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미끄덩하고,

차갑고,

또...


...유연한 것이, 

부드럽고 느릿하게 몸에 감겨온다.


가물거리는 눈을 겨우 뜬 민은 두 다리를 둘둘 감싸며 기어 올라오는 뱀을 보았다.


"아아아아아..."


끊이질 않는 낮은 비명에 이를 닦다 말고 침실로 달려온 비암은, 이내 배신감에 몸을 가누지 못 했다.


"순아, 어떻게 날 두고..."

"누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한텐 이게 중요해!"


다정한(?) 한때를 보내는 그들에게 빽 소리를 질러버린 비암의 목소리에는 질투가 잔뜩 묻어났다.


  소란에 잠이 깬 지경은 얼굴을 한껏 구기고 신경질을 부리며 몸을 일으켰다. 곧이어 온몸이 굳은 채 사색이 된 민을 발견한 그는 낄낄대며 휴대폰을 찾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소리는 멈출 줄을 몰랐고, 직사각의 작은 화면에는 모든 걸 포기한 듯한 표정의 민이 담겼다.


  그 와중에 비암은 뱀의 머리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와 털부덕 앉고는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불규칙적으로 혀를 날름대며 내는 소리에 고개를 연신 끄덕인 후, '슈- 슈-'라든가, '샤- 샤-' 와 같은, 뱀과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비암은 그것이 단순한 소리가 아닌, 어떤 의미를 지닌 언어일 것이라 굳게 믿는 모양이었다.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는 남은 두 사람의 눈동자는 공허했다.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비암이 허리를 세워 두 손을 모아 가슴팍에 얹은 채 감격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


"얘들아, 아무래도...우리 사이에 뭔가 통하는 것 같아..."

"...언니, 진심이야?"


그렇게 '언니, 언니' 하며 항상 비암을 따르는 지경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도무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일단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민의 일렁이는 눈동자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 같았다.



"배민, 이거 봐라. 잘 찍었지?"

"성 붙여서 부르지 말라니깐..."

"불만 있어?"

"아니, 그게... 그건... 그런 건 아니구..."

"사진이나 봐. 이게 진짜 표정 끝내준다."


지경은 아침밥을 먹으면서도 민을 놀리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민아."


비암이 그릇에 라면을 덜어 내밀며 말했다.


"오늘 순이는 내가 돌볼게. 넌 네 할 일 해."

"순이?"


지경과 민이 동시에 물었다.


"애기 이름이 순이야. 매뉴얼에 적혀 있던데."

"애기라기엔... 좀... 근데 그건 또 언제 읽었대?"


국물을 떠먹던 지경의 얼굴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애기'라는 호칭이 영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 끓이면서 봤지. 단번에 다 외웠다구.

하여튼, 민이 너는 너무 무서워하니깐 나가서 다른 볼일 봐."

"누나, 후광이 보여..."


민이 성스러운 존재를 대하듯 비암을 향해 두 손을 들자 지경이 다리를 뻗어 그의 무릎을 세게 밀쳤다.


"지랄 말고 밥이나 처먹어."

"지경아, 고운 말 쓰자."

"...밥 먹어."


세 식구의 아침상은 언제나 조용할 틈이 없으면서도 서로에 대한 정감이 은은하게 묻어났다.



민은 가방을 챙겨 매고 현관에 쭈그려 앉아 신발 끈을 꼼꼼히 묶던 참이었다.

아무런 방어 태세를 취하지 않은 그때, 무언가 엉덩이에 '툭'하고 닿자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잘 다녀와."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민은 등 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는 소파에 앉은 비암이 순이의 꼬리를 쓸어 만지고 있었다.


"...순이가 그러네."


비암이 미소 짓자 민은 서둘러 매듭을 짓고는 도망치듯 집에서 뛰쳐나갔다.


  민은 오전 내내 동네를 돌며 아무 곳에나 전단지를 붙였다. 불룩하던 가방이 비어갈 즈음, 저 멀리서 효자손을 들고 역정을 내며 달려오는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 주는 제대로 재수가 없으려나 보다,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민은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을 한참을 뛰어다닌 후에야 그는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앞머리가 젖을 정도로 땀범벅이 되어 티셔츠의 목 부분을 쥐고 펄럭이던 차에,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네, 넵. 곧 가겠습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후 두 손을 깍지 끼고 잠시 스트레칭을 한 민은 제 일을 하러 근처 아파트 단지로 이동했다. 순하고 착한, 몸집이 웬만한 성인 여성만 한 개와 함께 한 시간을 뛰고 걷기를 반복한 민은 녹초가 되어 제 누이와 누이동생, 그리고 아나콘다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아갔다.


