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패치

* 욕설주의 교육적이지 못한 내용 주의




 그렇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구 좆되네. 작게 말했는데 들은 건지 옆에서 친구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치 그치? 쟤 봐, 노란 머리. 쟤 포지션이 세터라는 건데……. 포지션 설명으로 시작해서 얼굴 칭찬으로 전이되는 일련의 과정을 들으며 나는 이 체육관을 부유하는 먼지라도 되는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배구 강호교라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넓은 체육관과 꽤나 높은 2층 관람석이었다. 그렇게나 널찍한데 왜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는 걸까.


˝나이스 킬!˝


 걔. 스나 린타로. 유니폼을 입고, 코트 안에 서있는.




4

 스나 린타로가 우리 학교 배구부 사이에 껴 있었다. 같은 학교였어? 운동하는 애였어? 나는 어이가 털려 말을 잃었다. 말이 나온다고 해서 걔한테 너 뭐냐고 소리를 지를 것도 아니었지만. 걔랑 내가 새삼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서로 뭐 굳이 안 봐도 될 모습은 다 봤는데. 정작 같은 학교 다니는 줄도 몰랐다는 사실이. 애초에 나는 걔 이름이라도 알지만 걔는 내 이름이나 아는지도 의문이었다. 이상한 거리감이었다.

 오늘 나온 애들 중엔 1학년도 많대. 이거 친선이거든. 우리 학굔 워낙 잘해서 1학년 중엔 레귤러 별로 안 나와. 근데 이번 1학년들은 대박이라더라. 일단 쟤네, 똑같이 생긴 애들 있지? 쌍둥이인데 잘 하고……. 나는 친구가 해주는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중엔 스나 린타로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대충 잘 한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배구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우리 쪽이 잘 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기술이나 규칙 같은 건 잘 모르는 눈이더라도 알아챌 수 있는 것들. 다들 키며 덩치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이라든가, 공이 무척이나 빨라 한 대 맞았다간 나 같은 건 골로 갈 수도 있겠다는 사실이라든가. 그리고,


˝아웃!˝

˝괜찮아, 다음!˝

˝와…….˝

˝1학년 센터 빡세노…….˝


 스나 린타로의 눈이 내게 보였던 서늘함은, 본인 수준에서 서늘한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 같은 것들.

 바, 방금 봤지? 쟨 블로컨데, 스파이크가 저래……. 방금은 아깝게 아웃이었지만. 하 씨, 진짜 개지린다. 친구가 꼴딱 침을 삼키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그럴만 해. 다른 선수들보다 배로 휘어지던 두꺼운 몸. 나는 저 앞에 바짝 다가가 선 적도 있었다. 검고 매끄러운 옷감 위로도 걔의 움직임은 오싹했지만, 유니폼 아래의 몸은 방금 그 모습보다도 무시무시하다고 말할 수 없어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뭐야. 그 민망할 정도로 무기력하던 분위기는 다 어디 가고. 나는 내가 딱히 뭘 당한 건 아니지만 억울해지는 기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모습도 무기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낯설어. 그렇게 생각하며 뒤로 몸을 기대는 순간.


˝…….˝

˝어때, 나 따라 오길 잘했…… 너 왜 그래?˝

 

 눈 마주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피했다. 아니 씨발. 방금 왜 피했지? 나는 원래 사람 눈 잘 안 피한다. 사람 눈 잘 마주 보는 건 내가 나름 자랑거리로도 생각하는 점이었다. 근데 방금은 왜. 다시 걔 쪽을 보자―시합 중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리시브 자세를 잡고 있었다. 어쩌면 눈 마주친 게 착각일지도 몰라. 워낙에 먼 거리니까. 그리고 내가 아니라 화려하게 꾸민 옆의 친구를 본 걸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내 생각이 맞았는지 그 후로 다시는 눈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같은 학교였다니. 내 교복을 보고 이나리 어쩌고 물어본 것도 그래서였나. ´나도 같은 학교인데´ 따위의 말을 덧붙이며 반가움이나 친밀감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야 걔 성격을 생각하면 뻔한 일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경기는 끝났다. 나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잡으며 친구를 따라 박수쳤다.

