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8 일부 문장 수정 및 추가.


(2)

 

카를라 왕녀는 어릴 때부터 그 특수한 정치적 입지 덕에 왕의 자녀들 중에서 왕의 집무실과 어전에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사적으로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이였다.

 

전례 없던 파격적인 대우였으나 왕이 총애하고 비호하는 왕녀의 걸음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간이 큰 사람은 없었다.

 

어린 왕녀에게 왕의 집무실과 어전은 놀이터였고, 서류가 쌓인 책상과 옥좌는 재밌는 놀이기구였다. 천방지축 어린 왕녀는 존엄하신 국왕폐하의 일터에서 온갖 장난을 치며 많은 사람들을 골탕 먹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장난을 쳐대니 시종인, 근위기사, 심지어는 나라살림을 좌우하는 대신들과 국왕폐하까지, 맡은 업무의 경중에 상관없이 왕국을 위해 봉사하는 이라면 왕녀의 천진한 장난을 겪어보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카를라 파올라, 무에 그리 생각할 것이 많아 아비의 말을 한 귀로 흘리느냐?”

 

왕이 딸을 부르며 웃는 모습은 어느 여염집 아비들과 마찬가지로 소탈했다. 카를라 왕녀도 입술 양 끝을 끌어올려 미소를 그렸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송구하옵니다.”

“이제 성인이라고 이 아비와 도통 어울려주질 않으니 네게 참으로 섭섭하다. 오늘처럼 부르질 않으면 도무지 아비를 보러 오지 않으니, 아쉬운 이 아비가 청할 수밖에 없구나.”

“그 또한 송구하옵니다. 허나 아바마마께오서 치국에 힘쓰시는 것을 제가 익히 알거늘 어찌 감히 시간을 내어 달라 청하오리까.”

“정말로 송구하느냐? 그러면 벌로 이주일 뒤 짐과 함께 왕립 미술관 분관 공사현장에 가자꾸나.”

 

나이를 먹고 성장하면서 제 위치를 자각하기 시작한 왕녀는 더 이상 왕의 공간에 사적으로 출입하지 않았지만, 과거의 그 모습들이 지워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더욱 기억되고 회자될 뿐.

 

그 때 왕녀 전하께서 폐하의 깃펜을 들고 서명하시는 모습은 참으로 귀여우셨지요.

그 때 폐하께서 왕녀를 어르시는 모습도 어찌나 보기 좋던지.

그 때, 그 때, 그 때…….

 

건국왕이 어린 소녀로 다시 태어난 것 같은 외모를 가진 사랑스러운 왕녀와, 외딸을 안고 어르며 국정을 돌보는 국왕을 한 번이라도 본 자는 틈만 나면 그 모습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곤 했다. 그만큼 부녀의 다정한 모습은 귀족과 신민, 온 대중들의 뇌리에 강력하게 남았다.

 

그래서 카를라가 본궁에 출입하는 것을 자제하자 왕은 각종 행사에 그녀를 동반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왕실의 모범적인 모습을 부각하는 자선행사나 민생과 관련된 행사였다. 그리고 왕위계승 서열이 높은 왕자들을 동반했다가는 귀족들이 요동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번에 말을 꺼낸 공사현장 시찰도 마찬가지였다.

 

예술을 사랑하고 숭상하는 플로렌스에서 왕립 미술관은 수많은 이권이 걸린 중요한 기관이다. 개국 초기 지어진 왕립 미술관은 몇 번의 개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간이 좁고 복잡했다.

 

왕은 그를 해결하고자 올해 초, 분관의 건축을 회의에서 제안했고 귀족들과의 지루한 줄다리기 끝에 상세한 계획안이 결정됐다. 그리고 건축 축하연이 몇 달 전에 열렸으니 지금은 한창 기반을 다지고 뼈대를 세울 시기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카를라가 물었다.

 

“많이 진척된 것도 아닐 텐데 벌써 시찰을 가신다니요.”

“이제 곧 혹한기이지 않느냐. 공사에 동원된 빈민과 노예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졌을 것이다. 사업 감독을 맡은 이들이 시커먼 복심(腹心)에 뭐를 감추었는지도 보고 싶고.”

“폐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국왕은 선한 통치자임과 동시에 능숙하고 노련한 정치가였다. 카를라는 이런 부왕의 모습을 볼 때마다 양가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후계자 자리는 여전히 공석이다. 물밑에서의 다툼은 여전히 치열하지만, 점차 카를라의 유일한 오라비인 1왕자에게 승기가 기울고 있다.

 

그 시류를 다 파악하고 있을 왕은 아직도 후계를 정하지 않고서 외딸인 카를라를 총애하고 오직 그녀에게만 공사 구분 없이 왕을 알현할 권리를 주었다. 왕위계승 서열이 가장 높은 1왕자마저 가지지 못한 권리다.

 

그 탓인지 올해 들어 카를라를 두고 수군거리는 목소리와 탐색하는 시선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카를라에게 들어오는 서신 중 표면적으로나마 구애나 친애에 목적을 둔 것보다 대놓고 정치적인 목적을 드러낸 서신이 더 많아진 것도 최근 1년 사이 일어난 일이다. 형제들에게서 정찬 초대가 오지 않은 지도 역시 꽤 됐다.

 

별달리 뭘 하겠다고 나서지도 않았는데 물러설 수밖에 없어, 부왕폐하와의 연락 외에는 모두 끊고 궁에 칩거한 지도 반 년이 다 되어간다. 우울감이 깊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이토록 미묘한 위치에 저를 붙박아 둔 이가 바로 부왕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희망을 가지게 하는 이 역시 부왕이었다.

 

“오랜만에 너와 동행을 하겠구나. 무정한 것.”

 

그 부왕폐하께오서 기쁜 얼굴로 말씀하신다. 그녀는 문뜩 부왕께 여쭙고 싶었다. 한 철만 피고 져버릴 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를 총애하는 것인지. 아니라면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폐하, 제게 무엇을 바라시나이까.’

 

제 원망을 아시나이까.

 

그러나 카를라는 침묵했다. 질문은 그녀에게 주어진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나오는 말은 서운함을 표하는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한 무람없는 어리광이다.

 

“무정하다니요. 어찌 딸을 그렇게 매도하시나이까? 저 또한 섭섭하니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그래그래. 미안하구나. 편히 쉬어라.”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펴 약식으로 인사를 올리고 카를라는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본궁에 있을 때 받는 시선들은 다른 곳에서 받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날카로웠다.


왕녀는 시선의 무리를 외면하기 위해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선택지를 일부러 떠올렸다. 싫어하는 것이나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그에 대한 대처법을 생각하는 건 왕녀 나름대로의 취미였다. 그에 몰두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식사를 거르다 유모에게 혼나는 경우도 많았다.


‘차라리 아무나와 결혼이라도 하는 게 좋을까.’

 

그러면 이 살얼음판 같은 목숨은 건지려나.


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이냐면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후기 *

1. 원래 제가 이렇게 글을 빨리 써내는 사람이 아닌데... 카를로스 파올로 글로리어스 당신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2. 이 시리즈 한 5편 정도 쓰면 끝나겠지 했는데 안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그리고 아직도 불크롬 등장 안 한 거 실환가...?

덕후 20년산입니다. / 요즘은 로오히를 하고 있어요. / BL, NL, GL, TS 전부 좋아요 빻은 취향도 OK / 트위터 주소 : https://twitter.com/Solidarity_S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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