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페달의 마키시마x칸자키 글입니다.
겁쟁이 페달 글러 합작에 참여한 글로 14.07.15 티스토리에 발행되었습니다.





무더운 날이었다. 땀은 저절로 주룩주룩 흘러 마치 비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젖었고, 입을 벌려 거칠게 숨을 쉬노라면 입안이 바짝바짝 메말라갔다. 사왔던 포카리는 이미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자판기는 이미 지나쳐서 새로 사기에도 애매했다. 목이 타들어 가고 갈라지는 느낌이 괴로웠지만,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마키시마는 아무도 없는 고요한 미네 산을 홀로 오르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바람이 불면 더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학교에 있을 시간에 나 홀로 산을 오르는 것은 감회가 새로웠다. 부원들은 아마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터였다. 당장에 내일이 출국이었고 감독에게 인사도 마친 뒤였다. 오늘은 익숙했던 모든 것들을 둘러보고 기억 속으로 넣어둘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마지막. 단 세 글자가 마키시마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미네 산의 꼭대기에 올라 내려다보는 마을은 새삼스러울 정도로 정겨웠다. 등굣길에 이용하던 도로도, 아이스크림을 자주 사 먹던 슈퍼도, 그 무엇보다 익숙했던 학교도. 마키시마는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쿠핫, 하고 웃었다. 마치 다시는 오지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땀이 식어갈 즈음 마키시마는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마치 시합을 하는 것처럼 페달을 밟으며 전력질주를 해 칸자키 샵 앞에 도착한 마키시마는 가볍게 숨을 골랐다. 이렇게 긴장할 정도로 어려운 장소에 온 것도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괜스레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 왔어요."


침착하게 가라앉힌 목소리를 내며 샵 안으로 들어오자 브레이크를 고쳐주고 있는 칸자키와 자전거 주인이 보였다.


"왔어? 거기 잠깐 앉아있어."


연락도 없이 찾아온 것에 적잖이 긴장했는데 맥이 풀릴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하기야 생각해보니 칸자키 샵은 예전부터 자주 오던 곳인 데다 새삼 긴장할 정도로 칸자키와 어색한 사이도 아니었으니 이렇게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칸자키와 단순한 선후배 사이였던 시절에는 올 때마다 적잖이 긴장했었는데.

순식간에 팽팽히 긴장되어 있던 근육에 힘을 빼며 시선을 또록또록 굴렸다. 평일 낮인데도 찾아오는 손님들이 상당수 있었다. 대다수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던가 체인이 빠졌다던가 하는 사소한 일들로 찾아온 것들이었다. 오래 걸리는 일들은 아니었으나 칸자키는 손님들이 가져온 자전거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펴봐 주고 점검해주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걸리는 평균 시간보다는 오래 걸렸다. 무엇보다 이상할 정도로 손님 한 사람이 가면 한 사람이 찾아왔기 때문에 마키시마는 인내심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체인이 이상하다면서 찾아온 아주머니의 자전거를 손봐준 칸자키는 가볍게 숨을 뱉으며 허리를 폈다. 그러곤 다른 손님에게는 잠시만 기다려달라며 안쪽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무더운 날이었기 때문에 바깥에 있는 사이 금세 더워진 듯했다.

물을 마시는 동안 칸자키는 얌전히 앉아있는 마키시마를 흘끗 바라보았다. 기껏 찾아와주었는데 계속 기다리게 하는 것은 미안했지만, 자신도 별수 없는 일이었기에 아쉬운 한숨이 나왔다. 일하면서 대화를 하자니, 마키시마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 봐 꺼려졌다. 평상시라면 그랬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칸자키는 냉장고에서 포카리를 꺼내 빨대를 꽂은 후 손님들에게 돌아오는 길에 마키시마에게 내밀었다. 마침 목이 말랐기에 얌전히 받아들자 그는 언제 마키시마 앞에 섰냐는 것처럼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이번에 온 손님은 타이어가 펑크가 난 모양인지 칸자키는 새 타이어를 들고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마키시마는 빨대를 통해 이온음료를 마시며 조용히 시선을 이리저리 굴려 칸자키 샵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몹시 익숙한 풍경이었다. 칸자키를 좋아하고, 그가 졸업하게 되었을 때 손님을 가장해서 자주 찾아오기도 했고, 사귀는 사이가 된 이후에는 약속이 있거나 보고 싶을 때마다 오던 곳이었다. 집과 부실 다음으로 가장 자주 찾아온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찾아왔다.

