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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리 민챙 스핀오프 입니다

읽고 보시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남양주 시우리 깊숙이 들어가면 김연리 작가가 죽을 날까지 살기 위해 만든 집이 있다. 뒤로는 계곡도 흐르는 커다란 산이 있고 둥근 숲으로 둘러 싸인 집. 동네 가장 안쪽에 있지만 곪지 않도록 바람이 잘 드나드는 길목에 지어 한 여름에도 제법 버틸만한 집. 김연리 작가님이 집을 짓기로 마음 먹은 이십 년 전까지는 그랬고, 어쩐지 여름은 해가 다르게 점점 찌더워진다.


둘은 작년 여름을 겪고는 살짝 타협을 한다. 형원의 방에만 설치된 에어컨으로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더위는 이민혁이 덜 탄다. 채형원이 더 더위에 약하다. 그런데 채형원은 그런 것들을 입 밖으로 꺼내는 법이 없다. 동그랗고 새카만 머리카락이 엉겨 붙어 이마에 구불구불 곡선을 그리면, 민혁은 형원을 마루에 앉혀두고 선풍기를 돌려주었다. 품이 큰 티셔츠를 펄럭거려주고 옅은 부채질을 해주면서도 속으로는, 그냥 덥다고 해도 되는데. 나한텐 해도 되는데. 그런 생각만 계속 한 것이다.


여름이 되면 집에는 과일이 들어온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람을 향해 오는 과일이었다. 조치원에서, 문경에서, 해남과 하동에서 전국에서 시우리로 향해 왔다. 받는 사람은 모조리 김연리로 되어있다. 생전에 할머니가 써놓은 글은 거의 대부분이 소설이었으나 딱 한 권 출판된 에세이가 있다. 겨울에서 시작해 봄으로 끝나는 그 글은 두껍지 않고 담백했으나 특히나 여름 파트가 길었다. 식사는 걸러도 과일은 챙겨 드시던 할머니는 여름의 한 철을 수박처럼 쪼개서 제철 과일이 가장 맛있는 시기를 알고 계신 분이었다. 과일을 보내는 사람들이 할머니와 어떤 인연인 지는 알 수 없었다. 부고를 받지 못했거나, 부고를 받았어도 여기 이 과일을 받을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거나.


약국문을 닫고 퇴근하고 돌아온 형원이 그대로 마루에 앉는다. 내일 모레 에어컨 설치 기사님 온대. 하는 소리에 으응, 하고 대꾸한 형원이 마루 앞에 놓인 과일 상자의 비닐을 뜯고 자두 하나를 슥슥 바지에 닦아 베어 물었다. 과즙이 흘러 손목을 타고 옷 속으로 들어가는 걸 빤히 보니까 형원이 뜨끔한지 천천히 돌아본다.


“씻을 거야.”

“…더러워서 보는 거 아닌 거 알자나.”


장난기와 애정이 드글드글한 민혁의 시선을 느끼고 형원은 푹 터져 웃는다. 조그만 자두 하나가 금세 사라지고 하나 더 꺼내려는 거 안된다고 말렸다. 또 그러다 밥 안 먹는다고 하려고. 그 소리에 형원이 좀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안경 끼고 셔츠 입었던 채 약사님은 어디가고 맹숭한 형원이가 젖은 채로 나왔다. 해가 좀 넘어가니 살만 해서 둘이 마루에 앉아 간단하게 저녁을 해먹었다. 자두 두 어 개 더 꼭꼭 챙겨 먹는 거 가만 두었다. 에어컨 저기로 오겠지? 형원이 손가락 가리켜 묻는 말에 어, 응. 하고 대답하던 민혁이 마루에 크게 놓인 책장을 둘러본다. 벽 하나를 빼곡히 채운 책장에는 커다란 박스들도 있다. 에어컨 들어오면 저 오래된 박스들은 치워야겠다고 생각한 민혁이 일어나 박스들을 훌쩍 꺼내 내려 놓는다.


