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늦은 의외의 더위에 조금 진이 빠진 트찰라는 셔츠 단추를 전부 열어젖힌 채 창가의 책상 앞에 앉아 이따금씩 불어오는 가을의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손에는 연필을 들고 있었지만 특별히 뭔가를 그리려고 의도한 것은 아닌 듯, 종이 위에는 이런 저런 낙서들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그 각각의 낙서들이 사실은 그의 뮤즈의 일부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으리라. 에릭의 뾰족한 눈꼬리, 에릭의 동그란 뒷통수, 에릭의 어깨죽지와 팔.... 에릭은 이제 이 섬세하고 상냥한 화가의 손에서 무의식에 가깝게 그려질 정도로 화가의 전부가 되었다.

 

 

 

손 위에서 연필을 튕기듯 돌리던 트찰라가 또 불현 듯 종이 위에 무언가를 그려내는데,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트찰라는 그에게 전화를 걸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보았고, 직감 상 그다지 달갑지 않은 전화일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어쨌든 그는 몸을 일으켜 더위로 끈끈해진 목 뒤를 손을 미끄러트리듯 훔쳐내고 전화기 앞에 섰다.

 

 

 

“여보세요? ..... ....아뇨, 초대장은 잘 받았습니다. 다만 참석이 어려울 것 같아서... 네, 카버씨에게 그렇게 전해주시겠어요? 네, 그래요, ‘다시 한 번 더’요.”

 

 

 

트찰라의 짐작이 애석하게도 맞았다. 릭의 비서에게서 걸려온 전화로, 곧 있을 파티의 참석여부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릭의 비서가 초대장을 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직접 확인 전화까지 건 이유는, 이미 트찰라가 6차례나 초대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릭은 누가 봐도 인종차별주의자 그 자체였지만, 동시에 감각이 뛰어나고 셈이 빠른 사업가였다. 이 대도시는 그 사업가가 평생을 보내온 남부의 촌구석보다야 훨씬 인종문제에 관대했고, 부유한 흑인들도 훨씬 많은 곳이었다. 돈이라면야 흑이고 백이고 나발이고 가릴 이유가 없을 테니, 릭은 트찰라를 통해서 그들의 돈까지 손에 넣으려고 드는 참이었다. 물론 릭이 트찰라를 후원하기로 결정한 건 사적인 이유가 훨씬 컸을 테지만, 잇속이 밝은 그가 단 한 가지의 그 다소 충동적이었을 이유만으로 제 돈을 쓸 리는 없었다.

 

 

정말, 그 어떤 이유로도 트찰라는 그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잠시 트찰라는 그가 릭이 원하는 대로 파티에 참석해 뻔뻔하게 거들먹거리는 그 작자의 옆에 서서 맘에도 없는 웃음을 쥐어짜내는 자신을 상상하고 저도 모르게 저절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전화벨이 다시 한 번 더 울렸다.

 

 

 

 

 

 

-배짱이 대단하군 그래.

“..... 카버씨.”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싶은 거라면, 다른 방법으로 하도록 해. 내 돈을 쓰는 주제에, 비싸게 굴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 텐데.

“..... ...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게... 영 성미에 안 맞아서요.”

-좋아, 그럼 그 망할 파티는 집어치워. 아주 잘나신 나머지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게 힘들다 이거지. 지금 가지고 있는 그림 중에 가장 좋은 그림 2점을 가지고 당장 내 집으로 와. 물론 그 유명하신 꼬마를 그린 그림이 좋겠지. 차를 보내도록 하겠네.

 

 

 

릭은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목소리로 트찰라에게 윽박을 지르더니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릭의 반응에 트찰라는 묘하게도 기분이 좋아지고 말았다. 흰둥이를 무시하는 검둥이라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하지만 그는 곧바로 그런 생각을 하며 웃어댄 스스로의 인간성을 자책하였다.... 어쨌든 더 이상 후원자의 성질을 돋워서 좋을 건 없었다. 게다가 그의 집으로 직접 오라니, 더 이상 거절 할 핑계가 없어진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캔버스들을 보관해둔 곳으로 걸어갔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카버씨.”

“..... 앉아.”

 

 

 

릭의 서재에 들어선 트찰라가 모자까지 벗으며 정중하게 릭에게 인사를 건넸으나, 릭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미간을 구긴 채 턱을 아주 조금 까딱여 인사를 받고는 손을 대충 휘저어 트찰라에게 앉으라고 명령하였다. 트찰라는 특별한 반응 없이 그저 순순히 릭이 권한 의자에 앉았다. 잠깐 주변을 둘러보니, 트찰라는 이 서재가 굉장히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가득 차있지만 마치 집 주인처럼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거만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잠깐 눈에 보이는 부분만을 훑고, 트찰라는 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전화로 들었던 대로, 릭은 짜증이 잔뜩 나있는 상태였다. 희미한 푸른색의 편안한 셔츠차림이었던 그는 위스키와 각얼음이 들어있는 잔을 든 채 서있었다. 예의 그 큰 체격에다 표정 때문에, 그는 한층 더 고압적으로 보였다.

