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그림, 제작 : 맨홀님








04. 상사야말로 원수다





"수석 회북술사 시안 클라라몬드 경. 아르덴 신성국의 제 1 신성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인 나 단 세실은, 우리 거룩한 빛의 사도이자 만물의 축복을 비시는 교황 성하의 명을 전한다. 시안 클라라몬드, 그대가 아도니스의 날개가 되었음을 알린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소용 없었다. 세실은 곧장 임명장을 펼치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크게 교황의 명을 읊었다.


"이 임명은 우리의 빛 되시는 아도니스의 인배하심으로, 역사 속에 그 분의 뜻이 임할 것입니다."


세실의 선언에 다른 성기사들이 마저 임명의 언약을 순서대로 읊었다. 어느새 그들은 나를 원형으로 둘러싸 시계 방향대로 서임식의 언령을 읊으며 절차를 완성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한 가운데에 있는 성기사를 묶어놓고 양손 잡고 기도하고 진중하게 읊어봤자 사이비 종교처럼 보일 뿐이라고! 이게 대체 창조신 아도니스를 섬기는 신성국 아르덴의 성기사단이라고 해도 되는걸까?


"아도니스의 날개가 지상에서 널리 펼쳐져 역사하시기를."


"이는 아도니스의 뜻이며, 그분의 빛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리라 믿습니다."


"믿습니다!"


서임식의 언령이라고 해봤자 결국 그저 신성력을 발휘해 강하게 염원하며 기도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언령은 언령이었다. 이들은 전부 이 과정의 보증자로, 아도니스의 종으로서 아도니스께 맹세하고 다짐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나는 허탈해져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새벽 하늘은 희미한 구름이 가득 껴 내 미래처럼 불투명하게 보일 뿐이었다.


도무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차가운 흙바닥에 등이 딱딱하게 베겨가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르덴의 날개라니. 교황의 무기이자 수족이 되는 아르덴 성기사단은 세속의 기준과 같은 기사단 직위를 사용하지 않아 겨우 네 단계에 불과했다. 수습기사, 평기사, 부기사단장, 기사단장. 평기사에 속하는 내 직위는 수석회복술사까지가 한계였다. 원래대로라면 말이다.


축복받은 네 기사는 아주 특별한 직책으로, '아도니스의 눈', '아도니스의 귀', '아도니스의 입'과 아도니스의 날개로 불리는 네 명의 기사를 말했다. 지난 대전쟁에서 특별한 능력으로 지상을 수호해내고 온 대륙의 영웅이 된 이들의 명성은 성기사단을 총괄하는 제 1 기사단장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추기경과 동급인 예우를 받고 외교 사절로 파견되거나 대회의에도 참석해 발언하는 게 허용될 정도로...성기사로서는 최고의 명예이자 지책이었다. 근데 내가 그 '아도니스의 날개' 라고? 아니, 아무리 아도니스의 날개가 전사를 치유해주는 회복술사를 말해도 이게 말이 되나? 대체 무슨 명분으로 날 특진시킨 거야?!


다들 번갯불에 콩 볶듯 서둘러 언약을 읊어대 신성한 서약은 끝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었다.


교황 나한테는 다시 사직서 써오면 될 것처럼 말해놓고! 사람을 이렇게 속여?!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어제에 넌 대공령으로 발령될 예정이니 꿈 깨라고 말해줬을 거 아니야. 그러면 밤 사이 사직서만 남겨놓고 튀었을텐데! 


"아아악!! 나 승진 안해! 안한다고! 이거 안 치워?! 니가 뭐라고 대관식을 약식으로 치뤄?!"


"왜 승진해도 난리야...덕분에 연금이랑 보너스는 엄청 늘었는데? 너 돈 좋아하잖아."


"몰라, 몰라! 돈이 문제야? 난 이 특진 인정 못해! 못한다구!"


갑자기 커진 소리에 저 멀리서 새들이 푸드덕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깜짝 놀라 귀를 막는 수습기사도 보였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만 있다면 당장 다리를 흔들고 양손을 움직이며 크게 소리를 질렀을거다.


"평소에 일도 안 하는 게!! 니가 무슨 부기사단장이라고!!"


나는 세실을 노려보며 말했지만, 세실은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말 뿐이었다.


"하아...이게 내가 이렇게 무시당해야 될 일이야?"


