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야는 온통 희뿌연 안개 뿐이다. 발밑으로는 진흙이 질척하다. 눈앞, 아지랑이처럼 일본식 목재 가옥이 너울거렸다. 다가가려하지만 여의치 않다. 진흙이 발모가지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덕분이다.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몸을 비트는 사이, 더 깊은 수렁으로 몸이 잠겨가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아득한 어디론가 빨려드는 것만 같다. 귓가에는 어린 짐승이 힘겹게 낑낑이는 소리가 들린다. 하,읏…하아…….


정강이를 잡아먹은 진흙이 이제는 넓적다리를 잡아당겼다. 몸부림 쳐보지만, 역부족이다. 끝내는 머리까지 잠기리라. 부연 안개 너머로 가옥이 점차 희미해진다. 멀리서는 말이 콧김을 내뿜는 소리도 어렴풋 들리는 것 같다. 그때였다.



'선녀야!'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니 머리 크기가 몸에 맞지 않게 비대한 사슴 하나가 상연을 그윽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노려보는지도 몰랐다. 박제된 것처럼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사슴은, 서서히 잠식 되어가는 상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대,대체 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왜 여기서 죽는 신세가 된 걸까. 원망섞인 욕설이 상연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러자 먼 데서 대답이 들려왔다. 궁금한 것이 많으믄 수명이 준다 안 카요. 마스터라고 불리는 자의 실루엣이 눈앞에 쑥 나타났다. 빛을 등지고 선 사내다. 사내 옆으로는 어린 짐승이 헐벗은 채 낑낑댄다. 아니, 자세히 살피면 짐승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벗은 몸뚱어리를 사내의 바지춤에 연신 비벼대며 소리낸다. 울음인지, 신음인지 당최 분간이 가지 않는 소리다. 상연이 손을 뻗으니 울부짖던 소리가 뚝 멎는다. 손 저리 치워! 꺼지란 말야! 사나운 말을 내뱉는 어린 아이. 상연은 이 아이를 알고 있었다. 아는 것 뿐일까. 아이는 자신의…


아이의 작은 입이 열린다. 듬성듬성 남아있는 유치乳齒와 잇몸만 남아있는 입안이 달려든다. 코피가 흐르는 얼굴로 웃는다. 눈은 우는데, 입은 찢어져라 웃는다. 다음 순간, 웃는 얼굴이 점차 흐려져 보이지 않게 된다. 눈밑 바로 아래, 검은 진흙이 피어난다.


끝내

잠식당하고 만다.







.

.

.






얼굴에 찬물이 뿌려졌다. 놀라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고 보니 사슴 머리가 달려드는 것이다. 허억 하고 비명을 지른 상연이 일어나려다말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쯧쯧... 그래가지고 어디 일이나 제대로 하겠소."


"..흐...푸흐..."


"일하겠다고 온 양반이 호출 소리도 못 듣고 퍼질러 잠만 자고 있으니."





곁에 선 사내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상연이 잠이 완전히 깬 눈으로 올려다보니 김판호, 통칭 김씨였다. 그러더니 들고있던 바가지를 바닥에 내던지고 방문을 턱짓으로 가리킨다.





"목욕가운이요. 마스터 방에 두시요. 씻고 계시니까네 방해하지는 말고."


"……."





김씨는 무뚝뚝하게 말을 던져놓고 돌아섰다. 문턱을 넘으려다 말고 뒤돌아 게슴츠레한 눈으로 상연을 쏘아보는 것이다. 





"한 번만 더 느그적거리믄 그때는 팔팔 끓는 물로다가 깨울 거니까네 그리 아쇼."





입 여는 족족 거칠고 살벌한 경고뿐인 자다. 다 불어터진 라면 머리를 한 사내는 그대로 방 밖으로 사라졌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고 있으리라. 곧, 상연도 그래야만 했다. 미닫이문 앞, 가지런히 개어진 옷가지를 바라본다.


시간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곳이다. 마스터의 방으로 향하기 전에 시계나 보고 가야겠다며 몸을 일으킨 상연이다. 벽 상단에 박제된 사슴 머리가 여전하다. 부숴버리고 싶은 욕구가 치미는 장식품을 흘깃 노려보곤 옷가지를 안아든다. 친절하지 않은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오죽 부지런해야 했다. 또 살벌한 경고가 날아들기 전에 시키는 일을 마쳐야 한다.


