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별궁에서 진행되는 행사는 헤르더의 말대로 굉장히 지루했다.

예법은 어찌나 까다로운지 슈미츠는 혹여 실수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린 채 거진 한 시간여를 벌서듯 서고 무릎 꿇고를 반복했다. 훈련생 때 받았던 얼차려보다 더했다.


지겹고 힘든 시간이 드디어 끝나고 폐하께서 퇴장하셨을 때부터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간단한 다과나 샴페인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었다.

당연하겠지만 슈미츠는 딱히 아는 사람이 없어 구석으로 향했지만 헤르더는 달랐다.

경찰 대장님이 손수 오셔서 그를 데리고 이곳 저곳 인사 시키느라 바빴다. 헤르더를 내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공치사를 위해서임이 너무 빤히 보였다. 슈미츠는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헤르더를 조금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이런 구석에 계신 겁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가 서 있었다.

이런 자리에 어울리는 예복을 차려 입은 그는 확실히 집사보다는 귀족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항상 단정히 묶던 머리를 약간 헐렁하게 묶여 안대를 적당히 가린 모습이었다. 조금만 멀리서 보면 별 특징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집사가 이런 데서 놀아도 되는 거야?”


칙칙한 제복이 아닌 흰 예복을 입은 탓인지 평소보다 훨씬 부드럽게 말이 건네졌다. 헨리의 입매가 보기 좋게 휘었다.


“사실 임시직이어서요.”


무슨 말인가 싶어 그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말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보고 싶지 않으셨습니까?”

“뭘?”

“저 말입니다. 저는, 무척 보고 싶었습니다.”


슈미츠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아는 사이였다고 보고 싶단 말인가?


그가 갑자기 그녀의 오른손을 잡아 들었다.

슈미츠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그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


“손등 키스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그건 귀족들이나 하는 거지 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간절함이 느껴지는 그의 눈빛에 결국 손에 들어간 힘을 뺐다.

무언의 허락에 헨리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들어올려 손등에 키스 하려는 듯 하다 갑자기 그녀의 손을 뒤집었다.

무슨 의도인지 몰라 슈미츠는 순간 반응이 늦었고 그 사이의 헨리의 입술이 그녀의 손목 안 쪽으로 닿아왔다.

손목에 닿아오는 입술의 생경한 느낌과 간질거리는 그의 숨결에 온몸이 찌릿해지는 이상한 감각에 놀라 슈미츠가 오른손을 빼냈다. 그리고 동시에 왼손으로 그의 뺨을 가격했다.


짝-!


경쾌한 마찰음이 연회장에 울리며 헨리의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다.

순식간에 둘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런 제가 레이디의 심기를 거슬렀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길.”


헨리는 난데없는 시선 집중에도 당황하지 않고 허리를 숙여 우아하게 용서를 구했다. 슈미츠는 분이 풀리지 않아 당장 저 자식을 끌고 나가 욕이든 주먹이든 먹일 생각으로 움직이려 했다.


“무슨 짓이야.”


그녀의 뒤에 다가온 헤르더가 그녀 어깨를 감싸듯 잡으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수호 기사님께서 오셨군요.”


그는 과장되게 인사를 건네며 뒤로 물러 났다. 입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의 왼쪽 눈은 웃음기 없이 헤르더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실례 했습니다. 저는 그럼 저택에서 뵙겠습니다.”


그가 사라지고 몰렸던 사람들의 관심도 사라지자 헤르더는 나지막한 한숨을 지었다.


“저 자식이 뭐한 거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말해. 뭘 한 거지?”


단호한 그의 말에 약간 주저하던 슈미츠는 입을 열었다.


“손목 안쪽에, 키스를 했습니다.”


으득-


슈미츠는 이가 갈리는 소리에 조금 놀라 그를 올려다 보았다.


“너 그거 무슨 의미인지 알고는 있지?”

“예. 하지만 어차피 계속 볼 사이도 아니고.”


