소보다 더 그리웠다.












경수는 그대로 백현의 옷깃을 잡았던 손에 힘을 더 주어 그를 끌어안으며, 품 안에 안겼다. 갑작스러운 경수의 행동에 백현은 당황도 잠시, 그대로 더욱 깊게 경수의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백현을 경수는 오히려 그의 등을 더 꽉 껴안았다.












한참이나 그렇게 키스를 마친 뒤에, 백현은 한겨울의 추위들이 다 녹을 정도로 따듯하게 경수를 내려 보았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분위기인 경수를 눈치챈 백현은 아까부터 놓지 않고 있던 자신의 옷깃을 부여잡은 경수의 손을 맞잡았다. 












“무슨 일 있었어?”






백현의 물음에 경수는 얼굴을 도리도리 내저었다. 사실 무서웠다. 저가 처음에 의도를 갖고 백현에게 접근한 걸 알게 되면 백현이 자신을 떠날까 봐. 어릴때 마저의 기억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백현이 저를 저버릴까 봐.










경수는 양손을 꼼지락대며 백현의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남들과 달리 경수는 거짓말을 할 때에 눈을 피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경수가 간과한 게 있다면, 짧지도 길지도 않은 6개월동안 경수의 사소한 습관들과 패턴을 이미 익히 눈치챘었다. 다만 경수를 위해 그저 눈감고 넘어가 줬을 뿐이었다.










“경수야, 난 네가 날 믿고 다 말해줬으면 좋겠어.”






“…”





“사소한 것들도 다 좋아. 그저 네가 오늘 무엇을 했는지, 밥은 뭐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큰 거 안 바래.”





“…”





“난 항상 기다려 줄 수 있어. 그저 마음 편해질 때 얘기해줘.”








이렇게 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며 얘기할 때의 백현을 믿고 싶었다. 반대로 점점 바뀌는 그의 모습과, 저를 대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는 백현에게 큰 실망감만 안겨줄까 봐 두려웠다. 경수가 혼자 갈팡질팡하는 사이, 백현은 이미 비서를 시켜 차를 출발 시킨 지 오래였다.






마주 잡은 손을 내려본 경수는 입술을 달싹이며 말할 타이밍만 잡고 있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왜 당신에게 왔는지 말하면 그때는 자신을 안 떠날 자신이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더 늦어지면 오히려 나중에 상처가 더 커질 걸 알기에 백현에게 물어보려는 찰날 그가 갑작스레 얼굴을 돌려 저를 마주한 채 한껏 웃고 있었다.






"경수야. 생각해 보니깐, 우리 이때까지 해외 제외하고는 여기서는 별로 간 곳이 마땅히 없네. 어디 가보고 싶은 데 있어?"




문뜩 1구역에서 자신과 경수와 첫 만남이 카지노였던 것을 제외하면 1구역에서는 정말 경수와 딱히 나다닌 곳이 없었다. 경수의 신분을 생각해 혹시나 12구역에서 사라진 경수의 행방을 찾을 타임키퍼들이 있을 수 있으니 오직 저의 눈에 닿는 곳만 경수의 외출을 허락했었다. 






답답했을 경수를 알았지만, 안전을 위해서 저라는 울타리 안에 가뒀었다. 사실 박찬열과 만나게 해줄 의향도 다분했었지만, 저를 몰래 둘이 연락을 주고 받는 것은 진작 알았던 터라, 약간의 괘씸함때문에 오히려 더 못 만나게 하는 것도 있었다. 대신 그래도 박찬열의 반려묘를 경수와 저만이 존재하는 주택으로 모르는 척 들여보내 주는 것은 그에 대한 사소한 배려였다. 그리고 경수에게 내색은 안 했었지만, 날이 갈수록 경수를 향한 마음은 좀처럼 줄어드는 법이 없이, 오히려 그를 볼 때마다 더욱 부풀어 올랐다. 경수를 향한 저의 집착심을 알게 되는 날, 아마 경수는 저를 겁먹어 할 수 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저 바다에 가보고 싶어요."




