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뽑았던 검을 갈무리해 넣은 다이무스는 조금 더 단단히 표정을 굳혔다. 드디어 결심이 선 탓이었다. 홀든의 차기가주로서 구속받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절호의 기회였다. 다이무스는 스스로가 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인지 의아할 정도로 내딛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번 일만 마치고 나면 홀든이 제 발목을 붙잡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공적이든 사적이든. 그래서 조금은 주저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며칠 전, 홀든의 안주인이자 그의 어머니 프시케는 그에게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지목한 이의 목을 벤다면 더는 그의 일에 참견하지 않겠다는 조건이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이미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많은 이들의 목을 베어왔던 ‘전사’였다. 그럼에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은 그녀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반목하지 않은, 적이 아닌 ‘누군가’를 죽이는 것을 내켜 하지 않는 심성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철부지 막내와도, 자존심이 드센 둘째와도 달랐다. 3형제 중에 가장 홀든답지 않았으나, 가장 홀든다워지려고 노력하는 아이였다. 그녀는 그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다이무스가 진심으로 제 앞에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미 혼기가 차고도 넘친 그에게 어울리는-정확히는 홀든가문에- 혼인 상대를 구해주었을 때, 다이무스는 단호하게 그것을 거부한 것이었다. 어째서? 그녀는 처음 겪어보는 당혹감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두 눈만을 깜빡이고 있었다. 심지어 그 이유가 마음에 둔 이가 있으며, 그 상대가 근본도 알 수 없는 천한 사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놓칠 뻔했다.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자식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녀는 도무지 제 손에 들어오지 않는 두 아들처럼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다이무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녀는 그것이 몹시도 언짢았다. 그래, 그것이 모든 것의 발단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기는커녕 그날 밤 식사를 마칠 때쯤 다음에 본가에 들릴 때는 그 정인과 함께 오겠노라 선언한 다이무스를 가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정인이라고만 표현했기에 불호령이 떨어지기는커녕 그런 일을 어째서 자신에게만 쏙 빼놓고 나눌 수 있느냐며 퍽 기쁜 모습을 감추지 못하는 홀든의 가주에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안 될 일이었다. 그와 다이무스가 어울리고 아니고는 두 번째 문제였다. 차기 가주로서의 모든 책임을 마다하고, 엇나가려는 자신의 큰아들을 어머니로서 그녀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신속하게 준비했다. 그녀 역시 홀든의 안주인으로서 오래도록 그 이름을 지켜온 자였다. 다이무스 홀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도, 그 상대를 붙잡아오는 일도, 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다이무스 홀든을 다시 굴복시키기 위한 계획 모두 그녀에겐 손쉬운 일이었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프시케는 제 앞에 묶여 있는 남자를 서늘한 시선을 해 내려다보았다. 흔히 볼 수 없는 자색의 눈동자가 처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히카르도 바레타라고 했던가. 다이무스에게 그럴듯하게 어울릴만한 것을 꼽자면 저 눈 정도일 듯한 남자는 그녀에게 도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그녀가 혀를 차자, 복면을 쓰고 있던 쾌검사가 히카르도의 등 뒤로 크게 채찍을 다시 휘둘렀다. 윽. 절로 터지는 신음을 애써 갈무리한 히카르도의 고개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두 손목을 옥죄여 머리 위로 고정한 쇠사슬이 히카르도의 몸이 떨릴 때마다 찰그락 거리며 울었다.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얼굴을 가린 부채를 천천히 흔들었다. 히카르도가 다시 시작된 채찍 세례에 도망칠 수 없는 몸을 비틀기도 잠시 간헐적으로 떠는 몸을 길게 축 늘어뜨린 것은 수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곳에 구금되고 사흘 만에 히카르도는 정신을 잃었다. 제대로 잠을 자기는커녕 계속해서 호된 채찍질을 당했던 그의 등은 살갗이 터지고, 짓물러 만신창이였다. 곳곳이 찢어진 얇은 셔츠는 본래의 색을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검게 물들어 있었다. 거기다 히카르도의 등을 보호하기는커녕 기괴하게 부풀어 오른 손상된 근육 안쪽으로 파편들이 채찍질에 가시처럼 박혀 들었다. 그럼에도 히카르도는 그녀가 원하는 답을 도무지 내놓지를 않았다. 그것이 퍽 짜증스러워진 그녀는 못마땅한 듯 낮게 으르릉거렸고, 눈치가 좋은 주변의 사내들은 곧장 히카르도의 머리 위로 준비한 얼음물을 끼얹었다. 소금이 잔뜩 녹아있는 것이었다. 정신을 잃었던 히카르도가 거의 울 듯이 발작하며 몸부림쳤다. 붉게 충혈된 두 눈 위로 생리적인 눈물이 차오르고 흐르길 반복하며, 짐승처럼 흐느꼈다. 그러면서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무겁게 느껴지는 머리를 수차례 가로 저었다.