바닥에 자리 잡은 박스들에 형원이 가만히 손을 뻗는다. 모양이 제각각인 노트들. 어르신이랑 오래도 알고 지냈는지, 형원은 이게 어르신 물건이 아닌 것부터 알아챈다. 꺼내든 노트는 노트가 아니라 얇은 스케치북들이다. 이민혁. 이라고 이름이 쓰여진 걸 보고 형원은 가만히 눈을 들어서 민혁의 등을 본다. 시골 살더니 부쩍 벌어진 등은 분주하다. 조용히 펼쳐보니 그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도 샤프 하나를 커다란 손에 쥐고 그렸던 아주 미세하게 얇은 목탄화 같은 그림들, 섬세하고 선이 얇고 민혁이 특유의 따뜻한 필터가 끼인 그림들.


시내의 오일장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가판들을 그려 놓은 그림, 오래되고 커다랗고 애들이 많았던 학교, 담쟁이 덩쿨이 덮은 학교 벽, 교실 구석의 애들, 맞아. 그때는 되게 커다란 TV장에 TV가 들어 있었다. 그 뒤에 숨은 애들의 귓속말, 1분단 맨 왼쪽 구석, 별로 말이 많지 않고 지금 보다 말랐던 사람의 등. 품 큰 하복을 입은 등 그림이 두 장, 세 장, 네 장. 그림은 이 집으로 옮겨와 과일 몇 개, -재미없어- 적힌 낙서 그 뒤로 테이블 위로 놓인 손목, 자두를 쥐고 있는 손만 덜렁 그려져 있다. 형원은 가만히 제 손을 옆에 두고 비교해본다. 아직 똑같네….


“책장은 두고, 여기를 싹 비울게. 근데 이건 다 뭐…….”


이민혁이 뒤를 돌았을 때 채형원은 앞니로 입술을 깨물고 있다. 푹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려고. 분주하던 민혁이 굳은 걸 알고는 형원은 펼쳐진 그림을 보여준다. 누가 봐도 훔쳐본 게 뻔하고 묘하게 야하기까지 한 그 그림의 뉘앙스를 둘이 모를 리가 없다. 민혁이 꿈지럭거리면서 온다. 그림 빼앗아 들고 빽 소리나 지르면 어쩌나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게 여기 있었냐? 하고 와서는 옆에 꼭 붙어 앉아서 가만히 들여다본다. 풀썩 앉자 민혁의 살냄새가 닿는다. 형원은 조용히 그 애 입꼬리에 입 맞춘다. 이민혁이 한 뼘 물러나 빤히 쳐다보는 거였다. 싫어? 묻는 말에 고개만 도리도리. 새카만 눈의 이민혁이 조금 있으면 서른이다. 믿을 수 없게도.


너한테

자두 냄새 나.


그리고 믿을 수 없게 아직도

이런 말을 태연스럽게

뱉으며









밤길 따라 여름방학









열여덟의 이민혁은 마루에 대자로 드러누워 있다. 입가엔 짜장면 먹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걸 모를 나이도 아닌데 반항하듯이 일부러 닦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아침에 딱 눈을 떴고, 하품하며 컴퓨터 본체 켜놓고 냉장고의 보리차 꺼내 방으로 와서 스타크래프트를 다섯 판 정도 때리고 나서야 이상하게 인기척이 엄청나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 것이다. 수상함을 느끼고 벌떡 일어나 마루에 나와보니 조용하고 할머니 서재를 가니까 책상 위에 덜렁 유리병 두어 개가 놓여져 있다. 고소한 냄새가 묵직하게 났다. 참기름과 들기름이 한 병씩이다. 그리고 그 밑에 쪽지와 현금 5만원이 있었다.


이거 형원이네 갖다주고

밥 알아서 챙겨 먹으렴


뭐야, 진짜. 어이없어! 이민혁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어 또각또각 문자를 보낸다. 이민혁이 반에서 문자 속도가 제일 빠르다. 덕분에 알이 매일 부족해서 형원이한테 한 달에 두 번은 꾸고 있었다. 걔는 아무랑도 연락을 안 하는지 알이 남아돌았다. 그럴 거면 나랑 얘기나 하지.



[할머니 서울갔어?]


[종로에서 사흘 정도 아시아 여성 도서전이 있다. 23일에 돌아갈게.]


