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흘러흘러 어느새 연회의 날이 되었다. 나 혼자서는 드레스를 입지 못할 것이므로 아이리의 손길이 필요했고, 피에르는 흔쾌히 부티크의 탈의실을 빌려주었다. 아이리는 내가 옷을 갈아입자마자 어린아이는 알아서는 안될 이유로 쫒겨나긴 했지만.


"어깨를 드러내지 말라고 할 걸 그랬어요."


피에르의 부티크 안에 딸린 화장대에 앉아 라프레티가 요 며칠 새 계속 물고 빨아서 생긴 자국이 신력의 빛과 함께 사라지는 걸 아쉽게 바라보며 말했다. 숄을 걸치거나 마법으로 가리거나 하면 가려지긴 하겠지만 파티 내내 신경 쓰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력으로 키스마크 지우는 전직 신녀…….'


하지만 자괴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키스마크도 일종의 상처라고 판단이 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키스마크 지우기를 끝내고 빗으로 머리를 빗겨주는 라프레티의 손길이 기분이 좋아서 눈을 감자 금세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놀라서 눈을 뜨자 벌꿀색의 눈과 눈을 마주쳤다. 머리를 빗겨주다가 어느새 눈 앞으로 온 것인지 신기했다.


"앗, 키스 해달란 뜻이 아니었나요?"
"화장이 망가지면 곤란해요 라피."


이 곳의 화장품은 하나도 몰라서 수정화장 하는 법도 모른다. 애초에 화장의 시작부터가 '라프레티가 마법으로 해결해주었습니다!' 였지만. 핸드백에 들고 다녔던 쿠션 팩트와 립스틱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괜찮아요 언니는 맨 얼굴도 예쁘니까."


그런 대사를 진짜 예쁜 애가 하니까 진짠지 아닌지 모르겠다. 아마 얘는 진심으로 하는 얘기겠지만. 지금도 자기 꾸미기는 마법으로 3초 만에 끝난다며 나를 꾸미는데 애를 쓰고 있다. 마치 현실의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으면서 게임 캐릭터 커스텀 마이징은 몇 시간씩 투자하는 전생의 나처럼.


"이제 핀만 꽂으면 돼요. 언니한테 어울릴 거 같아서 챙겨둔 게 있죠."


머리를 틀어올릴까 했지만 귀족 놈팡이들에게 언니의 목선을 보여주기 싫다며 몇 놈의 눈알을 뽑아 버려야 할까 하며 고민하길래 빗어내려 머리 장식으로 장식하는 정도로 끝내기로 했다.

라프레티가 주섬주섬 꺼낸 핀은 내가 알기로는 게임 내 아이템은 아니었고 누가 봐도 진짜 보석들을 큼직큼직하게 박아 놓은 화려한 핀이었기에 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물어보기로 했다.


"이 핀은 어디서 샀어요?"
"산 건 아니고 어느 드래곤이 갖고 있었더라……."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핀을 머리에 장식하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라프레티가 드레스 자락을 정리해주었다. 하얀색 엠파이어 드레스는 마치 웨딩 드레스 같았다. 장난스럽게 반투명한 숄을 머리에 걸치고 한바퀴 빙글 돌아보자 라프레티가 나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언니가 그럴 때마다 심장이 멎을 거 같으니까 그만 해요."


나에게 가볍게 키스한 라프레티가 두어걸음 뒤로 물러나 손가락을 마찰시켜 소리를 내자 라프레티는 여신처럼 바뀌었다. 아니, 원래도 예쁜 아이였지만 꾸며놓으니 더 예쁘다. 연분홍색의 머리카락과 밤하늘 같은 짙은 남색의 드레스는 지독히도 어울렸다. 하지만 한순간에 바뀌니 어딘가 위화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꼭 프리셋에 저장해 놓은 코디 같네.'


내가 너무 게임에 찌든 걸까? 라프레티를 한바퀴 돌아보는데 단정히 빗어내린 머리카락에 내 머리에 장식된 것과 맞물리는 한 쌍일 것 같은 핀이 라프레티의 머리카락에 장식되어 있는 걸 보고 살짝 웃었다. 라프레티가 선물로 준 수정 백합도 허리에 장식하고 라프레티의 손을 잡고 탈의실을 나서니 아이리가 드레스에 맞춘 구두가 담긴 상자를 내밀었다.


'상당히 굽이 높네?'


신녀 생활을 한 뒤로 거의 굽이 없는 신발을 신다보니 높은 굽의 구두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신을 신고 부티크의 밖으로 나가보니 고급스러운 남색 마차가 서 있었다. 마차의 문 앞에 서 있던 마부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사파이어의 주인께서 보내셨습니다."


샤를로트가 보냈구나. 라프레티의 표정이 팍 구겨졌지만 이내 말 없이 마차에 탔다. 천천히 움직이는 마차의 창 너머로 화려한 황궁이 보였다. 어쩐지 전쟁터에 들어가는 느낌이라 손에 힘이 들어 가려는데 라프레티가 내 손을 잡았다.


"드레스 구겨져요."


내가 알기론 라프레티도 본궁에 들어가는 건 처음일텐데 왜이렇게 평온해 보이는 걸까. 세계관 최강자의 여유일까. 약간의 불공평함을 느끼며 본궁의 연회장으로 향하는 마차의 바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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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래는 본편과 상관 없는 글입니다.