 

 

 

“위스키를 한 잔 하기엔 이른 시간이야, 그치?”

“..... 오후 두 시니까.. 그렇군요.”

“하지만 난 영 불쾌한 상황엔 취기라도 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

 

 

 

비아냥을 입가에 잔뜩 머금은 채 각얼음이 든 잔을 위협적으로 짤랑이던 후원자는 도수 높은 술을 조금 홀짝이더니 얄팍한 입술을 한 번 핥고는 턱을 치켜들었다.

 

 

 

“...... 가져온 그림이나 보여주는 게 좋겠군.”

 

 

 

뭔가 벼르고 있던 것처럼 그는 잠시 숨을 들이쉬었으나, 이내 유순하게 앉아있는 트찰라를 보고 얇은 입술을 더 얇게 다물고는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트찰라는 바로 각각 크기가 다른 캔버스 2개를 기대 세웠다.

 

 

“흥, ...그래, 이 정도 크기면 응접실에 걸 만 하겠어, 마치 고등교육이라도 받은 것처럼 보이는 검둥이들이 떼로 있는 게 아마 잘 먹히겠는데...”

 

 

 

릭은 그림들 앞으로 와 서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림을 발로 툭툭 쳤다. 듣다못해, 트찰라는 시선을 돌리는 것을 택했다. 어쨌든, 방을 박차고 나갈 수는 없었으니까.

 

릭은 큰 캔버스의 그림(에릭과 다른 모델들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 속에서 그들은 세련된 턱시도를 입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남자 옆에 서서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에릭은 께느른한 표정으로 관심이 덜 하다는 듯 피아노 옆에 매혹적으로 기대 서있었다)을 한참을 보고는 옆으로 걸어가 다른 그림을 살펴보았다. 첫 번째 그림보다 크기가 작은 다음 캔버스 위에는 에릭만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을 볼 때마다, 항상 시선이 마주치는 기분이야. 아마 그림을 그릴 때 이 꼬마에게 자넬 보라고 시켰나보지?”

“네.”

“흠.”

 

 

 

다소 코웃음치는 것처럼 들리는 소리를 내고, 릭이 다시 위스키를 홀짝이며 두 번째 그림을 유심히 살핀다. 캔버스 위에서, 에릭은 파스텔톤의 푸른 끼가 도는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 앉아 무료한 표정으로 화가 혹은 그림을 보는 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트찰라는 에릭의 피부색이 보통은 좀 더 강한 색과 있을 때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왔지만, 작업실에 있기 싫다며 나가자고 트찰라를 졸라대던 에릭이 그를 이끌고 공원에 나갔을 때, 그 라일락 꽃 곁에 서있던 소년티를 벗은 이 청년이 정말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워 보였다는 것을 대번에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바로 에릭을 라일락 나무 아래에 앉히고 멀찍이 서서 그림을 그렸었다.

 

 

 

 

 

봄날의 따스한 햇살이 캔버스 위에 내려온 것처럼, 그림 속의 에릭의 따뜻한 카페오레 같은 피부색에도 선명한 음영이 져있었다. 섬세한 이목구비의 표현은 언제나와 같이 에릭 그 자체이며 동시에 에릭의 실제 모습 이상이기도 했다- 바로 트찰라가 스스로 일종의... 뭐랄까, 기묘한 자부심을 느끼는, 트찰라와 있을 때만 드러나는 에릭의 모습들 중 하나가 이번에도 그려져 있었다.

 

 

 

릭은 그 표정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트찰라의 짐작이 맞다면, 이 거만한 장사치는 그 묘한 차이점을 아마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그림을 보면서 기분이 더 나빠질 리 없지 않은가? 릭의 표정은 놀랍게도, 아까보다도 더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이 두 후원자와 화가의 만남은 결코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고, 살갑게 대화를 하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느끼는 일종의 경쟁심 같은 게 둘 사이에 있다는 것을 서로 의식하고 있었다. 애초에 둘의 이 괴상한 관계가 시작된 계기를 생각해보면 응당한 일이기도 했다. 낡은 다락방에서의 릭과 그림 속의 에릭과의 첫 대면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 ...그래, 그때와 같은 그림은 더 이상 그리지 않기로 한 건가?”

 

 

 

콧잔등을 잔뜩 찡그리며 불쾌함을 대놓고 드러내던 릭이 잔뜩 꼬인 목소리로 비꼬듯 물었다. 트찰라는 대번에 릭의 말뜻을 이해하고 미간을 좁혔다.

