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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주간 경수는 백현의 마니또가 된 기분이었다. 마니또의 필수 조건은 선한 마음이 바탕이 된 치밀한 염탐이었다. 경수는 반쪽짜리 마니또였다. 파악은 했지만 좋은 걸 가져다 주진 못했다. 한 발짝 물러나니 백현이 아닌 백현의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신기했고, 그 영역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백현의 일면을 포착하는 순간이면 새삼 백현과 자신이 다름을, 다를 수 밖에 없겠지만 진짜로 다름을 실감하게 됐다.



경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원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원 속에 자신과 상대방을 가두곤, 테두리를 면밀하게 관찰하며 신경을 쏟았다. 원 밖의 누군가와 접촉하는 일을 꺼렸다. 원 안의 사람만이 경수의 종족이었다. 원 밖은 위험하게만 보였다. 사귀는 동안 백현을 원망했던 것도 다 그런 의식의 발로였다. 경수는 백현이 원 밖을 갈망한다고 생각했다. 유쾌한 언술로 사람들을 웃기는 사소한 순간에도 그런 감정을 느꼈다. 차마 변백현 너를 내 좁은 원 안에 가두고 있다고, 할 수만 있다면 이 원의 지름을 줄이고 싶다고, 종이에 대고 손 모양을 본뜨는 것처럼, 우리 몸 만한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딱 붙어있고 싶다곤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멀리서 관찰한 백현은 선을 긋는 사람이었다. 백현의 선은 굵고 짧았고 두꺼운 연필심처럼 백현의 속에 박혀 있었다. 언뜻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고 경수 역시 그렇게 여겨온 세월이 길었다. 착각이었다. 그동안 겪은 백현은 그야말로 ‘도경수의 변백현’이었다. 다른 사람 앞에선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 모두의 변백현이었고 다시 말하면 그건 누구의 변백현도 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오직 도경수라는 선. 가장 최상위에 자리한 한 사람에게만 특별한 정성을 쏟았다. 애초에 선 아래의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 위에 선이 있는지도 몰랐다.



백현을 알게 됐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경수는 백현의 방식이 취향에 맞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그 사실이 경수를 포기하게 했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있었다. 백현은 차분하게 경수를 지켜봐 주었고 그 기다림은 경수에게 용기가 됐다. 원과 선을 생각했다. 선을 구부리면 원이 되지 않나? 하고 불평하다가, 선을 구부려서 원이 될 것 같으면 애초에 선과 원을 구분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데 선과 원이 반대말이던가? 그냥 선이고 그냥 원이지…하는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종이를 꺼냈다.



차분한 편지였다. 가감 없이 밝혔다. 어려운 말을 뺐다.



오랜만에 백현의 사물함을 열었다.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 경수는 백현의 사물함을 제 것처럼 썼다. 안 그렇게 생겨서 의외로 덜렁거린다며 백현은 신기해했다. 경수의 물건과 백현의 물건이 뒤섞여 구분이 어려워지자 경수는 자신의 것 앞에 견출지를 붙였다. 학기가 끝난 후엔 가져가는 걸 깜빡했고 어쩌다 보니 2학기 수업 때도 종종 필요할 일이 생겨 그대로 두었다. 당연히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물함이 그대로였다. ‘도경수’라고 적힌 견출지가 붙은 몇 권의 책들. 체육대회 상품으로 받은, 그러나 막상 받고 보니 쓸 일은 없던 경수의 만년필. 누가 변백현의 사물함을 제 것처럼 쓸 수 있을까. 누가 변백현의 마음을 이만큼이나 오래 가질 수 있을까.



사랑과 집착이 뒤섞였다. 노란색 포스트잇을 한 장 떼어냈다.



2명 중 1명은 불륜 유전자를 타고 났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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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하늘은 곧 터질 것 같았다. 선선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봄과 여름의 경계를 가파르게 오가는 에너지가 곳곳에 도사렸다. 사람들은 벗고 소리질렀다. 글씨란 글씨는 다 때려 박은 강렬한 포스터들이 캠퍼스를 뒤덮고 있었다. 축제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서, 과장된 제스처를 뽐냈다. 그거 진짜 죽이더라! 죽인다는 말만 몇 번째인지. 축제 한 번 더 했다가는 다 실려나갈 판이었다. 새내기들의 목소리는 우렁찼고 다른 학년들은 쟤네 내년만 되어도 시끄럽다며 불평할 거라고 꼰대인 양 굴었다. 척도가 다를 뿐이지 다들 관심은 있었다. 여기,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우뚝 걸어가는 백현을 제외하면.