[알게써요]



우리 할머니는 정말 이상한 할머니야. 에구, 우리 강아지. 같은 말 한 번 해준 적이 없다. 엉덩이 토닥인 적도 없고. 다른 할머니들은 집착적으로 밥을 먹이신다는데 할머니는 본인도 절대 배부를 정도의 식사를 하지 않으므로 민혁은 할머니가 주시는 용돈으로 바깥에서 키를 키워온 편이다. 그래도 서울에 갔으니 아마 돌아오실 때는 도미노 피자를 두어판 사서 오실 거였다. 할머니 50살 되던 해에 처음 미국 가서 드신 게 그 음식이라고 그랬다. 지금으로부터 벌써 20년이 꼬박 더 된 일이지만 말이다.


뭔가 마음이 불퉁해져서 민혁은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켜서 먹었다. 짜장면 한 그릇만 겨우 먹고 탕수육은 거의 남긴 채로 드러누운 것이다. 여기서 믿을 수 없는 일이란, 할머니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탕수육이 다 남은 것도 아니고. 이민혁이 도통 너무 외롭다는 거였다. 겨우 할머니 사라졌다고 이게 이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고 요새 불쑥 자꾸 신경 쓰이는 포도알 같은 새카만 그 얼굴 때문에. 


걔 생각을 하면 마루에 누워서도 울렁거려가지고 민혁은 성질을 불쑥 내며 일어났다. 그리곤 서재에서 가지고 나온 병 두 개를 한참 노려본다. 할머니가 채형원을 되게 좋아한단 말이지. 이게 할머니의 애정이 밖으로 새어나가 벌어진 질투에 가까운 마음일까 생각해보지만 아니, 사실 할머니가 형원이를 더 많이 좋아했으면 좋겠는 거였다. 그래야 내가 걔를 더 자주 볼 테니까. 사실 나 이거 뭔지 대충 알 것 같다. 그 정도는 사실 당연히 안다. 우리 할머니가 글을 쓰는 사람이다. 내가 이 정도 감정선을 알아 차리지 못할 리가.


외로운 마음이 든다는 건 그리운 누군가 생겼다는 것. 그리고 나는 온통 걔 생각 뿐이다. 나는 자꾸 마음이 뜨끈하고 떠오르는 해는 작열하고, 아, 더워. 너무 더워 죽겠다.









집은 너무 덥고 축축해서 도서관이라도 나오는 길에 형원은 김연리 작가님을 마주쳤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려면 나가는 길이 하나 뿐이라 동네 사람을 마주치는 일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하필 민혁의 할머니인 게 좀 불편했다. 원래는 이민혁이 김연리 할머니의 손자였었는데 요새는 그게 좀 바뀌었다. 마음의 추는 벌써 예전부터 민혁이 쪽으로 기울었다.


뜨거운 해를 피하려고 양산을 드신 할머니와 거리를 좀 두고 걷고 있는데 뜨거운 햇빛이 살근히 가려진다. 형원은 올겨울에만 8센치가 컸다. 할머니를 내려다보면서 양산을 대신 들었다. 할머니는 형원이 이걸 당연히 들 거라는 걸 안다는 듯 웃고 있다.


나란히 버스정류장에 앉았다. 나른한 부채질이 이어진다. 너네 싸웠니? 묻는 말에는 대답을 제대로 못 했다. 싸운 건 아니에요. 소리 내서 부딪히지 않았으니까 싸운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좀 이상했던 거였다. 할머니가 채근해서 학교 갈 때 올 때 오토바이 타고 데려다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민혁은 정말로 무식하게 형원을 기다릴 때도 있었다. 대충 사는 것 같은 애가 나한테는 대충이 아니다. 팔자에 안맞는 야자를 할 때면 걔가 온갖 종이에 뭔가를 너무 많이 그려서 손날 부분이 새카매져 있었다. 그걸 보면 책가방 끈을 쥐고 마음이 단번에 너무 복잡해졌다.


“그냥 좀 복잡해요.”

“열여덟이니까.”