할 말은 많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괜찮겠지라는 마음에 자신의 말은 뒷전으로 하고 경수는 사람이 적은 바다를 선택했다. 실제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구경하러 가보지 못한 바다를 가보고 싶었다. 자신이 제일 아끼는 사람과 함께. 혜진은 이미 없었기에, 저에게 남은 것은 백현이었다. 




"가본 적 없어?"




"..네. 한 번도 본적도, 가본 적도 없어요."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




"어릴때 동화책에서 그림으로, 그리고 12구역에서 살아가려면 벌어는 먹어야 해서 상표 붙이는 작업할 때 사진으로 본 게 다였어요."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 했을 때의 경수의 눈빛에서는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놀이동산을 놀러 가는 듯한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12구역에 있을 때를 생각하자마자 경수의 표정은 본인도 알아차릴새 없이 공허해졌다. 이미 백현과 자신의 거리감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덤덤해져 있었다.




무덤히도 말하는 경수를 보며 백현은 알 수 없는 기시감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잘나가다가도 이렇게 서로에게서 느껴지는 거리감이 둘을 동떨어지게 하는 느낌을 들게 했다. 그런 느낌을 애써 무시한 채 백현은 비서에게 근처 앞바다로 가자고 얘기한 채, 그저 아무 표정을 하고 있지 않은 경수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백현과 손을 마주 잡은 채 경수의 시선은 창문 밖으로 고정돼 있었다. 오랜만에 나온 바깥은 보지 못했던 것들의 투성이었다.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달라지는 풍경에 신기할 틈도 없이, 백현이 경수의 창문을 내려주자 한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냄새가 한껏 경수에게 들이닥쳤다. 청량하면서도 짭쪼름듯한 냄새에 경수는 그대로 몸을 틀어 백현을 마주 보았다.











"진짜 너무 좋아요."









정말 한 치의 거짓이 없이, 눈을 마주 보며 아이처럼 맑게 웃는 경수를 보니 백현은 마음 언저리가 간질거렸다. 여태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경수를 만난 뒤에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쾌했었다. 자신도 모르는 감정들이 솟구치는데 그게 무슨 감정인지 깨닫는데 한참이 걸렸다. 






한겨울인데, 춥지도 않은지 경수는 얼굴을 살짝 창밖으로 내민 채 한껏 바다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런 경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백현은 다시 한 번 깨달아가고 있었다. 경수는 마치 저에게 온 따스한 봄바람 같았다. 여름에 만나 추운 겨울까지 함께한 경수는 늘 싱그러웠다. 










그런 싱그러움을 그저 변백현이라는 담벼락 안에 저가 죽이고 있었다. 





















해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수평선 너머로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온 하늘이 금빛으로 오색찬란하게 빨갛게 물들어 갔다. 바다는 잠잠하면서도 햇빛에 반사된 파도가 일렁이며 반짝였다. 그중에서 제일 빛나는 건 다름 아닌 그저 모든 것을 담아내겠다는 경수의 눈빛이었다. 







철썩이는 파도소리부터 시작해, 발걸음을 내딜때마다 모래와 눈이 어우러지는 소리가 잔잔하게 백현과 경수의 귓가를 메꾸었다. 








겨울바람에 경수의 몸이 시릴까 백현은 차에서 내릴 때부터 자신의 목도리를 경수에게 둘러주었다. 경수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백현은 조금이나마 경수가 춥지 않게 자신의 모든것을 내주었다. 마음마저 함께.








한참을 걷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춰선 경수는 시선을 바다 저 멀리에 두고, 백현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시린 바람이 둘을 훑고 지나가지만, 경수는 오히려 뻥 뚫린 바다와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바람이 자신의 내내 꼬여있던 생각의 실타래들이 풀리는 기분 들었다.






경수의 시선은 여전히 거두어지지 않은 채, 마음을 다잡아 조금이나마 말해본다.








"제가 저 믿지 말라고 했던 거 기억하세요?"






이렇게 갑작스레 자신을 먼저 털어놓을 줄 몰랐던 백현은, 경수를 쳐다보던 눈이 커졌다.








