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날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전날부터 수화기 너머로 조잘거리는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우리는 밤이 깊도록 유선 전화로 통화를 했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우리끼리 있을 땐 제법 수다스러웠다. 나는 퇴근 후 침대에 누워 협탁에 설치한 유선 전화 수화기의 선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아가며 한탄을 들었다. 천장에 빛바랜 야광 별이 붙어 있었다. (난 그걸 왜 지금에야 알았을까?) 창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살갗에 가을바람이 닿으면 기분이 좋았다. “안 가고 싶은데.” 수화기 너머로 그녀가 투덜거리면 나는 더 기분이 산뜻해졌다. “기껏 만나준다는데 왜요, 지금 아니면 다신 못 볼걸. 원래도 틀어박히면 잘 안 나오던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보고 싶지 않은 거야. 내가 뭘 만나러 가는 건지조차도 모르겠으니까.”

“누가 보면 괴물한테 시집가는 줄 알겠네.” 숨을 죽여 웃었다.

“웃기냐?”

“웃으면 안 되는 거였어요?”

“내가 대서양을 건너서 널 쥐어패러 갈 수도 있다는 걸 꼭 기억해, 오트.”

“으하하, 내일 데이트라는 사람이.”

“데이트 아냐.”

“생각하기 나름이죠….” 역시 유쾌한 일이다.

 

2.

앨런 왓슨이 돌아왔다. 그는 반년 넘게 실종 상태였고, 그녀가 그의 소식을 찾기 위해 들인 노력을 무게로 달아서 잰다면 지구가 폭삭 무너질 만큼은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자주 휘둘려 가며 주말이면 세계 곳곳을 돌아다녀야만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남자는 생김이 평범했고, 어딜 가나 잘 기억에 남질 않았다. 그를 기른 마음씨 올곧던 왓슨 부부는 전쟁통에 공습에 휘말려 돌아가셨고 남은 친족 하나 없는 까닭에 그의 소식을 알만한 사람을 추려낼 도리도 없었다. “앨런 왓슨에겐 정말 우리밖에 없었군.” 12사도를 제외하면 아무도 그를 모른다.

 

3.

돌이켜보면 그러니 근무하던 부대 내에서도 진급이 늦었을 터다. 사색가는 어느 국가에서나 군부대와 기질이 맞지 않으니까. 언젠가 이 점을 짚었더니 그는 얼빠진 얼굴을 하고 “최전방에선 저 같은 사람이 유리합니다.”라며 웃기지도 않을 농담을 했다. “별이 돌아가는 각도 따위를 계산하면서 시간을 때울 수 있거든요. 전쟁에 몰두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빨리 죽던데. 영웅이 되고 싶어 하니까.”

그때 우리 앞에서는 죽어서 틈새로 빨려 들어가는 괴물의 시체가 있었다. 밤은 깊고, 빛 공해로 인해 별은 없었다. 나는 그가 빛을 발하며 사라져가는 틈새를 쳐다보다가 마지못해 담배에 불을 붙이는 꼴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형님은 우리가 빨리 죽을 거라고 예상하는군요.”

“‘우리’라니?”

“나랑 누님.” 여기서 ‘누님’은 ‘그녀’를 의미한다. “우린 영웅 놀이에 진심이잖아요. 아시다시피.”

그는 눈을 찬찬히 깜빡거리기나 했다. “당신들 없이 오래 살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늘 어딘지 나사가 빠져 있는 인간. “진심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데요.”

“그만두는 편이 좋다고 하면 그만둡니까? 틈새 수선할 때마다 입고 나오는 요란한 스타일이라거나….”

“제 마법은 누님이나 당신과 달리 믿음에 뿌리가 있어서 무리예요. 화살 하나에 담는 마법이 흔들렸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그때도 죽는 거라고요. 영웅 놀이건 뭐건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게 낫지.”

“그런가.” 담배 연기가 샅샅이 흩어진다. “그럼 저도 영웅 놀이에 가담하는 게 낫겠군요….” 그 말은 성사된 적이 없다.

 

4.

그는 그녀의 생일을 이틀 앞두고 전화를 걸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일일이 캐묻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생일 전날 나에게 전화를 걸어 그 남자를 만나기로 했다는 말만을 전했다. 나는 단단한 피복으로 감싼 전화선을 손끝으로 어르기나 했다. 구태여 그녀를 만류하진 않았다. “틈새 수선 같은 걸 하러 가는 것도 아니니까,” 그녀가 내일 억센 새빨간 머리칼을 어떻게 묶을 건지, 뭘 입을 건지 따위나 실없이 상상했다.

“좀 멀쩡히 입고 가봐요.” 수화기 너머로 대답이 없다. 기분은 알 것 같았다.

 

5.

공을 들여도 ‘우리’가 되어주지 않는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앨런 왓슨은 어디서건 겉돌았고, 그건 집단의 성질에 전적으로 달린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사관학교에서도 이렇다 할 친구 하나 만들지 못했다고 했다. 왓슨 부부 또한 지역 내에서 가깝게 지내는 친인척이나 이웃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어쩌다 공동체라는 커다란 바다에 잠기지 못하고 수면 위나 간신히 표류하는 조각 섬들이었는지는 그도 모르겠다고나 했다. 그저 그들 가족은 누구 하나 타인과 잘 어우러지지 않았다. 그는 12사도 내에서도 말수가 적었고 가끔은 까닭 없이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랬다 한들 이상할 게 하나 없는 신격이었다. 다만 그녀 하나만이 그가 사도들끼리 모여도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표류하는 꼴을 지켜보질 못해서, “술은 좋아해?” 그런 흔해 빠진 말을 빌미로 ‘그녀의 우리’로 끌어들였다.

