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미이-"


나는 카페 테이블에 턱을 기댄 채 노조미를 빤히 쳐다보다가 작게 이름을 불렀다. 노조미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창밖의 풍경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나는 볼을 크게 부풀렸다가 홧김에 따듯한 커피를 두 모금 마셨다. 


탁.


컵을 소리나게 내려놓자 그제서야 노조미가 고개를 돌렸다. 


"아, 니콧치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건 십분도 더 지난 대화 주제잖아!"


노조미는 미안하다면서 애매한 웃음을 짓더니 또다시 번화가의 네온사인을 눈동자에 담았다. 나는 다시 커피를 홀짝였고, 나무 테이블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럴 때의 노조미는 아무도 말릴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

한숨을 쉬며 바라본 창밖 하늘은 이미 까만색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카페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 어둑어둑한 진청색이었는데, 돌이켜보니 카페에 들어온지도 벌써 한 시간도 더 지나간 것이다. 


즐겁고 행복할수록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말했던가. 아침 일찍 노조미를 만나 함께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커다란 산책로를 걸었다. 별달리 특별한 일을 한 건 아니었지만 시간이 눈 깜짝할새에 지나가버렸다. 오늘 하루종일 노조미와 함께 있었다는 게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꿈결처럼 즐거웠던 오늘 하루도 어느덧 종착점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더 조바심이 난다. 앞으로도 노조미와 얼마든지 함께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 속의 의문. 

졸업이라는 갈림길을 지나 앞만보며 달려가다보면, 어느새 시야에서 노조미가 사라져버릴것만 같아서..


노조미를 다시 쳐다봤지만 여전히 나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물론 2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아키바의 도심 거리는 꽤 아름답기는 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행복감에 젖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과, 친구와 함께 도심 한가운데의 기나긴 길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것처럼. 

생각해보면 나도 마찬가지다. 눈앞의 노조미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는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지금까지 한번도 흔들린 적 없이 서있던 마음의 벽을 누군가가 부드럽게 노크하는 것 같다.


광장 쪽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고, 2미터정도 되어 보이는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린 녹색과 황금색 아기 전구가 깜빡거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 창문에 비친 노조미의 시선도 그쪽을 향하고 있었다. 


"..가까이 보러 갈래? 사진도 찍고."


노조미는 내 말에 눈을 깜빡거리고는 싱긋 웃었다.


"응!"


-


우리는 인파를 뚫고 크리스마스 트리 앞까지 걸어갔다.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는 루돌프와 썰매 모형이 있었는데, 노조미는 어린애처럼 총총 뛰어가더니 썰매 위에 올라탔다.


"에리치! 이러면 좀 산타아저씨 같나?"


노조미가 빨간 목도리를 머리에 엉성하게 두르더니 산타 흉내를 냈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을 찍기 위해 장갑을 벗자 아직 차가운 바람이 손을 따갑게 때렸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 했다. 썰매 모형에 같이 앉아 지나가던 사람에게 부탁해 사진을 찍기도 하고, 내가 앉아있는 모습을 노조미가 찍어주며 짧은 시간을 보낸 후, 우리처럼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해 노조미의 손을 잡고 광장을 벗어났다.


인파에 휩쓸려가던 우리는 겨우겨우 대로에서 조금 떨어져 한적한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빵집 문틈으로 고소한 빵 냄새가 풍겨나왔다. 크리스마스가 밝기 전에 케이크를 먹기로 약속했던 우리는 빵집 진열장에 다가갔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여러 종류의 케이크가 먹음직스러운 모양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뭘 고를지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노조미는 뭔가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반대편의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갔다.

크리스마스에 아이스크림? 내가 천천히 뒤따라가자 노조미가 아이스크림으로 만들어진 케이크들이 늘어서있는 냉장고를 가리켰다.


"언젠가 호노카가 말했제. 빵보다는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맛있다고. 내도 한번 먹어보고 싶었다."


그러고보면 예전에 한 번,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어떤 맛일지 노조미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와 노조미는 한 케이크를 동시에 가리켰다. 아이스크림으로 만들어진 이글루와 그 위에 귀여운 설탕 인형 두명이 손을 맞잡고 있는 새하얀 케이크였다. 