백현은 흥분하지 않으려 노력 중이었다. 빈 책이 된 심정으로 걸었다.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해 노트를 사서, 첫 페이지를 펼쳐본 학생을 떠올렸다. 경수는 깔끔하고 정갈하게 적었다. 이제 백현의 차례였다. 내내 기다려놓곤 막상 닥치자 두려움이 일었다. 누군가 심장에 대고 펌프질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통속적인 말이었지만 그런 표현만이 가능한 때도 있었다. 웬만한 비유들이 다 과하게만 느껴져서, 가장 간단하고 익숙한 말을 겨우 내뱉게 되는 때. 담백하고 직설적인 말들. 열 걸음에 한 번씩 멈춰서 경수의 편지를 읽었다. 경수가 준 책을 마구잡이로 펼쳤다.



캠퍼스는 넓었고 경수의 활동 범위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적었다. 그래도 걸었다. 걸어서 세계 속도 가는데 경수 속까지 못갈 이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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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는 세훈과 있었다. 세훈이 먼저 연락했다. 마땅한 이유도 없이 그냥, 만나자고 카톡이 왔다. 조별 과제도 성공적으로 마무리 했으니 밥이나 한 번 먹자든지, 그동안 형이랑 식사 한 번 꼭 하고 싶었는데 오늘은 어떠신지, 등등 덧붙이는 말이 일절 없었다. 깔끔했고 꼭 명령처럼 느껴졌다. 심지어는 경수가 그걸 거부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자신감마저 어려있었다. 그 당당함에 이끌려 자연스레 약속을 잡았다.



베트남 음식점이었다. 맛집 프로그램에서 나왔을 법한 가게였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사람들로 붐볐다. 세훈은 팟타이를, 경수는 똠얌꿍을 시켰다. 테이블 간 거리가 적당해 대화를 나누기 좋았다. 세훈은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었고 주저하지도 않았고 그냥 슥슥, 경수와 단 둘이 여러 번 식사해 본 사람처럼 냅킨을 깔고 물을 따르고 벨을 눌러 주문을 했다. 그리곤,



팟타이 먹을래요 똠얌꿍 먹을래요? 하고 물었을 때처럼 말했다.


“저 아직 형 좋아해요.”

“아직?”



경수는 적정 수준 만큼만 예민했다. 세훈이 과거에 자신을 좋아했음을 알아차린 딱 그 정도로만. 후의 일은 경수가 관심을 쏟을 만한 영역이 아니었고 그래서 주의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세훈이 여유로움을 가장하지 않듯 경수도 타인을 향한 무관심을 애써 포장하지 않았다. 테두리 밖의 인간을 신경 쓰는 일이 힘겨웠다. 그래도 안면 튼 적 없는 생판 남과 세훈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경수 딴에는 열심히 들어주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오히려 세훈은 그게 부담스러웠다. 경수가 제 말에 경청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정말로, 팟타이나 똠얌꿈을 말하듯 얘기하고 싶었다. 선택지가 지금은 도경수뿐이지만 곧이어 다른 것도 생길 테니까 걱정 마시라고…자신있게 치고 빠지려고 했다.




“네, 아직요.”

“…끝났다며.”

“제가 얘기했었잖아요. 전 다 나중에 안다고.”

“지금이 그 나중이야?”

“나중 진행형이에요.”

“무슨 뜻이야 그거.”

“끝이 났으면 좋겠다는 거죠.”

“…”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을 테니까. 그걸 빨리 알아차리고 싶어요.”



세훈은 경수에게 해야 할 말을 되짚어보며 경수가 자신을 좀 봐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애쓰지 않아도 모두가 자신을 주목했던 지난 생애를 거쳐 최초로,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자 세훈은 외로워졌다. 그리곤 예견했다. 이런 처참한 고백을 들은 경수가 만약 자신을 어루만져 주거나 신경 쓰여 죽겠다는 얼굴을 하거나, 많은 악랄한 짝사랑 상대들이 그랬듯 자신의 어장 속으로 끌어당겨 살뜰히 보살펴 준다면, 자신은 그게 똥통임을 알면서도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거라고.