 1층으로 내려오는데 친구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나더러 기다리라 말했다. 왜냐고 물으니 상대 팀 세터 번호를 따와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완전 자기 스타일이 어쩌고 하더니 날 두고 수줍은 걸음으로 가버렸다. 역시. 의도가 다분한 직관이었구만. 갑자기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체육관 구석에 서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내 머리 위에 손을 턱 얹어왔다.


˝뭐하노, 쫌싸.˝


 멸치 친구 멀대였다. 쫌싸는 쪼매난 싸가지라는 뜻이다. 난 별로 쪼마나지 않다. 멀대 이새끼가 지 키 크다고 이지랄하는 거였다. 이새낀 키부심이 대단했다. 지랑 별로 차이 안 나는 애들도 지보다 작기만 하면 쪼마나다고 말했다. 나는 몸을 빼며 대답했다.


˝쟤 기달려.˝


 멀대는 내가 고개로 가리킨 쪽을 보더니 배를 잡고 웃었다. 점마도 앵간하다, 너거 배구 보러 간다 카디만 니 쟈 연애사업에 고마 낑겨온 기고. 얼마나 요란하게 웃는지 사람들이 지나가며 흘긋흘긋 쳐다봤다. 좀 닥치라고 쿠사리를 먹이는데 곧 멸치가 나타나 한참 찾았다느니 어쨌다느니 툴툴댔다.


˝왜 찾어.˝

˝와긴 와고, 아들이랑 시내 가기로 했는 거 까뭇나.˝

˝엥, 그랬어?˝

˝내 이칼 줄 알았다. 니 또 탕 놓을라 하제. 오늘은 택도 없디.˝


 멸치는 으름장을 놓으며 내 목에 헤드락을 걸었다. 안 놔? 이 씹탱, 멸치의 팔을 팍팍 치며 발광을 하고 있는데 멀대가 내 뒤를 향해 인사했다.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 쫌싸 솜주먹이고, 오늘 고기 한 판 때려뿌야지 안되겠다, 지껄이는 멸치에게 좆까라고 말했다. 진짜 노느냐고 묻자 그렇다는 답이 돌아온다.


˝어디 가는데. 누구누구 감?˝

˝뻔하제. 지금 우리 빼고 아들 다 요 앞에 샐바 내려가고 있다. 오빠야 한 까치 빨고 드갈 테니까 쪼매만 기둘기둘.˝


 아님 같이 빨래? 멸치는 그렇게 말하며 진짜 가오 좆도 안 사는 포즈를 해보였다. 야…… 너 진짜 뒤지고 싶은가봐. 내 대답에 낄낄대는 틈을 타 녀석의 옆구리에 한 대 먹이고 나는 멸치의 팔을 빠져나왔다. 제발 내 표정에 극혐이라는 티가 되도록 많이 나길 바라며 그럼 먼저 내려간다고 말하기 위해 멀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근데. 진짜 뭐랄까.


˝야, 나 먼저…….˝


 진짜 구려. 사람이 이보다 타이밍이 구릴 수 있을까. 왜 하필이면 거기에.


˝…….˝


 스나 린타로가.


˝쫌싸 와. 집 가나? 아, 임마 우리반 일등 싸가지다.˝


 스나 린타로가 멀대 옆에 서 있었다. 얜 왜 이렇게 내 주변 사람들이랑 커넥션이 많아? 나 빼고 내 주변 사람들이랑은 다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멀대가 스나 린타로에게 나를 소개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애쓰며 걔를 올려다 봤다. 세상에. 큰 줄은 알았지만…… 스나 린타로가 멀대보다도 컸다. 멀대가 키부심이 오져서 그렇지 실제로 걔보다 큰 애가 없었는데. 그리고 뭔가 얘가 멀대보다 큰 건 키만이 아니라……. 나는 나를 내려다 보는 그 눈빛에 마른침을 삼킨다. 타월을 두르고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무심한 얼굴로 나를 보는 그 애는 뭐랄까, 계속 보고 있기 좀 그런 아우라를 풍겼다. 다른 사람 같아. 얘가 보는 지금 나는 어떨까. 별로 좋게 보이진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옆에서 헛소리를 지껄인 멸치를 존나 패주고 싶었다.