"저는 당신을 못 믿는 게 아니라, 절 믿지 않게 위해 서에요."





"..."





"제가 지금 당신 곁에 어떻게 있는지 알게 되면..."





묵묵히 경수의 말만 듣고 있던 백현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이나 뜸들이는 경수를 기다려줬다. 




"절 미워할 수도 있어요. 아니... 어쩌면..."




경수의 말을 끝내 이어지지 않았지만, 백현은 경수가 하고자 하는 말의 끝을 알았다. 아마도 이 관계의 끝을 얘기하는 것이다. 고개를 떨군 경수는 울먹이며 나지막이 얘기한다. 





"그냥 이 찰 날이 좋아서, 놓지 못하겠어요. 이 맞잡은 작은 온기가 좋아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현은 경수의 몸을 돌려 양손으로 경수의 얼굴을 부여잡아 자신을 바라보게끔 하여 그대로 키스를 했다. 가벼운 입맞춤도 아니고 그렇다고 농염하지도 않은, 백현은 그저 담백하게 퍼부었다.






"난 놔준다고 한적 단 한번도 없어. 오히려 난 경수 네가 도망갈까 두려워."




"..."




"내가 너를 얼만큼이나 생각하는지 알게 되면, 도망갈 수도 있어."




"..."




"마지막 기회야. 지금 가면 난 그대로 눈감아 줄게. 찾지도 않을게. 근데도 나와 있겠다면, 나는 너를 평생 놓지 않을 거야. 내가 질려도, 미워져도, 증오해져도 안 보내 줄 거야."



"어떡할래? 경수야, 너에게 선택권을 줄게."









이미 백현이 저를 향한 집착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의 소유욕은 웬만한 사람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아끼지 않더라도, 일단 그의 소유라면 그 누구도 건들 수 없었다. 그 대단한 변회장조차.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어릴때 그의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 중 한 명이 백현의 작은 연필 하나를 버린 적이 있었다. 그의 연필이 사라진 걸 단박에 알아챈 그는 집안에 있던 모든 가정부를 불러 버린 사람을 찾아냈다. 버린 사람은 다름 아닌 주택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벌벌 떨던 그녀는 백현에게 사죄와 용서를 빌었지만, 백현은 그녀에게 웃어주며 '내걸 버렸으니, 네 것도 버려야겠지?' 라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음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집에서 보이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영영 1구역에서 버려졌는지는 그만 알 것이다. 보통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의 연필 한 자루가 버려졌다고 주동자를 찾진 않을 것이다. 변백현은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저는 이 위험함을 알면서도 당신을 놓지 못한다. 이미 그에게 세뇌되어 떠나지 못하는 거라고 자위를 해보아도, 이 허허벌판 같았던 공허한 마음은 이미 백현으로 채워지지다 못해 넘쳐 흐르고 있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그를 담은 저의 마음은. 











나는 너를 떠나지 못 할 것이다. 나를 먼저 떠나지 않는 이상.

















석양을 등진 채 주황빛으로 물든 경수는 처음으로 백현에게 먼저 다가가 그대로 입을 맞췄다가 바로 떼었다. 그리고 말로 형용할 수 없을만큼의 감정이 북치어오르며 백현을 쳐다보았다.








"좋아해요. 정말 많이."








그 어느때보다 더 화사한 경수의 웃음을 본 백현은 한 두방울씩 굵게 눈물을 떨어뜨렸다. 어릴때의 누군가가 경수랑 겹치며 떠올라서.

















여느 날과 다름없이, 세훈과 함께 낮에 정원에서 시간을 보낸 경수는 백현이 돌아오는 저녁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와 같이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백현을 기다리다 경수의 폰의 진동이 짧게 울렸다. 






퇴근했어. 어디 들렀다가 가야 해서 조금 늦을 거 같아. 미안해. 금방 갈게. 사랑해.






