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카아무 전력 60분 참여했습니다. 주제는 '하루를 마치며' 입니다.

- 아카이 슈이치 X 후루야 레이

- 퇴고를 거치지 않은 글입니다. 

 

 

 

 

 


 

끝은 생각보다 허무했고 또 평범했다. 반쯤 무너진 건물과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두 대의 헬리콥터, 그리고 아직 걷히지 않은 잿빛 연기를 제 주변에 두었을 때, 후루야 레이는 딱 그렇게 생각했다. 허무하고, 또 평범하다고.

무언가 굉장한 보람이나 대단한 희열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공허함을 바란 것 또한 아니었으므로. 후루야는 흙투성이가 된 와이셔츠를 두 손으로 털었다. 탁, 탁, 하는 투박한 소리가 몸을 타고 올라와 귓바퀴를 돌았다.

전부 끝이었다. 수년 간 쫓던 조직에 마침표를 박은 것이다. 아니, 아니었다. 후루야가 마침표를 찍은 것은 조직의 핵심이었다. 중심을 잃은 채 어쩔 줄 몰라 폭주하려 드는 피라미들에게는 손도 대지 못했다. 이른바, 잔당처리가 남아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부터 시작일지도 몰랐다. 잔당 하나하나에 들이는 노력과 시간은 수년 간 긴장을 쏟아 부었던 것에 비하면 한 줌도 채 되지 않겠지만 문제는 수였다. 조직의 손이 어디에까지, 또 얼마나 뻗쳤는지 지금 파악하고 있는 것만 해도 너무 많고, 너무 넓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후루야는 곧 쓰러질 것 같은 건물을 빠져나가기 위해 계단을 찾았다.

 

“아무로 군.”

 

그 때였다. 후루야가 긴장을 놓고 있던 시야에 한 남성이 불쑥 다리를 뻗었다. 후루야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남자를 힐끗 보더니, 조금 미소 지었다. 왜 그를 보고 웃음부터 나왔는지 후루야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우습게도 정情 같은 것이 생긴 것인지도 몰랐다.

 

“같이 내려갈까요. 아카이.”

 

우습게도.

 



 

   Beer, Cheers and Weird

 w. 비에

 



 

아카이를 비롯한 FBI가 일본 경찰과 합동수사팀을 꾸리고 조직을 괴멸시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기쁨에 취할 새도 없이 잔당 체포에 들어갔다. 후루야 레이를 중심으로 시작한 새로운 수사는, 그의 오랜 잠입 경험 덕분에 대체로 막힘없이 진행되었지만 많은 수와 넓은 범위 탓에 상당히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그 증거로 아카이는 벌써 1년 째 잔당 처리를 위해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일본을 오고가는 바쁜 몸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시작은 후루야가 그에게 미국과 캐나다의 잔당 처리를 맡긴 것에서였다. 달리 거절할 이유도 없었으므로 아카이는 흔쾌히 알겠노라 했다.

이후로 석 달은 넓은 대륙을 돌아다니며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잔챙이들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아카이는 다시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예약하고, 몸을 실어, 일본 땅을 밟았다.

일본에 남아 있던 상사와 동료들이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카이는 자신의 방문이 그리 놀랄 일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차피 그들의 반응 따위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따로 있었으므로.

 

‘… 아카이? 왜 여기 있습니까?’

 

회의실에서 막 나온 후루야는 여전히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주위에 선 험상궂은 얼굴들이 한껏 미간을 찌푸리며 아카이를 노려보았다. 합동수사팀을 꾸리고 정보를 공유한 지 반 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타국의 수사기관 및 요원을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후루야의 놀란 눈이 방금 전 자신을 바라보던 동료들의 눈과 같았다. 아카이는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있으면 이상한 사람임을.

그들, 그리고 후루야의 눈이 말하는 것은 ‘미국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일본에 있느냐.’ 였다. 일본에서는 그가 할 일도 없는데.

아카이는 이 방문도 일이 아니라 사적으로 온 것임을 깨달았다. 석 달 간 고생한 포상으로 받은 휴가를 써서 온 것이었다. 물론 비행기도 사비로 예약했다. 너무 피곤해 홀린 듯 예약한 것을 떠올린 아카이는 돌연, 가슴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 일본에 왔느냐고?

 

‘… 아직 여기에 가족도 있고,’

 

내가 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겠어.

 

‘자네도 있으니까.’

