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화 보기★


#32

 

 

넌 너의 형제들을 모두 죽인 살해자야.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네가 생기는 바람에 다른 아이들이 모두 죽어버렸어. 네가 자초한 일이야. 너의 얼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테오.”

 

이름이 불리자 아기 토끼가 귀를 쫑긋거렸다. 아기 토끼의 동그랗고 까만 눈이 초롱초롱했고, 테오의 보드라운 하얀 털이 사랑스럽다는 듯 어미 토끼는 테오를 보듬어 주었다. 손길이 기분 좋았다. 포근한 배로 품어주는 따스함이 좋았다. 하지만,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어둡고, 눅눅하고, 날카롭고, 무서웠다.

 

다 너 때문이야. 테오, 난 네가 혐오스러워.

 

“사랑한단다, 우리 테오.”

 

작은 아기 토끼가 어미 토끼에게 안겼다. 아기 토끼의 몸이 덜덜 떨렸고, 어미 토끼는 테오의 귓가에 따뜻한 말을 속삭여 주었다. 널 사랑한다고, 네가 있어서 행복하다고, 네가 태어나서 나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그렇게, 계속해서, 끊임없이.

 

어미 토끼는 여덟 마리의 새끼를 출산했지만, 그중 살아남은 아이는 테오뿐이었다. 어미 토끼에게 어떠한 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심장이 아프다거나, 내장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여덟 마리의 새끼 중에 한 마리만이 살아남았다. 나머지 일곱 마리는 태어나자마자, 말 그대로 세상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테오는 무럭무럭 자랐다. 아기 토끼는 온몸이 눈처럼 새하얬고, 눈동자가 칠흑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다. 테오의 두 눈동자 안에는 별이 빛나고 있었다. 세상을 멋지게 살아가기 위한 긍지를 품은 듯, 아기의 두 눈은 밝게 빛났다.

 

“엄마는 나를 바라볼 때 무서운 말을 해.”

 

어느 날, 테오가 말했다. 어미 토끼는 고개를 저었다.

 

“테오. 엄마는 널 사랑한단다. 왜 내가 너에게 무서운 말을 하겠니.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한단다. 자기 몸보다 더 아껴준단다.”

“다른 아이들의 생명을 빨아먹었다고, 나 혼자만 살아남아서 혐오스럽다고, 나에게 살해자라고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어. 테오는 다 들었어. 테오가 잘못한 거라고, 엄마 목소리가 그랬어.”

 

테오의 말을 듣던 어미 토끼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등에 식은땀이 죽 흘렀고, 동공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뭘 해야 할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몹시 놀라 움직이지 못하는 어미 토끼에게 아기 토끼가 슬그머니 다가갔다.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어미 토끼가 소리쳤다. 무서운 괴물, 무서운 괴물. 또 한 번, 어미 토끼의 속마음이 아기 토끼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아기 토끼는 작은 몸을 움츠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흘러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 세상엔 엄마뿐인데, 엄마마저 나를 싫어하면,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날 더는 사랑하지 않으면 난 도대체 어느 곳으로 가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테오는 몸을 덜덜 떨었다.

 

테오는 무작정 우리에서 벗어났다. 하염없이 달렸다. 어디론가로 끝없이 달려갔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연약한 발에 가시가 박혀도 쉬지 않고 달렸다. 도망쳤다. 달아났다.

 

“그대가 테오로군. 소문은 들었네만 눈빛이 심상치가 않군. 흠. 인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지.”

 

백금발의 인간 남성이 온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아기 토끼를 집어 올렸다. 테오는 벌벌 떨고 있었다. 인간에게 먹히겠어. 이제 곧 죽는 거야. 하지만, 죽을 거라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 바엔, 엄마에게 버려져 방황할 바엔, 심장이 너무 아파서 매일 밤 눈물을 쏟을 바엔. 그럴 바엔 죽는 게 나아. 

아기 토끼가 눈을 질끈 감았다. 토끼의 귀여운 표정을 바라보던 백금발의 남성이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대를 기다리는 펭귄 한 마리가 있네. 그대가 필요하네. 무서워하지 말아. 널 죽이려는 게 아니야. 펭귄이 네가 필요할 게야. 어서 가보도록 하게나.”

 

...

 

하루도 빠짐없이 토끼는 펭귄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작은 아기 펭귄은 홀로 버려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기 펭귄의 작은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펭귄이 안쓰러워 보이는 한편, 저 애가 죽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테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날 버리지 말아 줘요. 따뜻한 품으로 안아 줘요.

―아무나 와서 날 잡아가세요. 날 죽이세요. 날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주세요.