 모호한 상황이었다. 아는 척을 해야 하나.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 당황한 티를 안 내려고 애쓰는 나도 나지만 걔야말로 침착함의 극치였다. 하긴 마주칠 때마다 민망해하는 건 나 뿐이었지. 갑자기 재수가 없어진 나는 그냥 적당히 둘러대자 마음 먹고 입을 열었다.


˝알아.˝


 근데 선수쳤다. 스나 린타로가. 타인을 한 번씩 거친 사이로 둘러싸인 미묘한 거리감을 먼저 깬 건 걔였다.




5

 우예 아노? 화들짝 놀란 멀대가 반사적으로 묻는 목소리에 나는 긴장했다. 하지만 스나 린타로는 그냥 좀, 이라는 말로 간단히 걔의 입을 틀어 막았다. 그렇게 말하며 자기를 흘긋 보는 스나 린타로에게 멀대는 무슨 말을 더 붙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가까운 건 아닌가 보네. 하긴. 좀 안 어울리는 조합이긴 했다. 스나 린타로와 멀대 무리는. 나는 불편한 공기가 더 씹히기 전에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다고 대충 둘러대며 튈 각을 쟀다. 세 쌍의 눈이 동시에 내게 꽂혔지만 고기고 뭐고 지금 여기 더 붙어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마침 코트 쪽에서도 누군가 스나 린타로를 불렀다.


˝뭐고, 진짜 가나. 니 잡아갈라고 고마 마중까지 왔디만 쌀쌀맞노.˝

˝지랄. 본관이랑 체육관이랑 얼마나 된다고. 하여튼 오늘은 니네끼리 놀아. 급한 일이라 먼저 간다.˝


 어어, 애들이 뭐라 말을 더 하려 하길래 나는 잽싸게 발을 뺐다. 내가 그렇게 빨리 걸을 수 있는지 몰랐다. 등 뒤에서 스나 린타로의 그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교문 밖을 빠져 나와서야 걷는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생각해보니 걔의 좀 이상했던 것들이 아다리가 맞아 떨어졌다. 배구부 아침 연습 있다던데, 첫차를 타고 나가서 한 번도 등굣길에 마주친 적이 없었구나. 최근 부쩍 집에 밤 늦게 들어오는 일이 늘어난 나는 오히려 하굣길에 그애를 마주치는 일이 더 잦았고, 걔는 그때마다 운동복을 입고 있었던 것도. 이제 고등학생 막 된 애 몸이 그렇게 좋았던 것도 그래서였고. ……. 나는 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에 막 손부채질을 했다. 걔가 앞에 있을 때 그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걔가 나를 안다고 말했다. 그야, 알기야 알지만. 걔는 그냥 안다고 말한 것 뿐이지만. 왠지 무슨 의미였을까 자꾸만 생각하게 되는 내가 이상했다. 걔한테 내가 어떻게 보였을지 계속 신경쓰는 내가 이상했다. 이상한 건 나를 그렇게 만드는 걔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이면, 내가 이상했다. 이래서야 마치…… 내가 걔를 좋아하는 것 같잖아.


*


˝…….˝


 나에게 아주 민망하고 간지럽고 사적인 사정이 생긴 것과 별개로, 이 몸은 참 효녀인 자식새끼라서, 자식으로서 하는 생각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엄마도 직장 동료 말고 친구가 많이 생기면 참 좋을 텐데. 그래서 퇴근하고 나서도 직장 상사 욕을 속 편히 털어놓고, 남편과 떨어져 사는 유부녀의 고충 같은 것도 좀 나누고. 근데 씨발 이거는 좀 아니지.