젠장, 평소에 하도 일도 안 하는 게 낙하산으로 승진했다고 대놓고 깠더니 역시 아무 면역도 없는 모습이었다.


"몰라, 모른다고! 나 쉬고 싶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왜 교...성하랑 같이 날 보내버릴 생각을 해? 네가 친구 맞냐!"


"아니...나도 시시 네가 쉬고 싶어하는 건 잘 아는데. 솔직히 나이가 님 후임으로 보낼만한 사람이 진짜 너 밖에 없다고. 단델리온 대공이 오 년 넘게 널 콕 집어서 요청했는데, 그걸 반려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젠장! 대체 단델리온 대공은 왜 그렇게 날 요청해서 이 사단을 만든거지?! 정말이지 유능하고 똑똑해도 문제다. 나는 회북술사들 중 가장 젊은 축에 들었고, 전례 없이 드물게 빠르게 승진한 걸로도 유명했지만 신학원에 들어가선 치료 안 해줘도 된다고 신나다고 열심히 연구에 몰두해버리는 바람에 이름을 더 알려버렸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유명해졌다고 해도 굳이 대공령까지 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대공령은 분명 한때는 최전방으로, 대전쟁의 현장이었지만 이젠 종종 출몰하는 마수와의 작은 소요전만이 계속 되는 중이었다. 대전쟁이 끝나고 마계의 문이 봉인된지도 벌써 19년 째인 현재인 오히려 서부 지역의 오랜 가뭄으로 인한 기아와 분쟁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다.


"아, 그래도 나 아니여도 되는 거잖아!"


세실은 내 말을 듣자마자 안쓰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무릎을 굽히고 나와 시선을 맞췄다. 뭐야, 가까이 다가와서 보니까 더 짜증난다. 내 친구지만 어째 해가 갈수록 능글맞아 지기만 하는 게 아주 재수없어.


"그래. 그건 그렇지 근데...네가 잘못한 게 하나가 있어."


"대체 내가 뭘! 내가 뭘 잘못했는데! 성하께서 먼저..."


"그러니까. 성하가 까라고 하시기 전에 진작 깠어야지. 안 까고 버티니까 이렇게 된 거 아냐. 대체 왜 그랬어, 친구야."


"악!!! 이 교...성하 앞잡이가!!!"


나는 단 세실에게 가운데 엿을 날려주려고 했지만 손목이 묶인 채라 그것도 심통치가 않았다. 결국 나는 혀를 최대한 길게 빼고 내밀어서 양쪽으로 흔들어대며 세실을 골리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나 아무리 약 올려도 세실은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가 내 욕을 하나~' 하고 귓구멍을 파는 그 모습이 더 얄미워서 소리를 치느라 기운만 뺐을 뿐이다. 그 동안에도 수습 기사들이 성력을 불어넣은 이동진은 점점 더 크게 빛을 발했다.

고대의 성어가 내 머리 위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성어를 해석하자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동 좌표는 분명 북부의 교단 수도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안 돼! 거기서 죽기엔 아직 이르단 말이야!!"


내가 아무리 처절하게 외쳐도 세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듯, 거기는 특히 추우니까 특별히 제작한 방한복을 미리 보내놨다는 할뿐이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정말 생명이 위협받는 문제였다. 일단 그곳에서 최대한 힘을 아껴서 써보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장기간으로 파견되어 있다보면 내 심장이 너덜너덜해서 회복력의 분출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내 또래 기사들은 전혀 없는 그 추운 변방 지역에서 외롭게 몇 년이나 썩다가 죽고 싶지 않다고!


"단세실! 너 진짜 내가 죽여버릴거야!!"


눈 앞이 점점 흐려졌다. 빛이 한가득 들이차서 세실의 얼굴이 일렁여보였다. 젠장,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눈 앞이 온통 하얗게 점멸했다. 그리고 완전한 암전이 찾아왔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면 북부 수도원일 것이다. 시안 클라라몬드, 이렇게...방년 26세에 화려하게 떠나버리는구나.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치디찬 북부에서 이단으로 몰릴까 두려워하면서 치료만 해주다가 쓸쓸하게...


