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분석글을 쓴 지 약 4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혹시라도 3편을 기다렸을 사람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어서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 죄송합니다.

새로운 진도를 나가기 전에, 전편에 소개했던 "이제 끝났어, 아름답지 않으면 살 의미가 없어"라는 대사를 다시 짚고 넘어가고 싶다. 나는 이 대사를 옛날의 별 볼 일 없던,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기 두려운 하울의 마음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하울의 아름다움을 향한 집착은 그 이상의 것이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악마와의 계약으로 괴물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이라던가.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하울의 몸에서는 검정색 깃털이 솟아난다. 하울이 그토록 끔찍하게 싫어하는 검정색. 자신의 아름다운 몸은 칙칙한 털로 뒤덮이고, 고운 손 대신에 날카로우면서도 거친 발톱이 자리한다. 완전히 괴물화가 되었을 때, 그의 두 서슬퍼런 눈과 투박한 부리를 보고 "아름답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계약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하면 하울은 그런 괴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이를 깨닫게 된 하울은 얼마나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까. 혹시라도 이런 괴물로 평생을 살아야하는 것은 아닐까, 당연히 무서울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하울의 아름다움을 향한 집착이 더욱 이해가 간다. 아름답지 않으면 자신은 계약에 진 괴물 그 이상 이하의 존재도 아니게 된다는 공포가 묻어있는 것이다.

겁(이란 겁은 혼자 다) 먹은 하울과 그를 구해줄 유일한 사람인 소피의 이야기로 다시 들어가본다.

너를 위해서라면

설리먼이 보낸 추격대와 거리가 멀어진다. 하울은 소피에게 5분 동안 보이지 않게 해줄테니 도망치라고 말한다. 물론 최선의 방법은 함께 도망치는 거겠지만, 이대로는 소피와 일행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차라리 자신이 미끼가 되어서 설리먼의 부하들을 따돌리는 편이 낫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소피에게 이미 길을 되찾아 올 수 있는 반지를 주었다. 소피라면 의심의 여지 없이 안전하게 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뭐, 그래도 설리먼에게 위치는 다 들켰을 테니 어차피 이사는 가야겠지만 말이다. 지금쯤이면 이미 성의 입구들에 설리먼이 보낸 부하들이 쫙 깔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 역시 가장 안전한 곳은 성 밖에 없어. 하울은 소피 일행과는 반대쪽으로, 소피의 환영과 함께 날아간다. 무사 비행을 기원해.

소피도 없는 지금, 남은 건 설리먼의 부하들을 처리하는 일뿐이다. 그들을 따돌리는 건 쉽다. 하지만 이들이 소피의 흔적을 따라가 괴롭힐지도 모른다. 뒤쫓아가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려면 마법으로 처리하는 수 밖에... 그나저나, 누군가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자신이 전면으로 나선 적이 있었던가, 잠시 생각하면서 하울은 짐짓 미소를 짓는다. 하울의 몸이 점차 일전의 끔찍한 야수로 변해간다. 그래, 너를 위해서라면. 

하울의 굵은 포효에 피비린내가 뒤따른다. 

사라진 기대

지쳤다. 악마에 마음을 모두 빼앗긴 자들과 다투는 건 쉽지 않다. 대화로 해결하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이미 야수적인 본능 밖에 남지 않은 이들에게 무엇을 바랄까. 하울은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눌러 참으며 소피가 있는 성으로 돌아온다. 인간의 몸으로 다시 돌아오기도 쉽지 않다. 마법을 너무 많이 사용해버린 걸까, 생각하면서 하울은 조용히 계단을 오른다.

이런 끔찍한 나의 모습을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울은 방문을 열고, 깊은 구석으로 파고든다. 그의 우울과 좌절은 동굴을 이룬다. 동굴에는 하울이 어릴 적부터 잘 갖고 놀던 장난감, 마법 도구 등의 추억이 깃든 물건이 빼곡히 박혀있다. 이 동굴은 하울의 마음의 표상 (representation). 비록 마법으로 꾸며진 공간이래도 지금의 우울한 자신을 달래줄 수 있는 곳은 이곳 뿐이다.