펭귄의 마음속 울림이 또렷이 들렸다. 펭귄은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인 차가운 눈 위에서 펭귄이 몸을 움츠렸다. 냉랭한 바람이 그의 등을 쓸고 지나갔다. 펭귄이 덜덜 떨고 있었다.

너도 나와 같아. 너도 부모에게 버림받은 거지.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널 사랑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지.

테오는 펭귄의 근처로 다가갔다. 펭귄이 눈을 들었다.

 

“네가 좋아. 나랑 같이 가자.”

 

펭귄이 좋았다. 갈 곳을 잃은 펭귄. 사랑받지 못한 여린 아기 펭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마치 테오 자신의 모습과도 같은 연약한 펭귄이 사랑스러웠다. 아무도 널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내가 널 사랑해줄게. 그러니까 나와 함께 가자. 우리 둘 다 혼자잖아. 하지만 우리가 함께한다면 더는 혼자가 아니야. 

마음으로 말을 삼키며, 아기 토끼는 펭귄의 등에 올랐다.

 ―<토끼의 우울> 끝.

 


5월 19일, 아침. 어느 해협

 

인간은 물을 사랑한다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양수 속에서 자란 인간은 자연히 물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차가운 물이 온몸을 덮는다. 나는 물을 사랑한다. 내 몸을 덮는 고요한 물의 행적이 나를 집어 삼킨다.

달과 별의 중력에 이끌린 행성의 바다는 때로는 느슨하게, 또 언젠가는 다급하게 흔들리고는 한다. 내 얼굴에 스치는 차가운 물살이 나의 잠을 깨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뺨을 간지럽히는 연한 물살에 도리는 깊은 잠에서 일어나 눈을 떴다. 다리가 무거워 허리 아래쪽에 눈을 돌리니, 허벅지와 종아리가 온통 물가에 잠겨 있었다. 

도리는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물결을 만들었다. 바르르 떨리는 수면이 거품을 만들어 내고, 그 곁에 동동 떠 있는 하얀 다람쥐가 두 눈에 들어온다.

 

“다람 씨.”

 

다람은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도리는 하얀 다람쥐를 품에 꼭 껴안았다. 촉촉이 젖은 다람쥐의 새하얀 꼬리가 바람에 흩날려 번들거린다. 도리는 다람쥐의 코에 입술을 맞춘다.

 

바닷가에는 가족들과 함께 물놀이를 즐기는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부모들이 있었다. 모래사장 위에서 바비큐와 버섯, 향신료를 뿌린 마늘을 굽는 사람들이 보였다. 

밀물과 썰물이 모래를 어루만진다. 도리는 하얀 다람쥐를 품에 안고 그 곁에 가만히 서 있었다. 

발밑에, 다람의 셔츠와 바지가 놓여 있었다.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여기가 정확히 어디인가요?”

 

도리는 다람의 옷가지를 챙겨 들고 바비큐를 굽는 사람들 곁에 다가갔다. 한 남성이 고기를 뒤집었고, 옆에 서 있던 여성이 접시 위에 고기를 놓고 썰고 있었다. 

남성은 도리를 바라보다 방긋 웃었다. 마치, 도리를 처음부터 알고 있다는 듯이.

 

“여긴 서해 연안이에요.”

 

남성의 말을 듣던 도리는 발아래로 눈길을 돌렸다. 어린 남자아이가 도리의 바지를 꾹꾹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리는 허리를 숙여 쪼그려 앉아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도리의 예쁜 눈을 바라보던 아이는 얼굴을 붉히며 쭈뼛거렸다. 도리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족 여행을 오셨나 봐요.”

 

도리가 고기를 굽는 남성에게 물었고, 아이는 곧 도리의 품에 안긴 하얀 다람쥐에게 관심을 돌렸다. 남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가족 여행을 왔죠. 날이 좋아요. 곧 유월이 될 테고, 더워지기 전에 바다 한 번 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당신은요?”

 

도리는 몸을 일으켰다. 남자아이는 하얀 다람쥐를 품에 안아보고 싶어 난리를 부렸다. 꿈나라에 빠진 하얀 다람쥐의 숨결이 도리의 가슴에 닿았다.

 

“갈 곳을 찾고 있어요.”

 

도리의 대답을 들은 남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도 여행을 온 게 아닌가요? 동물학자인가요?”

 

남성의 눈길이 하얀 다람쥐에 가 닿았다. 도리가 고개를 흔들었다.

 

“대답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잘 있어, 아가야.”

 

도리는 방긋 웃어 보였고, 아이의 머리를 짓궂게 헝클어뜨렸다. 도리가 발걸음을 옮기자 도리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도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맨발로 모래사장을 걸었다. 