경수는 세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끝까지 경수다웠다.



“저번엔 미안.”

“…”

“걔가 너 째려봤을 거야. 괜한 오해사게 해서 미안해.”

“…”

“그리고 네 마음도, 미안해.”



변백현을 사랑하고 오세훈은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을 동시에 하네. 그것도 미안하다는 말로.



“문구류 좋아해요?”

“…딱히.”

“알바 관뒀거든요.”

“왜? 일 잘하던데.”

“잘하니까 자꾸 더 시키려고 하더라고요.”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남는 거라면서 이것저것 줬어요.”

“…”

“근데 저는 형 주려고요.”

“괜찮은데.”



세훈이 미리 챙겨왔는지 가방에서 무언갈 꺼냈다. 샤프, 샤프심, 지우개, 형광펜, 수정 테이프…그리고 하늘색 봉제필통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문구점에서 보던 세훈의 모습이었다. 실수 없이 바코드를 찍고 포스기를 두드리던, 심드렁한 얼굴. 마치 경수가 주문하고 세훈이 처리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한 더미의 문구류 앞에서 경수는 고민했다.



“좀 받아줘요.”

“…”

“마음은 안 받아주는 거 아니까.”


“…잘 쓸게. ”

“… ”

“고마워.”



백현에게 그랬듯 세훈에게도 경수는 이제껏 익힌 단어를 새로이 고치게 하는 인물이었다. 세훈은 ‘경수’라는 낱말을 배웠다. 모든 자연현상이나 감정에 이름을 붙이려 드는 독일 사람들처럼, ‘경수’라는 말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느리고 슬기로운 사랑. 느렸지만 슬기로웠고, 슬기로웠지만 느렸던 사랑.



남은 팟타이를 마저 해치웠다. 계산대에 서서는 원래 형이 계산하는 거라며 뻔뻔하게 굴었다. 짐을 덜어서 가방이 가벼워졌다. 납작한 뒤통수가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았다. 끝이 왔으면 좋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마음도 빨리 가벼워지길.



66



-왜 전화 안 해.



땀 흘리며 뛰어다니는 백현을 재촉하는 경수였다. 그러고 보니 그냥 너 어디냐고 물으면 되는 거였는데. 캠퍼스 이곳저곳을 쏘다니기 바빴던 백현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경수는 편의점에서 물을 하나 샀고 백현은 자판기에서 레모네이드를 뽑았다. 신 맛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고, 키패드를 눌렀다.



-보고싶어.



답장이 오기도 전에 똑같은 내용으로 두 번 더 보냈다. 보고싶어, 보고싶어, 보고싶어. 닳지 않는 말이었다.



-아, 좀.



타박에도 즐겁기만 했다. 경수를 상대로 하고 싶은 말을 바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짜릿한 백현이었다.



-나 예대 건물 쪽 벤치인데. 뭐 준비하나봐. 못 보던 조형물이 잔뜩 있어.

-학교 안에 이런데도 있네.

-너 여기 좋아할 것 같아.

-경수야

-어떡해

-데이트하기 좋은 곳 밖에 안 보여.



-거기 있어.



다리를 오므렸다. 조소과 애들이 만들었을 법한 자유분방한 사물에 비해 지나치게 정적이고 각 잡힌 자세였다. 벤치 옆의 이정표보다도 반듯했다.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어딘가에서 도경수가 다가오고 있다니. 단 한 사람, 변백현을 향해. 보이는 풍경을 꼼꼼히 아로새겼다. 변백현 뇌, 들어라 오바. 도경수와의 교신이다. 왕래가 끊긴줄로만 알았겠지만 더는 아니므로, 빠짐없이 기억하도록!



멋들어진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몽골인의 안구가 탐났다. 더 자세하게 볼 수 있다면 좋았을텐데. 경수가 걷는 폼. 희미하게 짓는 웃음.



다시 저렇게 웃어주는구나. 못보게 될까봐 겁났어, 사실.



사진이나 기억으로는 도저히 박제할 수 없는 저 웃음을, 얼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을, 그리고 저 웃음의 이유가 나라는 데서 오는 이 벅참을, 다시는 느끼지 못할까봐.



“한참 찾았잖아.”

“…”

“축제 때문에 정신없어 죽겠어.”

“…”

“넌 괘씸하게 연락도 안 하고. 보자마자 전화할 줄 알았는데.”