복도 벽면, 촛불이 너울대며 춤추고 있다. 몇 개는 초를 새로 간 것 같다.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하는 느낌이다. 이 넓은 저택에 있는 인물이라고는 고작 그 몇 사람 뿐일 텐데. 게다가 마스터와 선대, 기태는 일손이 아니었다. 각자 맡은 바가 정해져 있는데 이런 자잘한 일들은 누가 하는 거지? 생각하는 사이 복도 끝에 다다른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 괜스레 반대편 복도 끝을 살핀다. 윤기태. 키스 마크. 그리고…. 꿈이 아니었을 것이다. 부끄럽게도 아랫도리로 성큼 눈길이 간다. 그날의 쾌감은 거짓이나 꿈이 아니었다. 희미하게 숨을 뱉고 발을 재촉한다.


내려온 1층은 생각보다 조용하다.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는다. 유령의 집처럼 비생물非生物만 가득하다. 괘종시계 앞에 다가가 선다. 다섯 시 사십 분. 오전인지 오후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 오전일 것이라 여긴다. 이 친절하지 않은 곳이 자신을 그리 오래 재울 리 없었다. 간밤의 기억을 더듬는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고 바랄 만큼 충격적이었다. 앓는 듯한 신음 소리와 살결이 부딪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 상연은 고용주의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번에도 문틈이 조금 열려있었다.









M

A

S
T

E

R






허둥지둥 도망쳤던 문 앞이다. 괜히 바닥을 살피었다. 다행히 튀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안도하며 큼 하고 목을 가다듬은 상연이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문을 밀고 들어갔다. 실례 하겠습니다. 내뱉고 나서야, 이런 인사는 필요 없을 거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욕실 쪽에서 세찬 물소리가 이어진다.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욕실 용품에 자주 쓰이는 익숙한 향이 코로 흘러들었다. 주춤거리며 침대로 다가가 품에 안고있던 옷가지를 내려놓는다. 침대는 간밤의 정사가 벌어졌다고는 생각도 못할 정도로 가지런히 정리 되어있었다. 그러나 상연은 곧, 벗은 두 몸이 뜨겁게 부딪던 광경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두꺼운 털이불에 손을 대어본다. 미세한 솜털이 손끝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손바닥으로 이불을 쓸던 상연이, 어느 순간 뚝 멎은 물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침대를 벗어난다.


욕실로 눈길이 향한다. 이대로 당장 달려나갈까도 싶었으나 생각해보면 자신이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다. 상연은 침을 삼키며 방의 주인이 욕실에서 나올까 욕실 문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뒤, 다시 세찬 물 소리가 이어졌다. 무엇이 다행인지도 모른 체, 상연은 안도하며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방문이 아니었다. 틈이 열린 욕실 문쪽이었다. 스스로도 자신이 왜 방문이 아니라 욕실문으로 향하는지 알 수 없으나 상연은 기어코 욕실문 앞까지 다가가 멈춰섰다. 열린 틈으로 한쪽 눈을 대고 안을 살핀다. 더운 공기가 눈에 닿는 게 느껴졌다.


부연 김이 사내의 살갗을 감싸고 있었다. 머리에 한 손을 올린 사내가 샤워 부스 안에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욕실 안 또한 서양식으로 꾸며져있었다. 이쯤되면 괴짜가 만들었다해도 손색 없을 정도다. 참으로 괴상한 저택이다.


욕실 내부는 값비싼 대리석으로 이뤄져있다. 문 바로 앞에는 고풍스런 장식장이 자리했다. 그 안에는 장식장에 걸맞게 고급스러운 와인과 크리스탈, 내지는 순금과 백금 등으로 빚은 작은 조각상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속으로는 그 장식품들의 값을 가늠하면서 상연은 이 욕실의 주인에게 다시 눈길을 던졌다. 샤워 부스 안에 있는 주인은 등을 내보이고 있었다. 때문에 간밤의 기억이 기억의 수면 위로 다시금 떠오르려는 참이다. 상연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애써 떠오르려는 생각을 멈추려 노력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상연이 노력하지 않아도 생각이 저절로 전환되는 일이 있었다. 허리에서 둔부로 이어지는 엉치 부근에 검은 문신이 보였다. 그다지 놀랄 것도, 중요할 것도 아니었으나 그 문신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상연은 숨이 멎었다. 동공이 확장되어 단단히 그 문신에 고정되었다. 그냥 문신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연이 아주 잘 알고있는 낯익은 것이었다. 이를 테면 상연의 위팔 안 쪽, 겨드랑이 부근에 있는 표식과 같은.






