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엇갈린 운명의 수레바퀴



"내가 어째서 그대의 말을 믿어야하지?"


새하얀 얼굴의 핏기없는 서생의 모습. 한눈에 보아도 그다지 건강이 좋아보이지 않는다. 병약해보이는 외모로 자신을 소철이라고 소개해 온 매장소이다. 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택하겠다 말해오는 매장소의 말에 정왕 소경염의 눈썹이 씰룩인다. 

양나라의 7황자인 그는 그 동안 변방을 떠돌며 자신의 몸을 납짝 낮추는 것으로 목숨을 부지하였다. 12년전 7만 적염군이 누명을 쓰고 비명횡사를 당하였을 때에 그들의 억울함을 황제에게 토로하다 결국 황제 소선의 눈 밖에 난 결과였다. 자신의 친우였던 임수가, 적염군이, 기왕 형님께서 역모를 꾸몄다는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싫었다. 살고 싶지 않았다. 임수가 없는 금릉에서, 그와의 추억이 흘러넘치는 정왕부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외로이 전장을 떠돌았다. 그저 버틴다의 생각으로 이날 이때까지 덧없는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왔다. 태자 소경선이나 예왕 소경환과는 다르게 든든한 뒷 세력도 하나 없다. 무엇하나 내세울 것 없는, 보잘것없는 자신을 택하겠다 당당하게 말해오는 매장소의 말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어보였다. 그를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소문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소철이라는 자의 말을 믿을만한 근거가 없다. 가볍게 나부끼는 말들이 애써 뱉은 보람도 없이 흩어진다. 창밖을 바라보는 정왕의 등 뒤로 매장소가 입을 연다.


"허면, 제가 어떻게 하여야 제 뜻을 믿어주시겠습니까?"

"꼭 믿음을 구하여야 할 수 있는 일이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를 오롯이 내게 주시오. 할 수 있겠소?"

"네?"

"차마 못하겠지. 세 치 혀만 움직일 줄 알고 남의 마음을 얻을 줄 모르는 사람이겠지. 소선생은."

"정왕전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내 쉽게 믿지 못하겠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오. 얻었다고 생각하였던 이들에게 배신을 당하면 이렇게 나처럼 되는 것이지."

"....................."

"그렇기에 어려운 것을 내 걸어야 한다오. 내 마음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전하."

"설마 쉽게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것은 아니겠지?"

"...................."


소경염이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모습에서 매장소는 깨닫는다.

저 이는 내가 알고 있는 그 소경염이 아니다. 당당하게 몸을 요구하여오는 저 이는 순수하였던 그 소경염이 아니다. 

12년전의 상처가 하나도 낫지 않았다. 그에게 적염군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생각보다 큰 상처였기에 아무는데 드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시뻘겋게 주욱 깊고 크게 그어진 상처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린다. 소경염은 아물지 않은 그 상처를 매장소에게 기꺼이 내어보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택하겠다는 책사에게 자신의 역린을 서슴없이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이나 깊은 상처를 너따위가 어찌 감히 감당할 수나 있겠냐 하면서.

이제 아주 조금은 괜찮을 줄 알았다. 적염군 소원수 임수가 매장소로 다시 태어나기위해 엉망으로 망가진 육체를 추스르면서 더 엉망이었던 정신을 다듬느라 미처 몰랐다. 열 아홉 소경염과 열 일곱 임수가 지금도 그 때 그 모습, 그 때 그 사람 그대로일 줄 알았다. 하지만 태양처럼 빛이 나던 임수는 뼛속까지 음험한 책사 매장소가 되어버렸고, 정왕 소경염은 친우를 잃어버린 마음에 방황하여 그만 그 때의 순수함을 잃고 말았다. 매장소는 정왕 소경염이 홀로 견디어왔을 상처의 깊이가 이렇게나 커서 회복이 되지 않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세상을 알아버린 정왕 소경염. 세파에 형편없이 흔들려 자신을 잃어버린 소경염. 닫힌 마음의 그. 잔혹한 현실에 차마 눈을 감는다. 그의 마음을 얻기에 너무 늦어버렸다. 그에게로 돌아오는 길이 험하고 어려웠던 탓일까. 12년의 시간을 돌아 가까스로 찾아온 친우는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말았다. 더 이상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여, 애써 돌아온 이의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도 쉽게 믿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매장소가 어두워져버린, 이미 어둠에 물들어 굳게 닫힌 마음의 소경염을 외면하며 떨려오는 음성으로 입을 연다.


