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한복판에서 설명을 늘어놓기엔 시간도 늦었고 공기가 찼다. 하나 씨는 이미 많이 울었고, 이러다 탈수라도 오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부엌의 작은 등 아래. 마주 앉아 따듯한 차를 마신다. 청소엔 꼼꼼한 편이라 보이면 안 될 것들이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민망했다. 마찬가지였는지 갈증이라도 해결하자며 설득해 겨우 들어선 이후로 그는 말이 없었다. 차를 마시는 소리가 적막 속에서 아주 작게 맺혔다.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집중력으로 그를 천천히 담았다. 머그잔을 감은 손. 둥근 이마. 선이 선명한 코끝, 광대뼈. 속눈썹까지. 눈과 기억, 그리고 마음에도 뻐근하도록 담았다. 어떤 말도 건넬 수 없는 나를 대신해 그저 손안의 온기가 달래주길 바랐다. 적막을 깬 건 하나 씨였다.


“맛있네요.”

“아. 다행이에요.”

“네.”

“뺨 아프지 않아요? 지금도 빨개요.”

“괜찮아요.”


 미리 내어준 타올 덕분인지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해 마음이 놓였다. 춥지는 않은지, 차가 더 필요하지는 않은지 묻는 나에게 꼬박꼬박 잘 대답해주었다. 눈가가 조금 누그러져, 우습게도 안심했다. 이제 천천히, 꼭 전해야 할 말이 있다.


“하나 씨.”

“네.”

“노파심이지만, 일단 이것만은 먼저 분명하게 할게요. 저는 하나 씨의 마음을 이용하거나 감히 동정하지 않아요. 혹시라도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요.”

“……네.”

“저도 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요. 오해도 풀어야 하고.”

“….”

“그런데 전 글재주가 없어서. 대화로 대신하고 싶어요. 지금은 무리니까, 내일 다시 만나도 괜찮을까요? 모레라도 좋아요. 저한테 시간을 좀 빌려주세요.”


 생각 많아 보이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기만 한다. 거북하면 거절하라는 말을 하기 직전, 그가 시선을 맞췄다.


“내일 오후가 좋겠네요. 우리는 잠이 필요하니까.”

“그래요.”

“다섯 시쯤 어떠세요.”

“좋아요. 그 전에 제가 전화할게요.”

“…제 전화번호 모르시잖아요.”

“그러니 지금 줄래요?”


 잠시 주저하더니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곤 늘 그랬듯 양손으로 내민다. 손이 그의 목도리만큼 빨갰다. 건네받은 전화기를 역시 양손으로 돌려주었다. 마음 같아선 아직도 차가운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당연히 참을 수밖에. 잠시 스쳤을 뿐인데도 눈에 띄도록 반응하니까.


“점장님 아니고, 윤정민으로 저장했어요.”


 끄덕이는 고개가 좋다.



 우리는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깐의 적막 후 가보겠다며 벌떡 일어난 몸에 담요를 둘러주고 생수통도 하나 안겼다. 데려다주겠다는 말은 한사코 거절해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만 했다.


“조심해서 가요. 안에 있다가 나가는 거라 더 추울지도 모르고, 바닥도 미끄러울 거예요.”

“네. 차 잘 마셨어요. 감사해요.”

“그래요. 내일 연락할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하나 씨도 가서 푹 쉬어요.”


 대답 대신 몸을 꾸벅 숙인 그가 문 너머로 사라졌다. 가벼운 전자음이 멎고,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긴장으로 바짝 솟아있던 몸이 풀리자 술기운과 함께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숙취가 벌써 밀려오는 것 같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 일어나 전화부터 걸었다.

 걱정을 많이 했던 건지 돌아오는 말들이 묵직했다. 전력을 다해 사과하며 지은 죄가 크니 그만큼 술을 사겠다 은채를 달래야만 했다. 설명은 다음에 제대로 하도록 할게. 미처 못한 말을 삼키고 전화를 끊자마자 뜨거운 물을 틀었다.


 훈기를 뚫고 나오자 몸은 녹진해져, 액체 괴물이 따로 없었다. 머리 위가 아니라 식도에도 물을 들이 붓고 나니 새삼 내가 한심했다. 이렇게까지 이기적일 수가 있을까. 고백을 거절한 지 한 달 만에 또 울리고는 말 그대로 덥석 안아버렸다. 절절대며 대화라도 하자고 부탁했다.


“네가 비엘 후회공이냐!”


 침대로 잽싸게 들어가 머리를 퍽퍽 박았다. 창피하다. 어떤 상황이든 태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건 어릴 때부터 갈고 닦아온 고도의 기술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쓰일 때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이 났다.

 여유 넘치는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런 일 따위 하루에도 수십번씩 겪은 어른인 척하는 스스로가 싫었다. 또 구토가 올라오려 했다. 물리적인 게 아닌 심정적 기운에 지끈지끈한 머리를 이불로 감쌌다.