* * *






상연이 하루동안 한 일 중, 대단히 어렵거나 한 것은 없었다. 옷가지를 가져다 놓거나 정원사 이씨가 모아둔 낙엽과 부러진 나뭇가지, 썩은 잎들을 가져다 태우는 일, 저택 대문 앞으로 배달된 식자재를 부엌까지 가져가는, 아주 간단한 일 뿐이었다. 꼬불 머리 사내가 대단히 겁준 것과는 아주 판이했다. 아니면 아직 초짜라 쉬운 일만 골라 주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만하면 할 만하다고 여긴다. 어떤 일의 뒤처리나 개인의 시중 등을 도맡는 것은 상연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상연은 이런 일에 능숙했다. 


나머지는 전부 자유시간이었다. 상연은 이제 누가 일러주거나 방까지 찾아오는 수고를 해주지 않더라도 종소리를 들으면 식사를 하러 내려갔고 부지런히 계단을 오르내리며 시간을 체크했다. 저택 내부의 그들과 살갑게 말을 섞지는 못하나 종종 마주칠 적엔 인사도 건넸다. 


상연은 이 일에 아주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괴상한 곳이라지만 다 사람 사는 곳이 아니겠는가. 일이 없을 때면 방 안에 들어와 박제된 사슴 머리와 눈싸움을 할 여유까지 생겼다. 일주일쯤 뒤엔 저 사슴 머리를 떼어다 소각장에서 태워버리리라 하는 결심도 품는다. 그런 상연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했듯, 사슴의 눈빛이 언뜻 날카로워졌다.


일과를 보내며 상연은 부지런히 저택 안을 돌아다녔으나 기태는 만날 수 없었다. 정원에서 만난 이씨와 식사 때마다 보는 추씨, 그리고 저택 대문을 지키고 있던 박 쌍둥이와 소각장에서 만난 다른 박씨까지 다 보았으나 이름으로 불리는 사내는 만나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또 간밤의 일이 불쑥 떠올라 괴롭게 머리 안을 돌아다녔다. 혹시 학대 당하는 거라면 어떻게 하지. 자신이 목격한 게 강간이나 성폭행이었다면. 일리 없는 생각도 아니다. 기태는 저능이었다. 여자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없는 이곳에서 가장 만만한 먹잇감이 되는 사람이야 불보듯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으흥,흐.. 마,만지면 아..아파...'


'으읏...아,아파..기,기태 아..아야..아야해.....'


'이,이거… 너,너는 못 만져…. 안 돼, 이거는…….'




키스 마크. 강압적인 음담패설들. 주인을 제외하고는 다른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하던 그 행동하며.

짐작이 사실로 굳어지려는 참이었다.






 * * *






작은 기척에도 눈이 절로 떠졌다. 누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상연은 스스로가 잠을 잔 것인지 조차도 헷갈렸다. 아무 자극도 없이 단숨에 잠이 깨버린 탓이었다. 저녁, 자신이 세운 가설의 증명이 필요했다. 사실이라면 신고는 나중 얘기였다. 경찰이나 사법 기관과는 별로 엮이고 싶지 않다. 어쨌든,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어떻게 할 건지는 그때가서 정해도 늦지 않다. 자정녘 울린 종소리를 듣고 잠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미닫이문을 살짝 열고 촛불이 일정한 간격으로 흔들리는 복도로 발을 내딛는다. 발밑에서 마룻바닥이 삐걱였다.


벽면을 손끝으로 훑으며 천천히 걷는다. 곧이어 나온 계단을 돌다리 두들기듯 발로 조심히 짚어가며 내려간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워낙 저택 내부가 어두운 탓이다. 해가 뜬 낮에도 어두컴컴한 저택은 해가 없는 밤이면 거의 암흑 수준이었다.


괘종시계 앞을 막 지날 때다. 하악이는 신음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상연이 소리를 좇아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번에는 복도 끝 방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서 들리는 것이다. 상연은 재촉하던 걸음을 멈췄다. 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이 방 안이었다. 이번엔 선대 코우즈키의 방이다.








연성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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