"...소모, 아직 전하를 모실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적당한 시기가 되면 알려주시게. 그럼 내 기꺼이 소선생의 말을 믿도록 하지."

"......................."

"참고로 나는 목석같은 이를 싫어한다오. 설마 그 나이까지 한번도 경험이 없는건 아니겠지?"


마음을 얻기 위하여 몸을 겹친다라. 예상하지 못한 바에 입맛이 쓰다. 천하의 기린지재도 당황하여 찻잔을 든 손이 떨려온다. 흔들리는 매장소를 모르는 체하며 정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한다.


"내 뜻이 그러하니 소선생이 알아주리라 믿겠소."

"네, 전하."

"그럼 깊이 생각해보시고 기별을 주시오."

"네. 알겠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는 소경염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당당하게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은 여전한데, 그는 이전의 임수가 알던 소경염이 아니다.


무엇이 너를 이렇게나 변하게 만든 것이냐. 도대체 무엇이 너를 이리 어둡게 만든 것이야. 설마, 그럴 리가 없겠지만 나 때문인 것이냐. 내 탓인게야? 억울하게 죽어간 7만 적염군의 영혼이 너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냐. 그래서, 그렇게나 빛을 잃고 어두워진 것이냐. 스스로 깊고 깊은, 끝을 알 수 없는 암흑 속에 빠진 것이냐.


매장소의 목으로 넘어가는 차의 맛이 형편없이 쓰다.



*



해가 채 뜨지 않은 무렵. 린신이 새벽이슬을 맞으며 옷자락이 젖어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바쁘게 소택으로 들어온다. 소택 식구들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발걸음을 죽인채로 조용히 숨어든다. 얼굴은 이미 제 빛을 잃은지 오래이다. 전서구를 받았을 때부터 린신의 오장육부는 뒤틀려 버렸다. 매장소는 가끔이지만 자신의 사람들을 밑도 끝도 없이 순수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다. 기린지재라도 실수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하필이면 이 때 말이다. 자신이 변한 만큼, 정왕 소경염이 변하였을 것을 예측하지 못하였다. 린신이 애꿎은 입술을 꽉 문다.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면, 매우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올 줄 알았다는 매장소가 태연하게 서책을 보며 앉아있다. 그 차분한 모습에 오히려 린신은 화가 불같이 난다. 속에서 천불이 나 버린다.


"장소!"

"그런 얼굴 하지 말아. 다 내가 바라서 하는 일이니."

"허, 끝내 입만 살아가지고 그런 말이 차마 나오나?"

"나는 괜찮다니까 그러네."

"괜찮다는 사람 치고 혈색이 영 아니올시다네."

"나보다는 자네가 더 걱정이네만... 내 그래도 괜찮겠나?"

"어차피 내 마음 따위는 자네의 선택지에 들어있지 않잖나."

"...미안하네. 린신."


매장소의 입에서 나온 사죄의 말에 린신의 화가 순간 쑥 내려앉는다. 차분한 마음이 되어 그의 곁에 앉는다. 아무도 볼 사람 없는 새벽이기에, 단 둘만이 있는 공간이기에 그제야 마음을 놓고 매장소의 손을 잡는 린신이다. 닿아오는 서늘한 온기에 가슴이 아파온다. 그는 자신을 기꺼이 바쳐 정왕의 마음을 얻기 위해, 급하게 린신을 찾은 것이다. 색사를 감당할만한 수준이 되기 위하여 며칠동안 쓰디쓴 약을 퍼마실 생각을 한 채 말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얻어야할 정왕전하의 마음인 것이야?"