원래 그쯤 친구 사이라는 게 그런 거다. 나랑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애가 내일은 저 애랑 꼭 붙어 다니면 마음이 드글드글 끓는 거야. 작가님은 자기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가만히 드문드문 이어 말했다. 꺼내지는 이야기가 민혁과 본인의 사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건 꼭 사랑하고 연애하는 기분 같지 않니? 묻는 말엔 대답을 못했다. 쑥맥이고 말이 적고, 키가 큰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설익은 형원은 사랑 같은 거 아직 해본 적 없다. 사랑이요?


더듬 더듬 되묻는 말은 통째로 의문덩어리였다. 사랑의 정의가 무엇인가요, 사랑은 어떤 기분인가요? 사랑을 할 수 있나요? 사랑은 만질 수 있나요? 사랑은 향과 색감이 존재하나요? 아무나 사랑할 수 있나요? 그 애가 아무나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하여튼 사랑을 해도 되는 건가요? 사랑이 무엇인 지 도저히 알 수가 없고, 마음만 복잡한데.


눈이 얼굴의 절반 정도 되었던 열여덟의 채형원을 김연리 작가는 한참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모든 질문은 통째로 닿아 전해졌고 버스도 때마침 도착했다. 양산을 곱게 접어 손잡이 부분을 잡을 수 있게 돌려주는 형원에게 김연리 작가는 사랑이 무엇인 지 조용히 일러주었다. 형원은 되묻지 않고 조용히 버스를 타고 흔들렸다. 작가는 뒤에 따로 앉았다. 조그만 머리통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퍽이나 궁금했고, 버스는 메타세콰이아길을 뚫고 시내로 향한다. 여름 햇빛이 형원의 어깨 위로 하얗게 부서져서 얹어져 있다. 저걸 부르는 말이 있다. ‘볕뉘’라고 하는 말.


서울로 향하는 길, 작가는 작은 수첩 하나를 꺼내 소설의 첫 문장을 시작했다.


사랑은 순도가 높은 마음이지. 아이가 엄마에게, 복잡한 밤에 읽은 시에게, 소설 속 외로운 주인공에게, 그리고 어린 마음에 만난 가여운 너에게. 빼곡히 차오르면 그것이 사랑이어라. 얘야, 너 지금 그거 사랑이란다.










민혁은 사실 형원에게 조금 화가 나 있었다. 형원이에게 그 애들이 붙었기 때문이다. 겨울을 지나서 채형원이 한 뼘이 더 크게 자라오고, 봄에는 내 옆에 붙어 앉아서 웃기도 많이 웃고 말도 하기 시작했다. 아픈 엄마랑 살면서 늘 그늘져 있던 형원이 살아 움직인다고 생각이 들었던 모양인지. 형원과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나온 동네 애들이 형원을 지들 무리에 끼우려고 하는 모양이다. 딱 봐도 각이 나왔다.


형원이는 걔들이 나쁜 애들은 아니라고 했지만, 글쎄. 이민혁 생각은 달랐다. 나쁜 애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웃지 않던 겨울의 채형원은 그냥 그늘에 냅뒀잖아. 분명 자기만 아는 새끼들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올여름의 형원이가 뻐끔 자라고 잘 생겼고 공부도 잘하니까. 채형원을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몇 명이나 반에 생겼다는 걸 아는 새끼들이라 더 짜증 나는 거였다.


방학을 하던 날에 며칠을 형원에게 시간을 투자하던 애들이 걔를 데리고 사라졌다. 형원은 민혁에게 그날은 나 기다리지 말고 그냥 집에 가라고 했지만 오토바이를 끌고 시내를 내내 돌아다녔다. 도대체 어딜 간 건지 채형원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끈적이고 불쾌한 공기가 죽어있는 노래방이나 들어가서 네미시스 노래를 찢고 있는 그 새끼들이랑 어울리고 있을까봐. 그 생각하니까 화가 나는 거였다. 어울리지 않아. 너는 그런 애가 아니잖아. 아니 사실 그런 애여도 좋은데, 그래도 네미시스 노래를 나랑 불러주던가.


그렇게 일주일이나 지난 게 지금, 채형원은 문자도 잘 들여다보지 않아서 답장이 잘 안 온다. 그러면 나는 혼자 자꾸 마음이 상하고. 문자도 잘 안 하고. 그러다 보면 내가 너무 구질구질해 죽겠고. 짜장면 묻힌 채로 마루에 드러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폴더폰을 야무지게 펼치고 문자를 적는다.