˝뭐 해? 얼른 나와.˝


 언제 미숙이 아줌마랑 그렇게 친해졌는지? 나는 지금 아랫집이 초대한 저녁식사 자리에 내려가는 길이었다. 이사 오고 같이 제대로 밥 한 번 먹은 적 없다며 아줌마가 저녁 한 끼 같이 하자고 했단다. 진짜 의리갑이었다. 저돌맹진 우리 삼촌이랑 친해진 이유가 있었다. 우리 외가 사람들과 아주 쿵짝이 잘 맞는 스타일이신 모양이었다. 엄마는 벌써 미숙이 아줌마랑도 친하고 스나 린타로랑도 친하고 걔네 오빠랑도 친했다. 나만 빼고 이 집 사는 사람들은 다 친했다. 나는 치과에 끌려가는 어린애마냥 엄마에게 질질 끌려 1층으로 내려갔다. 안 가겠다고 뻐팅겼다가 웬 철 지난 사춘기 여고생 노릇이냐며 한소리 들었다. 철 안 지났는데요. 저 사춘기 여고생인디요. 존나 억울했다. 사실 억울한 마음보다 사춘기든 중이병이든 낯가림 대장이든 뭘로 보여도 좋으니 어떻게든 탈주에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하루에 스나 린타로랑 두 번 마주치는 건 사양이라고 하지 않았나. 심지어 아까 같은 상황을 겪고서 또 보는 거라니. 시간도 좀 지나고, 어? 이미지가 좀 희석되고 나서 보는 거면 몰라. 개양애취 새끼들 사이에 섞여서 욕하고 입 털다가 자기네 엄마 앞에서 내숭 떠는 나를 뭐라고 생각할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아줌마, 걔 오늘 경기 뛰어서 피곤할 거예요.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저녁은 또 같이 먹을 수 있잖아요. 아줌마한테 하소연하고 싶었다. 근데 난 못한다. 아줌마랑 안 친하니까. 씨발. 아줌마랑 친해지려면 지금 내려가야 했다.


˝어머, 네가 윗집 귀염둥이였구나? 너희 삼촌이 어찌나 자랑을 하는지 글쎄 조카 아니고 자기 자식인 줄 알았지 뭐니!˝


 호호호, 아줌마가 간드러지는 웃음으로 날 반겨줬다. 하핫…… 귀염둥이요? 존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나는 걔네 집 거실로 들어섰다. 현관 앞까지 와본 적은 있지만 안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걔네 집. 나는 조금 긴장했다. 거실에 이미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인사치레로라도 뭘 좀 도우려고 했는데 할 게 없었다. 걔네 오빠가 수저를 놓다 말고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소파에 걔가 앉아 있었다.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예의 그 후드티에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은 스나 린타로. 나와 눈이 마주친 걔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엄마한테 인사했다. 오셨어요.


˝그래 그래, 린타로는 날이 갈 수록 잘생겨지네 어쩜?˝


 린타로? 나는 귀를 의심하며 엄마를 한 번 쳐다봤다. 헐, 진짜 어이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걔는 뻔뻔한 얼굴로 우리 엄마 비위를 잘도 맞췄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살며시 자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발을 뗐다. 근데 걔가 내 이름을 불렀다. 천천히 돌아보니 나한테 인사한다. 안녕. 나는 딸꾹질이 날 뻔한 걸 참으며 반사적으로 어, 하고 대답한다. 그때 아줌마가 타이밍 좋게 나를 부르셨다. 스나 린타로는 이런 거나 닮았어야 된다는 생각을 한다.


˝딸래미― 갈비찜 좋아하니?˝


 아이고 환장하죠. 비즈니스 톤으로 대답하며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나는 얘가 몇 반인지도 모르는데 겸상부터 해야하나. 집에 까스활명수가 있었는지 생각하며 밥알을 씹었다. 밥알을 씹다 고개를 들면 맞은 편에 스나 린타로가 있었다. 진심 체할 것 같았다.