 이대로 모든 게 다 끝나면 어떡하나. 아주 잠깐 함께 마신 차는 향이 유달리 짙었다. 감기에 걸릴까 걱정되어 끓인 진저 레몬티가 우리의 마지막 거리면 어쩌지. 벌써 겁이나 집어먹으려는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퍽퍽 박았다. 동이 트기 시작할 때쯤에야 뒤늦게 찾아온 수마에 풍덩 빠졌다.




 눈을 번쩍 뜨자 이미 해는 중천을 넘어서고 있다. 가게에서 온 연락 두 개와 은채의 육두문자 컬렉션으로 빽빽한 잠금화면을 보고 그대로 엎어두었다. 연락하면 이상하려나. 몸은 괜찮은지. 몇 시간 후의 만남이 이제 와 생각해보니 버거운 건 아닐지.

 정신이 맑아질수록 어제의 내가 떠올라 속이 뒤틀렸다. 다시 뜨거운 물을 몸에 퍼붓기라도 해야 할 거 같았다. 해장용으로 사둔 즉석 북어국을 쥔 채 한참 고민하다 결국 메시지를 보내고 말았다.


 서둘러 욕실로 달려가 뜨거운 물을 함껏 받으며 진하게 밀려드는 숙취와 자기혐오에서 도망쳤다. 퉁퉁 부어 무거운 얼굴로 간이 맞지 않는 북어국을 열심히 삼켰다. 맛없어. 하지만 귀찮다. 이런 레토르트 나부랭이라도 살겠다고 먹는 내가 귀찮아……….


 기계적으로 숟가락질을 반복하던 손이 삐걱 멈췄다. 메시지가 왔다. 메신저가 아니라 메시지다. 꿀꺽. 천천히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네. 저는 괜찮아요. 술 드신 거 같던데 괜찮으세요?]


 괜찮고말고. 괜찮다 못 해서 몸이 떨리네요.




 습, 후. 스읍- 후. 진정에 좋은 복식호흡을 하고 설거지와 청소, 빨래까지 끝마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가게 사무실을 이용할 수도 없었고, 또 집으로 부르는 것도 불편해할 것 같았다. 어디에 가는 건 분명 불편할 것 같아, 결국 차에서 만나기로 했다.

 미리 환기 후 히터까지 켜두어 꽤 따듯해진 운전자석에 앉아 있자니 다시 긴장이 밀려온다. 술에 취해 저질러 버리듯 실수한 게 아니었다. 취하지 않았어도 벌컥 튀어나온 진심이 그를 울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씨를 보자마자 술기운은커녕 또렷하다 못해 투명해진 마음이 버거울 지경이었다.


 가까이 다가선 순간부터는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 다시금 스스로 제동을 걸지 않은 건, 결국 참을 수가 없어서였다. 변명은 하나 씨 앞에서 하자. 결정은 그 후의 일이겠지. 받아들여 주지 않더라도 그건 내 몫이다. 초조해지지 않으려 양손을 마주잡았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얼마 되지 않아 도착한 하나 씨는 새카만 버킷햇을 쓰고 있었다.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아쉬웠지만, 눈빛만은 선명했다.


“아니에요. 타요.”


 조수석에 오른 그에게 무릎 담요를 건네고 음료도 쥐여주었다. 어제보다는 좀 더 생생해 보이는 몸짓과 목소리가 안심이다. 답답하면 겉옷을 벗어두어도 된다는 말에 대답 없이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항상 이렇게 챙겨주시네요.”

“네?”

“어제는 차도 주시고, 물도 주셨잖아요. 덕분에 감사했어요. 오늘도 잘 마셨어요.”

“다행이네요. 제가 챙겨주는 게 혹시…, 불편해요?”

“좋기도 한데 불편하기도 해요. 제가 고백해서 그러시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늘 아래 완전히 마주친 눈엔 더는 눈물이 고여있지 않았다.


“저 좋아하세요?”

“네.”

“제가 좋아한다고 하니까 뒤늦게 그러시는 건 아니고요?”

“네, 아니에요.”

“그럼 언제부터 좋아했는데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왜 이렇게까지 힘들게 만들었냐는 말까지 들은 것 같다. 언제부터였을까. 너를 좋아하게 된 게.


“모르겠어요.”

“….”

“가게에 오지 않으면 생각이 났어요. 계속. 오면 반갑고, 좋았어요. 새 메뉴를 만들 때도 생각했어요. 이거 하나 씨가 좋아하면 좋겠다.”


 고백이란 걸 해본 게 언제더라.


“우리 가게는 단골 위주로 돌아가요. 전 풀타임은 아니더라도 일요일 빼고 매일 출근해요. 오고 가는 사람들은 많아요. 자주 오는 분들도 당연히 알고, 반찬을 얻어먹기도 할 만큼 잘 지내요.”