젠장! 죽기 싫어, 죽기 싫단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아픈 건 싫고, 괴로웠다. 사람들을 치료해주면서 보람도 느끼고 칭찬도 받고 그런 삶이 싫었다는 건 아니다. 평민에, 전쟁 고아인 내가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아온 것도 결국은 다 이 가짜 신성력과 치유능력 덕분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살아야 더 많은 사람을 치료해줄 수 있을 것 아니야? 그동안 분쟁 지역과 역병 발생지에 파견 나가면서 아프고 괴로워하는 모습은 많이 보았다. 이제 더 이상은 내가 아픈 건 물론이고 누가 아파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자유로운 새니 영혼이니 같은 놀림을 들어도 다 감수하고 신학원에 처박혀있던 건데...


첸 교황과 망할 단델리온 대공 때문에 조용히 은퇴해서 목숨 부지하고 편하게 사려던 내 계획이 이렇게 전부 헛거가 되어버렸다. 나한테 거짓말하면서 잠깐 도망가고 쉴 시간도 주지 않고 이렇게 사람을 보내버린 교황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굳이 47명 중에 날 집어서 요청한 단델리온 대공도 가만 두지 않을 거다! 아, 단 세실도 여기에 일조한 이상 절대 가만히 둘 수는 없다.


나는 그렇게 그들에게 꼭 전부 복수할 거라는 다짐을 수십번 되새기고 어떻게 복수할지 전략을 짜내어 단델리온 대공령으로 보내졌다.







그날, 시안은 흥분해서 거의 신경쓰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선 전송 직전까지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부기사단장을 놀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있었다. 다섯 명 전부 시안보다도 젊고 어린 수습기사들로, 대체로 그들은 이제 갓 신학원을 졸업하고 정식으로 기사단에 편입된 자들이었다.


"그...시안 경께서는...원래...저러신 편인가요...?"


수습기사 한 명이 눈을 찡그리고 망설이며 묻자, 세실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응. 쟤 알고 보면 성깔 진짜 더러워."


세실은 후폭풍을 걱정해서라도 전날 시안이 마신 와인이 교황 성하가 직접 축성을 내려 깊게 잠들게 하는 효과가 있는 와인이라는 사실은 평생 비밀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신학원에서는...전혀 저런 줄 몰랐는데..."


수습기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세실의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말했지만, 동시에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항상 단정하게 땋아올리던 하늘색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쳤고, 검은 눈동자는 자기를 매섭게 노려보던 그 모습은 도무지 잊힐 것 같지 않았다. 신학원에선 키가 작아 단상이 높다고 투덜대고, 까치발을 하고 칠판에 필기하는 모습이 귀여웠던 그 시안 님이 저런 모습이라니. 시안 님을 흠모하던 애들에게 말해주면 절대 믿지 못할 터였다. 세실은 수습기사를 돌아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거야 당연히 그랬겠지. 쟤도 나름 수석회복술사의 이미지라는 게 있잖아?"


어깨를 치며 웃는 모습이 친한 친구를 대하는 듯 친숙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마치 장난을 저지르고 같이 하자며 동의를 구하는 악동처럼 보이기도 했다. 수습기사는 세실의 시선을 피하며 땅으로 고개를 숙였지만 납득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람들은 교황청 소속의 사제라든가 성기사를 떠올리며 금욕적이고 과묵하고 항상 겸손한 모습을 생각하기 일쑤였다. 그건 심지어 신학원에서 교육받는 기사준비생조차 마찬가지였는데, 신학원 내의 엄격한 규율 때문에 교황청과 기사단은 더욱 그러리라 예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제 아무리 대륙에서 가장 신실한 종이라고 찬탄받는 아르덴의 성기사라도 공과 사는 다르다는 걸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세실은 일부러 모범생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고 타의 모범이 되는 성기사들만을 모아 흥분한 시안의 모습을 보게 한 것이다. 편견은 일찍 부수어 줄수록 좋았다.


사람의 절제에는 한계가 있다. 무작정 억누르기만 하면 반드시 터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완벽한 금욕을 실천하느니, 미숙한 절제가 낫다고 첸 교황은 말했다. 세실은 그 말에 동의했다. 어렸을 때부터 성력을 발현해 모국에서 아르덴 신성국으로 보내지고 중앙 수도원을 거쳐 신학원에서 성장한 성기사들은 순정과 청렴, 정직의 미덕만을 배웠다. 