 

과정은 험난했지만 소용돌이 속에서 도출된 결론은 간단했다. 모든 문제가 으레 그렇듯 결론 자체는 아주 심플한 법이었다. 우습게도 그랬다.

아카이는 후루야의 뒤에 선 부하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것을 훑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법 고백으로 들릴 법도 했으므로 그의 부하들의 눈이 한층 더 날카로워지는 것도 당연했다. 어쩌면 후루야의 얼굴도 곧 일그러질지도 모른다. 아카이는 그런 것까지 전부 포함해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 같은 남자가 무슨. 약한 척 하지 마세요. 나 없이도 잘 하잖아요.’

 

아카이와 부하들의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하얀 물음표가 한 개씩 떠올랐다. 아카이의 머리 위로 솟은 물음표는 곧 빨간 느낌표로 바뀌었다. 부하들의 물음표는 여전히, 물음표인 채였다.

그래. 너는 그런 남자였지. 서툴고, 서툴러서 아주 귀여운 남자. 그렇게 말하면 이번에야말로 그 단정한 얼굴이 먹구름 낀 하늘처럼 잔뜩 일그러질 것 같아, 아카이는 말을 꿀꺽 삼켰다.

 

‘안타깝게도 나는 리더 자리가 성격 상 맞지 않아서 말이야. 자네 지휘를 따르는 게 편하기도 했고.’

‘그렇게 일에 쫓기고 싶은 줄은 몰랐는데요. 좋습니다. 안 그래도 인력 부족으로 허덕였는데 좋네요.’

 

그렇게 아카이는 미국과 캐나다, 일본 3개국을 오고가는 몸이 되었다.

 

“슈. 너는 며칠에 출발할 거야?”

“…… 마지막 날.”

“Ok.”

 

아카이의 업무 진행 상황을 감시도 할 겸, 그의 데스크로 다가온 조디가 아카이의 귀국예정일을 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태블릿PC와 펜이 들려있었다. 보름 전 본부로부터 떨어진 귀국명령에 따라 일본에 체재해있는 요원들의 귀국일을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처음, 책임자인 제임스로부터 귀국명령을 들었을 때 FBI 요원들은 드디어 집에 돌아갈 수 있겠다며 환호했다. 아직 일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누가 보면 꼭 모든 일을 끝낸 사람들 같았다.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너무 좋아 훌쩍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카이로서는 귀국명령이라는 것이 그리 기쁜 소식은 아니었다. 미국에 가도 반길 가족이 없다던가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그런 애정어리고 평범한 따뜻함이라는 것에 큰 감동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므로.

후루야 레이가 아직 이곳에 있다. 그리고 그는 평생 이곳을 떠나지 않을 터다. 그 사실 하나가 귀국명령을 달갑지 않게 만들었다. 일부러 일을 더 늘리면서까지 3개의 나라를 오고 간 보람도 며칠 뒤면 맛볼 수 없는 것이다.

 

“자. 잠깐 주목.”

 

권태감에 빠진 사람처럼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왼손으로 펜을 돌리고 있던 아카이의 뒤로 제임스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는 박수를 두 번 쳐, 요원들이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했다. 그는 평소에 늘 깔고 있는 사람 좋은 웃음을 한 채 귀국명령 만큼이나 좋은 소식을 전했다.

 

“오늘 저녁, 일본 경찰 측에서 우리를 위한 회식을 주최한다고 한다. 달리 일정이 없는 이들은 참석하면 좋겠군. 일본의 우수한 경찰들과 사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테니까.”

 

그는 다시 손뼉을 한 번 쳐서, 전달사항은 이걸로 끝이니 이제 각자 할 일을 재개하라는 말을 대신했다. 요원들의 얼굴이 귀국명령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밝아졌다.

그러고 보니 아카이가 캐나다에서 수사를 진행하고 있을 때, 공안에서 주최한 회식에 간 적이 있다고 했다. 아카이가 들은 바에 따르면, 굉장히 즐겁고 유익해서 2차까지 있었던 자리가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했다.

 

“아. 그래서 아까 그들 표정이 환했던 거군요.”

 

방금 전까지 공안경찰이 있는 층에서 회의 준비를 하고 왔던 조디가 제임스에게 말을 얹었다.

 

“우리도 그랬지만, 요즘 들어 그들도 집에 못 들어간 지 꽤 됐으니까 말이야. 간만에 정시 퇴근에 회식이라고 하니 숨 쉴 틈이 생긴 거겠지.”

“가끔 그런 시간도 필요하니까요.”

“후루야 경시가 제 자식들 바라보는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던 거, 자네도 봤으면 웃었을 거야.”