“알아요.”

“그런데도 제가 기다리는 건 하나 씨뿐이었어요.”

“…….”

“기억나요? 성년의 날에 저한테 장미꽃 준 거.”

“네, 그럼요. 얼마나 고민 했는데요.”

“그때 하나 씨가 그랬어요. 받고 싶으니까 대신 주기로 했다고.”


 누군가에게 꽃을 받아본 게 처음이었다. 졸업식이나 입학식 때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받고 싶어서 대신 주기로 했다는 그의 대담함이 넝쿨째 마음에 박혔다.

 나는 늘 기다렸다. 항상 보고 싶고 궁금했다. 어리다는 이유로 미안해하고, 자신 없음을 이유로 거리를 두면서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 척 했다. 그렇게 내 마음을 접고 또 접었다.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지면 언제든 버릴 수 있게.


 눈이 조금씩 녹는 길가엔 사람 하나 없다. 고요한 오후. 차창의 안과 밖에는 하나 씨만 가득하다. 당장이라도 도망쳐 이불 속에서 잠들고 싶은 이상한 기분. 손끝이 타들어 가는 감각.

 안전벨트를 해서 다행이다. 다시 도망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진심으로 생각했다. 고해성사인지 해명인지 모를 구차하고 구구절절한 고백을 묵묵히 들어준 하나 씨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나이도 어리고 어디서든 사랑받을 최하나가 너무 아깝고, 미안해서 내내 거절했다는 뜻이에요?”

“…네.”


 단숨에 비운 병을 소리 나도록 내려두곤 몸을 돌렸다.


“어제 차 안에서 키스하는 거 봤어요. 그건 뭐예요?” 


 어투가 묘하게 높아지고 빨라져, 나도 모르게 대답의 템포가 빨라졌다.


“방금 말한 제일 친한 친구예요. 지인 소개로 알게 된 사인데, 정작 소개해준 사람은 이제 안 만나고 그 친구만 만나요.”

“대체 누가 친구 사이에 키스를 해요?”

“사귀려다 친구 사이가 우리한테 더 좋다는 게 결론나서, 그 뒤로 진짜 가끔…….”

“저랑도 그럴 거예요?”

“아니, 아니에요! 하나 씨는 달라요.”

“뭐가요? 뭐가 달라요?”

“그, …친구랑은 평소엔 완벽히 친구로 지내다 서로 노는 정도예요. 정말이에요.”

“저랑도 그냥 노는 정도가 되나요?”

“아뇨, 아니에요. 아니어서 매번 거절했던 거예요. 그런 거면 벌써 사귀고 헤어졌을 거예요, 우린.”


 이런 대화를 세워둔 차 안에서 싸우다시피 하다니.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대화의 중심이 된 당사자는 배를 잡고 웃겠지. 민망하고 부끄럽지만 그래도 다 사실이었다. 거짓말은 한 톨도 없다.


“8시에 하는 저녁 연속극에서나 나올 말을 이런 식으로 들을 줄은 몰랐어요.”

“…미안하다고 또 하면 화낼 거예요?”


 힘이 쭉 빠진 목소리로 묻자 하나 씨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말 들어도 계속 좋은 제가 바보인걸요, 뭐.”

“제가 더 바보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


 고개를 푹 숙이는 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이 순간에도. 어제는 목도리가 가렸고, 오늘은 모자에 가려져 있고. 항상 짧은 머리칼이 다 드러나도록 다니면서 활짝 웃어줬는데. 핸들에 몸을 기댄 채로 최대한 시선이 맞도록 목을 뺐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시네요.”


 모자를 벗어내 머리칼을 헝클이는 얼굴이 붉다. 어제도 오늘도 내내 빨가네. 잠깐 앞유리창이 뚫어져라 보던 그가 헛기침했다.


“얼굴에 구멍 나요. 그만 보세요.”

“아, 미안해요.”


 헛기침이 전염되는 거였나. 머쓱함을 가리려 괜히 목을 울리는데 하나 씨가 두툼한 후드 점퍼를 벗었다.


“바람 쐬고 싶어요. 커피도 마시고 싶고.”

“근처 카페 갈까요?”

“아뇨. 잠깐 걷고 싶어요.”

“그럼 뒤쪽 큰길로 갈게요. 거기 커피 트럭 있을 거예요.”


 시동이 걸린 차의 핸들을 돌렸다. 심장은 이미 시속 200km가 넘은 지 한참인데 바깥 풍경은 느리게 지나간다.







1

아 이번 편 재미없다


2

점장님이 없어도 가게는 굴러가지만 손님들은 쉬는 날인걸 알면서도 늘 찾습니다


3

완전히 겨울 오기 전에 끝내고 싶어요 그럴 수 있을까요


4

오늘도 감사합니다



take your broken heart make it into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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