고개를 기울이고, 천천히 숨을 들이쉰다. 동굴의 쿰쿰한 흙 냄새와 물 냄새가 코를 통해 들어온다. 나에게는 이런 어둠이 어울려, 하고 생각하는 하울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하울, 하울이지?

소피다. 잠든 줄 알았던 소피가 기어이 촛불을 들고 이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저렇게 환한 촛불이라니.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하울은 등을 돌린다. 자신의 이런 흉측한 모습을 소피가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앞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소피는 하울에게 다친 것이냐 물어보고, 하울은 다가오지 말라고 대답한다. 녹슨 철판을 긁는 듯한 그의 낮은 목소리에는 절망감이 서려있다. 

널 돕고 싶어, 너의 저주를 풀고 싶어.

소피는 괴로워하는 하울에게 다정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마음이 이죽거린다. 당초 기대와는 달리 자신의 저주도 풀 줄 모르는 소피가 자신을 도와줄 거라고는 바라지 않았다. 이제는 저주가 풀릴 거라는 희망도 없다. 그저 저주가 나의 몸을 삼키기 전에, 소피가 안전하도록 지키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하울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모난 말을 한다. 너 자신의 저주도 못 푸는 주제에, 남을 도울 생각을 하냐고. 

하지만 소피는 굴하지 않고 당차게 대답한다. 

난 하울을 사랑한단 말이야!

사랑. 소피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누군가는 사랑이 가장 강력한 마법이라고도 하지만, 하울이 그런 낭만에 빠질 인물이던가. 누구보다 현실적인 그의 판단에는 섣부른 절망이 따라온다. 억울함, 화, 그리고 포기의 심정을 담아 하울은 소리친다.

이미 늦었어!

하울은 애먼 화풀이를 하곤 자리를 피한다. 그녀의 다정함에 자신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 없었는데. 소피가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잘 아는데. 하울은 어둠 속을 가르며 생각한다.

혼자 남을 소피를 위한 준비

아침이 밝았다. 하울은 밤새 앓은 끝에 겨우 인간의 모습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언제 설리먼에게 붙잡힐지 모른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전쟁을 막는 것이지, 전쟁에 동원되는 게 아니다. 자신이 괴물이 되어 사라져버린대도 소피가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 안식처를 만들어 두어야 한다.

구둣 소리를 시끄럽게 내며 나무 계단을 내려온다. 아침 식사를 하는 일행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넨다. 어젯밤에 그런 일도 있었으니, 애써 더욱 밝은 척을 한다. 소피는 하울에게 무사했냐고 덤덤하게 물어온다. 설리먼의 개, 황야의 마녀, 별난 저주에 걸린 청년까지. 이렇게 돌이켜 보니 우리 성에는 정말 독특한 사람들만 모여있단 말이야, 물론 나를 포함해서.

하울은 오늘은 이사를 하는 날이라며, 설리먼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일행에게 이사의 목적을 설명한다. 물론 이렇게 마법을 써버리면 자신이 괴물로 변하는 순간이 더욱 가까워질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은. 

야외 마법진을 그리고, 소피 일행을 식탁 위에 앉힌다. 스케일이 큰 마법이다 보니, 캘시퍼의 힘이 없으면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캘시퍼를 손에 든 하울은 조용히 마법 주문을 속으로 되뇌인다. 이내 캘시퍼의 불꽃이 방안 가득 타오르기 시작하고, 집안의 구조가 변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다같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구조. 이제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한 집이 아닌, 소피와 친구들에게 안락함을 안겨줄 수 있는 그런 집. 그리고 이제는 평원이 아닌, 소피가 사랑하는 기찻길 옆 모자 가게에 자리할 수 있도록.

이사가 끝이 난다. 하울은 소피를 위해 마련해둔 곳들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다. 

