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라고 한다면 사실 아버지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아버지가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어렸을 때 돌아가셨으므로 어머니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다. 한 4개월이 지나면 1주기가 되는데, 나는 여전히 종종 할아버지(또는 할배, 할비, 할바시)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날 때도 있다. 각별하게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는 이유는 내심 내가 할아버지를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겠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를 포함한 손주들을 가르치는 데 꽤 열성이 있었다. 조기교육으로 (당시) 준 영재급으로 영어를 잘하던 나를 성당에서 자랑하기 바빴으며, 나는 할머니에게 한글과 구구단, 시계를 읽는 방법을 배웠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할머니는 격변의 시대에 공무원으로 일했고 아마 모자라지는 않게 배운 모양이었다. 기억이 없는 영아기에는 다른 이모의 댁에서 자랐지만 뇌에 기억이 남겨지기 시작한 유아기, 특히 내 동생이 태어나고나서는 나는 하루 24시간 중 내가 살던 효자동 집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던 완산동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것은 나와 내 동생이 어느정도 앞가림을 하게 된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생 때까지 계속 되었다.

으레 머리가 자란 손주들이 그렇듯, 모계와 친했고 물리적으로 가까이 살았던 우리는 그나마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보러 종종 완산동 그 집에 가곤 했지만 가끔 귀찮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두 분께 용돈을 받는 것이 죄송스러웠다. 그러던 중 가족의 불화로 나는 집을 떠나게 되었고,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집에 다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사실 집을 나간 뒤로 1년에 한 번은 두 분을 뵈러 갔다. 한 번은 제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봐달라고 어머니가 사정했기 때문이었고, 몇 번은 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년기를 보낸 내 고향같은 완산동은 많은 집이 헐렸고, 우리가 모험을 했던 골목 자리에는 새 아파트가 들어섰고, 아버지와 이모부들을 찾아 나섰던 오랜 술집은 문을 닫은지 오래였다. 다만 할아버지가 오토바이를 산 그 가게는 아직 문을 닫지 않았던데, 나는 버스를 타고 그 가게를 볼 때면 가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했다.

할아버지는 때로 좋은 아버지나 좋은 남편도, 좋은 할아버지가 아니곤 했지만 그래도 내 곁의 든든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을 나왔다는 걸 이야기해야하나? 그래도 가족인데, 네가 이해해라 같은 이야기를 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친척들에게도) 거짓말을 했고, 나는 그 거짓말에 탑승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만약 할아버지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었겠지.

할아버지는 지긋지긋하게도 필사를 해댔다. 폐암으로 입원해 생사의 기로에 서기 직전까지 자신의 약봉투에 필사를 했다. 유품을 정리하는 와중에 몇개가 나왔는지 모른다. 할아버지가 학교를 마치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 할아버지는 어떤 학교를 다녔을까? 다 헤진 초등학교 졸업사진을 보며 결국 그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다. 어쨌든 할아버지는 많은 책들을 베꼈고, 천재같은(사실 천재 아니라 좆밥이었다네요...ㅈㅅ함다) 손주가 공부를 계속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사람은 공부를 해야한다며 열심히 하라고 응원해준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마 그래서 더욱 할아버지께 미안한 마음과... 여러 기분이 드는 거겠지.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에 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한 번 더 보러 갈걸이라는 생각과, 그깟 책이 얼마나 비싸다고 내가 쓴 책 좀 드릴 걸 하는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앨범 속 할아버지는 꽤나 멋졌는데, 파란 베스트에 노란 셔츠를 입고 보잉 안경을 쓴 모습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할머니 피셜 할아버지는 몇 안되는 잘생긴 사람 중 한 명인데, 키도 훤칠하고 옷도 잘 입어서 참 부럽다 싶었다. 그래서 그런가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은 굉장히 잘 나온 편이었는데, 나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날 붙들고 우는 어머니와 아버지보다 그 잘 나온 영정사진을 보며 '영정사진 잘 뽑혔네'라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하고 말았다.

나는 어쩐지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에 가고 싶지 않았는데, 그 당시에는 가족들을 다시 봐야한다는 것이 너무 싫다고 이야기했지만 어쩌면 할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장례식에서, 화장터에서, 하얀 자기에 담긴 할바시를 보면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 게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장례식이 끝나고 어머니는 두툼한 돈봉투를 건넸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백여만원을 남겨줬지만 나는 차마 이것을 저금하지 못하고 꽁꽁 갖고만 있다. 할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면 큼큼한 지폐냄새를 맡기 위해서. 

여전히 성당은 나가지 않지만, 나는 괜히 하느님에게 협박한다. 정ㅇㅇ 마태오 형제를 하느님 아버지 곁에서 잘 보살펴주지 않으면 정말로 내가 지옥에 갈 거라고.



눈 밑에 점이 있으면 음기가 강하다 그런데 난 두 개 ( ・ิϖ・ิ)っ

이점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