잠시 멈춰 서서, 다람쥐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다람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로랑의 집무실

 

그 사건이 벌어진 후, 로랑은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은빛 머리칼의 남성이 레빈을 안아 들고 사라져 버리는 그 장면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남성은 로랑 만큼 키가 컸고, 어깨가 넓고 단단해 보였다. 레빈과 같이 눈동자가 금색이었고, 아름다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레빈과 남성은 도대체 무슨 사이일까. 둘은 어떤 관계일까. 

그 생각을 하느라 업무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둘은 그날 밤, 함께 잠을 잤을까? 관계를 맺었을까? 유성우가 떨어지던 날 로랑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안기던 백금발의 남성을 떠올렸다.

 

“로랑, 나를 사랑해주게.”

 

그런 말을 속삭였던 사랑하는 이를 떠올렸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노력해 봐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고, 툭하면 부하들을 거침없이 썰어 버리는 그 남성이 도대체 뭐가 좋단 말인가. 뭐든 마음이 끌리는 대로 처리해 버리는 그 악독한 상관이 뭐가 그렇게 좋다는 것인가. 

로랑은 고개를 내저었다. 레빈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무척이나 괴로웠다.

 

그때,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념에 빠져 있던 로랑은 한숨을 푹 내쉬고서 입을 열었다.

 

“들어오십시오.”

 

무뚝뚝한 말투로 대답하자, 이윽고 문이 열렸다. 작은 오목눈이 한 마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의자에 걸터앉아있던 로랑은 오목눈이와 눈이 마주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오목눈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보게, 로랑 소령. 그런 차림으로 예를 갖추어 봤자 우스꽝스러울 뿐이지 않습니까?”

 

오목눈이의 말에 깜짝 놀란 로랑은 자신의 차림을 훑어보고는 더욱 소스라치게 놀랐다. 로랑은 잠옷 차림으로, 게다가 발에는 거실용 털 슬리퍼를 신고서 오른손만 펼쳐 들고 이마에 대고 있었다. 

로랑은 헐레벌떡 고개를 숙였다. 오목눈이는 괜찮다는 의미로 날개 한쪽을 흔들어 보이더니 소파로 총총 걸어가 앉았다. 로랑은 탕비실로 후다닥 달려가 차 한잔을 가져왔다.

뜨거운 다즐링을 홀짝이던 오목눈이는 그 곁에 놓인 쿠키 한 조각을 잘라 입에 넣었다. 오목눈이의 작은 부리가 오물오물 움직였다. 

로랑은 그의 앞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상관님을 뵈었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로랑의 앞에서, 오목눈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광대한 날개를 펼쳐 보이며 그 위엄을 자랑하던 독수리가 어느 새 쪼글쪼글 몸을 움츠리고 있어서, 잠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오목눈이가 마른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로랑 소령.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고 부하를 죽이는 그런… 나는 그런 생물이 아닙니다. 그대가 사랑하는 레빈 대령님과 나는 다르단 말입니다.”

“상관님…”

 

로랑의 눈빛이 촉촉했다. 오목눈이는 로랑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다즐링을 한 모금 길게 마셨다.

 

“레빈 대령님과 총대장님이 이곳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찻잔을 컵 받침에 내려놓은 오목눈이의 눈빛이 달라졌다. 로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사라지셨다니, 대체 어디로…말입니까? 총대장님이라는 건…의회가 열린 날 등장했던 은빛 머리의 남성이 총대장님이라는 말입니까?”


예상치도 못했다는 듯 로랑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오목눈이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쿠키를 집어 먹었다. 아삭아삭, 하고 쿠키가 치아에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습니다. 그대와 플로라, 그리고 알베르트, 슈, 마지막으로 테오는 그 사실을 몰랐겠지만, 그 남성은 총대장님이십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대령님을 찾아내야 합니다. 아무래도, 우주의 법을 어기고 ‘이야기의 흐름’을 깨부술 생각이신 듯합니다. 

그대도 알고 있듯이 우리는 ‘우주의 질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탓에 온 우주가 혼돈에 빠져 버렸습니다. 내가 대령님을 대신하여 자네에게 임무를 맡기겠습니다.”

“잠, 잠깐만요, 상관님.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게다가…”

“로랑. 난 말입니다.”

 

로랑의 말을 끊은 오목눈이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고, 로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앞에 앉은 작고 하얀 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4행성을 샅샅이 뒤져 검은 도토리와 하얀 다람쥐를 찾아내, 그 둘을 없앨 것입니다. 그대가 그 임무를 맡아 주어야겠고요. 당연하지만, 그대에게 선택권은 없습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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