“그 후루야가요? 후루야부터 시작해서, 그 집단은 의외로 큐트하다니까요.”

 

아니야, 조디. 그는 ‘의외로’ 라는 말을 붙일 필요도 없이 귀여워. 아카이는 펜을 돌리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려던 것도 그만두었다.

지금은 그녀의 평가를 지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회식. 이 기회를 놓치면 자신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함만이 묵직한 가슴을 더 짓누른다. 불만 가득한 한숨이 서류 위로 내려앉았다.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 줄도 모르고 내렸다. 해가 떨어질 때쯤 거세게 내렸으므로 사람들은 소나기인가보다, 하고 넘겼다. 아침 일기예보에 강수확률이 10% 미만이었던 것도 추측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소나기인줄 알았던 비는 밤하늘이 컴컴해지고 나서도 멈추지 않고 내렸다. 처음 내렸을 때처럼 거세지는 않았지만 한두 방울씩 창문을 톡, 톡, 하고 두드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아직 나는 그치지 않았음을.

아카이는 오후부터 붙잡고 있는 서류를 단 한 글자도 읽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싸인을 하거나 내용을 추가하지도 못했다. 오늘 하루 종일 정신이 어디 가 있는 거냐며 잔소리를 하는 조디의 목소리는 듣지도 않고 흘려버렸다.

20시 33분. 아카이의 데스크 위 컴퓨터 전원이 꺼지기 직전, 화면에 나타난 시간이었다. 일반 회사원보다는 늦은 퇴근 시간이었지만, 평소 출퇴근의 개념도 없이 본청에서 살다시피 하던 이들에게 있어서는 달콤한 퇴근이고, 꿈같은 시간이었다.

전에 없던 활력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동료가 콧노래까지 부르며 아카이의 어깨에 제 팔을 둘렀다. 아카이가 동료의 팔을 치워낼 요량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려던 찰나, 반대편에서 빠져나오는 경시청 공안부의 얼굴들이 보였다.

아카이에게 어깨동무를 걸고 있는 동료가 전의 회식에서 친해진 이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그 틈을 타 그의 애정 섞인 스킨십에서 빠져나온 아카이는 재빠르게 우락부락한 고릴라들 사이에서 제가 보고 싶은 얼굴을 찾으려 눈동자를 굴렸다.

없다. 그가 없다.

 

“카자미 군. 후루야 군은 어디에 있지?”

 

카자미가 뒤를 돌아 아카이와 마주했다. 여전히 각진 자세로 타국의 수사 요원을 대하는 모습이 후루야에게서 받은 교육의 결과를 알려주는 듯했다.

 

“아. 후루야 씨는 불참입니다. 원래 이런 자리에 잘,”

 

아카이는 건넸던 물음에 대한 답을 얻자마자 총알처럼 어딘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카자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달려가 그에게 뻗은 카자미의 팔만 민망하게 되었다.

 

“어, 슈! 어디 가! 회식은!!”

“안 가!”

“뭐어?!”

 

당황한 동료의 얼굴은 보려고도 하지 않고, 아카이는 달렸다.

 

 



 



불이 꺼진 사무실에서 후루야는 스탠드 불빛 하나에 자신의 시야를 의지한 채 펜을 움직였다. 제출 마감일은 아직 멀었지만 최대한 빨리 끝낼수록 좋았기 때문에 후루야는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 홀로 남기를 선택했다.

자신이 남아있는 것을 알면 부하들이 눈치를 볼까봐 퇴근하는 척 상냥함을 베풀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느냐는 카자미의 물음에 확실하게 그렇다고 대답까지 했으니, 지금쯤 모두 회식을 즐기고 있을 터다.

어차피 후루야는 좀처럼 회식에 참여하지 않는 타입이었으므로, 이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가 아니었더라도 그 자리에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카자미에게 대답한 것처럼 곧장 집으로 갔을지도 몰랐다.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라도 몇 캔 사들고 가 느긋하게 마시는 밤도 나쁘지 않았다.

맥주 생각을 하니, 갑자기 갈증이 일었다. 목구멍 끝이 따끔거리는 것이 꼭 흡혈 욕구를 폭발시키기 직전의 뱀파이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판타지적인 생각을 하며, 후루야는 속으로 혼자 웃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자신이 그런 영화 소재로나 쓰일 법한 상상을 진지하게 하고 있는 것도 우스웠고, 지금 이 밤 갈증을 느끼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그 남자라는 것도 우스웠다.