히카르도는 자신이 이곳에 잡혀 와 이런 수모를 당하는 이유를 차라리 알지 못했다면 조금 더 견디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실컷 욕지기라도 내뱉을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 저주라도 퍼부어주었을 테지만 히카르도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다이무스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스스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용기를 냈던 것은 저를 필요로 해주고, 사랑해주는 다이무스를 역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늘 다이무스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본가에 일이 있다며 며칠 자리를 비웠던 다이무스와 오랜만에 함께한 저녁 식사에서, 다음에는 함께 가자는 말을 듣고는 며칠 동안 잠까지 설쳤었다. 믿기지 않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꿈같은 일이었다.

자신을 표독스런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그녀를 본 순간, 히카르도는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지 않아도 어린 시절부터 눈치로 굴러먹던 감이 시시덕거리며 떠들어댔다. 머저리 같은 놈. 뭘 기대했던 거야. 히카르도는 그녀의 모욕적인 말마따나 자신의 분수를 아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히카르도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릴 수가 없는 데는 터무니없는 이유가 있었다. 차라리 다이무스 홀든의 곁에서 사라지라거나, 둘 사이의 관계를 끝내라는 말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 고개를 끄덕이며 사죄라도 했을 터였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것을 요구할 테니까. 하지만 홀든 부인의 요구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제가, ...잘 못...”

히카르도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겨우 정신의 끝자락을 세게 움키며 덜덜 떨리는 턱을 가누어 잘못했다고 빌었다. 감히 다이무스 홀든을 곁에 두려고 해서, 사랑해서 잘못하였다고. 하지만 그녀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처음과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이제 다이무스 홀든을 죽일 마음이 들었습니까?”

히카르도는 다시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서 평생 썩는 한이 있어도 그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 끔찍한 지하실에서 평소보다 일찍 자리를 뜬 것은 다이무스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결심이 선 것이겠지. 프시케는 선선하게 웃었다. 지금이야 자신을 거역하고 있긴해도 다이무스가 그녀의 뜻대로 굴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래, 저 남자의 일만 아니라면. 그것은 역시 못마땅했다. 차라리 그 벌레 같은 남자가 다이무스 홀든을 죽이겠노라 입을 가볍게 놀렸으면 이쪽에서 처리할 생각이었지만, 반대의 경우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랑? 웃기는 이야기지. 그녀는 조소했다. 제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은 살아가는데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순간의 유희에 불과하다. 그것에 목숨을 거는 것은, 미친 짓이지.

“정말 이번 일만 처리하면...약속 하신 겁니다.”

답지 않게 저게 던지는 미묘한 불신의 말에 그녀는 쓴 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물론이다, 아들아.”

태도를 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것이 그녀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이제 곧 끝이 날 터였다. 두 사람의 시시한 사랑도, 홀든가에서 자랑하는 저 태도에 깨끗하게 잘려나갈 것이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잠시 삐걱대던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확신했다. 거기에 조금의 의심은 없었다.

그녀의 예상만큼이나 태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깨끗하게 잘라냈다. 자신을 옥죄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족쇄를. 홀든의 장남이자, 차기 가주로서 짊어져야 하는 짐들과 부담감, 그리고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일격이었다. 그의 ‘모든 것’을 베어내는 순간, 바닥으로 떨어진 남자의 목은 볼품없이 다이무스의 발치로 굴러왔다. 치솟는 피를 피하지 않았다. 이곳은 전장이 아니었고, 다이무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지독히 이기적인 살인이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다이무스는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신이 검을 뽑아 들기 전에, 지하실에 들어선 자신을 보자마자 검은 복면에 얼굴이 씌워진 남자가 목 아래서부터 들끓는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내저어도 한 치의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혀가 잘리고, 입에 재갈이 물린 남자의 진심 따위는 단 한 마디도 닿지 못했다. 히카르도는 엉성하게 얽힌 검은 천 너머로 보이는 연인의 모습에 절망했지만, 다이무스는 그것을 단칼에 베어냈다. 더할 나위 없는 단호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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