"어쩔 수가 없네. 내 거기까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어."

"........................."

"그가 그렇게 변해버린 것도 다 내 탓이고, 내 업보이니..."

".........장소."

"그러니 탓하려면 아둔한 나를 탓해주게나."

"제발 그러지 말게."

"린신."

"다른 방도를 찾으면 되지 않아. 그러니 그러지 말게."

"......................"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린신이 말한다. 엉망진창이 된 마음은 이제 아픔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애초에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매장소였지만, 이제는 그보다 마음에 더 여유가 없어진 것은 오히려 린신이다.


"장소, 내 자네를 원망하지 않아. 하지만 이 일로 자네 마음이 다칠까 그게 걱정이 된다고."

"나는 괜찮네."

"아니, 괜찮지 않을거야. 아마도."

"괜찮아야해. 그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또 린신 자네를 위해서도..."

"정왕은 저자를 어슬렁거리며 쏘다니는 개만도 못한 자야."

"...린신."

"소중한 이를 알아보지 못한 죄, 그 언젠가 통곡의 눈물이나 흘리라지. 친우도 알아보지 못하고 마구 대한 업보로 언젠가 피눈물이나 흘려라."

"차라리 잘 되었어. 별 가치도 없는 몸뚱이 하나로 그의 마음을 쉬이 얻을 수 있다니 말이야."

"그리 마구 해도 되는 몸이 아니야. 자네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 아니란 말일세."

"...................."

"내게는 이렇게나 소중한 사람인데, 자네는 왜 자꾸 스스로를 하찮다 생각해."

"...신."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금방이라도 쏟아내어버릴 것 같은 린신의 모습에 매장소는 그를 끌어안는다. 그의 품 안에서 흘러나오는 약초의 내음이 매장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 언젠가 금릉으로 떠나오기 전날 밤의 뜨겁게 타올랐던 그 날의 모습처럼, 여전히 자신을 생각하고 아껴주는 린신의 마음이 애틋하다.


"...안아줘. 신."

"응?"

"허튼 생각이 들지 않도록, 정신이 나가버리게."

"장소."

"부탁이야. 그러니 제발."

"........."

"해가 떠오르기 전에, 새벽이 가버리기 전에 어서."

"........."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게 해줘."


이윽고 먼저 닿아오는 입술은 달지만 썼다. 미처 감지 못하고 파르라니 떨려오는 눈꺼풀 위로 안타까운 숨결이 엉킨다.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야 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 그늘 속에 숨은 사랑이기에 더욱 애처롭다. 이 세상에서 단 둘만이 아는 사랑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있다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기에 떨려오는 손길로 풀어내리는 옷자락이 야속하다. 린신이 금릉으로 오던 날 아침에 정성스레 올려주었던 옥관을 풀어낸다. 푸스스-하고 매장소의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이제 매장소이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의 린신이 그를 기꺼이 끌어안는다. 말랑하게 닿아오는 살결이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뜨거운 열기가 어느새 방 안에 가득차 버리지만, 가슴 한 켠은 서늘함이 감돈다. 입을 틀어막고 신음을 참는 것이 화가 나서 입술을 마주댄다. 그의 숨결을 마셔버린다. 그의 아픔을 옮겨내온다. 쏟아지는 마음을 애써 쓸어담는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두 사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하나가 된다. 힘겹게 마음을 모은다.



*



체력이 받쳐주지 그와의 새벽이 생각보다 뜨거워 정신이 나가버릴 뻔하였다. 답지않게 계속 칭얼대면서 치대어오는 매장소의 모습에 린신의 마음 한 구석이 조용히 허물어져버린다. 

이거 괜찮지 않잖아... 전혀.