그 날, 후루야는 아카이와 함께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가 재빨리 폭발 예정인 건물을 특정하고 일반 시민을 대피시켰기 때문에, 모든 일이 끝난 뒤의 건물에는 두 사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후루야 혼자만 남아있어야 했던 건물이었다. 거기에 아카이 슈이치가 남아있는 것은, 정말이지 후루야의 예상 밖이었다.

아카이는 늘 후루야의 예상 범주 밖에 위치했다. 고려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종합하여 시뮬레이션한 뒤 도출한, 가능성이 높은 몇 개의 시나리오에 아카이의 이름을 적는 것은 고민이 되는 일이었다. 어디에, 그 이름을 적어야 하는지 늘 알 수 없었다.

후루야는 늘 제 예상 범주 밖에 서 있는 그가, 꼭 절벽 위의 꽃 같았다.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닿을 수조차 없는 절벽 위의 꽃, 그림의 떡. 그리고 나를 우습게 만드는 사람. 라이는, 그리고 아카이 슈이치는 후루야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평생 내 사람은 되지 않을 터다. 내 팔 안으로는 들어오려 하지 않을 터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남자는 항상 나의 예외이지 않았던가.

우습게도, 정말 우습게도.

 

“일 하자. 일.”

 

컴컴해진 밤하늘의 구름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 때문인지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올라갔다를 반복한다. 뒤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들리는 탓이었다. 비 오는 날은 감성적이게 된다더니, 정말 그랬다.

후루야는 한숨처럼 한 번을 웃고는 눈빛을 바꾸었다. 뾰족해진 눈꼬리가 곧장 아래를 향했다. 작은 글씨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서류 위로 펜을 미끄러뜨렸다.

그 때였다.

 

“… 아카이?”

 

스탠드 불빛이 미처 닿지 못한 곳에서 투박한 소리가 났다. 후루야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인영의 얼굴이 전부 비춰지기도 전에 눈앞의 남자를 아카이 슈이치로 특정했다. 아무리 시야가 자유롭지 못한 곳이라고 해도 후루야 자신이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리는 없는데, 이번에는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후루야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남자가 거의 유일했다.

아카이가 스탠드 불빛이 닿는 곳까지 오자, 후루야는 자신의 추측이 맞은 것이 뿌듯한지 조금 미소 지었다.

 

“오늘 같은 날도 열심히 하는군.”

“맥주입니까?”

 

편의점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봉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존재를 드러냈다. 반투명한 봉지 안에 본 적 있는 로고가 있었다. 맥주임이 틀림없었다.

아카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봉지 안에 들어 있던 맥주를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후루야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 편의점에 들어가자마자 사람들이 많이 사가는 것 위주로 집어 들었다. 계산대로 향하기 전 과자코너에서 맛있어 보이는 과자 몇 개를 함께 집어 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자미는 후루야가 회식에 불참한다고만 대답했으므로 그가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카이는 틀림없이 그가 아직도 청사에 남아 일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몇 가지 근거야 있었지만 솔직히 감으로 추측한 거나 다름없었다.

 

“어떤 거 마실래?”

“아. 저는 지금 좀 할 일이….”

 

맥주를 전부 늘어놓은 아카이가 이번에는 과자를 꺼내었다. 후루야가 책상 위 맥주와 서류더미에 번갈아 눈길을 주었다. 갈증이 일었다.

후루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서류더미 몇 개를 다른 책상으로 옮겨 아카이가 술상을 차릴 공간을 넓혀주었다. 그리고는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맥주부터 집어 들었다.

 

“과자도 사 왔네요.”

“안주가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좋네요.”

 

좋다. 더없이 짧은 감상이었지만, 그것만큼 지금의 기분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표현도 없을 터다. 후루야는 정갈했던 자세에서 허리에 힘을 빼고 몸을 늘어뜨렸다. 몸에는 좋지 않지만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였다.

캔을 따자 특유의 경쾌한 소리가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를 먹어치웠다. 아카이도 후루야를 따라 맥주를 따고, 엉덩이는 책상 위에 붙여 비스듬히 앉았다.

후루야는 의자를 돌려 아카이와 시선을 나란히 했다. 새까만 하늘과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토독, 토독, 한 방울씩 창문과 떨어져 표면을 미끄러졌다. 직선으로 떨어지지 않고 삐뚤빼뚤한 것이 꼭 주정뱅이가 비틀거리는 것 같았다.

 

“조용하네요.”