질리지도 않느냐던 칸자키도 점점 찾아오는 것에 익숙해져 일정 기간 찾아가지 않으면 연락이 오기도 할 정도였다. 그토록 익숙했다.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키시마."


마키시마는 퍼뜩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는 상냥하게 사과와 함께 그렇게 많이 지루했냐는 말을 건네왔다. 마키시마는 아니라며 가볍게 대꾸했다.


"자전거… 봐줄까?"


마키시마는 거절하지 않았다.

마키시마의 자전거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칸자키의 모습은 진지했다. 사실 정기적으로 칸자키가 마키시마의 자전거를 점검해주었기 때문에 어딘가 크게 문제 될만한 곳은 없겠지만, 그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구석구석을 살폈다.


"언제 가는데?"

"내일이요."

"그래?"


그것을 마지막으로 대화가 끊겼다.

칸자키는 별달리 말을 잇지 않고 계속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키시마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마키시마는 대화를 능숙히 이어가는 화법을 가지진 못했기 때문에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사실 영국으로 떠나는 것을 결정했을 때, 마키시마가 가장 먼저 사실을 알린 것은 칸자키였다. 연인인 탓도 있었고, 부원들과 매일 만나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에 더욱 안심한 것도 있었다. 영국 이야기를 처음 꺼냈을 때 칸자키가 내뱉은 첫마디도 '그래?'였다. 그때 칸자키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지금에 와서는 알 방도가 없다.


"별다른 이상이 있지는 않네. 하지만 슬슬 테이핑 바꿔야 할 때지?"


테이핑은 아직 멀쩡했지만 마키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칸자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칸자키는 새로운 테이프를 가져와 마키시마의 드롭바에 새로이 테이핑을 해주기 시작했다. 비교적 깨끗한 테이프가 새롭게 감기는 것을 보고 있을 때, 칸자키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가서도 자전거 탈 거지?"

"네."

"잘됐네. 테이핑 괜히 해주는 건가 싶어서."

"테이핑 바꿔야 할 때니까요."

"그러게. 테이핑 바꿔야 할 때니까."


정적은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사라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힘내라, 마키시마. 나는 남겨진 다른 애들보다 네가 더 걱정돼."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너는 혼자서 타국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니까."


칸자키는 마키시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그렇지만 힘이 실린 손으로 계속 쓰다듬어 주었다. 칸자키라고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놀란 것만큼 칸자키도 놀랐고, 자신이 무어라 해도 결정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답답했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칸자키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마키시마를 대해주는 것뿐이었다.

쭈뼛거리면서 고백해오던 1학년이 끝날 때의 그는 금세 3학년이 되어 후배들이 생겨났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산을 오르는 클라이머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스스로의 길을 걷기 위해 발을 내디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자신은 마키시마의 선택에 충고할 만한 위치도 아니었고, 책임져 줄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응원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이 조금 쓸쓸하면서도 아쉬웠다.


"내일 배웅은 못 가."

"알아요."

"생각해보니 너희 집에 찾아가 본 적도 없네."

"올 일이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한 번쯤은 가볼 것을. 칸자키는 뒤늦은 후회를 목 안으로 삼켰다. 마키시마는 볼일이 있건 없건 언제나 먼저 찾아와주었는데 자신은 단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가장 후회스러웠다.

테이핑이 다 감긴 핸들을 잡은 손에 무심코 힘이 들어갔다. 나름대로 자신도 감정을 잘 추슬렀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평소와 달리 이상한 표정으로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마키시마는 칸자키의 손을 잡고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핸들 위 칸자키의 손 위에 손을 포개 꽉 쥐고, 그것보다 훨씬 부드럽게 키스했다. 평상시와 달리 칸자키도 적극적이었다. 가볍게 숨을 고르며 입을 뗀 마키시마는 조금 작아진 소리로 칸자키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에는 가게 안에서 키스하는 거 싫어하잖아요."

"그랬지."

"누가 보면 어떡하냐면서요."

"맞아. 근데 오늘은 괜찮을 거 같아."


이번에는 칸자키가 먼저 입을 맞춰왔다. 당연하게도, 마키시마는 거부하지 않았다. 

땀이 흐를 정도로 무더운 날, 맞닿아 있는 피부로도 열기가 후끈하게 올라왔지만 덥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는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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