[할머니가 참기름 가져가래]


사실 나보고 가져다 주랬지만


[할머니가 오늘 너 여기서 자고 ㄱ


음 이건 아니야.

한글자씩 또각또각 지우고


[할머니가 책 보고 싶은 거 있으면 오래]


꼬셔질까?


[집에 자두랑 복숭아랑 수박 있어]


채형원이 애도 아닌데


[너 다 먹어]


아. 망한 것 같은데.




[더워]

[나 지금 양평도서관]


[ㅋㅋ딱 기다려]

[형이 데리러간다]



핸드폰 탁 접은 꼬질꼬질한 이민혁이 드디어 씻으러 욕실로 우다다 달려 들어갔다.











채형원이 집에 와서 이민혁은 기분이 최고였다. 밤이 늦을 때까지 형원이가 여기 있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자꾸 배실배실 웃음이 난다. 그런데 그걸 티낼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서 건조한 척 하고 있었다. 마루 문을 활짝 열어 놓았고 운동화가 자유롭게 벗겨져 있는 섬돌 옆으로는 모기향이 올라왔다. 할머니랑 사는 동안 이걸 켜고 끄는 건 이제 이민혁 담당이 되었기 때문에 딱히 어렵지도 않았다. 배 깔고 엎드려서 책 읽고 있는 형원이한테 불쑥 복잡한 맘이 들기도 했지만, 참는다. 우리 앞으로 이런 얘기할 시간 진짜 많을 거니까.


그러다 꼬르륵 잠든 형원을 본다. 속눈썹도 길고 순해 보여서, 그게 예뻐서. 집에서 짐 싸서 나오던 길에 훔쳐나온 디카를 찾아 찍어 둘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데 또 그렇게 하고 싶진 않고. 조용히 방으로 가 샤프랑 얇은 스케치북에 되는 대로 옮겨 두었다. 처음도 아니었다. 자꾸 채형원을 종이로 옮겨 놓는 일. 큰일이네, 이러면 까먹어지지도 않을 텐데.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텐데.


그런데 밖에서 큰 소리가 들린다. 이민혁 오토바이 소리에 정확히 열 배 정도의 소음이다. 마후라 저렇게 터뜨리는 것도 재능이라고 생각하며 민혁은 스케치북을 닫아 마루 구석으로 치워둔다. 저 바깥으로 서너명이 찾아온 게 보였다. 와, 너 여기까지 와봤냐? 씹, 집 존나 음침하게 크네. 야. 저거 이민혁 아냐? 웅성이는 소리에 슬리퍼 꿰어 신고 나왔다.


“채형원 있어?”

“응.”

“어딨는데.”

“자.”

“야, 걔 좀 불러봐. 아니다. 됐다. 우리가 데리고 나갈게. 니 집 존나 좋다?”


비죽이는 건지 신기한 건지 안으로 들어오려는 걸 막았다. 주머니에 손 꽂고 서서 막아 서는 이민혁을 보던 애들이 감정이 톡 상해 어그러진 눈빛으로 본다. 꼬우면 서울로 좀 가라, 너 어차피 채형원 없으면 친구도 없잖아. 그 소리에 민혁은 꼼짝도 안했다. 왜냐면 서울로 꺼지고 싶은 건 예전부터 그랬는데 요새는 별로 안 돌아가고 싶고, 집은 여기가 된 지 한참이었고, 채형원 없으면 친구 없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도 서울 가구 싶다. 근데 너네도 들어서 알겠지만.”

“…….”

“우리 할머니가 좀 이상하냐?”

“…….”

“여기 동네 아저씨들 전부 다 경찰에 신고해서 내가 귀찮아 죽겠자나.”


아니, 지석아. 너네 아버지도 신고 당하지 않으셨냐? 여기 뒷산 우리 할머니 땅인데 거기에 하우스 만들어서 화투 치셨다며. 우리 할머니 여기 동네 조용해서 오셨다고 했는데. 너네 마후라 소리 너무 커서 깨셨겠다. 걱정이다, 얘들아. 진짜루.