 

그의 말대로 사무실은 조용했다. 후루야가 꿀꺽꿀꺽 맥주를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주변은 조용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무無의 공간에 입장한 것도 같았다.

 

“원래 회식엔 잘 안 가나?”

 

고요함을 깬 것은 아카이였다. 후루야는 눈을 감으려다가 다시 힘을 주고 조금 웃었다.

 

“네. 부하들 노는 데에 상사가 끼는 것만큼 어색한 게 어디 있겠어요.”

“자네 부하들은 자네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거랑은 좀 다르죠.”

 

후루야는 입꼬리 끝에 쥐고 있던 긴장을 완전히 풀었는지, 자꾸만 웃었다. 아카이는 이 순간이 좋았다. 후루야가 제게만 기대오는 편안함 같은 것이, 아카이에게 더없는 오만함을 부여한다.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다. 하다못해 친구나 동료도 아니다. 그들의 관계는 이상했고 또 우습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아카이가 후루야에게 기울이는 호감도, 후루야가 아카이에게 느끼는 낯섦도 전부 우스운 일이다.

거세게 내리쳤던 빗방울이 이제는 창문을 두드리는 것이 고작이 된 것처럼, 모든 일은 시간이 흐르면 변하기 마련이다. 아카이는 과거의 관계가 현재에 이른 것처럼, 지금의 관계 또한 내일은 다를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기왕이면 좋은 방향으로. 기왕이면 우습지 않은 방향으로.

아니, 우스워도 좋으니 그저…. 네가 편해질 수 있는 방향으로.

 

“그러는 아카이는 왜 안 갔습니까?”

“자네 때문에.”

 

후루야의 입술이 삐죽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이번에 조금 미소 지은 것은 아카이였다.

 

“무슨… 제 탓 하지 마세요. 당신 귀국한다고 해서 요즘엔 이쪽 일도 안 맡기는데.”

“탓 하는 거 아니야.”

“… 뭐야. 싱겁긴.”

“하지만,”

 

한 캔을 모두 비운 후루야가 두 번째 캔을 집어 들 때였다. 아카이가 싱겁게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를 이으려는 듯 말을 더했다.

 

“자네가 이유가 되긴 했지.”

“나 때문이라는 거잖아.”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오자 후루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제임스로부터 FBI의 귀국을 들었을 때부터 아카이에게 주었던 일의 양을 줄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카이가 원했다고는 해도 너무 제 수족처럼 부려먹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으므로. 그는 제 무엇도 아닌데.

일을 줄인 것은 일종의 감사이기도 했다. 그동안 자신들의 사정에 맞춰 바쁘게 잘 움직여주었으니 남은 시간은 관광도 하면서 편하게 지내라는 배려였다. 솔직한 마음을 전하기에는 어색한 사이라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아카이 슈이치는 눈치가 빠른 남자니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그런데 회식을 못 간 게, 나 때문이라고? 후루야는 기껏 베푼 배려가 원망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짜증이 일었다.

 

“자네가 갔다면 나도 갔을 거야.”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후루야의 머리 위로 하얀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카이는 후루야가 지금까지의 맥락을 전혀 못 잡고 있음을 알았다. 서툴고 서투르기에 귀여웠지만, 역시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아카이는 이제 슬슬 후루야의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고 싶었다. 3일 뒤면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을지 몰랐으므로.

 

“내가 자넬 좋아해서.”

 

시작은 기억나지 않는다. 코드네임 하나로 모든 것을 꾸며냈을 때부터였는지도 모르고, 그 날 저녁 서로의 머리와 눈에 총구를 들이밀었을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건물에서 그를 찾기 위해 뛰어다녔던, 그래서 그의 이름을 불렀던 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시작은 기억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아카이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이었다. 그는 이미 후루야를 좋아하고 있었고, 앞으로의 관계에 무언가 그럴 듯한 이름을 붙여보는 것. 그의 관심사는 온통 거기에 꽂혀 있었다.

 

“그냥 좋아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뿐이야.”

 

후루야가 방전 직전의 로봇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아카이의 고백 대상이 자신이 아닌 이곳의 다른 누군가가 아닐까 확인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애초에 아카이가 ‘자네’라고 부르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아카이는 후루야의 반응이 예상 범위 내였기 때문에 순수하게 그 상황을 즐겼다. 다 마신 첫 번째 맥주 캔을 내려놓고 두 번째 캔을 들어 후루야가 들고 있는 캔에 가볍게 부딪쳤다.

 

“Cheers.”