  비틀거리며 긴 복도를 걸어 겨우 집 앞에 다다른 민은 천천히 비밀번호를 누르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신발을 벗으며 두리번거리니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왔고, 문 앞에는 비암의 잠옷이 개켜 있었다. 주방 싱크대에서 손을 씻은 후 옷을 갈아입으려던 민은, 문득 지경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얘가 벌써 자기라도 하는 건지. 두 발을 질질 끌며 침실 문가에 도달한 민은 방 전체를 차지하고 똬리를 튼 채 잠이 든 순이를 발견했다. 피로감에 흐물거리던 두뇌가 삐그덕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경아!!!"


겁먹을 겨를도 없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간 민은 순이의 몸을 더듬으며 지경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순이의 길고 긴 몸은 꼬리 끝까지 굴곡 없이 매끈했다.


'벌써 소화되어버린 건가? 이렇게 빨리? 그치만, 지경이는 워낙 작으니까. 이미 늦었는지도 몰라...'


민은 그대로 주저앉아 코 먹는 소리를 내다 흐느끼기 시작했다.


'끝까지 거절할걸. 그깟 돈이 뭐라구. 산책 몇 번 더 하면 되는 건데. 아니, 그냥 오늘 집에 있을걸...'


그의 푸르뎅뎅한 머릿속에는 폭풍이 휘몰아쳤다.

두 눈을 손등으로 아무리 비벼 닦아도 눈물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등 뒤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냐?"


돌아보니 멀쩡히 살아있는 지경이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고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온갖 꽃의 향이 섞여 풍겼다.


  민은 한참을 아무 소리도 내지 못 하고 입만 벌리고 있다가, 지경의 다리를 붙들고 엉엉 울어버렸다. 지경은 욕설을 뱉으며 그를 걷어찰 기세로 한쪽 발을 비집어 꺼냈다. 작은 발바닥이 민의 헝클어진 머리에 안착하려는 순간, 소란에 급히 뛰쳐나온 비암이 나타났다. 지경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얘들아, 왜 그래?"

"아니, 배민이 막 울더니 이러고 자빠졌어. 왜 이래, 진짜! 짜증 나게."


  울음을 그칠 줄을 모르는 민은 급기야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벌건 얼굴로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려 했지만, 딸꾹질과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그의 절박함을 우습게 만들어버렸다. 그를 내려다보던 비암이 풋, 하고 가벼운 웃음을 내뱉자 이어서 지경도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비암은 몸을 수그려 불쌍한 동생을 꼭 감싸 안고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미처 말리지 못 한 젖은 머리카락에 민의 어깨가 축축이 젖어들었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새 잠에서 깬 순이는 소리 없이 세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동그란 눈알은 평소와 약간 다르게도, 옅은 라임색으로 빛났다.


"야!!!"


 곧이어 지경이 급히 민을 발로 차 문턱 밖으로 넘어뜨렸다. 


  그는 순이의 머리를 방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세게 닫고는 등을 기대고 식식대며 거친 숨을 쉬었다. 민의 어깨에 밀려 함께 넘어진 비암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 하고 지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 그는 무언가 깨달은 듯 목이 늘어난 민의 티셔츠를 붙들고 냄새를 맡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어리둥절한 민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생각이 얽힌 채 석상처럼 멈춰있었다. 정적이 길어지기 전, 지경이 첫 번째로 입을 열었다.


"야, 너 개 산책시키고 왔지."

"우웅..."

"으이구, 미친놈아. 미친놈아!!!"


  지경이 조그맣지만 옹골찬 주먹으로 민의 가슴팍을 두어 번 내리치자 비암이 이를 제지했다. 그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 한 민을 일으켜 세우고 욕실에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절해진 민은 아직 가시지 않은 뜨끈하고 습한 공기를 한참 마시고 뱉은 후에야 비음 섞인 그 목소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 산책시키신 후에는 꼭 샤워 하시구요~ 잘 부탁드려요!''


