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 파트너가 일이 많다는 건 알았는데 막상 야근해본 적은 없다. 허도영이 관리하는 파일만 해도 한눈에 봐도 많고, 실제로 바쁘고 주변에서도 난리인데도 말이다. 파트너가 내게 넘겨오는 서류는 항상 깔끔하다고만 생각했지 바보같이. 왜 지금까지 같이 야근할 일이 없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옆에 쌓인 온갖 종류의 서류철에 숨이 턱턱 막힌다. 한 시간 째, 단순한 입력만 도와주다가 알았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가끔 파트너와 바로 연락이 안 되면 냅다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허도영이를 찾는 싸가지 요만큼도 없는 그 업체라는 걸. 갑갑함에 내가 한숨을 쉴 때까지 허도영은 한마디도 없이 입술만 쭉 내밀고 일에 열중했다. 이래서 허도영, 허도영 하는구나.

 


“하.”

“설아 씨, 그만 들어가세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죠?”

“네?”

“도와주니까 빠르잖아요. 아니 대체, 이걸 왜 지금 해야 해요? 날짜 보니까 오늘 오후에 넘어왔던데.”

“음, 그건 보너스 같은 건데 월요일 아침에 서류 먼저 준비한 거 넘겨 줄 때 같이 줘야 해서요. 항상 그렇게 받아가요.”

“미친, 완전 개 또라이네.”

“큽… 또라이….”

“아주 언니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거잖아요. 내역서 정리해서 주는데 뭐가 그렇게 의심스러워서 품목별로 유통처별로 세부 내역을 항상 다 달래요? 이게 또라이가 아니고 뭐야? 주면 보긴 해요? 이거?”

“보겠죠? 보라고 달라고 한 거니까….”

“아주 상전이네.”

 


거침없이 거래처를 까는 동안에도 파트너는 실없이 실실 웃으며 집에 가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미 늦었는데 무슨 소리인가? 빨리 끝내고 회사에서 탈출하자며 파트너의 어깨를 주물러 주자, 처음에는 간지러운지 몸을 뒤틀더니 이내 안마가 끝난 후엔 또 말없이 입술만 쭉 내밀며 일만 했다. 방해되지 않도록 단순 내역서를 거래처별로 정리해 파트너에게 메일로 전송해놓고 헐렁함은 하나도 없는 신기한 파트너의 모습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어후, 설아 씨 수고하셨습니다. 도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뭘요. 언니가 고생했죠. 진짜, 너무 고생했어요.”

 


하면서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짐을 싸서 사무실을 나섰다. 익숙하게 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 경비 설정까지 건다. 아무도 없는 까만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까지 약간 무서웠다. 같이 있어도 스산한 느낌이 드는데, 허도영은 여전히 실실 웃으며 휘파람까지 불었다. 같이 있으니까 뭔가 안심이 되어 엘리베이터 안에서 붙어서 섰다. 버스가 아직 막차까지는 여유로워서 일층을 눌렀는데 파트너가 다시 일층을 눌러 취소를 시켜버린다.

 


“저 버스 타야 해요.”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데려다줄게요.”

“이러면 도와준 의미가 없는데. 언니 피곤하잖아요.”

“아니요? 설아 씨 덕분에 하나도 안 피곤해요. 너무 즐거웠어요.”

“같이 야근했는데 즐거웠어요?”

“네. 즐거운 야근이었어요.”

“세상에 즐거운 야근이 다 있어요? 그러면 내일은 거의 파티겠네요.”

“그럼요. 설아 씨 말이 맞아요.”

“허.”

 


이 언니가 야근을 너무 하더니 정신이 나갔나. 일할 때 빼고는 이렇게까지 헐렁하고 실없는 농담도 곧잘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전보다는 한층 정돈된 회사 차를 얻어타고 집까지 가는 동안 라디오는 없이 아까 그 미친 거래처 이야기, 내일 하고 싶은 것들 이야기, 아까 같이 먹었던 떡볶이 이야기 같은 것들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별로 말을 많이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집 앞에 도착이라니. 벌써? 버스는 돌아가는데 차는 안 돌아가니까 아무래도 거리가 짧긴 하지. 택시 타면 그렇잖아. 그보다 어차피 내일 만날 건데, 왜 아쉬워하는 거야 난.

 


“언니 아무튼! 전 내일 언제든 괜찮으니까 푹 쉬고 연락 주세요.”

“네 알았어요. 설아 씨 진짜 고마워요. 잘 자요.”

“언니도요. 언니 가면서 졸면 안 돼요? 조심해서 가세요.”

“네.”

 


***

 


“하아, 언니이….”

 


설아 씨의 벌겋게 된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내 손짓에 몸을 맡긴 채로 울먹이는 모습을 보며 혀로 입술을 쓸며 입맛을 다셨다. 아, 더 괴롭히고 싶어. 울먹이는 소리 사이로 숨을 헐떡이며 힘들어한다. 사람이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는 거야? 목을 빳빳하게 하고 이를 꽉 물었다. 머리 꼭대기까지 피가 쏠리는 느낌이다. 한마디로 꼴렸다. 설아 씨의 귓가에 얼굴을 파묻고 사랑스러움에 뺨을 부볐다. 온 신경이 설아 씨에게 향했다. 몸을 들썩이던 설아 씨는 팔로 목을 감싸며 귓가에 언니, 언니 불러댄다.

