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여름 밤의 꿈




배부르게 저녁까지 먹었는데도 뭔가 아쉬웠다. 괜히 냉장고 문이나 부엌 찬장을 여닫는 백현을 본 신선이 리모컨으로 TV 볼륨을 줄이며 물었다.


“왜 허기져?”

“그런 건 아닌데…. 입이 심심해요.”

“맥주 한 캔 할래?”

“있어요?”

“사와야 해.”


얼마 전에 처음으로 맥주 맛을 본 신선은 이제 자연스레 1일 1캔을 실천하시는 중이었다. 이것저것 먹어보더니 자기 취향은 흑맥주라며 기네스를 고르는 게 제법 모양새가 났다.


“나가기는 좀 귀찮지 않아요?”

“그럼 내가 사다 줘?”

“길도 잘 모르잖아요. 그냥 같이 가요.”

“이제 길 잘 외우는데….”

“또 미아 신고하러 파출소 가고 싶지 않아요. 얼른 가요.”


지난주 혼자 저녁 장을 보러 다녀온다고 집을 나선 신선이 세 시간이 넘도록 오지 않아 눈물 콧물 다 빼며 파출소에서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파출소 순경이 실종자 이름을 말하라는데 이름을 몰라 더 서러웠던 건 비밀이었다.



* * *



맥주를 사러 다녀오는 길이 더웠던 둘은 돌아오자마자 후다닥 에어컨을 틀었다. 분명 첫날만 해도 가만히 있으면 안 덥다는 다 늙은 소리를 하던 신선은 어디 가고 이제는 에어컨 없으면 죽겠다는 소리를 하시는지 참. 집 바로 앞 편의점을 다녀온 건데 땀이 도로 난 두 사람은 결국 다시 냉수마찰을 하고 밥상을 폈다. 마주 보고 앉은 둘은 연신 머그잔을 부딪치며 짠을 외쳤다.



찬열이 신기하다고 산 감자전 믹스로 만든 바싹한 감자전에 싸게 파는 청포도까지 제법 괜찮은 안주상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막걸리도 함께였다. 예전에 인간일 때 먹던 술이라며 찬열이 집어 든 탓이었다. 원래도 술이 약한 백현은 막걸리 석 잔에 벌써 헤실거리며 실없이 웃기 시작했다. 곧 밥상에 머리를 박을 꼴이라 얼씨구, 혀를 찬 신선이 백현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내가 치울 테니까 얼른 양치하고 와. 자자.”

“자요?”

“응. 너 이러다 얼굴 박고 잠들겠어.”

“그쪽은 괜찮, 아니 잠깐. 생각해보니까 왜 이름 안 알려줘요?”

“…이름 벌써 알려줬어.”

“나 들은 적 없는데….”

“기억날 때가 되면 기억날 거야. 얼른 씻고 와.”

“치- 좋아하는 사람 이름도 모르는 거 너무 억울해.”



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입술을 비죽 내민 백현이 툴툴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뒤에서 남자가 그런 백현을 사랑스럽다는 듯 웃고 있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 * *



상쾌한 치약 향을 폴폴 풍기며 백현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에어컨 온도를 맞춘 신선이 자연스레 웃옷을 벗어 의자에 걸어두었다. 잘 때면 열이 더 올라서 옷을 벗는 게 편하다는 이유였다. 남자의 무게 만큼 침대가 움직였다. 양치하고 나와 정신이 조금 든 건지 백현이 남자를 향해 돌아누웠다.



생각해보니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종종 ‘내가 인간일 때는’이라는 말을 했는데 대체 어떻게 해서 신선이 된 건지도, 같이 산 지 한 달이 넘어가는데도 여즉 알려주지 않는 이름까지도. 백현이 저를 향해 돌아눕자, 남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잠을 쫓으려는지 순한 눈을 부릅뜬 모양새가 귀여웠다. 이렇게 계속 가까이에서 마주 보고 있다가는 입이라도 맞출 것 같아 신선은 제 몸을 조금 뒤로 물렀다. 그 물러난 만큼 백현이 데굴 굴러 남자의 품에 가까이 다가왔다.