 

 

 

“아니면, 작업실 한 구석에 꽁꽁 숨겨 놓았거나.... 이번에는 잘 지켜야지, 하면서 말이야.”

 

 

 

트찰라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릭은 그런 트찰라를 위아래로 훑듯이 살펴보았다. 트찰라의 기분이 상한 것을 보고, 릭은 뱀처럼 얄팍한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그래, 그런 그림이 또 있다 한들 내게 가져올 리는 없겠지....”

 

 

 

릭의 목소리는 이제 제법 즐거운 티가 나기 시작했다. 물론 매우 신경질적인 즐거움이었지만, 어쨌든 이 강한 수컷을 웃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머리로 열이 몰리는 것을 느끼며, 트찰라는 또 다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뭐, 상관없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릭은 위스키를 홀짝이면서 시선을 한 군데에 두고 무언가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트찰라도 무심결에 릭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런 트찰라의 뒤편의 벽에....

 

 

 

 

“.... 인정하지, 썩 괜찮은 그림이야.... 신이 그런 류의 재능은 검둥이들에게도 공평히 나눠주기는 하는가보지.”

 

 

 

... 절벽 아래 선 에릭의 벌거벗은 몸이 그려진, 예의 그 그림이 걸려있었다. 고급스런 짙은 색 목재 가구들 사이에서 너무 선정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튀어 보이는 그 그림을 오랜만에 바라보며, 트찰라가 뺨을 화끈하게 붉혔다.

 

자신의 야릇하고 그릇된 감정이 여과 없이 온전히 그대로 투영된 그림을 바라보는 것은 아직도 순진한 화가에게는 너무 벅찬 일이었다. 트찰라가 두 주먹을 꽉 쥐는 동안, 릭은 트찰라의 표정 변화를 곁눈질로 살피며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겨 트찰라 곁에 섰다.

 

 

 

“저런... 안색이 안 좋군. 왜 그런가, 화가 양반?”

 

 

 

성적인 행위 후의 모습을 암시하는 그림 그 자체인, 자신의 (반 강제적으로) 떠나보낸 그 작품을 보면서, 감당하기 힘든 감정을 느낀 화가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이 모든 게 정말 잘못된 거야,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던 거야, 비열한 인간 같으니, 당장 물릴 수만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관계를 끝내겠어, 당장 이 작자에게 말을....

 

 

 

“....그런데, 이상하게 말이야, 자네 그림실력은 말했다시피, 검둥이치고도 제법 뛰어난데 말이야... 이상하게 이 그림만큼은 좀.... 뭐라고 말해야 할까.”

 

 

 

릭은 극적인 효과를 주려는 듯 일부러 뜸을 들였다. 그리고 다시 그 뱀 같은 입술이 열리는 순간, 트찰라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실제와는 좀 다르더군. 그 꼬마는... 좀 다른 표정을 짓는 것 같던데 말이야.”

 

 

 

트찰라의 주먹에서 힘이 빠져, 그의 두 손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릭은 기어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안녕하세요.”

“소문이 자자하더군. 온갖 파티에는 빠지지 않고 얼굴을 비추는 걸로 말야.”

“초대를 받았으면 당연히 응해야죠.”

 

 

 

거의 완벽에 가깝게 잘 재봉된 턱시도를 입은 거구의 백인 남자가 저보다 머리 하나쯤 작은 흑인 남자를 내려다보면서 농을 던지고 있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값비싼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릭은 에릭의 턱시도가 제가 소개시켜준 재단사가 만든 옷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게다가 누릴 건 아주 약삭빠르게 다 누리고 있고...”

“그러라고 돈 준 거 아니에요?”

“물론 어디에 쓰든 니 맘이지.”

“나한테 기부나 뭐 자선 같은 걸 바랄 거면, 딴 데 가서 알아봐요.”

“가난한 인간들 따위 관심 없어.”

“그쵸? 그럴 인간처럼 보여요.”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경쾌한 음악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서, 참 안 어울리는 다른 인종과 계층의 두 남자가 서서 의외로 합을 맞추고 있었다. 에릭의 맹랑한 대답에 릭은 기가 찬 듯, 또 동시에 매우 즐거운 듯 입술을 쪼개며 실실 웃었다. 에릭이야말로 사실 그 ‘가난한 인간들’ 부류의 사람이었으나, 이 청년은 빠르게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지겨운 소굴에서 빠져나와 부유한 사회로 비집고 들어왔다. 사업가는 이 모델의 그런 뻔뻔함이 마음에 들었다.

 

 

 

“네 잘난 그림쟁이 양반은?”

“이런 데는 싫대요. 그 아저씨가 은근히 정신 나간 구석이 있다니까. 뭐... 어찌 됐든 나한텐 고마운 사람이니 함부로 말하면 사실 안 되겠...지만...”

“....”