그는 그제야 '아-'하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잔뜩 긴장해 솟아있던 어깨에 힘을 풀었다.



한편 거실에서는, 지경이 제 가슴팍을 팍팍 두드리며 한숨을 줄기차게 내쉬고 있었다.


"언니, 언니는 안 답답해? 난 진짜 죽겠어. 쟤 때문에."

"심성이 착하고 여려서 그래. 지경이가 좀 이해해줘. 

네 걱정을 얼마나 했으면 다 큰 애가 저러고 울겠어?"


지경은 고개를 팩 돌리고는 입을 비죽 내밀고 무어라 들릴 듯 말 듯 구시렁거렸다.

그런 동생을 바라보는 비암의 눈빛은 참 다정했다.


"오늘 장사는 잘됐어? 혼자 고생했지. 미안해. 이번 팀플은 좀 빡세네..."

"고생은 무슨... 뼈 빠지게 일해서 다니는 학굔데 성적 잘 받아야지. 난 괜찮아.

사람들이 느릿느릿 조금씩 사가더니 결국에는 다 팔리더라. 언니 거만큼 인기 있지는 않았지만."


비암은 지경의 지푸라기 같은 머리를 한참 쓰다듬다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동그란 이마에 '쪽' 소리가 나도록 연달아 입을 맞추고 제 이마를 갖다 대고 부벼댔다.


"으이구, 우리 애기가 언제 이렇게 커서 가게도 혼자 보고, 이러다 시집간다고 쏠랑 나가면 어쩌나?"


지경은 비암을 살짝 밀어내며 빗물을 털어내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왜 이래? 나도 낼모레면 성인이거든? 애기는 쟤가 애기 같지."


괜히 심통이 난 지경이 욕실을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말했다.


"낼모레는 무슨, 그럼 난 낼모레 백 살이다."


비암은 장난스럽게 지경의 양 볼을 살짝 쥐고 늘이며 웃었다.

지경은 미간을 찌푸리며 저보다 키가 한참 큰 제 언니를 째려보았다.


"그리구, 난 결혼 안 해. 평생 언니랑 살 거야. 언니가 결혼한대도 같이 살 거야. 그렇게 알아."

"그래, 그러면은 언니도 결혼 안 할게. 우리 애기랑 같이 살아야지."


"애기 아니라고..."


아직 젖살이 통통한 지경의 얼굴을 점토처럼 쥐고 뭉개는 비암의 손은 차가웠다.



  욕실 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은 민망함을 감추지 못 하고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한 발짝도 나오지 못 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아직도 발갛게 물든 얼굴이 욕실의 증기 탓인지, 부끄러워서인지, 둘 다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내가 웃통 까지 말랬지."


기다렸다는 듯 지경이 으르렁거렸다.


  민은 흠칫 놀라더니 얼른 티셔츠를 집어 들어 몸을 구겨 넣었다. 지경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던 비암은 말없이 웃음을 흘리며 일어나 동생들의 머리를 차례로 쓰다듬어준 후 부엌으로 향했다. 순이의 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지경과 민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곧 지경이 고개를 휙 돌리자 민은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조그마한 금발의 소녀는 입 모양으로만 '팍, 씨'하고 거칠게 위협하며 주먹을 쥐어 보이고는 종종 걸어가 비암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제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여준 후 보란 듯이 비암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어 종알종알 말을 하기 시작하자, 민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쭈그려 앉아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좁은 간이 식탁에 둘러앉은 세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쥐어 원을 만들고 눈을 감았다. 각자 기도를 올리는 대상도, 기도의 내용도 모두 달랐지만, 그들은 항상 식전에 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비암은 마음이 복잡할 때면 뒷산에 위치한 작은 절을 찾아간다. 지경은 그를 따라가 옆에 꼭 붙어 앉고는 눈을 감은 비암을 실눈으로 흘깃흘깃 훔쳐보곤 한다. 줏대 없다는 이유로 하루에도 몇 번을 얻어맞는 민은 종교관에서만은 곧은 심지가 있어, 홀로 성당에 새벽기도를 다닌다. 이러한 세 사람이 한 식탁에 모여 기도를 하는 일은, 처음에는 저들이 생각하기에도 조금 우스워, 기도를 마치면 서로 눈을 맞추지 못 하고 피식 웃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보다도 진실한 마음으로 각자 기도를 올리게 되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들만의 의식을 마친 세 청년은 침을 꼴깍 삼키며 상 가운데 놓인 라면을 쳐다보았다. 집주인에게 온 식구가 함께 지내게 되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 하였기에, 가능한 한 신세를 지지 않기 위해 이틀째 라면으로 식사를 때우던 참이었다. 비암은 당연하다는 듯 동생들을 먼저 챙긴 후 마지막으로 제 몫을 덜어 내려놓았다. 