“이 미친 새끼가….”


훅 올라온 주먹은 멈춘다. 마루 뒷문이 드르륵 열려서 그랬다. 형원이 빤히 서서 보고 있다. 민혁이 좀 당황했다. 그래도 십년 가까이 본 애들한테 너무 싸가지 없게 굴어서 싫어할까봐. 가만히 민혁을 보던 형원이 턱짓을 한다. 집 안쪽으로.


“너 찾으시는데.”

“…….”

“핸드폰 어딨냐고.”


그 말에 웅성이던 애들이 씨발, 하고는 형원의 손목을 잡아 챈다. 이민혁이 그거 보고 눈이 돌아 채형원 팔을 대신 잡아 끌어 집으로 들어온다. 가라고 안에서 손 흔들어 보내는 형원을 보고 서로 눈짓하던 애들은 금세 다시 큰 소음을 만들며 사라진다. 신고 당할까봐 아마 무서웠을 것이다. 새카맣게 표정이 지워진 채로 바깥을 보던 민혁은 형원을 본다. 커다란 손으로 꽉 잡았던 팔을 그제야 놓는다. 좀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너 거짓말도 해?”

“나 거짓말 잘 해.”


형원이 가만히 마루에 걸터앉았다. 민혁은 옆에 나란히 앉는다. 왜 그랬냐고 묻고 싶은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가슴이 막 간지러워서 여름밤 공기가 이상해서 민혁은 고개를 돌려 형원을 보면서 물었다.


“걔네랑 안 놀고 왜.”

“…네 말 맞더라.”

“응?”

“걔네 말야.”

“…….”

“별로 재밌지 않았어.”


여자애들이나 꼬시고 싶어 하고, 몰래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뭐, 그게 나쁜가 싶긴 한데. 그냥 나랑 별로 안 어울리잖아. 엄마 걱정 시키고 싶지도 않고. 그냥 그래서.


이유에 이민혁은 하나도 없지만 민혁은 그 대답이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걔네 보다는 나라는 거잖아. 그래서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이건 분명한 여름밤의 장점이다. 그런 쩨쩨한 마음은 멀리 도망가고 없는 거. 나, 이제 가야겠다. 하는 형원을 따라 벌떡 일어났다. 왜 따라오냐는 둥, 뭘 데려다주냐는 둥 그런 소리 형원이는 굳이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민혁한테 친구라곤 본인 뿐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깨달은 것 같다.


“야, 형원아.”

“어.”

“거짓말 해봐.”

“…나 여자야.”

“아니, 그런 거 말고!”

“그럼 뭐. 어떤 거?”

“그냥 되게 거짓말 같은 거.”

“나 초등학교 때, 너희 집 공사하기 전에.”

“응.”

“거기 원래 무당집이었어. 사람들 목매다는 나무 있고.”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엄마가 그래서 그 근처 가지 말랬어.”

“…….”

“그 무당도 거기서 목매달았어.”

“…너 진짜 좀 하네?”

“응.”


맨날 학교 재미 없었는데 재밌었다고 말하고

밥 안 먹었는데 먹었다고 말하고

울었는데 안 울었다고 말하고

그러다보니까

잘해


물끄러미 보는 시선을 느낀다. 형원은 그 눈빛이 너무나 온도가 높고 밀도가 높아서 마음이 쓰인다. 민혁아, 너 그거 순도 높은 마음이면 어쩌냐고 묻고 싶다가도, 하지 않기로 한다. 우리 아직 어리고 이런 이야기를 할 시간은 아주 많을 거잖아. 나는 계속 재미도 없고 잘 먹지도 않고 잘 울기만 하다가 요새는 너 때문에 덜 그런다고 말해줄 날이 언젠가는 올지도 모른다.


형원의 집까지는 걸어서 십분. 도착해서 훌쩍 들어가려는 형원을 민혁이 덥썩 붙잡는다. 요새 얘한테 이렇게 붙잡히는 일이 많다. 돌아보니까 민혁이 어색하게 웃는다. 그리고는 새카맣게 밤이 내려 버린 돌아가는 길을 가리킨다. 낑낑대는 시골 똥강아지 같은 얼굴이다. 너무 무서워! 그 말에 웃음이 결국 터져버렸다.