그래서 성기사단은 수습기사가 신성국 바깥에서 향락과 권력의 맛을 접하고 평생 억누르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는 걸 극도로 경계했다. 국가 자체가 교황청이나 마찬가지인 도시국가 아르덴 신성국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지만 그들이 수습 기간을 마치고 정식으로 파견을 나가는 그때가 가장 위험했다. 이제 막 정식기사가 된 풋내기라 할지라도 성기사인 그들은 교황의 직속 군대이자 교황의 가장 가까운 수족이었다. 신성국에서는 크게 대단한 지위가 아니었지만, 오히려 바깥에선 주교 이상에 준하는 고위성직자로 극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평화의 시대라 신권이 예전과 같이 않다고 해도, 오랜 세월을 거쳐 교세를 나날히 확장해 대륙을 하나의 종교로 통합한 유일신 아도니스와 그 교회의 권세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 그 대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도 전대 단델리온 대공과 성녀의 희생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항상 각국의 귀족과 정치가들은 발 벗고 나서 고위 사제 혹은 성기사와 연줄을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신의 후광을 업은 권력으로 부정을 저지르고 사익을 추구하는 사제들은 지금도 적지는 않았다. 그래서 교황청은 그를 적당히 받아들이고 이용하면서도 항상 권력의 남용으로 인한 부정을 경계했다.


비록 사제들에 비해 그 기회가 적다 하나 성기사가 권력의 맛을 보고 변모하지 않도록, 그들이 향락에 눈을 뜨지 않도록 오히려 평소에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신심을 유지하는 것과 엄숙하고 품위있게 말하는 일은 별개라는 걸 가르쳐주는 것도 바로 그 일환이었다.


모름지기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웃으면서 그저 기도할 뿐이라 말하고, 뒤에서 쌍욕을 하며 속풀이를 하는 게 진정한 성기사의 자세였다. 

신성국의 원조가 닿는 곳은 언제나 항상 어렵고 괴로운 지역이었기에, 그들이 구호 작업 때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은 대체로 빈민가의 사람들이었다. 쉽게 말해, 아무리 금욕적인 기사라도 빡치면 쌍욕을 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시안처럼 많은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는 회복술사라면 과중된 업무 때문에 성격이 더욱 험악해지기 마련이었다. 신실하기로 유명했던 어느 회복술사는 파견 업무를 시작한지 일 년만에 '시발! 아도니스여! 저도 살려주소서!' 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니. 하지만 역시 정권과 결탁해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것보단 쌍욕을 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성기사가 훨씬 건전했으니 성기사단에는 이를 오히려 당연하게 여겼다. 


"그것도 오늘부터 깨졌겠지만! 뭐, 그러니까 너희도 어디가서 말 함부로 하지 말고."


세실은 시안을 전송했던 이동진이 점점 새하얀 빛을 잃고 다시 잔디 아래 문양을 감추는 모습을 보고 다시 수습기사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수습기사는 갑자기 맞은 등이 아픈지 어깨를 움츠렸지만 감히 부단장에게 시안처럼 아프다고 외치는 만용을 부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니들도...성하께 잘 보여야 된다는 걸 좀 깨달으면 좋겠지?"


세실은 수습기사들을 둘러보며 지극히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그러나 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습기사들의 표정은 더 없이 무거워보였다. 마치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여전히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그 내용은 무시무시하게 들린 탓이다.


그날, 다들 한가지 교훈만은 가슴에 품을 수 있었다.


'교황 성하께 함부로 깝치지......아니, 대들지 말자.'


세실은 파리해진 수습기사들의 표정을 보며 두 가지 교육을 동시에 달성했다는 흐뭇함에 콧노래를 불렀다.  첫째는 가끔은 적당히 점잔을 그만 빼고 감정을 분출하는 방법, 그리고 가장 중요한 둘째는 성기사단의 주군 되시는 교황 성하에게 깝사지 말고 항상 복종할 것이었다. 








시안이 북부 수도원으로 강제 전송되어 비명을 지르고 세실이 신입 기사들의 정신 교육을 해주고 있던 바로 그 시각, 차가운 북부의 최북단에 위치한 빙하 지대에서는 살이 에는 칼바람과 함께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홀로 선방에 우뚝 서 있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오른쪽 위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빙산 몇 개를 너머 마계의 문이 열렸던 곳이자 봉인의 구심점, '마지막 빙극'에서 나오는 검붉은 오라가 흐릿하게 보였다. 자세를 고쳐 허리의 검집에서 바스타드 소드를 꺼내 쥐었다. 그의 오른손에서 얇은 검에까지 은은하게 푸른 빛이 뿜어져나왔다.


