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적 리얼타임.


눈이 마주쳤다.
상냥하게 웃었다.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대화도 몇마디를 나누게 되었다.
친해졌다 생각하고 연락처를 나눈다.
약속을 잡고 만난다.
영화를 같이 본다.
사귀게 된다.
잘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순간에 그를 만나고, 우연이 중첩되어 필연이 되고, 필연을 넘어선 그와는 인연을 맺었다. 계속 그와의 과정을 떠올리던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과연 사귀는 남자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챕터 1. 비(非, 아닐 비)

이번에 남자와 잡은 약속은 흐리고 햇빛 한 점 없이 구름 낀 날씨였다고 생각한다. 약속 때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와서 기다리는 나를 배려해 남자도 변함없이 30분 빨리 나왔다. 그런데 오늘 그렇지 못한건 날씨 때문일까.

“오늘따라 조금...늦네...”

역시 날씨 때문일거야, 라고 되새기는 나는 매일 일기예보를 보면서 맑은 날에 약속을 잡아놓던 남자를 머릿 속에 지우고 웃으면서 만날 남자를 눈으로 계속 찾았다. 눈앞이 흐려지고 주변의 가로수가 매연 가득한 곳에서 자라 시들시들한 것이 눈에 띄었다. 약속장소에서 비오는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전화박스에 들어가 전화기를 쥐고 전화하는 척을 해보기도 하고, 어쨌든 비오는 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쓸모없는 행동을 다하는 것 같았다. 손목시계에서 들려오는 작은 째깍이는 소리에도 긴장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뭐야, 내가 뭘 잘못한거야.’
‘저번에 만날 때 말을 심하게 한건가.’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를 상처줬나?’
.
.
온갖 생각이 행동이 시뮬레이션 되는데 하나같이 끔찍한 결말에 눈을 감고,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체페쉬!”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내 안심했다.

‘뭐야, 괜한 걱정이였잖아.’

하지만 그가 가까이 온 순간 무언가 이상했다.

달려왔지만 숨이 가쁘지 않고, 비를 맞고 있지만 뛰어온 것처럼 옷이 젖지 않았다.

뱀파이어. 아무리 뱀파이어라고 해도, 이 현상은, 나는, 그는, 아무도 모르는 제 3자는 무엇이라 할까.

문득 또 두려워졌다. 머릿속에 또 하나의 시뮬레이션이 비참하게 삐걱이며 결말을 맺으려고 했다. 그래, 이것도 생각을 포기하자.
나는 언제까지나 내 추측을 부정할 계획이였다. 그딴 일따위 나에게 일어날리가 없으니까.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오늘 우리 200일 이잖아. 그런데 어제 알아서.”

선물사느라 늦었지 뭐야. 라고 들려오는 뒷마디가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그게 아닐거야, 라고 부정하는 머리와 긍정하는 내 혀와 입술이 무섭게 느껴졌다.

내 스마트폰을 켰다.

일정에는
우리가 사귄지
247일이라고 적혀있었다.


‘거짓말....한건가?’

또다시 느껴지는 최악의 상황.
남자친구의 바람인가..........아니, 그럴리가 없잖아.

“왜 그래, 체페쉬? 무슨 일 있어?”

지금 이렇게 내 눈앞에서 해사하게 웃고 있는데.
그런 사람이 나말고 다른 여자를 만날리가 없잖아.
싸구려 감성팔이 영화 하나를 봐도 엉엉 우는 남잔데 그럴리가...없잖아?
아니면 내가 그 싸구려 감성팔이 영화보다도 못하다는 건가?

“아니, 질드레. 아무일도.”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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