“…뛰어 다녔어.”

“뭐?”

“너 찾으려고.”


“내가 어딨는 줄 알고 그렇게 막무가내로 돌아다녀.”

“근데 못 찾아도 오네.”

“…”

“나 안 믿겨.”

“…”

“다른 축제가 왜 필요해.”

“너 울어?”

“…경수야.”


백현은 무작정 경수를 끌어안았다. 세찬 박동이 경수에게 전달됐다. 백현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경수는 잠자코 들어 주었다. 처음부터 한 몸인 것처럼 가만히 포개져 있었다.



나 진짜 무서웠어. 너 계속 그럴까봐. 진짜 그만둘까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도저히 의욕이 안나서….


 

가끔 너무 좋은 노래를 만나면 아끼고 싶어서 잠깐 일시정지를 누르곤 하잖아. 그냥 너도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분명히 다시 시작할 수 있을거라고, 긍정적으로, 최대한 긍정적으로. 그래도 무서웠어. 나 정말.


 

네 심장 뛰는 소리 들려? 난 이거 듣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분명히 백현의 심장이 더 빠르게 뛰고 있었는데 하는 말이 그랬다. 경수는 눈이 다섯 개 달린 갈색의 조형물(아마도 조소과 학생이 만들다 실패했을 게 분명한)과 눈이 마주쳤다.



뭘 흘끔거려. 연애하는 거 처음 봐?



67



요즈음의 여름은 오는 게 아니라 덮치는 것 같았다. 아열대 기후로 변하는 한국…2030년이면 강원도 특산물이 사과… 따위의 기사를 읽었다. 강의실은 시원하지만 오래 머물고 싶진 않고, 필터 관리가 엉망인 에어컨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다.



지긋지긋했던 사회조사방법론도 큰 과제 두 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한 장짜리 페이퍼에 불과했던 과제가 꽉 채운 여덟 장의 문서가 되기까지, 수많은 회의와 자잘한 다툼을 거쳤다. 대강의 토대가 완성되었고, 완성된 가설과 측정지표를 기준으로 학생들에게 돌릴 설문지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막판에 대놓고 프리라이더 행세를 하는 형민(협박과 은근한 꼽주기도 먹히지 않았다. 아예 잠수를 타버리기 일쑤였다.)의 몫은 경수 고생하는 꼴은 도저히 못 보는 백현의 일이 됐다. 반씩 나눠 하자는 경수의 제안을 일축했다. 넌 첫 장이나 써. 내가 뒷부분 빨리 만들게.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00대학교 사회학과를 전공하고 있는 학생들입니다.

 

본 설문지는 학생 여러분의 비혼주의에 대한 생각과 실태를 알아보는 것으로 비혼주의에 어떠한 요인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파악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설문지는 여러분이 도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를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므로 여러분의 생각과 경험을 솔직하게 작성해 주신다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이 설문지의 내용이나 결과는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목적 이외는 다른 곳에 절대 사용하지 않으며 개인의 성명이나 학과를 밝히지 않으므로 비밀은 절대 보장되오니 안심하시고…



여러 번 경수가 말을 다듬는 동안, 백현이 됐다-하며 손뼉을 쳤다. 벌써? 경수가 의아한 듯 물었고 백현이 눈썹 사이를 긁적였다. 이거 아예 내가 조사했던 부분이잖아. 어쩐지 임형민이 이거 무슨 말인지 설명해달라며 카톡하더라. 형 이거 완전 기초 뼈대인데 모르시냐고 그랬더니 읽씹하더만.



백현은 빠르게 메일을 전송했다. 바로 도착한 메일을 확인해 본 경수가 백현을 불렀다. 장난해? 백현이 무슨 문제있냐며 경수의 노트북으로 얼굴을 가까이했고 폭소가 터져나왔다.



비혼주의에 관한 설문지가 있어야 할 자리엔 뜬금없이,



“이어질 질문은 도경수씨의 성적 판타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아니, 과제하다가 심심해서.”

“…”

“만들다 보니까 재밌더라.”

“…너 진짜.”

“아직 미완성이야. 기대해.”