“백구 왜-”

“저 물어볼 거 있어요.”

“좀 뒤로 가서 물어봐도 되지 않아?”

“으응- 여기서 말할래. 그쪽은 어떻게 신선이 됐어요?”

“왜, 나 같은 놈도 신선 되는 게 신기해?”

“아뇨오- 그냥 신기하잖아요. 실제로 신선이 있다는 거두. 저야 신선씨랑 같이 살다 보니까 믿어지는 거지. 처음 계곡에서는 술 취해서 헛것 보는 줄 알았다니까요.”

“음 요새는 사람들이 종교로 다 빠지니까 신선 믿는 사람이 적잖아. 그러니까 버티는 신선이 드물긴 하지. 적당한 비유인지는 모르겠는데, 결국 종교 같은 것도 다 장사거든. 요즘은 신선은 장사가 안되어서 많이 없어. 다 잡귀가 되거나 인간처럼 살지. 근데 내가 인간으로 죽을 때는 아니었어. 그땐 뭐 뒷산 신선이 제일이었거든. 그래서 뭐가 되고 싶냔 옥황상제 말에 냉큼 신선이 되고 싶다고 했지. 뭐.”

“그 얘기 더 해주면 안 돼요?”

“눈이 벌써 반쯤 감겼으면서 내 얘기 기억이나 하려고?”

“안 자는데-”

“그래 뭐, 애 하나 달래서 재운다 생각하고 말해줄게.”

“으응-”



옅은 숨을 내뱉으며 백현이 찬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조금 머뭇거리던 찬열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5. 홍연 (紅聯)




내가 인간으로 살 때의 첫 기억은 여섯 살쯤이었어. 찬열은 이미 느리게 깜빡거리는 백현의 눈꺼풀에 피식 웃곤, 그의 뺨을 살그마니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 듣다 잠들어서 하나도 기억 안 난다고 해도 다시는 말 안 해줄 거야. 서늘한 찬열의 손의 느낌이 좋은지 백현이 제 뺨을 더욱 비비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찬열의 첫 기억은 어느 초가집에서 시작되었다. 이제야 막 어린이가 된 찬열에게 어미는 두툼한 누빔 옷을 챙겨주며 한참 울기 시작했다. 어린 찬열도 알고 있었다. 눈치껏 들리는 말로는 저도 형처럼 이제 일을 시작할 나이가 된 참이었다. 3년 전에 일하러 간다며 떠난 제 형이 그 후로 집에 오질 못했으니, 아마 제게도 어미의 손길은 오늘이 마지막일 터였다. 어젯밤 아부지랑 약속한 것처럼 엄마 앞에서 울지 않기로 한 찬열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눈물을 히끅거렸다. 암만 어른스러운 체해도 열 한 살 조무래기는 애였다.



“그래두, 아가 변 대감네 어르신들은 머슴 놈들에게도 잘해주시고 따수운 방도 내어주신다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눈에만 안 띄게 빠릿빠릿하게만 굴어. 응?”

“…끅! 네. 어무니.”



어미의 따뜻한 품에 마지막으로 폭 안긴 찬열이 마당에서 담배를 말아 피고 있던 아비의 거친 손을 붙잡았다. 저도 아마 가정을 꾸릴 나이가 되면 아비처럼 이리 아침저녁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십여 년만 버티면 될 일이었다. 아비도 마음이 착잡한 모양이었다. 본인이 상놈만 아니었어도 금쪽같은 아들 둘을 머슴살이 안 시켜도 되었는데, 아무리 아등바등 살아도 신분은 어찌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 * *



소문대로 변 대감의 식구들은 모두 상냥했다. 다른 집처럼 매질하지도, 밥을 굶기지도 않았다. 어린 찬열은 가끔 어미가 보고 싶어 밤마다 숨죽여 울었다. 낮이면 다시 말간 얼굴로 열심히 일을 배웠다. 얼른 일을 잘하게 되어 외출을 허락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7살이 되던 해에 변 대감의 막내아들이 지내는 별채에서 일하라는 명령을 듣게 되었다.