기분은 나빴지만 그걸 가지고 계속 뭐라고 할만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미 꽤나 세게 뺨을 올려 친 것도 있고, 이런 일로 헤르더의 심기를 더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전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하아.”


그가 무거운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 내렸다.


“슈미츠, 제발 조심해. 너까지 잘못된다면 난,”

“괜찮아요, 선배님.”


그는 전에 없이 불안해 보였다. 남자들에게 받는 쓸데 없는 걱정들은 기분이 나빴지만 헤르더가 걱정한다고 하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을 여자로써가 아니라 하나의 사람으로 봐주는 사람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제가 당해도 어디 쉽게 당하나요? 그쪽도 목숨 걸어야죠.”


짐짓 자신감 넘치는 그녀의 말에 그의 얼굴색이 조금 나아졌다.


“이제 가서 쉬어요. 내일 또 수사해야죠.”

“그래.”

“돌아갈 곳이 그 빌어먹을 가문의 저택이라는 게 짜증나지만요.”

“풉, 그래.”


비로소 그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자 슈미츠도 같이 미소 지었다.


“슈미츠.”

“네?”


마차를 타러 가려 하는데 헤르더가 문득 그녀를 불러 세웠다.


“난 틀려 먹었지만, 넌 가능성이 있어.”

“?”

“경찰 대장 말이다.”


슈미츠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가 정점에 서고자 하는 야망은 있었지만 한번도 그에게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장담하는데, 네 위아래 3~4년 차들을 다 뒤져도 너만한 녀석은 없을 거다.”


한번도 못 들어봤던 칭찬에 슈미츠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꼭 대장 자리에 올라라. 그리고 죄가 있는 자는 꼭 그 값을 치르게 해다오. 그게 누구이건 간에.”

“헤르더님.”

“물론 어려울 거다. 불가능할 수도 있지.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게 좋지 않겠냐? 나한테도.”


말을 마치곤 헤르더는 이제 진짜 가자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뒤를 짐짓 비장한 표정의 슈미츠가 따랐다.









왕궁 별궁 옆 후미진 정원에 금발의 청년이 나무에 오른팔을 짚고 섰다.

오른쪽 눈에 안대를 찬 그는 인상을 구기더니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뱉어내었다.

준비 자세 없이 왼손으로 친 것인데도 입안이 찢어져 엉망이었다.


“제대로 맞으면 옥수수가 다 털리겠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분은 좋은 듯 빙글거리다 비틀거리며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섰다.

그의 다리는 약간씩 떨리고 있었는데 헤르더 그자와 마주한 이후 쭉 이 상태였다.


기세로는 이제 밀리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던 것 같았다.

그가 슈미츠를 감싸며 으르렁거릴 땐 진짜 맹수라도 만난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가까스로 빠져 나오긴 했지만 이래서야 좀 더 쉬다 저택에 복귀해야 할 것 같았다.


“여기 있었군요.”


테라스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헨리는 짐작하고 있었던 듯 그리 놀라지 않았다.


“안주인님께서 이곳까지 오시다니. 오늘은 쉬신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몸을 바로 세운 그가 충실한 집사의 모습으로 답하자 무언가 못마땅한 얼굴의 그녀가 미간을 좁히곤 그에게 다가왔다.


“둘이 있을 땐 그러지 않아도 되잖아요.”

“이런, 큰 일을 앞두고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더구나 여긴 왕궁입니다.”


듣는 귀가 많은 편이죠. 라고 덧붙이며 왼쪽 눈으로 윙크를 하자 그녀의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내일 일이 걱정이신 거라면 괜찮습니다.”


그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은 잊지 않으셨으리라 믿습니다.”


뼈가 있는 그의 말에 그녀의 어깨가 흠칫했다.


“흥, 당연하죠. 저도 긍지 높은 귀족의 여식입니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기우였기를 바라지요.”

“…늦었군요. 저택으로 돌아가야겠어요.”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정중한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흠잡을 데가 없어 보였지만 그녀, 실비아는 그가 마치 가면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가면 안의 모습이 상당히 무서운 것이라는 것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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