 

 

 

릭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고, 에릭이 약삭빠르게 지나가던 웨이터를 붙잡아 샴페인 두 잔을 나꿔챈다. 그리곤 한 잔을 릭의 손에 쥐어주고는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이런 비싼 술 앞에서 그런 재미없는 인간 얘기 하는 건 아무래도 모욕인 거 같아요.”

“..... 그래, 그럴지도.”

 

 

 

릭은 순순히 수긍하고는 샴페인을 마셨다. 에릭은 저도 샴페인 잔을 입에 갖다 대면서 자신도 모르게 옆에 선 릭을 곁눈질로 흘금거렸다. 아래에서 올려다 본 릭은 여전히 냉정해보였으나, 값진 샴페인 한 모금이 그나마 그 냉정함을 녹여낸 듯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졌다. 깊은 눈 아래 거의 회색으로 보이는 짙푸른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에릭이 인정하긴 싫은데 잘생겼다며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시선을 맞춰오는 릭에 놀라 뒤로 거의 펄쩍 뛰어오른다.

 

 

 

“,,,,,”

“...! 아니, 뭐, 얼굴에 금칠이라도 하셨어요? 닳아 없어질 것도 아닌데 좀 쳐다봤다고 유난이야.”

 

 

 

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에릭 혼자 얼굴을 붉히더니 되바라지게 툴툴대며 횡설수설한다. 주절거릴 때마다 열심히 열리고 닫히는 두꺼운 입술을 릭은 대놓고 유심히 바라보았다. 입술의 선명한 주름이 보일 정도로 풍성한 질감에, 의도하지 않았지만 릭은 성적인 흥미를 절로 떠올리게 되었다. 같은 이를 상대로 한, 낯설지 않은 흥미였다.... 그런 그의 생각은 곧바로 얼마 전 화가의 다락방에서 사온 절벽에서의 에릭의 그림을 상상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 아, 아저씨야 말로 뭘 그렇게 봐요?”

“.... 아저씨라고?”
“그럼 뭐, 아저씨지.”

 

 

 

어찌나 릭이 대놓고 빤히 바라봤는지, 거의 뜨겁게 느껴질 정도의 시선을 느낀 에릭이 뺨 끝을 빨갛게 물들이며 더 툴툴대기 시작했다. 싹퉁머리 없는 꼬마가 의외로 귀여운 구석도 있다고 릭은 생각하다가, 에릭이 저를 부르는 단어에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림쟁이를 네가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어...... 둘 다 아저씨는 맞잖아요..”

“아니. 맘에 안 들어.”

“.....”

 

 

 

릭이 난 데 없이 흉흉한 목소리로 차갑게 대꾸하자, 에릭이 그럼 어떻게 불러주길 원하냐고 되물으려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로 인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뉴욕에 온 지 얼마 안 된 매력적인 미혼의 백인 사업가와 요즘 인종 간에 관계없이 유명한 모델이 함께 있는 걸 사람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화가의 안부와 그의 그림을 산 이야기, 후원자의 예술적 후원에 대한 겉치레식 감사 등을 열심히 재잘거렸다.

 

 

 

 

 

 

 

 

 

 

 

 

 

몇 무리의 사람들을 보낸 건지, 에릭은 좀 지칠 법도 했으나 원체 주목받는 것을 즐기는 성정인 그 청년은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하면서도 여전히 극적으로 저를 보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 릭은 거의 가만히 있어도 될 지경이었다. 릭에 관한 질문도 에릭이 신이 나서 떠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릭은 그저 가식적인 미소를 지은 채 이 시대의 깨어있고 인품 넘치는(!) 사업가인 척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추임새를 넣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 짓도 신물이 나, 릭은 결국 가짜 미소조차 거두고 짧은 눈인사만을 건넨 뒤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물론, 수완 좋은 장사꾼인 그는 이 정도야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묘하게 불편한 기분을 결국 견디지 못해 자리를 뜬 것이다. 그 기분은, 글쎄....

 

 

 

“이봐요, 아저.... ... 저기, 아니 그냥 그렇게 가버리면 어떻게 해요.”

“뭐가.”

“사람들이 궁금해 했다구요.”

“내 알 바도, 그들이 알 바도 아니지.”

“와, 좀 전까지만 해도 세상 친절하게 웃고 있더니.”

 

 

 

하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온 건지, 릭보다 조금 늦게 빠져나와 그를 뒤따라온 에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쫑알거렸다. 릭은 그런 에릭을 몇 초간 묘한 눈빛으로 응시하였다.

 

 

 

“따라와.”

 

 

 

그리고, 곧 이어 릭은 짧은 명령만을 툭 던지고는 먼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에릭이 잠시 멍하게 있다가, 벌써 긴 다리로 회장을 빠져나가고 있는 릭을 따라 반쯤 뛰다시피 하며 그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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