열기에 지쳐 쓰러진 그를 끌어안고 잠들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눈을 뜬 린신이 물끄러미 품 안의 매장소를 바라본다. 보내고 싶지 않다. 정왕 소경염 따위에게 제 소중한 이를 함부로 내어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가 바라고 있는 일이기에 어금니를 꽉 깨문다. 참는다. 그를 위해 참는다. 마음이 여린 매장소가 입을 상처를 위해 애써 마음을 억누른다. 대업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성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일이 가혹하게 이리 흘러가게 될 줄은 몰랐다.


"장소. 부디 자책하지 마. 나는 괜찮으니..."


여전히 잠에서 깨지 않는 그의 이마에 입맞추고 방 밖으로 나간다. 그를 위해 저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하는 시간이다.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는게 고작 체력을 보(保)하기 위한 탕약을 만들어다 주는 것이라니. 자신의 존재가 작고도 하찮다. 하릴없이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누가 볼 새라 서둘러 긴 옷자락으로 훔쳐낸다. 한스러운 아침이다.




*



정왕부. 매장소가 12년만에 발걸음을 하는 곳이다. 비록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은밀하게 찾아오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캄캄한 밤에 조용히 가장 깊숙한 처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익숙한 공간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가 방 안에 서 있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공간 안에 서 있는 자는 매장소가 알고 있는 사람이지만 또 모르는 사람이기도 해 소름이 돋는다. 소경염이 등을 돌린다.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마주쳐오는 눈빛은 알면서도 또 모르겠는 눈빛이다.


"정왕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나름의 결심이 선 것이오?"

"그렇기에 이렇게 정왕전하를 뵙는 것 아니겠습니까?"


몸을 숙여 인사를 해 온다. 며칠간 고민을 한 듯해 보이는 얼굴이다. 눈에 띄게 살이 내렸다. 그러나 그 눈빛만은 형형하다. 정왕 소경염은 그런 그의 모습을 알아차렸지만 모르는 척 하기로 한다. 

음험한 기운 가득한 책사 주제에 감히 본 왕의 마음을 얻겠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괘씸하기 짝이없는 자였다. 그러기에 저 자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마음껏 굴려보기로 마음먹는다. 

어디, 한번 제대로 휘둘려 보시지. 내 너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을 터이니.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정왕 소경염이 입을 연다. 매장소의 눈을 바라보면 묘한 표정을 한 채,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맞추어온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패기가 있군. 마음에 드오."

"마음에 들어하신다니 다행입니다. 이제 한 배를 탈 몸이니 부디 뜻대로 취하시지요."

"그래? 뜻이 그러하다면 굳이 시간끌 것 없지. 스스로 벗으시오."

"......................."

"혹여 맨 정신으로 하지 못하겠으면 한 잔 해도 괜찮소만."


훅 끼쳐오는 향이 무척이나 독해보이는 술이다. 잔의 색이 다른 것으로 보아, 무언가 다른 두 종류의 것들이 섞여있는 모양이다. 무엇을 마셔야할지 고민을 하고 있자, 피식 웃으며 정왕이 가까이 다가온다.


"푸른 색의 잔은 그저 독한 술이고, 붉은 색의 잔은, 예상했겠지만 좀 더 이 밤을 수월하게 만들어줄 것이 섞여 있다오. 무엇을 택할 것인지는 소선생 마음가는대로 하시오."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잔혹함에 매장소가 눈을 감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크게 한 숨을 쉰 후에 매장소가 다시 눈을 뜨면, 이제는 떨리지 않는 손으로 푸른 잔에 손을 가져가는 그이다.


"선생의 뜻이 그러하다는 말이지. 내 잘 알겠소."


목을 넘어가는 술은 독(毒)이었다. 정신을 나가버리게 하는 독. 스스로 그의 앞에서 옷을 벗으며 매장소는 생각한다. 그가 어둠에 물들어 있다면, 자신도 기꺼이 그 어둠에 물들면 된다. 같이 어둠 속에 빠져버리면 어둠도 더 이상 어둠이 아니게 되니까.