“…”

“익명 보장 해줄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괴로운게 넌 즐거워? 경수가 중얼거렸다. 백현은 아니라고 말하기엔 찔리는 탓에(섹스할 때를 생각하면 더더욱)대꾸가 느려졌다. 여름이라 입이 둔하다, 경수야. 도경수 맞춤 변명에 경수의 얼굴이 풀렸다. 백현은 질세라,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쩔 수 없어…도경수가 도경수인 걸 어떡해. 나 이러는 거 너밖에 없는 거 알잖아. 경수의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그럴 때의 여름은 눈치를 살살 보며, 적당히 열기를 더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끈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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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 뼈의 생김새가 쉬이 보이지 않듯, 그것들은 잘 숨겨져 있다. 단순한 취향의 문제부터 입 밖으로 털어놓을 수 없는 짙은 열패감까지. 풀어헤치진 못하고 대강 어쩔 수 없다고, 그냥 나는 이렇게 생겨 먹었다고 얼버무리게 되는 지긋지긋한 속성들.



질투와 의심은 경수의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둘이 친했어? 둘이 친했나? 비슷한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대답은 경수가 한다. 친구 많은 백현이 대답 하다보면 말이 길어지고 그러면 소문이 생긴다. 경수는 소문이 싫다. (넌덜머리난다.) 응, 친했어. 확실한 대답에 애들이 흩어진다. 백현은 경수가 단언할 때의 톤이 좋다. 경수가 앞에 나가서 발표를 할 때면 녹음을 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필담으로 응, 사귀어-는 어때? 라고 적으려는 데 경수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세훈이 준(이걸로도 한바탕 싸웠었다.) 고급 일제 샤프로 휘갈긴다. 


방금 물어본 애 뒤에 있던 여자애, 너 좋아해. 


『바람난 유전자』를 선물받은 백현은 아직도 얼떨떨했다. 상상 이상의 질투라 참은 거라니. 역시 우리 경수는 스케일 부터가 남다르다며 팔불출처럼 군다. 플라스틱 필통을 열어 어디서 받았는지 모를 협회의 사은품인 볼펜을 꺼낸다. 펜촉이 두꺼워 선이 굵다. 방금 물어본 선배 뒤에 있던 여자애, 너 좋아해. 맘에 드는 글자만 남겨둔다. 달달 외운 『바람난 유전자』의 소제목을 복창한다. ‘불륜 남성은 일찍 죽는다.’ 손으론 마저 연서를 쓴다. 난 우리 경수 때문에 요절 못하지. 혀를 내두르는 구애에도 경수는 찝찝함이 가시지 않는지, 손에 쥔 일제 샤프를 한 바퀴 돌린다. 저건 원래 내가 화날 때 하는 행동인데…. 별게 다 감격스러운 백현이다. 집적 거리지마. 자취방 오지마. 청천벽력같은 메시지에 백현이 흐음, 하고 앓는 소리를 낸다. 살짝 불편해진 백현이다.



-앞에 당분간 붙여줘.

-당분간 집적 거리지마. 자취방 오지마.



-말 끝에 하트도. 기분이라도 좋게.



-당분간 집적 거리지마 ♥ 자취방도 오지마 ♥



미친. 이걸 또 들어준다 도경수. 기분 좋다 못해 하늘로 승천하게끔.



연애란 어쩌면 그러한 어쩔 수 없음이 부딪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나의 어쩔 수 없음과 너의 어쩔 수 없음. 전투를 할지 협상을 할지, 혹은 충돌 자체를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달아날지. 선택은 각자의 자유다. 경수는 도망쳤고 백현도 도망쳤지만 결국엔 만나고 말았다. 그래서 둘에겐 세 번째 선택지가 없다. 하루는 전쟁, 하루는 협상,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다. 기말 고사가 가까이 오면서 할 것도 많은데 연애마저 숨가쁘게 하려니 에너지가 남아나지 않는다. 그래도 다 할만하니 한다. 밥을 다 먹고 나서도 간식 배는 남아 있는 것처럼, 몸이 알아서 비축된 에너지를 상대방의 몫으로 둔다. 최후의 순간이 와도 마저 사랑할 수 있도록.




독사에게 물리면








/


오랜만의 완결이네요.

여름에 도착한 백도의 이야기를 저 또한 여름 한가운데서 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다 제가 느린탓에 공교롭게 맞물리게 된 것이지만요.)

헤어진 후에 시작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세훈이의 대사에서도 나왔듯,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고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는 거니까,

끝에서 시작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좋아해 주시는 분들의 마음 덕에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어요.


다시 한 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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