“거짓말인데?”

“그래두.”


나 좀 데려다줘. 그 말에 황당한 얼굴로 아까 같이 나온 그 집으로 돌아간다. 이민혁이 하도 꽉 붙잡고 있다. 아예 거의 팔짱을 끼고 있어서 형원은 어이가 없다. 아까는, 무슨 객기로 걔네한테 그렇게 거짓말을 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근데 형어나. 우리 할머니도 이 동네 무당 얘기하던데. 진짜 무당 있었어? 묻는 말에 뭐 동네에 원래 다 한 분 씩 계시지 않냐고 태연한 척 말을 하고 있는데 밤길 옆으로 바스락, 산짐승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괜히 무당 얘기 꺼냈다가 저도 모르게 무서운 기분이 들었던 형원의 몸이 울컥, 동그랗게 말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팔을 당겨 품으로 끌어 당긴 건 이민혁이었다. 형원이 달팽이 고개 내밀듯 천천히 어깨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완전히 멀쩡한 민혁 때문에 황당하다. 얘, 지금. 하나도 안 놀란 거 맞지. 밤길 무섭다고 잔뜩 쫀 채로 집에 데려다 달라던 애가 맞는지….


“…나도 거짓말 잘 치지롱.”


형원아, 나 집에 혼자 있기 싫어.

이건 거짓말 아니야.

응?

어?

아, 좀.

같이 가자, 엉?


채형원은 완전히 졌고, 엄마한테 민혁이 집에서 자고 가요. 짧은 통화를 남겨 두고는 밤새 그 집에 있었다. 그렇게 안 생겨서 수박도 서걱서걱 잘 썰어 오는 민혁이 덕분에 앉은 자리에서 수박 반 통을 나눠 먹고, 딱딱한 복숭아와 물렁한 복숭아 중에 뭐가 좋냐는 시덥지 않은 이야기로 한참 투닥이다가, 자두까지 꺼냈을 때가 아마 자정이 지났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잠도 없어 사뿐히 자리에서 일어난 민혁이 모기향을 새로 갈아 끼우고 느슨히 쭈그려 앉아 부채질을 한다. 한 입 깨문 자두알을 쥐고 제 팔을 밴 채로 잠든 채형원 옆에 앉아본다. 물론 정말로 잘 생겼지만, 형원이한테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네가 앞으로는 거짓말 할 일 없었으면 좋겠다. 나랑 있을 땐 재밌을 거니까. 재미 없다는 말도 안 할 거고. 밥도 잘 먹을 거고, 울지 않을 거고 그러다 보면 거짓말 할 일도 없을 거고. 근데 왜 마음이 자꾸 아프지. 누가 깨문 것처럼 아파서 민혁은 마른 코를 훌쩍였다. 네가 깨문 거야. 네가 날 좋아하려면 내 마음에서도 무언가 배어 나오고 있어야 할 텐데. 나도 좀 먹어주지. 바보야.












“잠도 없어?”

“…응. 나 잠 없어.”


형원은 힘 없이 웃는다. 허벅지 근육이 또 뻑뻑하게 뭉쳐 찢어졌던 곳들이 어디인 지 도로 상기시키는 동안에 저도 모르게 앓았을 것이다. 고통을 못 이기고 눈 떴을 때는 이미 민혁이 와있다. 형원은 약국을 개업하고 근처 동네 병원 의사들과 친해졌고, 적당한 진통제를 처방 받아 적절히 먹게 되었지만 그래도 불쑥 이렇게 아프면 어쩔 줄 모르는 편이다. 민혁은 진통제와 물을 까서 내밀고 알아서 척척 따뜻한 핫팩을 뜯어 흔들고 있다. 식은 땀이 흘러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본다. 에어컨을 살짝 튼 민혁이 거봐, 설치하길 잘했지? 하고 애써 웃는 걸 보면서 응, 하고 대답을 한다. 고개 푹 숙인 채로 이 꽉 깨물고 이게 지나가길 기다리는 동안에, 얼른 약이 몸에 돌기를 기도하는 동안에 민혁의 손이 허벅지 위를 가만히 주무른다. 가쁜 숨이 조금 사라지고 나서야, 민혁은 형원을 가만히 끌어 당겨 안는다. 가슴과 가슴이 닿고 뺨과 뺨이 닿은 채로 오래 안아주고 있다. 미안하다거나 잘못 했다거나 섣부른 사과 대신에 순도가 정말로 높은 마음만 남겨 두고.