˝그래도 딸래미는 엄마 따라 이렇게 같이 와주네. 요즘 애들이 좀만 크면 글쎄 부모님 따라 잘 안 다니잖아? 우리 큰애가 딸래미만 했을 땐 어찌나 말을 안 들었는지.˝

˝어허, 김여사님. 언제적 얘기를 하셔.˝ 

˝요새 애들이 옛날 같지 않지―.˝

˝그래, 이렇게 길 가다보면 교복 떡하니 입고 담배들을 뻑뻑 피우고 있질 않나. 너도 그랬잖아, 이놈시끼야.˝

˝내 그때 엄마한테 들켜서 먼지나게 등짝 맞고 졸업할 때까진 입에도 안 댔잖아 그래.˝

˝애들이 이런다니까. 우리 딸래미는 안 그러지?˝


 콜록콜록. 나는 급하게 물을 들이키며 그럼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나는 진짜로 안 하는데 여기서 당황하면 수상하지. 이게 다 앞에 앉아 있는 스나 린타로 때문이었다. 그간 정황으로 살펴 봤을 때, 솔직히 얘가 나를 오해하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물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스나 린타로의 눈치를 살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금빛 눈동자가 굴러와 내 눈에 닿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황했다. 하지만 이번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일종의 오기였다.

 스나 린타로는 말 없이 젓가락질을 하면서 끈덕지다고 느껴질 정도로 내 시선을 훑었다. 얘는 게으르긴 해도 나쁜 친구들은 안 사귀어, 집에도 제때제때 들어오고. 최근엔 내가 야근이 잦아서 우리 딸이 언제 오는지는 잘 몰라도― 애가 워낙에 집에 있는 걸 좋아해서 뻔하지 뭐. 그렇게 말하는 우리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걔는 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음식을 씹고, 물을 마시고, 이따금씩 나와 발을 맞부딪쳤다.


˝린타로야말로 말 잘 듣지?˝

˝작은 애야 뭐, 부활동밖에 몰라. 공부는 애저녁에 놨고. 배구 하나는 재밌나봐.˝

˝어머, 어쩐지 운동 열심히 한다 했더니. 좋으네― 그런 부활동이면. 우리 딸래미도 좀 가르쳐주구 그러면 안 될까? 너도 이렇게 친구가 운동을 열심히 하는데 좋은 건 좀 같이 하자 하고 그래라. 응?˝


 친구는 무슨.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내내 침묵하던 스나 린타로가 대답했다.


˝그럴게요.˝


 식사가 끝나고 엄마와 미숙이 아줌마는 안쪽 부엌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걔네 오빠는 여자친구를 만난다며 나갔다. 나는 이제 슬슬 올라가도 되겠지 싶어 눈치를 살폈다. 숙제가 있어서요, 잘 먹었습니다. 엄마는 더 놀다 오셔. 엄마는 알겠다고 했다. 스나 린타로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는 걔를 지나쳐 현관으로 가며 안녕이라고 말했다. 걔는 대답하지 않았다. 씨, 인사 지멋대로 하네. 나는 자기 인사 다 받아줬는데. 그리고 입술을 비죽 내밀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나는, 몸을 일으키는 순간 숨을 들이켜야 했다. 스나 린타로는 어느새 바로 뒤에 다가와 서있었다.


˝잘 가.˝


 움직임이 조용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언제 온 거야. 나는 어어, 대답하며 어둑한 현관에서 문을 더듬어 문고리를 찾았다. 부엌에선 현관이 보이지 않는다. 그 사실이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근데, 가기 전에 번호 주고 가.˝


 뭐? 나는 대답하며 그 애를 올려다 본다. 내 눈앞에 걔가 만지작대던 핸드폰이 들이밀어졌다. 스나 린타로가 웃고 있었다.


˝친구잖아.˝




6

 멸치가 날 보자마자 니 스나 금마랑 어예 아노! 하면서 난리를 쳐왔다. 아니 궁금하면 그때 걔한테 물어보든가. 나는 알아서 뭐 하게, 새꺄 하고 대답했다. 아니 스나 린타로랑 아는 사이인 게 뭐 어쨌다고? 무슨 학교의 요주의 인물이라도 되는 모양인가? 멀리 있는 중학교에서 올라온 나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어제 나 빼고 잘 놀았냐 물어보니 빠꾸친 건 너니 어쩌니 열불을 내면서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열심히 자랑을 한다. 단순한 새끼. 멸치는 귀여운 구석이 좀 있었다.