-언젠가의 이야기-


* 그냥 쓰고 싶어서 써 보는 스토리입니다. 본편의 스토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아마?



'역시 살 쪘지…?'


라프레티와 사귄지도 n개월, 언니의 체력을 늘려야 한다며 이것저것 먹이길래 덥썩덥썩 먹었더니 신녀복이 끼기 시작했다. 배도 만져보니 신전에선 없었던 군살이 만져지기 시작했고. 신전에나 있을 체중계에 올라설 자신이 없어서 속옷 차림으로 전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 보고서야 확신했다. 살이 쪘다.

아침 식사시간, 오늘은 간단한 샐러드와 닭가슴살 구이를 시키고 라프레티에게 선언했다. 다이어트 선언이었다.


"살을 빼야겠어요."


땡그랑, 라프레티의 손에서 포크가 떨어져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충격 받은 것 같은 표정이 누가 보면 헤어지자고 통보 받은 사람 같았다. 다시 포크를 든 라프레티가 달걀 프라이를 포크로 자르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언니는 더 쪄도 좋을 것 같은데."
"안돼요. 신녀복을 다시 맞출 수는 없으니까."


엄청난 양의 성수를 만들고 그 성수에 실을 담그고 축성을 하고 그 실로 천을 짜서 옷을 만들고……. 그 짓을 하느니 살을 빼는 게 나았다. 신녀복을 입고 운동을 할 수는 없으니 운동복부터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옷가게로 향하여 운동복을 샀다.


'왜 근세 시대 배경의 게임에 현대적인 트레이닝 복이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보니 학원의 체육복도 이런 느낌이었던가. 게임 사의 편의성을 위한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운동하는데 거치적거리는 긴 머리카락을 묶고 몸을 풀고 있을 때 라프레티가 다가와 뒤에서 나를 끌어 안았다.


"체육복 언니 야해……."
"대체 어디가요?"


평범한 반팔 반바지의 트레이닝 복의 어디가? 은근 슬쩍 배 부근을 더듬거리며 목덜미 쯤에 얼굴을 부비는 라프레티를 떨어트려놓고 어디서 운동을 해야 할 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세계관이 개판이라도 헬스장 같은 건 없다. 애초에 여행을 다니는 몸이니 있어도 등록 할 수 없다. 그 사이에 카운터에 물어보기라도 한 건지 나무 컵에 담긴 아이스 커피를 건네며 라프레티가 말했다.


"마을 밖 뒷산에 작은 공터가 하나 있대요. 제가 운동 봐 드릴게요."
"정말요? 고마워요."


라피가 운동을 봐 준다면 더 안전하고 좋겠지. 커피를 마시고 간단한 채비를 하고 라프레티와 손을 잡고 나와 마을의 뒷산으로 향했다. 정돈이 되지 않은 길이었지만 어쩐지 소풍 나온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과연 잠시 올라가니 나무가 우거진 자그마한 공터가 나왔다.


"우와, 비밀기지 같아요!"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좁긴 해도 가벼운 조깅이나 맨몸 운동을 하기엔 충분해보였다. 먼저 천천히 뛰거나 스쿼트를 해 보았다. 힐러는 몸이 연약하다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신전에서 일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고된 일이다. 애초에 신력을 운용하는 것 자체가 꽤나 체력을 잡아 먹는 일이었다.


"앞으로 다섯 번만 더 하고 쉬어요."


라프레티도 착실하게 내 운동을 도와주었다. 오랜만에 운동을 해서 그런지 숨도 차고 땀도 주륵주륵 흘렀다. 가지고 온 수건으로 땀을 닦고 라프레티가 건넨 물을 마시고 커다란 그루터기에 앉았다. 라프레티도 냉큼 내 뒤에 앉더니 나를 뒤에서부터 끌어 안았다. 목덜미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는 라프레티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내 힘으로는 라프레티를 밀어낼 수 없었다.


"라피, 저 땀 많이 흘렸어요."
"마리 언니 땀 냄새……."
"네?"


영문 모를 소리를 하더니 그러더니 목덜미에 뭔가 따뜻하고 축축한 게 닿았다. 라프레티의 혀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화들짝 놀라 뒤를 보자 평소의 벌꿀색 눈이 아닌 황금색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욕정을 한다고? 왜?


"은폐 마법 써놨어요."


어디서 꺼냈는 지 꽤 큼직한 담요를 그루터기에 깔며 라프레티가 말했다. 소모된 체력으로 인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라프레티의 손이 내 트레이닝 복 아래를 파고 들었다. 라프레티가 세계관 제일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잠깐 라피, 저 땀 범벅이예요!"
"그게 좋은 거예요 언니."


숙소에서 걸어서 나온 나는 라프레티에게 업혀서 들어갔다는 후문이다. 다이어트는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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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단편은 그냥 생각나서 썼습니다. 냄새 페티쉬가 있으면 좋겠다 했지만 이미 라프레티는 마리아 페티쉬이므로 상관이 없겠네요. 섹스로 다이어트를 한다는 클리셰는 몇 번을 봐도 좋네요. 클리셰는 클리셰인 이유가 있어요.

생각해보면 산을 너무 남발하는 경향이 있네요. 모든 지형이 70%가 산인 우리나라 같지는 않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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