"어디 그럼 기꺼이 나를 흥분시켜 보시지."


밤은 길었고 새벽이 다가오기에는 아직 멀었다. 잔인한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 빛은 필요없다. 불을 꺼버린다. 방안이 어둠에 잠긴다. 짙은 어둠 속에서 잔혹함에 눈을 뜬 정왕이 그대로 매장소를 바닥으로 내친다.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곳까지 끌어내려 보란듯이 깔아뭉개버린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매장소가 그대로 그에게 집어삼켜진다. 잡아먹힌다.



*



겨우 몸을 일으켜 애처로이 벌벌 떨면서 옷을 끼워맞춘다. 소경염은 매장소의 예상보다도 더 엉망으로 망가져있었다. 그의 잔혹함에 놀라버렸지만 차마 티를 내지 못한다. 여전히 벌거벗은 채로 거리낄 것 없다는 듯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소경염이 몸을 일으켜 그를 무심하게 쳐다본다. 

문득 추억이 휘몰아쳐 그의 머릿속을 스친다. 소경염이 지난 시간을 곱씹는다. 자신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하였던 그 시절을. 저 자는 임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아니 비교할 가치도 없는 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임수가 살아있었던, 제 곁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던 그 언젠가의 여름날 밤이 갑자기 떠오른다. 

더위를 참지 못하는 임수 때문에 한밤중에 둘이 놀러나가 냇가에서 신이 나도록 첨벙거렸던 그 날. 이제는 아스라이 사라져버린 안타까운 그 날의 기억. 그 날의 임수. 곁에서 잠든 임수 몰래 훔쳐내었던 그의 뜨거웠던 입술. 그의 온기. 안타까운 마음 가득해진 소경염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연다.


"...내 언젠가 마음 속 깊이 품었던 이가 있었지. 가지고 싶었지만 차마 소중하여 가지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던, 그런 이가 있었는데... 갑자기 그를 잃고 가슴 속이 뻥 뚫린 채 지금까지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지."

"........................"

"그러니 애초에 내게 얻어갈 마음 따위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오."

"전하."

"미안하게 되었소. 소 선생. 내 마음이 이미 아수라를 헤메느라 그대에게 내어 줄 여유가 없다고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을."

"그래도 괜찮습니다. 저를 믿어주시기만 한다면."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내 소선생을 믿어드리지."

"감사합니다. 전하."

"내 밖까지 배웅은 못하겠소. 그럼 살펴가시오."

"네. 전하."


겨우 움직이는 몸으로 정왕부까지 걸어나오면, 얼굴이 흙빛이 된 린신이 서 있다.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였을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매장소가 안도하여 그대로 쓰러지고 만다. 엇-하며 놀라 가까스로 그를 끌어안는 린신이다.


"...이렇게 힘겨워 할거면서 괜찮다 하기는."


평소처럼 투덜투덜대지만 일부러 그를 신경써 말하는 것이었다. 이미 혼절해버린 그가 듣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가볍게 들리는 그를 익숙하게 안아들고 마차에 눕힌다. 그의 앞날에 부디 오늘같은 날은 이제 더 이상 없기를 바라면서, 린신이 분기탱천하여 역류하는 혈기를 억누른다. 

내 소중한 이를 함부로 대한 오늘을,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

어둠 속에 달빛이 무심한 구름 사이로 숨는다. 밤은 아직도 깊다. 여명이 다가오는 새벽은 멀었다. 빛이 숨을 참는다.












참고.

기존 단편들 중 느슨히 또는 직접 연결되는 유사 세계관

경염임수 [열대야] http://posty.pe/tmxgig (← 약간의 알오버스 주의)

린매/각주종주 [금릉행 전야] http://posty.pe/voqgrm




루인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