 그래…… 귀엽지. 멸치 하는 말을 들으며 웃고는 있었지만 사실 나는 지금 존나 좌불안석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스나 린타로에게서 와 있었던 메시지 때문이었다. 미안한데 부탁 좀 할게. 내가 집에 뭘 두고 와서. 나는 눈을 의심했다. 걔는 자기 집 비밀번호와 함께 배구부 져지를 가져와 달라는 말을 남겼다. 오전 중에 우리 반으로 찾으러 오겠다고. 잠이 확 깨는 것과 동시에 어이도 같이 털렸다. 아니 배구부인 애가 져지를 두고 가? 이거 완전 약간 가까워지는 각인 줄 알았더니 그냥 나를 셔틀로 부려 먹기 위해 번호를 받아간 것 같았다. 버스 타러 가는 길에 조심스럽게 걔네 집에 들르니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나는 걔 방에 조심조심 들어가 의자에 걸려 있는 져지를 집어 가방에 쑤셔넣고 등교한 참이었다. 일단 그러긴 했는데, 걔가 우리 반에 와서 나한테 져지를 받아가면, 좀 그렇지 않나? 내가 오바하는 건가. 그래, 오바하지 말자. 걔가 아무리 신경쓰이기로서니 모양 빠지는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존빼시다. 존심 빼면 시체라는 뜻이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오전 중으로 오겠다던 스나 린타로는 4교시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까먹었나? 갖다 줘야 되나? 싶었지만 난 걔가 몇 반인지도 몰랐다. 점심시간에도 안 오면 멀대한테 몇 반이냐고 물어보기라도 해야겠다. 물어봤다가 괜히 또 무슨 소리를 들을까 걱정도 됐지만 필요한 거니까 굳이 나한테까지 연락해서 갖다 달라고 한 거 아냐. 그리고 점심을 먹고 교실로 돌아왔을 때 나는 괜한 걱정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문 앞에 우뚝 멈춰섰다. 스나 린타로가 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같은 교복 입은 거 처음 봐. 어딘가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어, 쫌싸 왔나. 스나 임마가 니 한참 기다렸디.˝


 걔의 옆에 서서 떠들던 멀대가 알은체를 하자 스나 린타로를 비롯한 교실 애들의 시선이 나에게 와서 꽂혔다. 배구 같이 보러 가자 했던 친구의 눈빛이 특히나 불타고 있는 걸 보며 나는 약간 좆된 것 같음을 느꼈다. 스나 린타로가 말했다.


˝별로 안 기다렸어.˝

˝오전 중에 온다더니 왜 이제 왔대.˝

˝너는 나 기다렸어?˝


 뭐야? 나는 인상을 구기며 되물었다. 아니 니가 온다고 했잖아. 말하자 그랬지, 하고 대답한다. 나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걔의 져지를 꺼내 건넸다. 멀대와 멸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고마워. 내가 챙기는 걸 깜빡하고…… 거기 놓고 왔네.˝


 스나 린타로는 옷을 받아들고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걔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멀대의 등을 툭툭 쳤다. 간다. 다음에 애들 모일 땐 나도 한 번 들를게. 멀대는 어어 그래 애들 좋아할 끼다 하며 교실 밖까지 스나 린타로를 배웅했다. 근래 본 멀대 모습 중에 제일 어색한 것 같았다. 갑자기 왜 저래? 매점에서 사온 피크닉을 쭉쭉 빨며 나는 생각했다. 배구 같이 봤던 친구가 다가와 쟤랑 아는 사이였냐고 물어봤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 좀 알긴 하는데 그렇게 친한 건 아니라 답했다. 사실이었으니까. 친구란 말마저 지나칠 정도로 우린 너무 안 친했고, 그렇다고 같은 집 사는 애라는, 안 친한데도 가까울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 관계에 대해 말했다간 더 피곤해질 것 같았다. 생각보다 친구는 더 많은 걸 캐묻지는 않았다.

 그날 남은 점심시간은 뭔가 허전했다. 피크닉을 빨고 있으면 으레 한 입 내놓으라며 달라붙던 멀대와 멸치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과몰입 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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