여느 때와 같이 사랑 고백과 함께 퇴근할 때 메시지를 보내오는 백현에 경수는 작게 미소가 새어나왔다. 그가 조금 늦어지겠다 할 때는 정말 10분에서 20분 정도 평소보다 더 늦을 뿐인데도 매번 저에게 미리 말해준다. 어디 가지 않는데도 매번 메시지를 제시간에 맞춰 보내는 백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뿐이었다. 하지만 늘 이렇게 평온한 시간 때 불행이 닥쳐온다. 혜진과 함께 12구역에서 힘들었지만 둘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다. 그녀가 그렇게 빨리 저를 떠날 줄 몰랐지만.









잡생각을 떨쳐내고자 서재에서 나온 경수는 발걸음을 주방으로 옮겼다. 복잡 복잡한 게 싫은 백현은 저와 사이가 그나마 나아진 뒤로부터 집 앞에 있는 경호원 몇 명과 집안에 가정부 이모님을 딱 한 명만 남겨두었다. 원체 사람 많은 걸 싫어했었던 터라, 백현이 사람들을 물린 뒤에야 집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아마 저를 위한 배려였을 거다. 






주방에는 늘 한결같이 저녁을 준비하고 계시는 이모님이 계셨다. 낯을 워낙 가리는 터라 다른 사람들과 쉬이 말을 못하는 성격인데, 쾌활한 이모님 덕분에 그녀와는 쉽게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어머, 경수군 벌써 나왔어요? 변전무님 오시려면 조금 더 걸리지 않나?"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던 손들이 멈추고, 경수를 바라보며 말을 걸어오는 이모님은 자신이 음식 준비가 늦었나 싶어 벽에 걸린 시계를 한번 보시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가정부를 보고 경수는 자신도 모르게 이 조용한 평화안에서 작게 미소가 걸렸다.





"아뇨. 변전무님 아주 조금 늦으신대요."





"아휴. 나는 또 시간이 벌써 다 된 줄 알았죠. 아니, 근데 경수군 웃는 얼굴 요즘 부쩍 자주 보이는 거 같아."





"제가요?"




"그럼요! 보기 좋아요. 몇 개월 전만 해도 훤칠한 얼굴이 매번 어두워서 걱정 많이 했었어요. 그래도 근래 밝아진 거 같아서 좋네요."




그녀의 쾌활함에 경수는 못 말린다는 듯 머리를 작게 절레절레 치면서 '그냥 물 한잔 마시러 나왔어요.' 가볍게 대답해주었다. 









물을 마시고 거실로 가서 백현을 기다려볼까 하는 찰나에 도어락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늦는다면서, 평소보다 이른데 싶었다. 놀라게 해 주려고 저에게 작은 거짓말을 했나 싶어, 경수는 역으로 놀라게 해 줘야지 하고 키 번호를 그가 먼저 다 치기 전에 도어락 문을 열어주었다. 










"왔어요?"









환한 얼굴로 문을 열며 백현을 마주하러 고개를 든 순간 경수의 몸은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데 변전무 집에서 나오지?"

















눈이 마주친 건 다름아닌, 눈을 내리 깔으며 저를 바라보고 있는 변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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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할 말이 없네요 ㅠㅠㅠ

새편을 가져오는데만 벌써 템포와 럽샷이 나왔네여 ^-^;;

ㅠㅠ 정말 다음부터는 빨리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ㅠㅠ 

그리고 드디어 과거가 펼쳐질거에요. 질질 끌어서 죄송합니다.

늦었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2018년도 하루도 채 남지 않았네요. 한 해 너무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겨울이 되시길 바랄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0<


-- 추가

+네. 염치없는 펭브입니다.ㅎㅎ 다시 읽으면서 정말 오타가 말도 안되게 많더군요.ㅠㅠ 혹시 읽으실때 발견하시면 꼭 피드백 남겨주세여.ㅠㅠㅠ 흑흑 3개월이 지난 지금 너무 민망하네요.ㅠㅠ


++ 대사수정을 좀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없던 대사들이 좀 많이 추가 됐어요. 수정전이나 수정후의 스토리 맥락은 같으니 별 탈 없으실 거에요!












구. w은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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