우리 둘은 케이크를 산 후에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아이스크림 케이크니까 녹아버리는 거 아이가?' 라는 노조미의 말에 얼른 노조미네 집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올 때, 나도 노조미도 아까 카페에서와는 다르게 서로를 바라보며 연신 기분좋은 웃음을 지었다.


"에리치."


노조미가 집 현관문을 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오늘.. 자고 가도 괜찮아."


깜깜하고 어두운 노조미의 집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다. 노조미와 함께 케이크를 먹고 헤어지는 건 오늘의 정해진 종착점이었지만 나는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를 떠올렸다. 작년에는 러시아에서 일본으로 오신 부모님과 아리사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냈기에, 노조미가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보냈는 지는 잘 알지 못했다. 

그때의 노조미는 내가 걱정할까 싶어 아무상관 없다고 말했었지만.. 노조미의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은 무척 느리게 흘러갔을 것이다.


"어쩔 수 없네. 아리사에게 따로 전화해둘게."


잠깐동안 굳어있던 노조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헤어지기 싫은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생기자, 아까 혼자 불안해했던게 떠올라서 쿡쿡 웃어버렸다.


-


"내일이 크리스마스니께, 오늘 마키쨩은 일찍 잠들었겠구마."

"후후. 그렇네."


똑똑한 두뇌파인 마키가 산타가 주는 선물을 기다리며 가슴 두근댈 것을 상상하는 건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노조미는 아이스크림 케이크 위에 서있는 설탕 인형들이 무너지지않도록 조심스럽게 한 스푼을 떠서 먹었다.


"에리치. 우리는 선물을 줄 산타가 없잖나."

"..."

"우리가 서로에게 산타가 되어 주는건 어떨까?"

"에?"


나는 잠자코 노조미의 표정을 살폈다. 약간 장난스러운 것 같기도 했지만, 진지함이 묻어 있다. 


'선물을 교환하자는 거구나.'


노조미는 내게 어떤 선물을 주려는 걸까? 그리고.. 노조미가 받고 싶은 선물은 뭘까.


잠깐 생각에 빠져 있자 노조미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듬뿍 퍼서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 먹었다. 

이런 행동은 애인들끼리나 하는 거잖아- 라는 말이, 목을타고 올라와 입안을 맴돌다가 초콜릿 아이스크림과 섞여 가슴 속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큼큼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무슨 선물이 받고 싶어?"


노조미는 미리 생각해놓은건지 거침없이 말하려다가 주춤하더니, 다른게 떠오른 듯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


"..한번만 안아줘."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리는 노조미를 보자, 나도 모르게 푸흡 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 선물을 바라나 싶었는데.


"한 번이 뭐야? 열 번도 더 안아줄게."

"에리치는 인심이 좋은 산타네."


나는 노조미를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노조미의 소원이었지만 정작 선물을 받은 건 나다. 나와 더 있을 수 있도록 구실을 만들어 준것도, 내게 안겨온 것도, 확신을 가지지 못해 불안한 나에 대한 노조미의 배려였다.


"됐다. 이번엔 내 차례!"

"받고 싶은 선물이면 아무거나 말하면 되는 거야?"

"응. 그치만 물건으로 부탁한데이. 이런 거 두번이면 부끄러워서 죽겠구마."


미리 생각해둔 게 딱히 없었기에 뭘 받아야 하나 싶어 고민하다가, 나도 노조미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잠깐 눈을 감아줘."


노조미가 보란듯이 내 앞에서 눈을 꼭 감았다. 실눈을 뜨지 않고 있다는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노조미의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노조미의 목에 부드럽게 양손을 올려 감싸안았다. 노조미의 살결에선 부드럽고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쪼옥-


노조미가 뜻밖의 감각에 놀랐는지 몸을 움찔거리더니 눈동자를 크게 떴다.


"ㅁ..뭐하는 기가? 왜 내 이마에.."

"다음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같이 있어준다고 약속해줘."


다시 노조미를 부드럽게 안았다. 내 품에 얼굴을 파묻은 노조미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

"다다음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그 다음에도."


아이스크림 케이크 위의 설탕 인형들이 넘실거리는 촛불 아래에서 영원할것처럼 손을 잡고 서있었다. 

나는 노조미의 어깨 너머로 촛불을 후 불었다. 


어둠이 찾아왔지만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조각배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