 


“하, 설아 씨 왜?”

“언니, 언니이….”

“응, 나 여기 있어요.”

“아, 언니….”

“응?”

 

 

 

 

“이거 꿈이에요.”

 

 

 

***

 


“헉! 헉, 헉.”

 


개안이라도 한 사람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이불 속에 파묻혀 머리만 굴러간다. 이게 꿈이라니! 다시 자면 아까 그 꿈을 이어서 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멍청한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가 이내 자괴감이 부끄러움을 들고 안녕? 하고 튀어나와 수치심을 착착 심는 중이다. 대체 나이가 몇 살인데, 아니 내가 아무리 여자에 미쳤다고 해도 여자를 상대로 무슨 몽정까지 꾸냔 말이야? 진짜 미쳤네, 미쳤어.

 


코를 훌쩍이며 설마 하는 마음에 손을 더듬거려 속옷을 확인해보니 아주 가관이다. 하하. 어제 설아 씨가 야근 좀 같이 해주고 잘해줬다고 이딴 꿈을 꾸다니. 발정이 났나? 여자랑 하지 않은 기간이 좀 길어서 그런가? 한심한 생각이 든다. 여전히 이불 속에서 나갈 생각은 없어서 충전기를 연결한 채로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해보면 만나자는 메시지가 여럿 와있다.

 


삼 년 전에 잠깐 만난 애, 만나면 술 사주는 언니, 바에서 일한다는 애, 대학 동기 1, 대학 동기 2,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인 애 등등. 온갖 사람들의 메시지가 빨간 숫자를 띄우고 있다. 내용은 읽어보지 않아도 대충 비슷하다. 오늘 내가 뭘 하는지 일단 묻고, 시간 괜찮으면 만나자는 말이다. 사람에 따라 세부 내용은 달라진다. 원나잇 하자, 소개팅하자, 술 마시자 그런 것들이다. 그 메시지들 속에서 설아 씨에게서 온 연락은 없다.

 


시계를 보니 열 시가 조금 넘었다. 처음엔 두 시에 타임스퀘어에서 보자던 약속인데 어젯밤에 아무 때나 연락해도 좋은 것으로 바뀌었다. 지금부터 준비하면 점심에 만날 수 있겠는데. 설아 씨가 가보고 싶다던 타로 카페에 갔다가 식사를 하자는 걸로 정리를 하고, 조심스럽게 점심때 만나는 건 어떻겠냐는 메시지를 보냈다.

 


“참나, 꾸려면 좀 길게 꾸던가.”

 


***

 


“그래. 둘 중에 누가 볼 거야?”

“둘 다요.”

“누가 먼저 할래?”

“설아 씨 먼저 하세요.”

“그럴까요?”

“아가씨는 뭐가 궁금해서 왔어?”

“직장 운이랑 애정 운이요!”

 


직장 운부터 본다며 속으로 취업에 관한 고민을 생각하며 카드를 뒤집어야 한다는 말에 속으로 정규직을 되뇌며 카드를 뽑았다. 카드의 방향은 자꾸만 거꾸로 나왔는데 마지막에 해설되는 카드가 마법사라고 했다.

 


“앞으로의 과정이 순탄치는 않아도 이 카드를 보면 승진할 수 있는 분위기는 조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이미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받고 있으니까 단정하고 좋은 이미지가 깨지지 않도록 지금처럼 잘 살피고, 능력이 있다는 걸 조금만 어필하면 괜찮다고 볼 수 있습니다.”

“휴, 진짜요?”

“바로 애정운 볼까요?”

“네.”

 


재미로 보는 점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막상 볼 때는 재미를 빼고 약간 진지해져서 나쁜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별로인데 괜찮다는 소리를 들으면 적당히 지내도 될 것만 같은 안정감이 드는 거. 그러나 아직 애정 운이 남았다. 괜히 긴장하며 카드 섞는 것에 집중하다가 문득 파트너의 얼굴을 살폈다. 도영 씨 먼저 보고 내가 할 걸 그랬나? 싶어서. 정말 그래야 했나 싶다. 파트너의 미간에 잔뜩 주름이 졌다.

 


“아가씨 집중.”

“앗, 네.”

 


카드를 모두 뒤집고 해설을 듣는 동안에도 파트너를 힐끔 관찰하면 어째선지 심각한 표정이다. 재미로 보는 점인데 저렇게까지? 얼른 보고 나가야지 하면서도 설명되고 있는 카드의 의미가 나쁘지 않긴 한데, 설명할수록 처음에 봤던 직장 운까지 의심스러워졌다.

 


“교황의 정방향 의미는 아가씨가 사회가 정의하는 전통적인 관계를 찾고 있다면 이 카드가 매우 긍정적인 신호라고 볼 수 있어요.”

“아~ 그래요?”

“아가씨 싱글?”

“네.”

“그럼 누군가가 아가씨를 좋아하고 있을 수도 있겠네.”

“에이, 설마요.”

“믿고 안 믿는 건 자유고, 이제 키 큰 아가씨 차례. 뭐 보고 싶어요?”


“음…. 애정 운이요.”



-출간작- My M8(Mate), 오렌지, 애집(愛執), 불온(不穩), true romance -출간예정작- oui+oui 스핀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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