"민아, 나 내일은 학교 가야 하는 거 알지?"

"나도 알바 가야 해."


두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민은 눈을 동그랗게 굴리며 물었다.


"나... 그럼 혼자... 있어야 해?"


대답 대신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민은 사색이 되어 손을 허공에 둔 채 멈추었다.


"일단 오늘도 여기서 잘게. 누나가 좀 일찍 일어나서 꽃 시장 갔다가 학교 갈 테니까,

내일 오전에만 혼자 보면 돼. 보호자 분이 한두 시쯤 오신댔지?"

"웅..."


벌써부터 기운이 쪽 빨린 듯 처진 민을 보며 배시시 웃던 지경이 장난스레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놀리듯 말했다.


"오늘처럼 질질 짜지나 말고. 이 누나는 배민이가 알아서 잘하리라 믿는다~"


호칭에 대해 불평할 생각조차 하지 못 할 만큼 민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얘 얼굴 하얘진 것 좀 봐. 민아, 괜찮을 거야. 매뉴얼도 다 읽었지?"

"웅..."


  민은 혼이 나간 듯한 얼굴로 제 수저와 빈 그릇을 들고 개수대로 향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온 그의 손에는 매뉴얼이 들려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그것을 재차 꼼꼼히 읽었다. 비암은 안쓰러운 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고서는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비암이 냄비를 들고 일어서자 지경은 물티슈로 식탁을 닦다가 나지막이 민의 이름을 불렀다. 매뉴얼을 뚫고 들어갈 듯 중얼거리던 민이 고개를 들자, 지경은 콧잔등을 구기며 혀를 내밀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식탁을 닦았다. 민은 우환이 가득한 얼굴로 코팅된 종이가 살짝 구겨지도록 꼭 쥐고 계속해서 웅얼거렸다.



"끄으..."


  민은 가슴과 무언가 배를 짓누르는 느낌에 괴로워하며 무거운 눈꺼풀을 올렸다. 눈앞에는 순이가 혀를 날름이며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이번에는 도와줄 이도 없고, 잘못 자극하면 정말로 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까스로 입을 꾹 다물었다. 온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눈만 끔뻑이며 시선조차 피하지 못 하기를 몇 분째. 순이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던 민은 '이러다 기절하는 것은 아닌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생각이 꼬리를 물며 또 한참이 지난 어느 순간, 민은 몸을 누르는 묵직함이 익숙해지고 순이의 눈을 보는 것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동그랗고 노란 것이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이 꼭 유리구슬같이 예뻤다. 


  불규칙적으로 날름이는 혀는 끝이 갈라져 알파벳 'Y'자 모양을 하고 있었다. 민은 용기를 내 제 혀를 살짝 내밀어보았다. 십 대 시절 아무 생각 없이 스플릿 텅 시술을 받은 그의 혀 또한 양쪽으로 벌어져 있었다. 그것은 이십 년 짧은 인생에 내린 가장 용감 무식한 선택이었으며, 그는 다시는 그러한 짓을 벌이지 못할 것이라 여긴다. 그리고 조금, 사실 조금 많이 후회한다고 말한다.


기분 탓인지, 순이는 그 혀를 빤히 보는 듯했다.

민은 긴장한 탓에 약간 거친 숨을 쉬며 순이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넸다.


"내 혀도... 갈라져 있어."


순이는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어 왔다.

한기가 살짝 느껴지며 발가락 끝부터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민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너랑 비슷하지..?"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순이는 제 혀를 더 자주 꺼내 보이며 머리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 모습에 조금 긴장이 풀린 민은 땀에 젖은 손을 겨우 들어 움직일 수 있었다.