그런 마음을 너무 선명하게 느끼고 나면, 형원은 민혁을 원하게 된다. 정말 아무랑도 살을 섞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오직 이민혁이다. 자극을 위한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확실하게 기억하기 위한 움직임들이다. 입술이 닿고, 혀가 엉키자 민혁이 가만히 입술을 뗀다. 이마만 대고 가만히 물었다. 괜찮은 거야? 다리 아프지 않아? 묻는 말에 대답 없이 다시 민혁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물어 밀어붙였다.


조용히 따라와 주는 민혁이 티셔츠를 벗기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허리께를 손으로 훑어 지나간다. 가슴께를 엄지가 꾹꾹 누르면 옅게 더워지는 몸이 이제 쑥스럽지 않았다. 허락하는 한 절대 멈추지 않고 들어올 것도 알고 있다. 몸이 아파서 다리 사이가 충분히 벌어지지 않아도 상관 없었다. 지긋하게 몸을 납작하게 만든 채로 깊게 들어오는 게 느껴져서 새삼 앓아야만 했다. 세포까지 반으로 갈라지는 기분이 들어 완전히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안을 수 있으려면 늘 시간이 좀 걸렸다.


민혁은 늘 저만큼 단단하면서 아주 약간 물렁한 형원의 살성을 좋아했다. 혀든 손이든 혹은 어느 곳으로든 닿는 모든 곳에 전부 기대고 싶었다. 이제는 딱히 설렐 부분도 없지 않느냐며 가끔 묻는 형원이한테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바보 같은 구석이 있다. 민혁은 눈으로 형원을 보는 단계는 열여덟에 졸업했는데. 아깐 아파서 앓았는데, 이제는 좀 다른 의미로 어쩔 줄 모르던 형원이 팔을 뻗어 민혁을 안는다. 민혁은 허리를 숙이고 길게 그 애 입술에 입 맞추었다. 깨물린 채로 줄줄 흐르는 둘의 마음이 입술을 타고 섞여 흐른다.


품 안에서 크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형원을 안고 우리 마음이 오래 여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젖어 흐르는 마음이 마르지 않게. 바스라지지 않고 끈적이도록. 자두 한 알에 네 마음 달랠 수 있고, 나를 자꾸 먹이고, 태연스럽게 오그라드는 말을 뱉고, 이제는 더 이상 너의 거짓말로 덮이지 않은 계절.













하..여름이엇따.


ㅋㅋㅋㅋㅋㅋㅜㅜ 여름..민챙을 보고 싶었어요,, 쓰면서는 사실 저 청소년기(?)를 지나서 저 둘이 어마어마한 이별을 겪는 상황이 펼쳐지는 게 좀 슬펐거든요. 탈선의 ㅌ도 싫어하던 형원이가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사고 나거든요ㅜㅜ 그리고 형원이가 본인이 거짓말을 잘한다고 하는 부분 말이에요. 한참 어른이 되었을 때 다시 재회한 민혁이를 사랑하지 않았던 척, 안 그리워했던 척 거짓말을 했어야 하는 형원이 맘이 좀 안쓰러운 부분이 있어서.. 적으면서 좀 짠했네요.. 어리고 설프고 뜨겁고 조금 바보 같던 사랑 하는 아기민챙과 .. 좀 쌉싸름한 느낌이 드는 어른 민챙도 쓸 수 있어서 오늘 몇 시간 호로록 쓰면서 너무너무 재밌었습니다...


저는 현생이 바빠져서

한동안은 자주 못 올 것 같아요

아무래도 ㅇㅕ름이 길 것 같으니 그거 끝나기 전에 꼭 올게요!!!


긴 글 읽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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