 

마음 같아서는 귀여운 코끝을 깨물어주고, 화를 내면 입 맞춰 달래주고 싶었지만 부끄러움이 많은 후루야였으므로, 아카이는 다음 기회로 기대를 넘겼다.

 

“자넬 탓하지 않는다곤 했지만, 이건 말해야겠는데.”

“… 또 뭡니까.”

“난 엄청 티냈어.”

“뭐요? 언제!”

 

후루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줄곧. 자네가 둔해서 눈치 못 챘던 거지.”

 

단정한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목과 귀 끝까지 빨개진 것이 꽤 신선한 모습이라, 아카이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당황으로 물든 얼굴을 좀 더 감상하기로 했다.

 

“이게 지금 웃겨?! 웃기냐고, FBI!!”

“귀여워.”

“뭐, 뭐요? 당신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후루야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려 발뒤꿈치에 힘을 주었다. 아카이는 혹시라도 후루야가 넘어질까 허리에 손을 얹어 그를 받쳐주었다. 평소였다면 이런 스킨십조차 어색해서 당장 손 떼라며 난리를 쳤을 후루야가, 아카이의 귀엽다는 소리에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손을 쳐낼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럼. 좋아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해줄까?”

 

아카이는 후루야를 놀리는 데에 재미를 들린 모양이었다.

 

“싫, 싫어! 하지 마. 하지 말랬습니다, 아카이. 진짜 하지 마요.”

 

그가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아카이를 올려다보았다. 조금이라도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떼고 낯간지러운 소리를 뱉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협박이 푸른 눈동자 안에서 일렁였다. 경고를 하곤 앙 다문 입술이 협박에 힘을 더했다.

하지만 아카이는 어깨를 으쓱이기만 한다.

 

“좋아해.”

“… 무슨…!”

 

심장에서 나온 마음이 성대에서 소리를 얻어 입 밖으로 나왔다. 줄곧 갇혀 있던 마음이었던지라, 자유를 찾으니 기쁜 듯이 훨훨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아카이의 좋아한다는 말은 그의 입술이 다물리자마자 소리를 잃었지만 여전히 후루야의 귓바퀴에 앉아 있었다.

아, 그렇지. 아카이는 다시 한 번 더 사랑의 말을 준비했다. 아까처럼 이 말이 자신을 향한 말인 줄 몰라,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도록.

 

“자네를 좋아해, 후루야 군.”

 

스탠드의 불빛과, 바깥의 아주 희미한 불빛, 그리고 여전히 불규칙적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후루야는 아카이에게 허리가 잡힌 채 그의 얼굴과 마주한다. 분명히 두 눈동자는 사정없이 떨리고 있을 터다. 눈썹과 입꼬리는 또 얼마나 우스울까. 분명히 이상하고도 이상한 표정일 것이다.

 

“귀까지 빨개졌어. 이런 거 남한테 보이기 싫지?”

 

아카이가 한 손에 들려 있던 맥주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후루야의 두 번째 캔도 제 것 옆에 둔다.

그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후루야의 새빨개진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그 손으로 후루야의 팔을 끌어당겨 제 품에 가두듯 안았다. 힘없이 그대로 끌려간 후루야가 양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손가락 끝만 덜덜 떨고 있었다.

 

“… 그렇다고… 이런 자세일 필요가 있나요.”

“숨겨주는 거야.”

 

어찌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역시 아카이를 제 팔 안에 들이는 것은 무리였다. 이래서야, 반대이지 않은가. 그에게 아카이 슈이치라는 남자는 늘 예상 밖에 위치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늘 예외로 두었으므로, 이런 당혹스러운 상황이 처음은 아닐 터인데. 그런데, 어째서, 왜, 당신은….

 

“이 자세 들키는 게 더 싫어…. 놔요.”

“싫어.”

 

스스로 절벽을 벗어나 내 손 위로 떨어진 꽃이 되는가. 차원을 넘어 액자 밖으로 튀어나온 떡이 되는가.

 

“짜증나, 아카이 슈이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후루야는 웃었다. 담배 냄새와 섞인 향수 냄새에 안정을 느끼고, 뭐에 홀린 듯 자꾸만 웃음이 나서, 그래서 웃었다. 후루야가 제 머리를 아카이의 가슴팍에 기대었다. 어찌할 줄 모르던 두 손은 아카이의 등 뒤에 두르고, 와이셔츠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비가 그치고 하루가 온전히 저물면, 이 이상하고도 우스운 관계에 이름을 붙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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