같은 해에 들어온 덕규는 안방마님의 안채로 가게 되었다고 들었다.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깐깐하기로 유명한 마님의 안채라니. 다들 덕규를 위로하기 바빴다. 같이 일하던 친구들도 각각 맡게 된 사람이 달라 이제 얼굴 보기가 어려울 터였다. 다들 아쉬운 인사를 하며 방에 있는 조촐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찬열은 6년간 변 대감의 기와집 아래 살며 막내 도련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또래보다 체격이 좋고, 운동신경이 뛰어난 찬열이 주로 맡은 일은 변 대감의 말을 다루거나, 사냥을 돕는 일이었다. 사냥을 도우러 들에 나가는 날이면 찬열은 설레임에 잠 못 들기도 했다. 꿩을 몰기 위해 산을, 들을 뛰어다니면 허파 가득 들어오는 시린 공기가 가슴 벅차기까지 했다. 다음 생에는 바람으로 태어나 어디에도 묶이지 않고 세상을 누리고만 싶었다.



변 대감의 다섯 아들 중 네 아들은 늘 사냥에 함께였다. 그래서 늘 막내 도련님이 궁금했다. 이리 좋은 사냥에도 나오지 않는 그 도련님이. 기와 아래 떠도는 소문으로는 죽을병에 걸렸다던데 소문이 진짜일지도 궁금했다. 착한 주인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찬열은 짐을 담은 낡은 보자기를 꽉 매듭지었다.



별채에 오게 된 날은 볕이 좋은 초봄이었다. 완연한 봄처럼 따뜻하진 않았지만, 얼마 전까지 시리던 공기가 제법 포근해진 참이었다. 막내 도련님은 외출이 잦지 않아 거느리고 있는 하인도 몇 되지 않았다. 다른 별채는 종놈 서너 명이 한 방을 나눠 써야 했는데, 찬열은 작지만 오롯한 개인 방을 가지게 되었다. 찬열은 그 작은 방에 보자기의 짐을 풀어 옷을 한쪽에 정리하며 자신은 운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별채의 마당은 사랑채나 대청마루 쪽 마당의 반절 정도 되는 크기였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빗자루를 잡아든 찬열이 솔잎이 떨어진 마당을 쓸어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큰 마당보다는 꽃이 많았다. 이제 봄이라고 막 몽우리를 틔우는 목련을 보니 찬열의 마음도 두근거렸다.



“너니?”

“예?”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찬열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목련 몽우리만큼이나 보드라운 목소리였다. 연보라색 도포를 입은 사내, 아니 소년과 청년의 사이에 선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귀한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은 사내는 아마도 제가 모실 막내 도련님이리라.



“이번에 새로 나랑 지내게 되었다는 종 녀석이 너냔 말이다.”

“예, 도련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름이 무어야?”

“박가의 찬열입니다.”

“이름이 예쁘구나. 나는 백현이다. 내 별채에 와주어 고맙구나.”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사륵 접히는 도련님의 눈에 찬열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봐서는 안 되는 걸 본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 * *



둘은 또래였다. 찬열이 백현보다 반년 정도 늦게 태어났지만, 어렸을 적 크게 아팠던 백현은 찬열에 비해 작기만 했다. 왜 온 집안사람들이 곧 성인이 되는 백현에게 아직 아기 도련님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본인은 의젓해 보이고 싶어 말은 안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입술을 비죽 내밀고 눈을 시무룩하게 내리까는 모습을 보면 찬열은 마음이 간질거렸다. 토라진 백현을 달래면 너밖에 없단 말로 자꾸 찬열을 욕심나게 했다.



백현은 그런 찬열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더 그를 찾았다. 몸이 좋지 않아 탕약을 먹어야 할 때도 찬열의 손을 꾹 잡고 들이켰고, 저잣거리를 놀러 나갈 때도 꼭 찬열과 함께 나갔다. 찬열이 사냥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저도 변 대감의 꿩사냥에 따라갔다가 단단히 고뿔에 걸려 열흘 넘게 고생한 적도 있었다.



