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길을 한참이나 달려 도착한 섬엔 정말로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30분이면 한 바퀴를 다 도는 작은 섬은 산 중턱에 크게 지어진 펜션만이 유일하게 사람 손을 탔다. 인터넷은커녕 안테나도 터지지 않는 탓에 수도나 전기가 정상 작동하는 게 오히려 기적 같았다. 몇 달 묵은 먼지를 죄 청소하는 데에 이틀을 소모하고 나자 태원은 할 일이라곤 없어졌다. 부엌 장에 묵은 쌀이나 유통기한이 한두 달 남은 인스턴트, 통조림 몇이 있었지만, 며칠 가지 않을 양이었다. 태원은 온종일 그림 같은 풍경을 창밖으로 내다보다가 조금 걷고, 금방 지는 노을을 봤다. 매일 똑같고 따분한 하루는 하루가 이틀 같았다가 사흘 같았다가 나중엔 나흘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 감각이 없어진 건 휴대폰이 꺼져버린 이후였다. 휴대폰만 있었지 충전기는 없었던 탓이다. 첫날 어디 한 군데라도 터지지 않을까 핸드폰을 들고 온 섬을 다 돌아다녔던 게 뒤늦게 후회스러웠다.


펜션의 음식이 떨어져 갈수록 불안함은 커졌다. 누구도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에서 '숨는다'는 더이상 능동형이 될 수 없었다. 누군가 와줄까. 와준다면 누굴까. 태원이 저도 모르게 고은을 떠올렸다가 머리를 저었다. 생각만이라도 긍정적으로 해야 해. 서진일까. 태원은 서진이 했던 말을 복기했다. '빈대 붙었다', '포기해라' 하던 말들이 말단 신경을 찌르는 듯했다. 남이 보는 내가 그랬구나 하면서도 다시 고개를 저었다. 기철이 올 리는 없을 것 같으니까 남는 건 강뿐이었다. 이강. 달랑 두 자는 떠올렸다는 이유만으로도 코가 시큰거렸다. 연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연인 비슷한 것조차 아니었던 관계. 기철과 뭘 어쩌건 일말 신경 쓰지 않던 태도와 병원에서 나눈 고작 몇 마디 말들이 대립했다.


"진짜……."


좋아하는데. 입술을 말아 물고 하는 고백만큼 부질없는 게 또 없었다. 강이 보고 싶었다. 3년 전 그때처럼 기적같이 나타나 주길 바랐다.







사 년 전 한겨울, 아홉수의 태원은 끌려 나오다시피 한 클럽에서 만취한 상태로 화장실을 찾았었다. 소변기 앞에 서서 부르르 떨고도 알딸딸한 기운을 이기지 못해 세면대까지 가는 내내 비척거렸다. 물을 틀어놓고 멍하니 수도꼭지만 보고 있는데 옆에 선 놈이 담배를 뻑뻑 피워다 세면대를 재떨이로 썼다.


"저기요. 화장실은 긍연구역이거드요."


태원이 구시렁거리며 말하자 옆에서 담배꽁초가 날아들었다. 허리 꺾인 담배가 태원의 뺨을 강타하고 물 낭비 중인 세면대로 골인했다.


"어쩌라고."


태원이 따끔한 고개를 휙 들어 남자를 노려봤다. 남자는 또 새 담배를 물고 있었다. 분명히 노려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광대가 올라갔다.


"불공평하게. 골촌데 잘생겼네."

"뭐가 불공평한데."

"다요. 잘생겼고. 키도 크고. 담배 피우는데. 잘생겼고. 아니 근데. 언제 봤다고 반말이에요. 잘생기면 다 형이야?"

 "뭐?"


남자가 미간을 좁히며 되묻는데도 태원은 실실 웃었다.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장초 걸친 손에서 시선이 떠나질 않았다. 잘생긴 놈은 손도 잘생겼네. 불공평하네.


"너 게이냐?"

"게이 아닌데. 여자친구한테 차인 건데. 남자친구,"


아닌데. 말이 목구멍 속으로 도로 욱여넣어졌다. 남자의 혀가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온 입속을 핥아먹었다. 아직도 남자의 손에서 혼자 타고 있는 담배 냄새가 입속으로 옮아 배고 있었다. 기침이 날 것 같아 차라리 숨을 참았다. 그 와중에 키스는 잘하는 게 또 불공평했다. 아래로 피가 확 쏠렸다. 게이도 아닌데 남자랑 한 키스 때문에 발기한 게 쪽팔렸다. 방금 싸고 왔는데도 소변이 마려웠다.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리자 무방비한 가슴이 한 움큼 잡혔다. 남자는 꼭 여자애랑 키스하는 것처럼 태원의 가슴을 주무르다 젖꼭지 위로 손끝을 긁으며 지나갔다.


"아읏,"


이상하고 높은 목소리가 절로 튀어나와 당황했지만 그제야 놈에게서 해방될 수 있었다. 참고 있던 기침이 뒤늦게 터졌다. 콜록거리는 사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기침 때문이다. 절대로 기침 때문에 그런 거다.


"필요한 일 생기면 연락해."


남자는 태원이 기침하는 사이 영수증 뒤편에 전화번호를 써 바지 앞주머니 깊이 꽂아주고 미련 없이 떠났다. 발기한 게 들켰을까? 굳이 바지 속까지 침입하고 간 이유가 뭘까. 묘한 불안감을 지우지 못하고 영수증을 펴봤다. 명품 매장 영수증 아래 숫자가 휘갈겨져 있었다.


[010-xxxx-xxxx]







강을 다시 만난 건 한참 지난 한강 다리에서였다.


"거기서 뭐 하냐."

"자살 기도요. 구경났어요? 갈 길 가요."

"왜 죽으려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재수가 없으려니까. 태원이 강을 노려보며 목에 밧줄을 걸었다.


"빚 있어요. 취직 안 되고, 알바도 잘렸고, 여친한테도 차였고. 장기도 얼마 안 한다 그러고, 여자도 아니라 몸도 못 팔아요. 일용직은…,"

"연락하라 했잖아."

"미쳤다고 해요? 아무튼 갈 길 가시라고요."

"왜 못해. 자살하는 마당에. 하던 거 계속해. 내가 보고 있으면 못 죽는 것도 아니잖아."

"쪽팔리니까 가요 진짜."

"구라치네."


강이 훌쩍 다가와 태원의 옆에 섰다.


"너 쪽팔리면 발기하잖아."

"뭐, 뭐라고……. ……너? 야 너 몇 살인데 자꾸 반말해."

"스물여섯."

"내가, 내가 너보다,"

"너 지금 섰지?"


태원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굳어버렸다. 개또라이한테 잘못 걸려도 한참 잘못 걸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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