손톱,

손가락 끝,


그리고 손바닥까지.


천천히, 조심스럽게 접촉하며 비늘의 결을 느꼈다.

이어서 느릿하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순이의 차고 매끄러운 몸을 쓰다듬을수록 얼어있던 몸과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민은 살짝 미소 지으며 순이의 정수리까지 조심스레 쓸어 만졌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다행스럽게도 휴대폰은 손에 닿는 곳에 있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배민씨~ 저 순이 보호자 최찬미예요!'

"아, 안녕하세요! 여행은 잘 다녀오셨나요?"

'네, 이제 공항에서 택시 기다리는 중이에요~ 배민씨 덕에 걱정 없이 재밌게 놀다 왔네요.'

"다행이네요. 순이가 참 이름처럼 순해서 돌보기 힘들지 않았어요."


민은 울며불며 호들갑을 떨던 제 모습을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저희 순이가 좀 착하죠? 호호...

근데요, 제가 전화 드린 게~ 이따가 택배 기사님이 오실 텐데~ 

그게 신용카드라서 문 앞에 두면 안 된대요~ 근데 대리 수령은 가능하다고 하더라구요~?'

"아, 네. 제가 받아서 식탁 위에 올려두고 가겠습니다."

'감사해요~ 제가 한 시쯤 도착하니 순이는 아침밥만 챙겨주시면 될 것 같아요~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려요~'

"네, 네. 조심해서 오세요!"


민은 전화기를 바닥에 내려놓은 후 순이와 다시 눈을 맞추었다.


"순아, 밥 먹을까? 밥?"


순이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치지는 않았지만, 느릿느릿 거실로 나가는 것을 보니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닭고기랑... 사과. 사과가 어디 있지..."


  민은 매뉴얼과 냉장고를 번갈아 보며 순이의 아침밥을 만들 재료를 하나씩 꺼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과 두 알을 맨 아래 서랍에서 꺼낸 그는 냉장고 문을 닫고는, 마지막으로 제대로 준비한 것이 맞는지 하나씩 체크하기 시작했다. 확인 작업이 마치기 무섭게, 초인종이 울렸다.


"순아, 잠깐만 기다려. 이거 먹으면 안 된다?"


그는 재료를 대충 조리대 위에 올려놓은 후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선 택배 기사는 적잖이 무뚝뚝해 보였다.

그는 흰 종이봉투를 슥 내밀며 기계적인 말투로 말했다.


"대리 수령 맞으시죠? 여기에 싸인해주시면 됩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기계를 꺼내더니 잠시 멈칫하고는 이리저리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수십 초간 '삑, 삑' 소리를 내는 기계와 씨름하던 그는 애꿎은 머리를 긁었다.


"이게... 고장이 났나 봐요. 여기 서류에 싸인해주시겠어요?"

"아, 넵!"


  민은 허둥대며 책상이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정돈되지 않은 책상 위에는 필기구가 잔뜩 들어 터질 듯한 필통이 놓여 있었다. 그는 '빨간색은 좀 그렇지'라 생각하며 검은색 볼펜을 찾으려 필통을 뒤적거렸다. 한참을 뒤적이던 민은 급기야 필통을 책상에 엎어버리고 검은색 볼펜을 찾아 쥐었다.


"기사님, 죄송해요!"


  민은 급히 거실로 나왔으나 현관에 서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닫히지 않은 현관문을 열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두리번거렸으나 복도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그는 한 손에는 볼펜을, 다른 한 손에는 허공을 쥔 채 고개를 갸웃하며 집 안으로 몸을 돌렸다. 순이가 거실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순아, 미안해. 얼른 아침밥 해줄게."


  아기를 달래듯 말하며 순이를 스쳐 지나 부엌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덜컥 멈추었다. 민은 고개를 천천히 돌려 순이를 다시 보았다. 머리부터 시작하여 점박이 무늬를 따라 몸을 훑어가 보니, 무언가 가득 들어차 부풀어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현관 한 구석에는 고장 난 기계가 떨어져 액정이 부서진 채 나동그라져 있다.



벌어진 민의 입안에는 갈라진 혀가 딱딱하게 굳어버렸고,


순이는 만족스러운 듯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레몬 라임 맛 사탕을 도르르 굴려 보인다.




짧은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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