그럴수록 찬열은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도련님도 나를 좋아하겠구나. 하는 그런 확신이었다. 찬열이 다른 종들과 이야기라도 하면, 그날은 온종일 찬열에게 투덜거리며 솜방망이 같은 주먹을 들어 찬열을 툭툭 건드리기도 했다. 악몽을 꾼다는 이유로 찬열을 제 방에 불러 함께 자면 안 되냐 칭얼거리는 일도 잦았다. 그때마다 찬열은 난감하면서도 스멀스멀 지어지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악몽을 꾼다는 막냇동생의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백현의 둘째 형님이 자수를 놓을 수 있는 도구를 선물해주었다. 자수는 여자만 하는 거 아니냔 백현 어미의 핀잔도 있었지만, 잠이 오지 않을 때 가만히 자수를 두면 잡념이 사라지니 좋을 거란 말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찬열아, 그거 아니.”


빨간 실로 모란을 수 놓던 백현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어떤 거요, 도련님?”

“큰 형님이 그러셨는데, 운명인 사람들은 새끼손가락에 빨간 실이 묶여 있고, 그게 이어져 있대. 그래서 어딜 가나 알 수 있대.”

백현이 자수 놓는 걸 돕던 찬열이 물끄러미 제 새끼손가락을 내려다봤다. 투박한 제 손은 멀끔하기만 했다.

“저는 짝이 없나 봅니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아무런 실이 없습니다. 밋밋하기만 합니다.”

“…왜 그리 못된 말만 하는 게야.”

“예?”

“맨날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다 알면서 예? 예? 거리면서 모른 척이나 하구 말이야. 정말 너같이 약은 종놈이랑 이리 어울리는 걸 감사히 여겨라~”



장난스럽게 툴툴거리는 백현이 바늘을 잠시 내려두고 손가락을 꼼실거렸다. 찬열은 그가 내뱉는 숨에 맞춰 흔들리는 등잔이 꺼지지 않도록 손을 들어 벽을 세웠다. 다 됐다. 작게 외친 백현이 붉은 실을 찬열에게 내보였다. 붉은 실의 양쪽 끝엔 둥그렇게 고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걸 이렇게 네 손가락이랑…. 내 손가락에 끼우면, 봐라. 이제 밋밋하지 않지?”

“…도련님. 제게 이리 잘해주시면 저는….”



찬열이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도련님이 저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건 이 사회의 통념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마음이었고, 또 저와 달리 백현은 잃을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애써 모른 척해 온 것도 있었다. 찬열의 주저하는 말에 백현의 눈에 눈물이 핑 고였다.



“싫어- 너도 같지 않느냐, 응?”

“저야 잃은 것 없는 천한 것이니 괜찮습니다. 오히려 도련님을 마음에 품은 것이 불경한 일이고 큰 욕심이지요. 도련님께서 저를, 어쩌면 그냥 착각이실지도-”



횡설수설하는 찬열의 이어질 말을 부정하듯 백현은 작게 고개를 젓고 찬열의 어깨를 잡은 채 제 입술을 맞댔다. 조용히 감긴 눈꺼풀 아래로 눈물이 흘렀다. 말간 뺨을 따라 흐른 눈물이 뚝, 찬열의 바지 위로 떨어졌다.



“착각이 아니야. 찬열아 나는 태어나기를 허파가 약해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했던 애였다. 용하다는 의원이 아무리 약을 지어주어도 살 이유를 못 찾아 아버지 어머니 몰래 약을 버리곤 했던 나였단 말이다. 그런데 너를 만나고 내 이렇게 너의 손을 잡고 꾹 참으며 살아가지 않느냐?. 착각이… 절대 아니란 말이다. 응?”



찬열은 제 새끼손가락에 엮인 붉은 실을 내려다보고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붉은 실의 고리가 풀리지 않게. 그리곤 그대로 백현을 끌어안으며 더 깊게 입을 맞췄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밤이었다.

찬백아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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