"대공 전하! 전방 세시 방향으로 중형입니다!"


뒤에서 마법구를 들고 살피던 부관의 경고가 들렸다. 그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한 점만을 응시하며 답했다.


"안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부수셔지는 빙하였다. 얼음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짐승의 포효가 고요한 설원에 울러펴졌다. 저 위 빙산의 방벽에 쌓여가던 새하얀 눈들이 우수수 떨어지더니, 곧 예상한 방향에서 빙산 하나를 뚫고 거대한 몬스터가 나타났다. 새하얀 털을 가진 짐승은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온전한 크기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 때 늑대의 것이었을 귀 옆에 사슴의 것보다도 길고 굵은 뿔을 양 갈래로 뻗치고 양 눈을 붉은 빛으로 형형하게 뽐내고 울부짖는 그 기세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변이한 늑대가 울부짖을 때마다 끓어오르는 마기에 다들 잠시 숨을 참았다. 표정의 변화 없이, 무감각해보일 정도로 냉담하게 짐승을 올려다보는 건 오직 그 뿐이었다.


그는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곧장 달려올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바로 그 순간을 위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새하얀 설원에서 어두운 검정 갑주와 짙은 회색 피부는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그러나 남자는 북부의 짐승들이 그렇듯 설원에서 자신의 색을 하얗게 덮어쓰지 않았다.


살의를 알아차리는 건 본능이었다. 자신의 숨통을 끊어놓고자 하는 상대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도 본능이었다. 그러나 그는 변이한 짐승과 달리 적의를 분출하지 않았다. 그의 살의는 한 점에 응축되고 집중되어 제련된 장인의 무기와 같았다. 그를 알아차린 짐승은 더욱 위협적으로 털을 부풀리며 발톱을 드러내 단번에 빙산에서 뛰어내렸다. 도약하자마자 아래 빙산을 밟고, 빙산이 부숴지기 전에 다른 빙산을 밟아가며 오는 짐승은 지나치게 빨랐다.


그의 뒤에서 마법 주문을 영창하던 부관과 활시위를 잡아당기고 검날을 치켜세우는 부하들의 긴장 또한 점점 가파르게 높아졌다. 그러나 그는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계속 짐승과 눈을 마주할 뿐이었다.


짐승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마지막 도약을 하는 순간, 그 또한 발을 움직였다. 한 순간의 도약만으로 착지한 짐승보다 높은 허공에 올랐다. 건장한 성인 남성의 움직임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순간,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그는 곧장 양손으로 검을 쥐는 자세로 검에 자신의 힘을 싣어 곧장 짐승의 목덜미에 내리꽂았다. 


그의 몸과 검의 무게를 함께 실은 일격은 괴물의 털과 두터운 가죽을 뚫고 명중했다. 변이된 짐승의 가죽은 보통의 검으로는 베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흩날리는 붉은 피와 함께 고통에 찬 비명이 매서운 칼바람을 헤치고 설원에 울려퍼졌다.


"정화되어라."


그가 말하자 말하자 검신에서 푸른 빛이 짐승의 목덜미를 주변으로 퍼졌다. 푸른 빛이 일렁이며 단숨에 짐승의 크기가 줄어들더니, 집채만했던 크기가 점점 더 줄어들어 일반 늑대와 비슷한 정도의 크기로 돌아갔다. 귀 옆으로 높이 솟아던 뿔도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뒤덮었던 눈에 보이지 않는 마기가 단숨에 흩어지더니, 정화의 빛을 이기지 못하고 소멸했다. 짐승은 숨이 직전, 작게 울었다. 개의 울음에 가깝게 힘없이 끼잉대는 울음이었다.


그는 검을 더 깊숙히 내리꽂았다가, 단번에 뽑아냈다. 붉은 피가 분수의 물처럼 뿜어져 나와 갑주에서부터 얼굴까지 붉은 피가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길쭉한 귀와 흑단처럼 검고 매끄러운 머리카락, 굳게 다물린 입술에까지 뜨겁고 붉은 피가 잔뜩 흝뿌려졌다. 그러나 그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뜰 뿐이었다. 눈을 뜨자, 짙은 속눈썹 아래 검은빛 동공과 은빛이 도는 새하얀 홍채가 모습을 보였다. 인간과 달리 홍채가 검고 어둡고 동공이 밝은 흰 빛을 띄는 다크엘프의 역안(逆眼)이었다.

















글연성 백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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