 

6.

앨런 왓슨은 우리를 ‘그의 우리’로는 당기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우리의 처절한 영웅 놀이에 정말 어울리지 않았던 이유겠다. 그에게 우리는 철저한 남이다. 누님이 아무리 마음을 쏟아도 셋이 모여 정말 ‘우리’가 되는 일 같은 건 벌어질 리가 없다. 그 남자는 우리 사이에 끼어 앉아도 술 한잔할 줄 아는 사교적인 인간이 아니었고, 우리는 그 남자의 서재에 앉아서도 책 한 장 넘겨 읽지 않는 무도한 이들이다. 그 남자의 탓도 아니지만, 우리의 죄도 아니다. 그녀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가 그해 생일에 실연당할 일만 남았다는 걸 알았다. 그게 퇴근길에 값싼 위스키나마 사서 귀가한 유일한 이유다. 그녀가 바다를 건너 나를 보러 올 줄 알았으니까.

 

7.

현관을 열면 남의 집이라는 인식조차 없이 아일랜드에서 날아온 새빨간 머리를 한 마녀는 어설프게 인간인 척하는 옷이나 걸치고, “너 정말 퇴근이 늦네.” 그런 소릴 하며 충혈된 눈으로 나를 쏘아본다. 나는 모르는 척 웃기나 했다. “그럼 야근도 안 했는데 야근했다고 거짓말이라도 하는 줄 알았어요?” 왜 웃음이 났는진 모르겠다. 끈을 복잡하게 얽어 묶어야 하는 앵클 부츠를 반쯤 벗고 남의 침대 위에 앉아서 정말 미친 여자처럼 엉엉 울었을 그녀를 상상하는 일이 나에겐 언제나 적당히 유쾌했다.

“왜, 반년 만에 돌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누님 싫다는 소리였어요? 그럴 것 같긴 했어, 솔직히 그거 아니면 돌아오자마자 누님부터 찾을 이유가 없지. 사도 멀린이 언제는 그랬나? 까닭 없이 만나자고 할 줄 아는 타입 아니잖아.”

“미안하다고 했어.” 그녀는 내가 얇은 겉옷을 벗어 걸어두는 동작을 지켜보다가 도로 얼굴을 그녀의 무릎 위로 파묻었다. “그래서 알았지, 어떤 의미로든 다 끝났다는걸.”

“진짜 거하게 차이셨나 본데.” 오른쪽 눈을 가린 안대를 풀어내면 시야가 맑아져서 좋았다. 그녀는 더 울지 않았다. 웅크린 몸에 미동이 없다.

“기억이 돌아왔대.”

“안주 없는데 괜찮아요? 마실 거죠?”

“내가 절대로 그런 저주 같은 마법엔 손대지 말라고 했는데도.”

“누님 말 안 들어서 천벌 받은 거지, 뭐.” 값싸고 얇은 유리잔에 술을 담아 건네면 그녀, 나의 영웅 이본느 녹턴은 술잔에 비친 그녀와 나, 한데 묶어 ‘우리’를 응시했다.

“널 정말 죽여버릴 거야.”

“마음에도 없는 소리. 난 피코드 호를 가동하라고 앨런 형한테 권유한 적 한 번도 없어요. 그거 돌아가기 시작하면 좋은 꼴 못 볼 거고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고만 경고했지. 정말 근사하게도 목숨을 끊는 형이로군.”

“‘우리’가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내가 술잔을 두 번 흔들면 그녀는 마지못해 그 잔을 받았다. “그냥 ‘우리’랑 사고 체계가 달랐던 거죠, 나 같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충고까지 무시하진 않았을 거라고요.”

“난 그냥,” 어쩌면 그녀가 받은 술은 그녀의 체온만큼은 따뜻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와 딱 한 뼘만큼 거리를 두고 앉았다. 그녀가 삼킨 말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었겠다. 잘해보려고 했던 건데, 아니면 걱정했던 것뿐인데, 친구가 되고 싶었어, 가끔은 그 이상, 그보다 조금 모자라더라도 ‘우리’가 되고 싶었어, 너는 아무와도 어우러지질 못하니까, 마치 물과 기름처럼….

“…누님 좋아하는 사람을 좀 좋아해 봐요, 싫다는 사람 때문에 울지는 말고.”

“싫다는 소리까진 안 들었어.”

“누님이 이것저것 다 해줘도 과거의 기억으로 도망치는 걸 선택하는 수준이면 싫었던 거지, 뭐.” 그녀는 서글플 만큼 맥없이 웃었다. “오트,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야. 그치?”

“난 더는 안 도망칠게요. 나까지 도망치면 누님이 울어서 태평양 만들어졌다는 전설 하나 생기겠어.”, 그러면 좀 더 웃을 줄 알았다. “미련한 여자라 이거야?”, “전 미련한 게 좋으니까 괜찮아요, 뭐….”, “말이라도 예쁘게 해봐, 바보야.” 알기 쉬워서 좋다.

이것이 내가 ‘앨런 왓슨’이 아닌 ‘파벨 설리번’을 좋아하는 이유다.

내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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