가장 먼저 자랑하고 싶은 곳은 새롭게 만든 방, 소피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해터스 모자 가게의 작업실이다. 방에 들어선 소피는 당연히 놀라워한다. 소피라면 어떻게 하울이 방을 알고 있지, 하고 생각하겠지. 하울은 천연덕스럽게 "소피의 방으로 하려고 하는데 마음에 들어?"라고 묻는다. 소피는 청소부에게 어울리는 방이라며, 시큰둥한 체를 한다. 참, 소피도 솔직하지 못하긴.

다음으로 야심차게 보여주고 싶었던 곳은 자신의 비밀 정원. 소피와 처음으로 만났던 운명의 장소. 물론 지금의 소피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성의 문을 연 하울은 소피를 위한 선물이라며, 소피를 이끌고 밖으로 나선다.

소피는 정원의 화려한 꽃들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렇게 한창 신나게 뛰어다니다가, 갑자기 멈춰서서는 멀뚱히 지평선을 바라본다. 하울은 나지막하게 소피의 이름을 부르고, 돌아본 소피는 의외의 말을 한다.

이상해, 전에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아. 눈물이 나오네.

그런가, 소피도 어느 정도 마력이 있는 사람이었지. 그러니까 가끔씩 불쑥불쑥,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풀었던 거야. 하울은 혼자서 생각하면서 소피에게 손을 내민다. 여리고 고운 소피의 손이 그의 손마디를 붙든다.

하울은 어릴 적 자신이 혼자서 여름을 지내곤 했던 작은 집을 소개한다. 마법사였던 자신의 삼촌이 자신을 위해서 남겨줬던 소중한 은신처임과 동시에, 소피를 만난 추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소피와 공유할 수 없는 자신만의 추억이라는 건 마음이 조금 아프지만, 어쩌겠어. 어차피 괴물로 변하고 나면 자신조차도 다 잊어버리고 말텐데.

소피는 마음대로 써도 돼, 라고 하울은 말하며 소피를 집으로 데려가려 한다. 그의 말에서 왠지 모를 한기를 느낀 소피는 하울의 손을 놓는다. 하울은 놀란 표정으로 뒤돌아보고, 소피는 저 집에 가면 하울이 떠날 것 같아서 두렵다고 말한다. 그렇다, 하울이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는 얕은 수 쯤은 소피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실을 말해줘,
난 하울이 괴물이라도 괜찮아.

강한 믿음, 소피의 말에는 항상 따뜻한 정과 신뢰가 느껴진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 저주가 풀리지 않는 이상 하울이 소피와 함께 할 수 없다. 괴물이라도 받아들여주겠다는 소피의 말에 괜히 기대고 싶은 어린 마음을 접고, 하울은 소피에게 다가가 말한다.

난 모두가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고 싶어.
소피라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진심이다. 자신이 없더라도 이 정원의 꽃을 따다가 꽃집을 운영하면, 소피도 아마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소피를 안심시켜주려고 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답이 들려온다. 

그럼 하울은 떠나는 거야?
난 하울에게 힘이 되고 싶어.

소피의 눈에 빛이 아른거린다. 저 반짝임에 의지하고 싶다. 하울이 소피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다. 어쩌면 소피는 정말 하울의 저주를 풀어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피는 늘 자신의 능력을 낮추어본다. 그녀의 솔직하지 못한 마음, 낮은 자존감이 잠자고 있는 능력을 흩트러지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소피는 뒤이어 "비록 예쁘지도 않고 청소 밖에 못해도..."라고 잔뜩 위축된 말을 내뱉는다. 하울은 바로 부정하지만, 소피는 또다시 자기 의심으로 가득한 노인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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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진짜 다음 편을 마지막으로 가져오겠다. 너무 풀 떡밥이 길어졌다. ㅠㅠ 다음 편은 오늘 밤 중에 작성해 내일 아침 업로드.

평범한 직장인 / ne00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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